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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나들길 제 10코스 (교동 2코스 머르메 가는 길)
6.25때 활주로로 사용하였던 곧게 벋은 도로를 따라 드넓게 펼쳐진 교동평야를 가로 지르면 거대한 호수를 연상케 하는 난정저수지를 만난다. 평범했던 선조들의 숨결이 유적으로 남아 있고 섬을 지키려 했던 역사가 이야기로 전해지는 마을로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머르메 가는 길은 옛사람들의 일상이 풍경되어 남아있는 코스다. 머르메는 동산리의 자연부락 이름이다. 원래는 가장 큰 마을이라는 뜻의 두산동이라 하였으나 한자를 풀어 우리말로 ‘머리뫼’라 한 것이 와전되어 ‘머르메’로 전해져 오늘날까지도 머르메로 불리고 있다.
탐방코스: [ 대룡시장~(4.3 km)~난정저수지~(2.1 km)~수정산~(2.5 km)~금정굴~(1.8 km)~애기봉~(1 km)~죽산포~(1 km)~머르메~(1.3 km)~양갑리 마을회관~(1.7 km)~미곡종합처리장~(1.5 km)~대룡시장 ] [17.2km / 소요시간 5시간 40분]
교동도(喬桐島)
면적 47.14㎢, 동서길이 10㎞, 남북길이 6㎞
요약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는 섬.
개설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하며, 동경 126°16′∼126°21′, 북위 37°45′∼37°00′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양사면과 내가면이 있고, 남쪽으로는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가 있다. 북쪽으로 불과 2∼3㎞의 바다를 끼고 황해도 연백군이 있다. 따라서 섬 북부에서는 황해도 땅을 쉽게 바라볼 수 있으며, 좀 높은 곳에서는 예성강 하구를 볼 수 있고, 맑은 날에는 개성 송악산도 바라볼 수 있어, 실향민들이 화개산 산정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명칭 유래
교동도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달을참(達乙斬), 고목근(高木根), 교동(喬桐)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달을참이란 ‘크고 높은 산이 있는 고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대운도(戴雲島), 고림(高林)이라고도 불렸다.
자연환경
고도가 매우 낮은 섬으로 높이 0∼10m의 지역이 섬의 3분의 2를 이루고 있으며, 마식령산맥 서단에 해당한다. 가장 높은 산은 화개산(華蓋山, 260m)으로 이 섬의 주산을 이루며, 봉황산(75m)·율두산(89m)·고양이산(35m)·수정산(75m) 등 모두 100m 이하의 낮은 구릉들이다.
연백에 면한 동북해안은 제방을 쌓아 고구(古龜)의 관개용 저수지의 완성으로 경지확장 및 경지정리를 하였다. 해안선은 단조로우며, 연안의 저지(低地)는 이질(泥質)인 갯벌로 되어 있어서 어항의 발달은 불리하고, 간만의 차도 커서 선박의 출입도 그리 편리하지 못하다. 섬인 까닭에 한서의 차는 내륙에 비하여 작으나 언제나 해풍이 비교적 강하게 불며, 겨울에는 해안의 유빙으로 한기를 더욱더 조장한다.
내륙에 비하면 겨울이 빠르고 여름이 늦어 환절기에는 해상의 기류가 고르지 않아 때때로 소나기·회오리바람을 몰아오며, 때로는 서리나 우박이 내리는 등 날씨가 고르지 못하다. 연평균기온은 11.2℃, 연강수량은 1,390㎜이다.
상고시대에 이 섬은 개화산·율두산·수정산을 중심으로 세 개의 섬으로 되어 있었으며, 교동평야에는 언제나 조수가 흘렀고, 그것이 그 뒤 하나의 섬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개화산 중턱에서 볼 수 있는 화석이 된 조개껍질이나 현 해안선에서 내륙에 위치한 패총의 흔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 남쪽에 있는 석모도 상주산 사이의 바다가 육화(陸化)되어 인마가 내왕할 수 있었다가, 1578년(선조 14)경 다시 바다로 되어 간조 때 외에는 인마가 내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보아, 후빙기 이후 범세계적인 해면변동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하천의 발달도 드물고, 작은 계류가 있을 뿐이다.
형성 및 변천
고구려 때에는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부터 교동이라 불려 혈구현(穴口縣)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교동이라 일컬었으며, 고려 명종 때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395년(태조 4)에 만호(萬戶)와 지현(知縣)을 두었으며, 그 뒤 이를 고쳐 현감이라 일컬었다. 1629년(인조 7)화량진(花梁鎭)으로부터 수영(水營)을 교동 원권진(현 읍내리)으로 이전하면서 현을 부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 겸 부사를 두었다.
1633년 서남해의 방어를 더한층 강화하기 위하여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고, 삼도, 즉 경기·황해·충청의 주사(舟師)를 통괄하게 하였다. 1777년(정조 1)에 이르러 교동부사를 격을 낮추어 현감으로 하였다가, 1779년에 통어사가 강화로 이속되면서 교동현감은 다시 부사 겸 방어사로 승격되었다. 1789년에 통어영(統禦營)이 다시 교동으로 옮겨왔다.
1866년(고종 3) 통어사가 다시 강화로 이속되면서 부사 겸 방어사로 변경되었다가, 같은 해 8월 또다시 통어사를 두었다. 1884년해방영(海防營)에 통어사가 이속되어 부사 겸 통어사로 격이 내려갔다. 1895년 행정개편에 따라 읍을 폐하여 강화에 이속하였다가 1896년 읍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강화군에 속하게 되면서, 개화·수정의 두 면을 두었다가 1934년 두 면이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현황
인구는 광복 당시 8,644명이었던 것이 6·25전쟁 뒤 많은 피난민으로 1965년에는 1만2443명에 달해 최고를 이루었다. 그러나 1972년부터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1977년부터 감소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2009년 5월 현재 교동면 인구는 3,132명이고 세대수는 1,389호이다.
2006년 현재 교동면 전체 면적은 47.14㎢이고 논 25.89㎢, 밭 2.57㎡, 임야 11.45㎢이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교동토의 간척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까지 지속되었다. 이로써 형성된 저평한 평야가 넓고, 완비된 경지정리·수리시설 기계화 등으로 쌀의 생산량은 섬의 자급자족을 넘어 다른 지방으로 나가며,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감자 등과 임산물은 밤·대추·버섯 등이 생산된다.
밭에서 하는 인삼재배가 농가의 부업으로, 완초공예품은 강화도의 화문석처럼 그 이름이 높다. 완초공예품으로는 화방석·꽃삼합·광주리·손가방·화문석 등 다양하며, 그 가운데 화방석과 꽃삼합은 대도시로 팔려나가는데, 수익성이 높아 오랜 전통을 오늘날까지 지속하고 있다.
6·25전쟁 이전에는 4개의 정기연락선이 있어 육지와 서해도서가 자유롭게 연락되었으나, 전쟁 이후 매우 불편해졌다. 그러나 서울과의 연결은 강화도 창후리에서 수시로 배가 있었고, 연안도서를 연락하는 선편이 있었으나 불편한 편이었다. 2014년 교동대교가 완공되어 강화도와 연결되었고, 서울과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육지와 격리된 섬인 까닭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유배지로 이용되었고, 지리적 위치상 외세의 침범이 빈번했던 관계로 섬에는 많은 고적이 남아 있다.
1629년에 축조된 읍성지(邑城址), 1173년경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화개산성지, 교동구현허(喬桐舊縣墟)를 비롯하여, 고려희종이 유배되어 기거하던 경원전(慶源殿)과 철종잠저소(哲宗潛邸所)·봉수대(烽燧臺)·단묘(壇廟) 등과 그 밖에도 많은 유적들이 있다. 또, 명승지로는 교동팔경이 있고, 화개사·교동향교 등은 화개산 남쪽에 있다.
오염원과 축산농가가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농사를 지어 생산한 교동쌀이 이름있다.
[BAC 섬&산 100]] 50년 전 우리 모습이 남아 있다, 교동도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글 신준범 차장대우 사진 주민욱 기자
월간산 기사 입력일 : 2022.01.28.
1970년대 풍경 간직한 섬, 나들길 9~10코스 걷기 여행
‘저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 싶었다. 북한 마을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검은 옷을 입고 걷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보였다. 항상 뉴스로만 보았던 북한을 망향전망대 망원경으로 보았다. 생각보다 가까웠고, 우리나라 1970년대 풍경 같았다. 북한이 가까운 섬 교동도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군 검문소를 두 번 거쳤을 뿐인데 공기가 바뀌었다. 더 정확히는 소음이 줄었다. 추수가 끝난 농경지는 황량했고, 육중한 침묵이 지그시 공기를 누르고 있었다. 간간이 흙먼지를 날리며 지나는 차량만 시간의 흐름을 일깨워 주었다. 2014년 교동대교가 생기기 전까지 섬 특유의 고립성이 있었고, 민간인 통제구역이었기에 1970~1980년대로 온 것 같은 묘한 느낌이다.
강화군 일대의 운치 있는 코스를 엮은 걷기길, 나들길 9코스 ‘다을새길’로 향한다. 다을새는 교동도의 삼국시대 이전 지명인 ‘달을신達乙新(하늘에 닿을새)’의 소리음이며, 신라가 강화도를 차지한 후 교동도라 불리게 되었다.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오동나무가 우뚝한’ 교동도喬桐島라 불렸으니 뿌리 깊은 섬인 것.
민통선 바다를 건너왔다고 하여 산과 바다가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편견이었다. 월선포엔 태풍의 눈 같은 바다가 있었다. 헤라클라스의 풀무질 같은 거대한 힘의 물결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바다가 아닌 폭우가 내린 다음날의 강줄기 같았다. 바다 건너엔 석모도 상주산이 솟구쳐 있었으나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힘의 물살이 시선까지 빨아 당기고 있었다.
햇살이 흐르는 수면에 찬란히 빛나는 것이, 거대한 은갈치가 휘감아 흐르는 듯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바다가 월선포에 있었다. 교동대교가 생기기 전엔 육지와 섬을 잇는 유일한 통로였으나 지금은 빛바랜 ‘선착장 대합실’ 간판만 분주했던 옛 시절을 추억한다.
인하대산악부 유한흠(25), 블랙야크 익스트림팀 김민선(27)씨와 함께 나들길 나들이를 시작한다. 중국 쓰촨성 출신의 중국인 유학생인 유씨는 북한산 인수봉만 30여 회 넘게 선등으로 오른 친한파 대학산악부원이다. 모처럼 낯선 곳에 여행 왔다며 즐거워한다.
시골길 따라 평범한 배경 속으로 든다. 이따금 지나는 주민들은 나들길 여행자는 익숙하다는 듯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해발 260m의 화개산은 교동도에선 압도적인 높이라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띈다. 나들길 표지기는 서서히 화개산 가까이로 이끈다.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인 교동향교
흙길과 포장길이 번갈아 이어진다. 앙상한 가지와 버려진 건물이 눈에 띄는 평범한 풍경 속에서 물씬 쓸쓸함이 묻어난다. 도시에서 온 여행자에게 시골 걷기길이 가진 특유의 황폐한 분위기는 희귀한 것에 가깝다. 빌딩숲과 규칙적인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쓸쓸한 풍경 속에서 만끽한다.
빈 터만 남은 쉼터, 안양사지다. <동국여지승람>에 이름이 올랐을 정도로 이름 있는 절이었으나 축대만 남았다. 지금은 아름드리 벚나무가 주인인양 거대한 품을 자랑하며 서있다. 안내판이 없었다면 전혀 몰랐을 숲 속이다. 사람의 시간이 자연의 흐름에 묻히는 건 금방이다.
리기다소나무와 해송, 노간주가 겨울에도 초록을 유지한 숲을 빠져나오자 만석꾼네 기와집 같은 교동향교다. 고려 인종5년(112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년)에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공자와 그의 제자 10인의 초상을 가져와 전국 최초로 모셨다고 하여 향교 중의 으뜸인 ‘수묘首廟’라 칭한다. 공자를 모시고 있어 예의를 지키라는 의미로 대성전으로 들어서는 문은 머리가 닿을 만큼 낮다. 건물은 198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짧은 오르막 포장길을 올라서자 화개사다. 고찰답게 정돈된 잔디밭과 승천하는 용을 닮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기품 있다. 원래 나들길은 여기서 화개산 정상으로 이어지지만, ‘공사 중’이란 팻말과 함께 우회로로 표지기가 이끈다.
간벌이 필요해 보이는 빽빽한 굴참나무 숲을 지나자 갈림길에서 능선으로 방향을 꺾는다. 정상으로 이어짐을 가파른 경사에서 대번에 알 수 있다. 숨이 가빠오다 정점에서 고요가 찾아오는 사점死點을 넘을 사이도 없이 오르막이 끝난다. 정상부에 펼쳐진 거대한 공사판, ‘화개산 전망대’를 짓고 있는데 보통 산에서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아니라 크레인까지 동원되어 건물을 짓고 있다. 사면 아래는 임도와 각종 시설물 공사를 하느라 모두 파헤쳐져 있다. 친환경적인 방법도 있을 텐데 산 절반을 깎아내 관광을 위한 토목공사를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왕실의 유배지로 사랑 받다?
공사판을 지나자 다시 이어진 산길에 ‘청동기 암각화’가 있다. 안내판이 없었다면 모르고 지날 법하지만 자세히 보니 바위에 구멍과 선을 그은 것이 드러난다. 대략 3,000년 전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순 없으나, 바위에 새길 정도라면 간절한 바람이 있지 않았을까? 상대적으로 암각화는 초라한 대접이다.
짧은 오르막을 올라서자, 스트레스가 풀리는 정상이다. 헬기장처럼 너른 터에 산불감시초소와 정상 표지목, 망원경이 있다. 북한과 인접해 불빛이 적은 덕분에 별 조망 야영 터로도 인기 있다. 오후로 갈수록 미세먼지가 자욱해 북녘 땅은 자취를 감추었다.
화개산성과 약수터를 지나 하산길로 이어진다. 나들길은 공사 중인 산기슭을 지나 마을로 인도한다. 연산군 유배지는 공사로 인해 임시 폐쇄되었다. 조선시대의 교동도는 한양과 가까우면서도 물살이 빨라 탈출이 어려운, 왕족들의 유배지로 각광 받던 곳이었다. 연산군이 이곳에 유배되어 사망했고, 광해군,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대군, 숭선군, 익평군, 영선군, 화완옹주 등이 유배되었다.
마을길은 곧장 교동도의 번화가인 대룡시장으로 이어진다. 이곳 시장은 6·25 때 강 건너 황해도에서 교동도로 피란 온 실향민들이 휴전 후 돌아 갈 수 없게 되자, 고향을 추억하는 마음으로 황해도 연백군에 있다는 연안시장을 본떠서 만들었다. 지금은 실향민 2세들과 외지에서 온 이들이 시장을 지키고 있다.
시장 골목에 들어서자 복고 분위기가 물씬하다. 교동이발관은 부친이 하던 이발소를 아들이 이어받아 이발소 인테리어 그대로 분식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오래된 신발가게, 작고한 시계 수리 장인을 모형으로 그대로 되살린 시계방, 달걀 노른자 동동 띄운 쌍화차가 있는 다방, 강화 향토음식인 젓국갈비 전문 식당, 황해도식 냉면과 고기국밥집, 수십 년 역사의 꽈배기집 등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옛 정취가 남은 교동도 최고의 관광지다.
16km의 나들길 9코스를 전부 걸으려면 하루가 짧다. 다시 찾을 것을 일행과 약속하며 시장을 지나 육중한 침묵의 시골길로 든다. 해가 저물어 갈수록 논 곳곳에서 짚 태우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서울에서 1시간 거리지만 일상의 간극은 여느 시골보다 크다.
운치 있는 저수지 사이를 지나 고풍스런 교동읍성을 지나 다시 해안길이다. 월선포로 돌아가는 갈대가 물결치는 해안 둑방길, 분홍으로 물든 하늘이 여행자의 마음을 황홀경으로 몰아넣는다.
몸은 녹초가 되었는데 마음은 간질간질 만족감이 차오른다. 수평선까지 닿을 것 같은 이토록 긴 길에 노을과 나만 남았다. 종일 걸어 몸과 마음이 완전히 이완된 여행자에게만 털어놓는 교동의 깊은 속내. 월선포로 돌아가는 깜깜한 길이 두렵지 않다.
교동도 가이드
교동도에는 강화나들길 9코스와 10코스가 있다. 9코스 ‘다을새길’은 월선포에서 시작해 교동향교~화개사~화개산 정상~대룡시장~남산포~교동읍성~ 동진포~월선포선착장으로 원점회귀하는 16km 코스다. 길 곳곳에 이정표와 표지기가 있어 한눈만 팔지 않으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화개산의 나들길 코스는 원래 화개사에서 정상으로 이어진 길이었으나, 공사로 우회로로 연결된다. 정상 부근 역시 대규모 공사가 진행 중이므로 통과 시 주의해야 한다. 월선포선착장부터 화개산 정상~대룡시장까지는 그늘 좋은 숲길이 대부분이고 대룡시장~남산포선착장까지는 논 사이의 포장도로가 대부분이다. 교동읍성을 지나 낮은 언덕을 지나면 월선포선착장까지는 해안가 길을 걷는다. 하이라이트 코스만 걷는다면, 교동향교에서 대룡시장까지 걷는 4km가 알맞다. 다만 월선포, 망향전망대는 교동도를 찾았다면 들를 만한 명소다. 나들길 9코스는 총 16km이며 6시간 정도 걸린다. 10코스는 교동도 남서쪽을 잇는 시골길 17km 걷기이며, 9코스에 비해 볼거리가 적고 지루하다.
교통
대중교통은 일단 강화도 버스터미널까지 온 후 교동18번(강화버스터미널↔월선포) 버스를 타야 한다. 주말에는 1시간 10분 간격(06:10~20:30)으로 운행한다. 강화터미널을 출발해 대룡시장을 거쳐 월선포까지 운행한다. 자가용 이용 시 교동대교 앞 검문소에서 간단한 출입신청서를 작성하고 출입증을 받아야 한다. 출입증은 나갈 때 반납한다.
BAC 인증지점
화개산 정상 표지목 좌표 N37 46.768, E126 17.757
[인천핫플] [동영상] 제비가 풍요를 몰고오는 평화의 섬 ‘교동도’
인천투데이 기사 입력일 : 2019.04.12.
기자명 류병희 기자
옛 모습 간직한 대룡시장, 관광 명소로 사람들 북적
교동읍성, 남산포 그리고 논길에는 평화로움 가득
[인천투데이 류병희 기자] 인천 강화 교동도에 봄이 왔다. 음력 삼월 삼짇날이 지나면 강남 갔던 제비들이 하나둘씩 이곳을 다시 찾는다. 제비는 봄을 알리는 반가운 존재다. 교동도에는 봄기운이 충만하다.
교동도 대룡시장에는 상가 처마 밑에 지난해 봄과 여름에 둥지를 튼 흔적들이 많다. 4월 말과 5월이 되면 대룡시장에는 제비의 울음소리로 한창 시끄러울 것이다. 버려진 둥지마다 희망은 다시 핀다.
옛 모습을 간직한 대룡시장
‘강남 갔던 제비’는 하늘을 날아 매년 고향땅 교동도를 찾는다. 이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과 불과 3km 안팎. 그렇지만 고향땅을 갈 수 없는 실향민. 교동도에는 한국전쟁 당시 어린 나이에 북에서 피난을 내려온 실향민들이 생존해 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80세 노인이 됐다. 언제 고향땅을 다시 밟을까. 매년 찾는 제비는 무심하게도 시끄럽게 울고, 그저 바라볼 뿐, 그 심정을 어찌 알까.
대룡시장은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장사를 하면서 형성된 골목시장이다. 남북이 분단되고 철책으로 막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실향민들은 고향 연백시장을 떠올리며 이 곳에 모였다. 현재 남은 실향민들은 20~30명 안팎.
교동도가 섬이었을 때에는 강화도 창후항에서 배를 타고 월선포항으로 들어왔다. 2014년 교동대교가 생기고 왕래가 비교적 쉬워졌다. 그리고 몇 년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단체 관광버스가 오기도 하면서 1000여 명의 사람들이 몰리기도 한다. 평일에도 비교적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이제는 명소가 됐다.
대룡시장에는 주택과 상가가 조화를 이루며 붙어 있고 자연적으로 생겨난 골목길은 70~80년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둥지거리, 제비거리, 와글와글거리 등을 따라가면 놀랍게도 어릴 때 보았던 이발소, 약국, 철물점, 옷가게 등을 만날 수 있다. 아메리카노 대신 쌍화차 한잔이 생각나는 다방.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추억의 사진관도 있다.
교동도에는 외지 관광객들의 이해를 위해 마을 안내소인 ‘교동 제비집’이 있다. 교동도의 스토리와 미래가치를 조명하고자 정부와 시·군, 그리고 주민들의 발전 의지가 더해져 만들어진 특별한 공간이다. 처음 교동도를 찾는다면, 제비집을 먼저 찾아 정보를 얻는 것이 좋다.
마을 사랑방 ‘청춘부라보’, 이북식 음식 만들기 체험
‘청춘부라보’는 강화 중앙시장에서 ‘한두뼘1.2갤러리’를 운영하는 손윤경 대표가 마을 실향민들과 만든 공간이다. 마을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는 이곳은 외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이북식 음식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4월에는 갯벌 보약이라고 하는 ‘나문재’를 재료로 이용해 튀김과 무침을 만든다. 음식을 만들면 참여한 사람들과 마을 주민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함께 즐긴다. 대룡시장에 들리는 사람들은 지나치다가도 이곳에 들려 차를 나누고 주민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청춘부라보에는 실향민 최봉렬(89)씨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만든 황해도식 ‘들깨 강정’을 맛볼 수 있다. 손윤경 대표가 만든 강아지떡과 함께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매월 1회 진행되는 음식 만들기 체험은 월별로 이북식 음식을 만들고 함께 나눈다. 이북식 만두와 떡국, 강아지 찹쌀떡, 추어탕, 매운탕과 호박김치, 그리고 순무 등 각종 김치도 만든다.
교동도로 떠나는 평화·역사 여행
교동도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강화터미널에서 18번 순환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자가용으로 가면 강화를 지나 교동대교를 건너는데, 교동도는 민간인통제구역이기 때문에 다리를 건너기 전, 하점면 이강사거리에 있는 군 검문소에서 신고를 하고 방문증을 받아야 출입할 수 있다. 최근 강화에서 교동도로 들어가는 길이 정비돼 출입이 편해졌다.
교동대교를 건너 교동으로 들어서면, 마을 입구에 고구저수지가 있다. 고구저수지는 낚시를 즐기는 ‘조사’(釣師)들에게는 붕어 월척이 나온다고 입소문이 난 곳이다. 민물낚시를 즐기며 야영을 할 수도 있다.
저수지가 있는 동편 산은 화개산 자락이다. 이곳에는 조선 연산군이 유배를 당했던 유적지가 있다. 당시 연산군이 기거하던 집을 재현해 놨다. 교동도는 고려와 조선시대 왕과 왕족들이 유배를 많이 온 지역이었다. 고려 희종, 고종, 우왕과 창왕 등이 폐위돼 왔고, 조선 연산군, 광해군과 임해군, 안평대군과 은언군도 귀양을 왔다.
교동의 생활중심지는 대룡리이다. 교동면사무소가 있고 상가들이 몰려있다. 대룡시장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교동읍성과 교동향교, 화개사를 갈 수 있다.
교동읍성은 1629년(인조7년) 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하면서 고을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한 성곽이며 삼도수군통어영의 본진이었다. 교동읍성은 남문인 홍예문과 무너진 성곽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삼도수군통어영지는 교동도 최남단에 있는 남산포에 있었다. 당시 경기·황해·충청의 주사(舟師)를 통괄하고 서·남해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도 통영에는 경상·전라·충청을 통괄하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듯 교동도 마찬가지로 통영인 것이다.
교동읍성 앞 화개산 자락에는 교동향교가 있다. 교동향교는 최초로 공자상을 모신 곳이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년) 안향이 원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져왔다. 이곳에는 공자의 신주와 유현들의 위폐를 모시는 대성전, 유생 교육을 하던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서재 등이 있다.
교동향교 옆에는 고려 때 창건한 화개사가 있다. 이곳은 고려 때 삼은(三隱) 중 한 명인 목은 이색이 한 때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작은 암자이고 남쪽 바다를 조망할 수 있으며 조용히 숲길을 걸을 수 있다.
화개사 옆길은 등산로이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화개산 정상으로 이어지고, 북한 땅을 바라볼 수 있다. 맑은 날에는 연백평야와 개성까지도 시야가 닿을 수 있다. 또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합수해 바다로 흘러가는 모습도 바라볼 수 있다.
트레킹을 한다면, 교동평야 논길과 크고 작은 포구를 이어 걸을 수 있는 강화나들길(9·10코스)을 계획하는 것도 괜찮다. 특히 10코스인 ‘머르메 가는 길’은 대룡리에서 출발해 논길을 지나 머르메와 죽산포로 이어지고, 금정굴과 난정저수지도 갈 수 있다. 10코스는 약 17km이고 소요시간은 6시간 정도 걸린다. ‘머르메’는 자연부락으로 옛 두산동(頭山洞)을 우리말로 푼 ‘머리뫼’에서 유래됐다.
교동도는 크고 작은 포구가 많다. 특히 원산포는 강화 창후포와 교류하던 항이었고, 남산포, 죽산포, 동진포 등이 있다. 교동은 새우젓의 고장이다. 음력 6월에 잡은 새우로 젓갈을 담은 것은 육질과 풍미가 매우 좋다. 그냥 먹어도 단만이 날 정도로 맛이 있고, 생새우를 튀기거나 볶아서 먹을 수 있고 국이나 찌개에 넣어도 일품이다.
대룡리에서 북쪽 율두산 자락에는 교동망향대가 있다. 망향대는 이곳 실향민들이 지척에 있는 고향땅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삭이는 곳이다. 망향대에서 북한 쪽을 바라보면, 드넓은 연백평야를 볼 수 있다.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다.
[섬 여행-교동도] 북한과 마주한 옛 시골풍경 섬
데일리스포츠한국 기사 입력일 : 2019.04.24.
기자명 박상건 기자
[박상건 시인의 섬과 등대여행] 33 교동도
[데일리스포츠한국 박상건 기자] 교동도는 강화군의 면소재지 섬이다. 강화도 섬 중에서 38선 근처 황해해역에 위치해 강화도보다 서쪽에 있다. 북한과 거리가 2.6km에 불과한 접경지역의 섬이다. 한 때 탈북자들이 수영을 통해 교동도로 왔을 정도로 강줄기 크기의 해협이 남과 북의 경계이다.
섬 면적은 47.17㎢, 인구는 2019년 1월 기준 1,489세대에 2,957명의 주민이 산다. 전 지역이 민통선 및 군사시설보호구역이고 어로한계선으로 조업이 제한받는다. 눈으로 직접 북한 땅을 조망할 수 있으면서 교동도 북쪽 해안에는 철조망이 설치돼 있다. 민간인통제선은 군사분계선의 남쪽으로 10km 이내에서 설치한다.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이지만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됐다.
교동도는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이 모여 일군 섬이다. 다리가 이어지기 전까지 시간이 멈춘 섬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교동대교를 건너 멈춘 그 시계바늘을 부지런히 함께 돌리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교동대교로 진입하기 전에 해병대 제2사단 검문소에서 차량 출입증을 받아 민통선 북쪽까지 여행길에 나섰다.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일은 통일을 위해 모두의 힘을 모으는 길이다. 강화군과 정부, 민간기업 ‘평화와 통일의 섬 교동도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이유이다.
2020년까지 기한인 국토개발계획에 따르면 목포에서 출발한 서해안고속도로는 현재 금천구까지이지만 통일 후에는 교동도를 지나 맞은 편 황해남도 해주를 거치고 남포, 신의주까지 연장한 것으로 돼 있다. 교동도가 ‘평화와 통일’을 상징하는 섬으로 거듭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다양한 체험을 즐기는 여행코스를 사랑받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교동도는 오랫동안 시간이 멈춘 섬인 탓에 오래전 우리네 농어촌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면서 분단 현실을 두 눈으로 확인시켜 준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가면 길 따라 발길이 멈춘 곳마다 애증의 우리 역사가 절절이 절여지고 아로새겨져 있음을 실감케 한다.
교동대교를 건너면 월선포구이다. 월선포는 교동대교가 생기기 전까지 교동도와 강화도를 오가는 연락선이 정박하던 곳이다. 걷기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강화도 전망 포인트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교동대교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일을 빼먹으면 안 된다. 여기서 여행 코스를 확인해야 한다. 다리를 건너면 길이 좌우로 나뉜다.
초보 여행자라면 일단 교동남로 20-1번지에 있는 제비집으로 가는 게 좋다. 교동도 역사를 익히고 여행계획을 짜는데 큰 도움을 주는 곳이다. 제비집은 교동8경 감상, 가상현실 영상체험, 신문 만들기, 카페와 전시관, 자전거 대여 등 여행객들을 안내해준다. 교동도의 과거, 현재, 미래가 담긴 관광플랫폼이자 여행자가 교동도 여행코스를 잡는데 큰 도움을 준다. 자전거 대여, 최신 ICT기술 기반의 관광정보 제공, 카페테리아, 갤러리, 각종 회의, 전시, 공연 공간을 대여해준다. 매월 두 번째, 네 번째 월요일은 휴무이다.
제비집에서 시작하는 자전거여행 ‘평화나들길’ 교동제비집을 기점으로 조성된 자전거길인데 회주길은 해안가의 철책선을 따라 섬을 일주하는 길이고 마중길은 넓고 푸르른 평야를 가로지르며, 교동제비집과 회주길을 연결하는 길이다.
제비집에서 걸어서 만나는 곳이 대룡시장이다. 1960~70년대 농어촌 시장풍경이 세트장처럼 살아 있다. 6.25 전쟁 때 황해도에서 월남한 실향민들이 휴전 이후 북으로 갈 수 없게 되자, 황해도 연백군의 연백시장을 본 따서 만든 재래시장이다. 각종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인기관광지가 되면서 시장사람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닌 것은 근접촬영 때문이다. 사진 촬영 때 서로 배려가 필요하다. 시장 안에 교동이발관, 동산약방 등 오래된 가게 앞에서 사진 찍기, 촬영지 구경하기, 전통 주전부리, 옛날 다방 등을 맛보고 구경하기에 그만이다.
시장에서 가까운 거리에 교동향교가 있다.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동재 서재, 제기고, 내삼문, 외삼문으로 이뤄졌다. 고려 인종 5년(1127)에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조선 영조 17년(1741)에 조호신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66년에 수리했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왔다고 전한다.
그 다음 코스는 작지만 운치 있는 절 화개사로 가는 길.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려 때 창건돼 상용리의 갈공사에 묵던 무학대사, 낙공선사, 지공선사가 이 절로 공부하러 다녔다고 전한다. 또한 고려 문신 이색이 이곳에 머물며 수양하고 글을 지었다고 전한다. 보호수로 지정된 200년 수령의 소나무 자태에서 청렴결백하게 살다가 간 선비 목은 이색을 떠올려보았다.
화개산은 해발고도는 259m이다. 목은 이색은 이곳을 전국 8대 명산 중 하나로 꼽았고 현재 교동도 명소는 화개산 자락 따라 밀집되어 있다. 산 정상에서 황해도의 연백평야와 예성강 하구, 송악산을 볼 수 있다.
화개산성은 조선시대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인데 내성과 외성의 2중 구조를 지니고 절벽을 자연 성채로 활용하고 있으며, 내성의 일부를 북쪽으로 길게 빼어 긴 용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 등이 특징이다. 둘레가 무려 2,096m에 이른다. 고구리산성이라고 부르는데 산세가 우뚝 솟아 마치 뚜껑을 활짝 벌려 놓은 것과 같다 하여 화개라는 명칭이 붙었다.
화개산봉수는 화개산 정상 서쪽 봉우리 정상에 위치하며, 향토유적 제29호로 현재도 석단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남쪽 아래로는 교동읍성과 남산봉수가 한눈에 들어오며 동남쪽으로는 덕산봉수가, 동쪽으로는 하음산봉수가 조망된다.
본도의 덕산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다시 본도의 하음산봉수로 연락을 보내는 역할을 했으며, 봉수군은 46명이었다. 봉수는 김포 백석산, 통진 수안성산, 강화 진강산, 교동 화개산 봉수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강화 하음산, 강화 송악산, 통진 남산, 김포 북성산, 양천 화개산을 거쳐 서울 남산 제 5봉(烽)으로 연결되었다.
1976년에 만든 고구저수지는 88.5ha의 넓은 저수지로 사계절 내내 낚시가 가능하다. 2월까지는 결빙과 하얀 눈발로 뒤덮여 또 하나의 볼거리이다. 남산포는 고려시대에 벽란도로 가는 중국 사신들이 드나들던 곳인데 사신의 무사태평을 빌던 ‘사신당’이라는 현재도 포구 정상에 설치돼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인조가 수군영통영을 설치하면서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했던 포구이다. 교동도 앞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숨어 있는 전망 포인트다. 수군들이 훈련하는 바다에는 이제 수많은 어선들이 정겹게 들어차 출렁이고 갯벌에는 새들이 비행한다. 당시 수군이 배를 정박하던 게류석이 보존돼 있다.
교동도는 조선시대에 경기수영의 본영이 있던 곳이다. 교동읍성은 1629년(인조 7년)에 경기수영을 설치하면서 같이 만든 것으로 둘레가 870m에 이르고 동쪽, 남쪽, 북쪽에 성문을 세웠으나 현재는 껍데기만 흔적으로 남아 있다. 지난해 남문(홍예문)을 복원했다. 읍성은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한 성곽이다. 대개 읍성 안은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과 관리들의 업무 공간이고 주민들은 성 밖에 거주하며 비상시에 성안으로 들어가 방어전에 임한다.
교동도는 유배의 섬이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이 쓸쓸한 죽음을 맞았던 곳으로 연산군 유배지 표지판이 있지만 연산군 묘는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재 서울 방학동)에 이장됐다. 교동도가 유배지가 된 것은 그만큼 물살이 센 외딴 섬이었기 때문. 한편으로는 한양과 가까워 관리가 쉬운 지리적 이유 때문이다. 광해군도 이곳으로 유배됐다가 제주도로 갔고, 임해군, 능창대군, 숭선군, 익평군, 영선군(고종의 조카 이준용), 화완옹주 등도 유배됐던 섬이다.
지금은 분단의 슬픔을 속으로 삭이면서, 통일을 염원하는 섬이 교동도이다.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망향대는 걷기여행의 전망 쉼터이면서 황해도 연백군 출신 실향민들에게는 고향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는 터전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북한이 바로 보이고 교동도 저수지와 들판풍경이 어우러진 풍경이 교동도 들판은 옛 시골 고향의 그리운 물결을 일렁여 준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논두렁길을 따라 해안 철책선 철조망 사이로 바라본 맞은 편 황해도 바다는 더욱 가깝고 선명하게 다가왔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여전히 남북은 대치중임을 실감하고 분단의 슬픔이 서서히 아려왔다.
교동도 걷기여행은 6시간이 소요되는 두 코스가 있는데 ‘다을새길 걷기’는 16km 구간으로 월선포선착장-교동향교-화개사-화개산정상-석천당-대룡시장-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월선포 선착장이다. ‘머르메 가는 길 걷기’는 17.2km 구간으로 대룡리-난정저수지-수정산-금정굴-애기봉-죽산포-머르메-양갑리마을회관-미곡종합처리장-대룡리이다.
교동도로는 가는 대중교통은 강화버스터미널→월선포(종점)→도보 이동→교동읍성→교동 화개사→화개산 등산(또는 버스 이용)→대룡시장 구경→버스이용→강화버스터미널 코스를 이용하면 된다. 승용차는 월선포→교동향교→교동 화개사→교동읍성→대룡시장 구경→(양사면 평화전망대) 코스이다. 문의: 교동면 사무소(032-930-4500)
제10코스 (교동 2코스 머르메 가는 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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