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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매니아 MBMania 카페 http://cafe.daum.net/MBMania 에 오셔서 논리와 이론을 함께 개발합시다.
대선에 관한 몇가지 글을 보고, 갑자기 생각이 나서 저의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대통령 선거의 ABC는
자기의 텃밭(지역, 연령 등)을 지키며 상대편의 것을 일정부분 획득하는데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는 가장 큰 표밭인 수도권 그 중에서도 서울이 좌우를 한다고 볼 수 있으나
수도권은 각 지방 사람들이 다 올라와 사는 만큼 누가 일방적인 독주를 하지는 못합니다.
전통적으로 캐스팅 보트는 충청북도가 잡고 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연령대로는 50대 이상 한나라당 독주 2,30대의 열우당 독주를 이야기합니다만
20대의 경우 20대 초반 그러니까 부모세대의 영향이 큰 대학생의 경우에는
중도성향이 많고 실제로 한나라당 지지율과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큰 차이가 없습니다.
25세-39세는 열우당 지지가 훨씬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키를 가지고 있는 세대는 40대로
386세대의 핵심을 차지하는 40-45세와
어느 정도 중년의 모습을 갖춘 45세-50세의 표심이 약간 다릅니다.
그러나 개혁적인 마인드와 보수적인 마인드가 혼재하는 세대인만큼
40대의 선택이 전체판세를 좌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념적으로는 보수와 진보의 확률이 거의 비등비등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구보수와 중도보수성향이 30-35%
진보성향이 30% 정도를 차지합니다.
중간그룹이 약 40%를 차지하며
중간그룹은 대선이 있는 해의 이슈, 경제사정, 후보의 면면에 따라 표심이 달라집니다.
역대 선거를 중심으로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97년 선거는 DJP가 연대를 하면서 충청 특히 충남에서 DJ가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JP를 추종하는 일부 보수세력도 JP를 따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충청은 예산출신 이회창과 논산출신 이인제, 부여출신 JP와 힘을합친 DJ가
동시에 출마를 함으로써 이회창에게 안좋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정부분 PK의 지분을 가지고 있던 YS와 이회창이 대립했고
YS의 정치적 아들인 이인제가 국민신당을 만들어 나가면서
이회창은 PK에서 상당히 고전을 합니다.
부산에서 이회창 득표율 97년 약 51% <- 약 16%차 -> 2002년 약 67%
특히 이인제가 박정희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면서 TK권에서도 나름대로 선전을 합니다.
결국 이회창은 DJ보다 1.6%차로 패배했으니 이회창 캠프로써는 땅을 칠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이회창+조순 연대 때 당권을 이회창이 쥐고 경제통인 조순을 내보냈다면
'신한국당 IMF 책임론'을 떼어내는 효과가 있었으리라 봅니다.
거기다 대선을 앞두고 명예총재인 YS를 탈당하라고 종용하는 등
선거를 앞에두고는 '자기 편은 못 만들 망정 원수를 만들면 안된다'는
기본을 무시한 정치력을 보였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는 물론 이수성, 박찬종 등을 포용하지 못하고
더군다나 이만섭 같은 정치 원로가 이인제와 함께 나가게 만드는 우를 범했습니다.
결국 1. JP를 잡지 못한 원인 2. 이인제를 당에 주저 앉히지 못한 원인
3. 아들관련 의혹 4. IMF 경제위기 5. 날카롭고 기득권적인 이미지
5가지가 어우러진 결과였습니다.
97년의 대선은 '여당'으로 치룬 선거이면서 패배한 어이없는 결과를 남겼습니다.
2002년 대선 전의 일을 잠깐 이야기하죠.
일단 2000년 총선에서 이회창은 대선 때 자신을 도왔던 김윤환,이기택씨 등을
공천혁명의 이름을 빌어 지역구 공천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 때 공천자 명단이 발표된 다음날 TV 뉴스를 보니
지금 원내대표이자 당시 비주류였던 김덕룡 의원이 이회창 총재를 향해
"이래도 되는 겁니까?" 라고 말했던 기억을 합니다.
구시대 정치인을 지역구에 주지 않고 새로운 얼굴을 공천한다는 취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97년에 자신의 민정계 지분을 전부 몰아주었고,
아들 문제로 위기에 처한 후보 교체론이 물아칠 때 "안된다고 하지 말고 해 봐"라고
힘을 주었던 김윤환을 공천주지 않았다는 점은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구시대 정치인이 맞더라도
그렇다면 왜 97년에 그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는지 그것부터 궁금합니다.
결국 김윤환+이기택씨를 축으로 마지막 재야 장기표, 김동주씨 등이 힘을 합쳐서
민국당이라는 당을 창당했습니다.
민국당은 당시 총선에서 형편없는 결과를 거뒀지만
결과적으로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이 창당되었다는 점만으로도
영남 표심을 한 번 흔들었다 놓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2002년 대선.
6월달의 지방자치단체 선거는 서울시장,경기지사,인천시장 빅3는 물론
대부분의 광역단체장을 한나라당이 차지하면서 압승으로 끝납니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DJ 아들 비리와, 옷로비 사건 등이 터지면서
'DJ정권 심판론'을 한나라당이 들고나온 첫번째 선거였기 때문입니다.
이 때만 해도 연말 대선에서는 그전부터 말로만 있었던 '이회창 대세론'이
실현되는게 아니냐는 분위기가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바로 다음에 있었던 8월달 국회의원 재보선에서도 한나라당이 압승을 하면서
그런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한화갑 의원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전투에서는 질 수 있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기면 된다"
그런데, 그런 말은 정몽준 태풍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월드컵 성공을 등에 업고 나타난 정몽준씨가
여론조사 1위로 등장합니다.
그 때부터 2002년 대선은 격동합니다.
6월 지방선거 서울시장 민주당 후보였던 김민석이 정몽준 캠프로 가고
노 와 정간의 단일화가 토론과 러브샷까지 거치며
국내 정치사상 처음으로 실현됩니다.
이 때 노후보는 자신에게 불리하던 여론조사에 의한 단일화를
수용함으로써 오히려 좋은 이미지를 쌓아갑니다.
2002년 대선의 또하나의 이슈는 '반미'였습니다.
미군 장갑차 사건으로 폭발한 반미감정은
전에 있었던 '안톤 오노' 사건에 이어 젊은이들을 분노시켰습니다.
광화문에는 촛불이 켜지고
'한미 동맹'을 중시하던 한나라당 후보에게 악재가 됩니다.
급기야 이회창은 '촛불 집회'에 뒤늦게 참석을 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익의 단결을 저해했다'는 보수진영의 논란을 남긴채
큰 소득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터져나온
'북한 핵'문제는 대선의 물줄기를 바꿀 이슈가 되지 못합니다.
결국 자민련에 입당한 반노의 핵심 이인제가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고
민주당 소속이었던 일부 의원들이 한나라당에 입당 하였지만
이는 유권자들의 견제심리만을 유발한채
'대세론'에 빠져 몸집만 불리던 창캠프는 패배의 문턱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대선 전날, 유세 현장에서 노후보 진영에 섭섭함을 느꼈다는 정몽준의
지지철회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노후보 지지세력의 단결만을 불렀다는 평가를 받은채
노후보가 이후보를 약 2.4%차로 누르고 대권을 거머쥡니다.
2002년 대선을 종합하면
수십년만의 사실상의 양자대결이고
세대간 대결의 성향이 나타났습니다.
이회창 패배, 노무현 승리의 원인으로는
1) 한나라가 두 번 재미본 'DJ 정권 심판론'을 삼세번 쓰다가
'정치권 전체를 바꿔보자'는 노후보쪽 이슈에 밀려 낙마합니다.
2) 지역적으로 PK후보인 노후보에 맞서
이회창이 오히려 97년보다 부산에서 16%을 더 얻는등 선전했으나
노풍에 수도권을 잃으면서 전반적인 부진을 면치 못합니다.
물론 노후보도 부산에서 30%를 획득하는 등
영남후보로써 효과를 봅니다.
3) 행정수도이전이라는 이슈에 밀려 이회창이 자기 고향 충남에서조차
우위를 얻지 못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4) 2002년 전반에 분 '반미' 바람에 창캠프는 중심을 잡지 못합니다.
5) 디지털의 위력을 한나라당이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2002년 당시 한나라당 홈페이지는 그야말로 '한심' 그 자체였습니다.
기타치는 노후보 cf도 표심을 자극했습니다.
인터넷과 미디어의 중요성이 그만큼 증가했습니다.
6) 지나친 이회창 대세론에 편승, 몸이 디룩디룩하게 된 것을 파악못합니다.
7) 민주당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자 신문광고에 당명을 거의 안보이게 한 점
그런 센스에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8) 민주당 내의 반노 진영으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고
당내에서조차 공격받는 노후보에 동정여론이 나타납니다.
급기야 갑자기 부상한 정몽준과의 단일화 과정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조사 방식을 노후보가 수용하면서
국민들에게 자신의 '희생정신'을 인식시킵니다.
9) 이회창은 97년의 아들 의혹 문제를 5년동안 계속 끌고 다니면서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다른 의혹들까지 받으며
그에 대한 대응을 효과적으로 하지 못합니다.
- 97년,2002년 대선을 중심으로 대통령 선거의 트렌드를 살펴봤습니다.
2007년에 대한 왈가와부가 많습니다.
지금의 고건, 박근혜, 정동영 순으로 나오는 여론조사에 일희일비하지 마십시오.
처음에 너무 떨어지지만 않으면 역전은 가능합니다. 4위는 상위권입니다.
이회창,이인제는 양당의 '대세'였지만 한명은 본선에서 한명은 경선에서 무너졌습니다.
고건,박근혜,정동영씨가 출마를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유감스럽지만 MB도 출마를 하지 않거나, 경선에서 떨어질 수 있는겁니다.
MB의 지지자라면 MB가 여론조사 4위에서 3위, 3위에서 2위 2위에서 1위로
한단계 한단계씩 올라갈 수 있는 전략을 개발하는데 서포트를 해주어야 합니다.
MB가 국민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 박은 아니어도 비 박에 가까운 글을 가끔 보는데
제가 판단하기에는 박근혜 대표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박근혜 대표보다 MB를 2007년에 적합하다고 보는 것은
'그 때 맞는 지도자는 MB다'는 큰 명제에 기인한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상황에서 MB가 빨리 메이저(여론조사 빅3)가 되는게
어렵게 생각되기도 합니다만 지지자들이 힘을 합쳐서 한 번
장기적인 게임으로 해보자는 것이지요.
MB 매니아들은 다들 그런 각오를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박대표 얘기로 돌아가서,
박근혜는 한나라당의 약점으로 뽑히는 20대, 호남,충청, 디지털을 뚫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입니다.
한나라당에서 가장 취약한
20대에서 다른 사람에 비해 월등한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한나라당 후보가 대학생이 뽑은 선호 정치인 1위에 오른 것은 박근혜가 처음입니다.
박근혜는 호남과 충청에서도 다른 한나라당 인사들에 비해 많은 지지를 받습니다.
실제로 박근혜나, MB나 손학규 모두 호남과 직접적으로 원수진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박근혜는 대중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호남에서도 비토가 적은 편입니다.
어머니 육여사가 충북 출신이라는 점은 본선무대에서 장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디지털의 경우에도 박근혜는 전자공학과 출신이라는 마인드를 잘 활용했습니다.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미니홈피는 평균 6천 Hit를 쳤고 평시에는 2500 Hit가 나옵니다.
무엇보다 싸이월드에 미니홈피를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박대표가 냈던지
아니면 비서가 낸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는 자체에서 대단했고
박근혜 대표가 직접 사진과 다이어리, 글을 올리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박사모 3만을 비롯, 근혜사랑, 사랑혜 등 지지자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도 장점입니다.
저쪽 후보들이 말을 잘 하는데 박근혜가 매칭이 가능하겠느냐 그런 글을 보았는데
이명박 vs 김민석을 기억해보십시오.
김민석 후보가 서울시장 토론회에서 매섭게 MB를 몰아붙이자
MB가 혼자말로 "말로는 못 당하겠군"이라 말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더군다나 이명박, 김민석 초기 여론은 김민석 우세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이명박의 승리였습니다.
선거라는건 정말 '그 때 그 때 달라요'
'말 잘한다고 좋아했다가 말 많다고 싫어하고'
'후보가 젊었다고 좋아했다가 어리다고 싫어하고'
변덕이 죽끓듯한게 표심입니다.
그러나 변치않는게 있습니다.
'대통령은 하늘이 낸다'는 겁니다.
대권을 거머쥐기 위해서 인간이 할 일은
자신이 정한 '원칙'에 맞게 이미지를 형성해가면서
선거 때의 상황과 이슈에 능동적으로 대처를 하고
'왜 자신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블럭 쌓듯 해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안티'들을 50% 이하로 묶어내는 노력도 있어야 합니다.
적을 만들지 말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사람까지 편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그 일환이겠죠.
'진인사대천명'이 정답입니다.
이명박 매니아 http://cafe.daum.net /MBMania
첫댓글 그래서 충청권 표심을 노통이 의식하고 수도이전을 그리 주장하는가 봅니다.
다시 오래전의 글을 보니 감회가 더욱 새롭습니다.
창사랑께서도 법에 계시다보니 정치꾼의 우묵가사리 모양새를 파악못하시어 너무 순진하셨군요.
이명박의 지역획득은 적과의 동침이 될 서울일것 같네요.
주먹만한 국가속의 아웅다웅이 삼국지입니다. MB가 유비가 될 것인가, 조조가 될것인지......김문수는 제갈공명이 되겠는지...
대중이란 대대적으로 중앙에 모인다해서 대중...그냥모이는 대중....이러한 대중은 선동적입니다. 옳고 그름보다는 떠밀리는 뗏목같다고나 할까. 아무튼...열우당이 그동안 경제를 조금이라도 일으키면 열우당의 함성에 대중은 군중이 될것이고, 3년안에 경제를 더욱 추락시키면 MB에게 유리하게 돌아갑니다.
길고 짧은건 대봐야안다고 3년뒤엔 많이 달라질겁니다. 소소한걸로 때린다해도 해 놓은 결과를 보면 MB쪽에서 유리하다는 희망도 있고, 이미지에 대한 개선도 계속나아지고 있습니다.
읽고 갑니다.
날치기 정치시대...소돔이 따로없군요. 이럴 때의 정치는 지식으로 사는것보다는 지혜로서 살아야합니다
그렇게 설치던 이인제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과거의 시끄럽던 대선주자는 물길 쓸리듯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의 대선주자들의 밑물작업이군요. 이번의 대선주자의 정치핵심을 찾아내는 것...국민이 요구하는 정치성에서 해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MB에게서 충족되는 국민의 요구가 나올 것 같은데....
집단이 있으므로 해서 정치가 생기고 정치는 절로 파당을 가져오고, 파당땜시 경쟁이 생기고, 경쟁은 과학을 주는 이러한 머리짜내기 현상은 과히 나쁜것만을 아닙니다. 나쁘면 나쁜대로 나름대로 배우는게 있습니다.
일본도 이러한 과정속에 성숙한 일본이 되었으니 한국도 그 과정을 거쳐가는 중입니다. 세상엔 공짜로 되는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름대로 값을 치루고 있습니다.
양보없는 정치구도도 알고보면 곳곳에서 일어나는 줄세우기가 만든결과로 사회 모두 공범이다.
MB는 뇌가 명석한 사람만이 진가를 알아봅니다. 의회가 명석한 의원이 모인곳이면 염려할 것 없습니다.
엇비슷한 일들이 되풀이 될 것 같군요.
바른생각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