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소고 정원종 교사의 '이근재 살리기' 大作戰
"목표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는 아이들 많아요"
소년이 쪽지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든 여(女)교사가 놀라 교무실로 뛰어왔다. 1학년 1반 담임 정원종(鄭元鐘·42)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뭔가 꺼림칙했던 이근재(李根宰·19)였다. 그가 마침내 '큰일'을 냈다.
유서(遺書)내용은 이랬다. '불안하고 살기 두렵다…. 난 혼자다. 우울하다. 아름다운 추억도 없다. 죽음만 선택하자. 경찰 아저씨 나의 시체는 화장해주세요.' 2007년 6월 15일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고에서 일어난 일이다.
쪽지 오른쪽 위에 '6월 21일'이란 날짜가 있었다. 자살하려 한 그날은 근재의 생일이었다. 정원종은 옛일이 생각났다. 처음 교단(敎壇)에 섰던 경기도 시흥시 한인고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한 학생의 전도(傳道)를 맡고 있었다.
졸업을 앞둔 학생이 갑자기 무단결석했다. 정원종은 그의 집을 찾아갔다가 너무 놀랐다. 방 안이 쓰레기처리장을 방불케할 만큼 지저분했다. 싱크대엔 닦지 않은 그릇들이 수북했다. 아버지는 사망했다. 어머니는 집을 겉돌았다.
소년은 끝내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픈 기억에 몸서리치던 정원종이 근재의 집으로 달려갔다. 햇볕 없는 컴컴한 반(半)지하 셋방에서 소년은 몸 불편한 할머니와 살고 있었다. 제자를 위한 스승의 분투(奮鬪)가 그때 시작됐다.
- ▲ 꽃샘추위도 사제(師弟)를 시샘하는 걸까. 어둠 속 텅 빈 교실,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네모난 빛 안에서 정원종과 이근재가 웃고 있다. 귀 어두운 소년이 부는 대금소리가 밤하늘을 유영(游泳)했다. / 오진규 인턴기자
―근재를 처음 봤을 때 왜 꺼림칙했습니까.
"전 매 학기가 시작되면 디지털카메라로 학생들의 사진을 일일이 찍습니다. 그래야 얼굴과 이름을 빨리 외울 수 있거든요. 다른 아이들은 다 좋아하는데 근재의 눈빛은 싸늘했어요."
―눈빛이 싸늘하면 다 꺼림칙한 건가요.
"학기 첫날 하는 일이 또 있습니다. 가정통신문을 보내는 겁니다.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이야기도 하고 가정방문 하겠다는 뜻을 학부모님들께 전해드리는 거지요. 근재는 신상명세를 쓰는 난에 주소를 쓰지 않았어요. 며칠 뒤 마지 못해 쓰더니 그 다음부터 무단결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요.
"집으로 찾아갔지요. 학교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었습니다. 전 그때 그 아이에게 청각(聽覺) 장애가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집안 환경이 어땠습니까.
"어머니는 아이가 백일(百日) 때 이혼했답니다. 그 뒤 재혼해 서울에 살고 있고요. 아버지는 강원도에서 트럭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연세가 칠십 가까운 할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다 관절염으로 누워 계셨고요. 이불 위에 먹다 남은 빵과 통조림통이 널려 있었습니다. 곰팡이가 슬어있더군요. 그런 곳에서 살던 아이가 유서를 쓴 겁니다."
―아버지에게 알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알렸지요. 처음엔 '뭐 이런 부모가 다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재 아버지에 대해 증오심 같은 것도 생겼고요. 알고 보니 아버지의 사정도 딱했습니다. 근재처럼 청각장애가 있었습니다. 택시운전을 했는데 손님과 대화가 됐겠어요? 해고된 뒤 트럭을 몰며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나 할머니에게 맡겨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근재가 다녔던 와부중학교를 찾아가 생활기록부를 떼봤습니다. 중1 때는 결석이 한번도 없었어요. 중2 때 사흘 결석하더니 중3 때는 57일을 결석했습니다. 제적당하지 않은 게 기적이었지요. 당시 급우(級友)들을 찾아 물어봤습니다. '점심 시간 때 친구와 말다툼하다 칼을 휘두른 적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성적은 당연히 엉망이었지요."
―어느 정도인 게 엉망인가요.
"중1 때는 391명 중에 391등, 중2 때는 383명 중에 383등이었습니다. 제일 잘한 과목이 중3 체육과목이었는데 364명 가운데 348등이더군요. 교사들의 평가를 보니 중1, 2 때는 '표정 밝고 명랑함' '음악에 재능과 관심이 많음'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중3 때는 '생활이 불규칙함'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자살을 결심한 아이는 어떻게 다뤄야 합니까.
"일단 경찰서로 데려갔지요. 그곳에서 의정부에 근재 같은 아이들을 치료하는 곳이 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경기도 청소년상담센터에 있는 임시 보호소였지요. 유서를 본 다음 날 제가 직접 아이를 데리고 그곳에 갔어요. 그런데 일이 생겼어요."
―무슨?
"6월 20일, 아버지가 센터에 전화를 해 '아이를 집으로 보내라'고 한 겁니다. 전 아버지가 아이를 직접 집에 데려다 준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혼자 갔다는 겁니다. 놀라서 다시 근재 집으로 갔습니다. 한참 문(門)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었어요. 경찰서로 뛰어가 경관과 함께 다시 집으로 갔지요. 문을 강제로 여는데 그제야 방 안에서 자고 있던 근재가 나오더군요."
―6월 21일이 근재 생일이지요.
"사실 몇몇 선생님들과 함께 선물을 준비했어요. 휴대전화도 사고 여교사 두 분은 근재 집을 청소해줬어요. 다시 의정부 보호소로 근재를 데리고 가면서 선물을 전하니 비로소 밝게 웃더군요. 아이는 6월 25일 퇴소했습니다."
―가정방문은 학부모들이 싫어하지 않습니까? 일부이긴 하겠지만 '촌지'를 바라는 교사도 있고 무엇보다 부담스러우니까.
"학부모님들이 그렇게 생각하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눈치가 싫어 가정방문을 하지 않으면 아이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지도를 바르게 할 수도 없지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가정방문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자립
정원종은 일단 근재의 자살을 막았다. 그다음은 그의 자립을 도와야 했다. 그러려면 같은 반 친구들의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선언했다. '근재를 편애(偏愛)하겠다'고. 종례시간에 정원종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도 학창 시절에 공부 잘하는 학생만 좋아하는 선생님이 너무 싫었어. 하지만 근재는 이대로 놔두면 큰일 나겠어. 너희들이 이해해줄래? 그럼 맨 먼저 근재의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줘. 힘내라고, 우리들이 있다고…."
―학생들이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까.
"거의 다 보냈지요. 근재같은 아이에겐 관심이 무엇보다 중요하거든요. '홀로 있다. 세상에 나 혼자뿐이다'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돈도 없는 아이가 어떻게 휴대전화를 쓸 수 있을까요.
"휴대전화는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제 막내딸(정제린) 명의로 돼 있었지요. 요즘 휴대전화에는 여러 기능이 있어요. 근재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문자 메시지 내용을 제가 다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위치 추적 기능도 추가했고요. 요금도 몇 달은 제가 내줬지요."
―그 다음부턴 근재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 사회에는 불우한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제도가 있어요. 제가 동사무소를 찾아가니 직원들도 이미 근재의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시더군요. 하지만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정부의 보조를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아버지에게 연락해 주민등록을 옮기고 근재를 단독 세대주로 만들어줬지요. 그렇게 하니 월 40만원가량의 보조금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돈을 아이가 다 써버리면…
"몇 달 근재에게 돈을 맡겨보니 역시 안 되겠더군요. 아이가 먹을 것도 없는데 이런저런 보험료로 돈이 빠져나갔어요. 제주도 수학여행비도 분명히 넣었는데 출금이 안 됐다는 연락이 학교 행정실에서 왔어요. 그래서 근재의 통장을 그때부터 제가 관리했지요. 지금 보이는 이 노트에 영수증들이 있지요? 근재에게 들어간 모든 비용 내역을 모아놓은 겁니다. 오해가 있으면 안 되니까요."
―가난한 아이에겐 제주도 수학여행도 부담되는 게 아닌가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겐 여행사가 비행기 표를 무상으로 지원합니다. 그럼 비용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지요."
―월 40만원으로 아이와 할머니가 생활하는 게 충분합니까.
"아이가 사는 집 근처의 덕소성당에서 도움을 주던 게 있었습니다. 한번은 근재가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왔어요. 알고 보니 성당에서 받은 돈으로 산 겁니다. 성당을 찾아가 통장으로 입금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학부모님들이 다니는 동부광성교회, 한밀교회 같은 곳에서도 여러모로 도움을 줬습니다. 근재가 할머니를 모실 수 없잖아요?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모셨습니다."
―그럼 근재 혼자 살게 된 겁니까.
"제가 근재 집에서 충격을 받은 건 좁은 방이나 청소하지 못한 광경뿐이 아니었어요. 제일 놀란 건 화장실이었습니다. 계단 밑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높이가 1m 정도밖에 안 됐어요. 용변을 보려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서 그 자세로 일을 봐야 하는데 얼마나 불편해요. 그래서 새집으로 이사를 시켜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새집을 구하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지요.
"학부모님 몇 분께 그 이야길 했더니 교회에서 보증금을 도와줬습니다. 돈이 추가로 들진 않았어요.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왔는데도 월세는 10만원 정도였거든요. 이사를 2007년에 한 번, 2008년에 한 번 시켜줬습니다. 그때는 학교 바로 앞에 집을 잡아줬지요."
―2008년이면 근재가 2학년일 때네요. 고1 때 외에는 담임을 맡지 않았잖습니까.
"담임을 맡으려 했지만 개인 사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관심은 계속 아이에게 두고 있었지요. 제가 지구과학을 가르치기 때문에 근재에게 이과(理科)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수업시간에라도 자주 볼 수 있으니까요."
―고교생 혼자 생활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집에 들러 보니 밥 짓는 법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밥솥을 사주고 제가 몇 차례 밥 짓는 시범을 보여줬어요. 그다음부터는 일부러 근재에게 밥을 짓도록 해 함께 먹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밥도 자주 지어 봐야 습관이 되잖아요."
―듣고 보니 대단합니다.
"꼭 뵙고 싶은 분이 있어요. 근재의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근재나 근재 아버지, 할머니는 청각장애가 있는 줄 몰랐대요. 그걸 그 선생님이 알아냈다는 겁니다. 아이가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자기는 들리지 않는데 그걸 사람들은 몰라주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사회에 대한 피해의식과 복수심이 생기지요. 그 담임선생님은 근재에게 몇백만원 하는 보청기도 사주셨대요. 모금운동을 벌여서요. 그분에 비하면 전 아무것도 아니지요."
- ▲ 생일을 일주일 앞둔날 어린 제자가 방 안에 틀어박혀 삐뚤빼뚤한 글씨로 유서를 써내려 갔다. 정원종은 제자에게 새 집을 얻어주고, 밥 짓는 법을 가르쳤다. 그런 그가 대학에 갔다. 잘하는 것도 없고, 목표도 없었던 근재는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헤쳐 나갈 것이다. / 오진규 인턴기자
- ▲ 귀퉁이가 닳고 누렇게 변한 종이뭉치가 마치 미스터리한 X-파일처럼 보인다. 송금내역, 성적표 등 정원종 교사가 모아온 근재에 관한 자료들이다. / 오진규 인턴기자
■ 희망
안정을 되찾았지만 근재에겐 '희망'이 없었다. 선생님은 그에게 목표를 주고 싶었다. 뜻밖에도 근재에겐 한 가지 재주가 있었다. 무슨 계기인지 당시는 몰랐지만 중1 때 가야금을 배우다 중2 때 대금을 불기 시작한 것이다.
정원종은 근재에게 말했다. "나는 널 꼭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합격하기만 하면 등록금은 어떻게든 마련해볼게. 다행히 넌 대금을 잘 불잖아. 서울대 국악과에 도전해 봐. 열심히만 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야!"
―그렇게 사정이 안 좋은 아이가 대금을 배웠다니 신기합니다.
"청각장애를 가진 근재가 음악을 한다는 게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재주가 있었는데 고1 때 잠시 공백기가 있었어요. 대학 진학이라는 목표가 생기니 근재는 서울로 레슨도 다니고 했어요. 용기를 북돋아줄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음악 선생님과 상의하니 남양주시 청소년 예능대회에 참가해보라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입상했습니까?
"제가 너무 자랑스러워 이렇게 상장을 복사해놓았습니다(정원종 선생이 보여준 상장은 '기악독주 고등부문 장려상'이었다)."
―그래서 목표하던 대학에 진학했나요.
"전북 완주군에 있는 우석대학교 국악과에 수시전형으로 합격했어요. 저는 근재가 간 대학이 서울대학교에 못지않다고 자부합니다.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대학 등록금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480만원이 나왔는데 장애가 있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은 75%까지 감면받을 수 있습니다. 180만원을 내야 했는데 아이의 어머니가 100만원을 몰래 마련해줬어요. 나머지는 교회와 성당, 정부 보조금을 모아놓은 돈으로 해결했고요."
―지난 2일 제게 이메일을 보냈지요.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제가 돌보던 학생이 대학에 입학한 날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거의 모든 학교에서 서울대, 의대·한의대, 1등한 학생만 화제가 됩니다. 그건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공교육에서 해야 하는 게 전 인성(人性)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잘하는 아이들은 분위기만 만들어주면 알아서 하지요. 하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선생님들이 돌봐주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학생들이 바로 그런 아이들이지요."
―아이가 지방으로 내려갈 때도 도왔습니까.
"지난 2월 5일 아내와 함께 완주로 내려갔어요. 인터넷으로 하숙집을 물색했는데 너무 좋은 곳을 얻었어요. 3월부터 12월까지 140만원만 내면 되니 얼마나 저렴해요. 이삿짐을 옮길 때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무슨 도움을?
"근재가 고2 때 이사할 때 '희망케어'라는 곳에서 이사 지원을 받았거든요. 그때 도와줬던 분이 나중에 '옐로우캡'이라는 회사의 지점 대표가 됐대요. 그분과 함께 트럭을 타고 이런저런 이야길 했는데 정말 자원봉사를 많이 하신 분이었습니다. 이사를 다 마친 뒤 제게 봉투를 내밀더군요. 근재 구두 사는 데 쓰라고 10만원짜리 티켓을."
―전 세상에 악한(惡漢)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 말을 들으면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분들도 많군요.
"그때마다 사실 제가 울어요. 근재 앞에서 절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세 번 운 적이 있어요."
―언젭니까.
"동부광성교회 목사님께 사정을 말씀드릴 때였어요. 목사님이 기도하는데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2학년 담임을 맡을 때도 그랬어요. 학생들에게 '너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아느냐. 정말 어렵게 사는 친구들이 많다'는 이야길 하는데 감정이 북받쳐올랐습니다. 세 번째로는 작년 대학입시 수시전형에서 합격했을 때였어요. 아내에게 '근재 합격했다'는 소식을 알리려 전화를 하는데 말을 못하고 울컥했지요."
―부인이 놀랐겠네요.
"처음엔 뭐가 잘못됐나 하고 놀랐대요. 아내가 그럽니다. '근재한테 하듯 우리 딸 셋하고도 시간을 좀 보내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내도 근재에게 때때로 밑반찬도 해다 주고 그랬어요."
―근재가 연락은 자주 합니까.
"어떨 때는 하루 20~30개씩 문자를 보낼 때도 있어요. 한번 보실래요? (그가 보여준 문자 메시지 중엔 '10학번 국악과에 59세 어머니가 입학했어요' '만 이십 나 이제 아빠와 쌩할 것임' '덕소 가고 싶어요' 같은 내용들이 있었다. '쌩할 것임'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가 말했다) 요즘 아이들 은어로 서로 얼굴 안 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 안되지'라고 했더니 'ㄴㄴㄴ'이라고 답장을 보냈더군요. 그건 '노(No)노노'란 뜻입니다."
■ 교육
정원종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교단에 섰던 그는 2년 반 동안 외도(外道)를 한 적이 있다. 삼성생명에 입사해 종신보험팀에서 1년을 일했고 건대 입구에 있는 강남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가 교직을 떠난 것은 글을 쓰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교사일 때보다 글 쓸 시간이 더 부족했다. 그런 그에게 다시 교사의 길을 권유한 이는 선친(先親)이었다. 아버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교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 좋다는 교직을 왜 떠났습니까.
"제가 시(詩)나 소설, 수필을 써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시간도 없고 보험회사에서 실적을 올리는 것도 부담이 되더군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계속 발전하면 보험설계사가 필요없는 시대가 올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원래 지금처럼 학생들에게 헌신하는 선생님이었습니까.
"덕소고로 오기 전까지의 저는 한마디로 '싸가지'가 없는 선생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청소하는 분들을 보면 '당신이 공부 안 해서 청소하게 된 거야' 하는 식으로 생각했거든요. 교직을 떠난 2년 반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우리 사회에는 열심히 사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학원강사 할 때 열심히 가르쳤지만 학원이 망하는 것도 보고 월급도 떼여 봤어요. 그런 걸 보고 체험하면서 생각이 바뀌더군요."
―전체 교사를 100이라고 보면 정 선생처럼 학생들의 인성교육에 힘쓰는 비율이 몇 정도 될까요?
"전 20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2대8'의 원칙이라는 게 교사 사회에도 있지요. 사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사대(師大)를 다녀도 임용시험 준비하느라 공부에만 신경 쓸 수밖에 없거든요. 학원에도 다녀야 하고. 교사가 된 후에는 교감·교장 되려면 실적(實績)을 쌓아야 하는데 그게 대부분 좋은 대학 보내거나 무슨 대회에 나가서 상(賞)을 받아오도록 해야 하는 겁니다. 많은 아이들은 사실 목표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는데…."
―교원평가를 하면 정 선생 같은 분은 손해를 본다는 뜻인가요.
"전 교원평가에 찬성합니다. 다만 평가방식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학 진학률 같은 것만 잣대로 잰다면 선생님들이 언제 인성교육이나 참교육에 신경을 쓰겠어요."
―학생들에게 매도 때립니까?
"때립니다. 그게 학생들을 바로잡는 길이니까요. 학부모님들이 서운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전 사랑의 매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사는 선생님은 집 칸이라도 마련하셨나요?
"처음에 시흥에 살 때는 11평 아파트에서 살았어요. 아내도 기간제 교사를 했는데 양가(兩家)의 사정이 넉넉지 않았습니다. 최근 무리를 해서 29평 아파트를 장만했는데 대궐이에요. 아이들이 다 딸이라 방 한 칸은 독서실로 쓰고 동성(同性)이니 같은 방에서 재워도 되지요."
―근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아직 스무살이 안 돼서 제가 돌봐주고 있어요. 1차로 대학 진학은 했는데 졸업 후가 더 걱정입니다. 그때는 정부의 보조도 끊길 테니까요. 성당에서 도와주던 것도 교구(敎區)가 바뀌었다고 중단됐고요. 제가 근재에게 그랬어요. 대금 연주자가 되는 걸 목표로 하되 대금 만드는 법도 배우라고. 그래야 자립할 수 있다고요."
전북 완주에서 이근재가 올라왔다. 취재가 있다는 정원종의 말을 듣고 근재는 고속버스를 타고 남부터미널에 도착한 뒤 다시 덕소까지 왔다. 근재는 8일 저녁 7시20분쯤 모교에 왔다. 그는 그날 오후 9시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에게 '대금은 왜 배우게 됐느냐'고 물었다. 근재가 말했다. "어렸을 때 TV에서 가수 이안이 국악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봤어요. 대금을 배우면 나도 저렇게 외국에 다닐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재에게 선생님은 어떤 분이냐고 물었다.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좋은 분이에요." 자칫 비행(非行) 청소년이 됐을 수도 있었던 그는 신입생 시절을 만끽하는 것 같았다. "3학년 누나가 통닭도 사주고 절 아주 예뻐해줘요."
어두컴컴한 저녁, 기자 일행과 정원종 교사, 이근재 학생이 신관(新館)의 2학년 5반 교실로 갔다. 사진촬영을 하기 위해 물색하니 그 교실만 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두 사람이 말했다. "이 교실이 옛날 1학년1반이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꽃샘추위로 날씨가 쌀쌀했다. 사진기자는 근재에게 대금을 불게 하고 선생님에겐 학생을 바라보라고 한 뒤 밖으로 나갔다. 어두컴컴한 배경 속에 두 사람이 마치 액자 속에 든 것 같은 장면이 화상(畵像)이 됐다.
일정 때문에 떠나는 기자 일행에게 선생님이 말했다. "자장면이라도 들고 가세요." 그들에게 탕수육이라도 대접하고 올 걸 하는 후회가 일었다. 사제(師弟)는 손을 호호 불며 자장면 두 그릇을 앞에 놓고 정(情)을 나눴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