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해대를 졸업한것이 1962년이렸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그 다음 해 쯤의 묵은 얘기일것 같다.
나는 좌학기간에 농땡이꾼으로 우리가 졸업할때 막 피어오른 해운사 취업대열에서 낙제하여 고향산천에서 빙빙돌고 있을 무렵의 얘기다.
당시 내고장 청주에는 꽤 걸출한 인재들이 점재(点在)하고 있었는데 실명거론하자면 학자풍의 정태조(鄭太朝)선배, 뭣하면 금방 주먹질 할것같은 지석룡(池錫龍)선배, 한번 말을 시작하면 끊일줄 모르는 정영식(鄭榮植)선배, 거기다 저 남주동(南州洞) 주성구락부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를 김연수(金演洙)선배 등등이 주름을 잡을 때 얘기다.
나는 거기서 한 백여리 떨어진 음성(陰城) 한촌에서 그저 술이나 마시고 때론 낙씨나 하면서 허송세월하던 그 시절 허기찬 얘기다.
헌데 별로 헐 일도없는 내가 그래도 심심하면 찾아가는 곳이 그곳 청주(淸州)였다.
우리집에서 한 십리쯤 뿌연 신작로를 걸어 나가면 거기에 청주행 버스가 시간단위로 지나가곤 한다.
그걸 집어타면 약 한시간 뒤면 청주에 당도를 하는데 청주에 닿자마자 나는 늘 남주동의 김연수형의 직장을 찾곤 했다.
삭막한 남주동(南州洞) 시장뻘에 커다란 아치형 간판에 주성구락부(舟城具樂部)라고 그려 진 장구석을 찾아가면 우락부락한 청주의 한량들이 보초를 서서 일일히 내객을 점검하는 조금은 음산한 곳이었다.
우여곡절, 연수형과 통화를 하면 그날이 그날 밤 술자린 확보한 셈이니 나의 청주방문은 일단 성공적인 셈이다.
그 다음 엔 타달타달 걸어 청주의 한 복판일수 있는 수동(壽洞)으로 향하는데 늘 익숙한 골목길에서 커다란 나무대문 집 앞에 당도한다.
수동(壽洞)은 얼마 전 어느 드라마에서 김탁구빵집으로 유명했던 바로 그곳이다.
사실 큰 용기는 없지만 기왕 이렇게 어렵게 청주엘 왔으니 큰소리로 주인장을 불러 본다.
"거 태조형 집에 계슈?!?!"
이 세리푸를 몇번 거듭거리면 그 울 안에서 급기야 뿌시시 인기척이 들리고 곧이어 대문이 삐드득 열린다.
늘 반가운 태조형이다.
그렇게 하여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어둠이 짙게 깔리면 대망의 청주의 밤이 깔리게 된다.
이때부터 생기는 모든 부가비용은 물론 연수선배의 몫이다.
소위 그 무슨 당(黨) 사전조직의 선봉에 있던 그 서슬 퍼렇던 주성구락부(舟城具樂部)의 연수형이 그래도 그중 여유로웠다.
그렇게 하여 좀은 어설펐지만 그 땐 그래도 당당했던 그 청주의 요정에서 거나하게 취하곤 했다.
이런 해프닝은 그나마 내가 청주에 출타해야 이뤄지곤 했던것 같다.
당시 중학교교장선생님의 자제셨던 태조형, 청주여중의 어느 선생의 동생이던 석룡선배, 현란한 스피치로 늘 학생들을 매료시키던 어느 학교 선생이던 영식선배, 그 무리에 비하면 한푼어지 깜도 안되는 내가 자주 모이던 그 추억의 그 술집 얘기다.
얼마 전에 영식선배가 별세했다는 얘기였고 연수선배는 훨씬 오래 전에 작고했다
우리가 반도호를 타고 붕고수이도를 빠져나와 태평양 초입에서 산더미같은 파도에 휘감길때 인천(仁川) 월미도 압바다에선 우리 선배 이영우소위가 단정과 함께 파도에 휩쓸린 어느 하사관을 구조하려 뛰어든것이 순직영면의 길이 되고 말았다..
이북에서 넘어 온 석룡선배는 당시 청여중(淸女中) 관사 뒷방신세로서 자기 형수의 구박덩어리 찬밥신세였는데 결국 싱카폴로 자릴 옮겨 스스로 거부(巨富)가 된다.
우리고향 음성(陰城) 무극광산(無極鑛山) 사택에 살던 영식선배와는 좌학시절부터 내가 늘 찾아가는 사이였다.
버스를 타면 30분이면 닿는 그 광산촌 사택을 찾으면 그 선배 늘 막걸리 주전자와 오징어 한마리로 입가심을 했었다.
그래서 얼간해 지면 그곳 무극읍내로 한 30분 걸어 나가서 청요리집으로 향하는것이다.
어차피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고 하나 둘씩 일찌감치 세상을 등지곤 한다.
정영식(鄭榮植) 오도영(吳道永) 이영우(李永雨) 이들은 거의 같은 키의 헌출한 미남들로서 흔히들 13기의 삼총사로 불리곤 했다.
이들 모두 이제 이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당시 청주 주성구락부(중앙정보부)에 있던 김연수(金演洙)선배는 언젠가 바다로 돌아와 우리 본업에 종사했었다고 한다.
초창기 해외취업선을 탔던 오도영선배는 깡패 주자(廚者)를 거느리고 온갖 주부식비(主副識費)를 횡령하는 그 유명한 어느 악덕선장에 대항하여 그 주자를 브릿지로 향하는 복도에서 몰매로 이른바 후꾸로다다끼를 가해 갈빗뼈를 분질렀던관계로 부산에 입항후에 사뭇 경찰의 수배를 피해서 숨어지냈었다.
그 뒷바라진 내가 하고 있었는데 아마 주로 동광동 40계단 아래 현대장여관에선가 은신하고 있었다.
강원도 원주시장을 하셨던 그 부친께서 내려오셔서 그 일 뒷수습에 애를 쓰셨던 기억이다.
그 한 동아리로 몰려 영도수상서에 잡혀있던 신석흔 신상관의 수염 덥수룩했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삼삼하다.
연수(演洙)선배와 절친이던 장준술(張俊述) 그리고 김국립(金國立)선배, 이들 두 선배는 내가 상꼬기센(三光汽船) 탱커에 승선중이던 시절 뉴욕 맨하턴 32번가에서 만나 하룻밤 회포를 푼적이 있다.
장준술 선배의 부인이 바로 강성구선배의 여동생이다.
미인이며 당대 그래머였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상념은 무궁하지만 술기운도 거의 끝나고 탈진하여 가니 이제 좀 쉬어야겠다.
아듀 굿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