생애 처음으로 만났던 고속도로에 대한 회상이다. 우연찮게도 타이완(Taiwan : 臺灣)의 ‘기륭(基隆)에서 타이페이(Taipei : 臺北)’ 사이에 건설된 고속도로로 지난 1968년 정월이었다. 그 때 ‘제4차 대학생 대표 파월장변 위문단’ 일원으로 참가하여 월남(越南 : Viet Nam)으로 향하다가 잠시 타이완을 들려서 그 나라를 둘러보던 중이었다. 한편 우리의 서울을 타이페이라고 한다면, 기륭은 서울의 관문항인 인천(仁川) 쯤에 해당하는 항구이다.
요즘 같으면 정부에서 주관하여 다른 나라에 보내는 위문단이라면 당연히 항공기를 이용했을 게다. 당시는 나라가 너무도 어려웠던 시절이라서 70~80명에 해당하는 학생과 담당 요원들에게 어마어마한 경비를 투입할 여력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 연유로 오가는 교통편은 월남으로 파견되는 해군 수송선이 낙점되었다. 다시 말하면 월남으로 가는 길에는 새로 월남의 임지로 파견되는 해군 수송선인 ‘LST 808’함을, 귀국길에는 현지에서 임무를 끝내고 귀국길에 오르는 ‘LST 812’함을 이용했다. 따라서 그들 수송선은 숙식 문제를 해결할 호텔이자 머나먼 여정을 오가던 교통수단이었다. 이런 때문에 타이완이나 홍콩에서 머물 때 숙식 문제는 원칙적으로 수송선이었다. 요즈음 학생 대표단을 외국에 보내며 그런 식으로 대접했다면 벌떼처럼 일어나 처우를 개선해 달라고 거세게 항의했을 게다. 하지만 그 당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
그 시절 어려운 형편을 대변하는 단면의 얘기다. 요즘처럼 아무 은행에서 환전이 불가능했었을 뿐 아니라 여권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부산항에서 LST 808에 승선하기 직전에 간이 여권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여행증서(travel certificate) 165185’를 손에 쥐어 주었던 관계로 우리 돈 즉 한화(韓貨)를 가지고 있어도 환전이 불가능했다. 물론 불법 환전상이 있었기에 불법일지라도 그 쪽을 통한 환전의 길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환전하지 않았다. 그런 사정을 참작했었는지 교육부에서 참가 학생 모두에게 각각 280달러를 여비로 지급해 타이완과 홍콩에서 요긴하게 사용했다. 요즘 그 정도 돈이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는 꽤 가치가 있었다.
먼저 기륭항에 도착하여 곧바로 타이페이로 이동하기 위해 승차했던 버스가 처음 보는 리무진 고속버스였다. 버스에 승차하려고 출입문을 밟고 올라서는 순간 세련된 유니폼을 차려 입은 팔등신의 안내양이 미소를 띤 채 친절하게 목례(目禮)를 건넸다. 그 당시 서울의 시내버스에서 안내양들은 승객을 빼곡하게 밀어 넣고 나서 출입문을 닫은 후에 버스 문짝을 손바닥으로 탕탕 쳐서 운전기사에게 출발 신호를 보내며 ‘오라이’라고 외치는 게 주된 임무처럼 보였었다. 그런 안쓰러운 모습에 비하면 하늘과 땅 같이 현격한 모양새라서 혼란스러웠다. 타이완에 머무는 동안 매일 어김없이 조석으로 고속도로를 오갔다. 중간에 신호등이나 기착지(寄着地) 없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편안하고 빠르게 오갈 수 있던 고속도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이들 중에 우리 고속도로의 효시(嚆矢)인 경인고속도로는 내가 타이완 ‘기륭에서 타이페이’ 사이의 고속도로를 처음 대하고 난 이듬해인 1969년에 완공되었다. 그런데 연이 닿지 않았는지 여태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그 고속도로를 지나갔던 적이 없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고속버스를 승차했던 정확한 기억은 없을지라도 경부고속도로이었을 게다. 경인고속도로를 필두로 해서 경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등을 비롯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동서남북으로 건설됨으로써 전국을 하나로 잇는 혈맥(血脈) 역할을 하며 산업 발전과 나라의 균형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끔찍했던 민족상잔의 6.25 전쟁이 휴전된 시점의 우리나라 도로는 사통팔달로 어연번듯하게 이어진 번듯한 길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게다가 버스나 자동차가 드물어 몇 십리 길은 걸어 다니는 게 태반이었다. 한편 건조한 봄날엔 신작로에 버스와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뽀얀 먼지가 주위를 온통 뒤덮어 눈을 감고 입을 닫은 채 돌아서야 했던 악몽 같은 경험도 숱하게 했다. 그 시절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독일은 도로를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했기 때문에 맨발로 다닐 정도라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때 얼마나 잘 살면 그런지 무척 궁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믿기지 않아 반신반의했었다.
요즘 고속도로나 국도를 비롯해 지방도로를 달릴 때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떠오른다. 온 나라 구석구석에서 날이 새기 바쁘게 불도저가 길을 닦고, 달이 바뀌면 터널이 뚫리고, 해가 바뀌면 강과 바다 위에 다리가 놓이기가 끝없이 반복되었다. 그 결과 마침내 사통팔달로 이런저런 도로들이 혈맥처럼 이어져 경이로운 세상을 펼쳐내 꿈같은 지금으로 확 바꿔놓았다. 물론 일반 국도나 지방도로에서도 달리다가 힘겨워질 즈음에 찾기 마련인 다양한 휴게소의 시설과 문화가 반겨 어디를 언제 가더라도 문제가 없는 세월이다.
이제까지 이런저런 핑계로 적지 않은 나라를 둘러봤다. 그 길에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 중국,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해 미국과 일본을 위시해서 유럽 그리고 동남아에서 특히 고속도로를 많이 스치며 지나쳤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가장 뛰어난 고속도로를 가진 나라 하나를 고르라고 주문한다면 ‘우리의 고속도로를 단연코 으뜸으로 꼽을 것이다’. 지구촌 어느 고속도로도 우리처럼 깨끗이 관리되고, 화장실에서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며, 겨울에 세면대에서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지는 경우는 듣거나 보지 못했다. 게다가 휴게소마다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먹거리 또한 어느 나라에 견줘도 손색없이 빼어남을 사족(蛇足)처럼 덧붙이고 싶다. 한편 약간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 국도나 지방도로를 주행할 때 신호등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고속도로와 다를 수 없을 만큼 잘 닦여져 있다. 만약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그렸던 김정호(金正浩) 선생이 환생해 거미줄처럼 사통팔달로 이어진 도로망을 보고난 뒤에 그 옛날 당신이 신명을 다해 완성했던 대작인 대동여지도를 어떻게 바꿔 표현할지 자못 궁금하고 흥미롭다.
(한판암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