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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에스겔 43장1~27절
제목 : 영광의 회복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는 환상을 봅니다.
그리고 성전 뜰에서 성전의 법과 제단의 규례를 일러주는 소리를 듣습니다.
1. 성전에 들어가시는 하나님(1~12절)
1) 환상의 장소 동문(1절)
“[1]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
본절은 성전에 대한 모든 측량을 끝내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40:6) 돌아온 사실을 묘사함으로써 성전 구조에 대한 측량 기사가 일단락되고 있음을 밝힙니다.
2) 돌아오는 여호와의 영광(2~5절)
(1) 하나님의 음성이 ‘맑은 물 소리’처럼 성전으로 들어오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났다(2절)
“[2]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 본 구절은 성전의 구조적 측량에 이어 19년 전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그 동문을 통해 성전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10:18-22;11:22-24)이 그 동문을 통해 다시 완성된 성전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5절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의 회귀는 모세의 성
막 봉헌식(출 40:33, 34)과 솔로몬 성전 봉헌식(왕상 8:11) 당시에도 보여진 바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와 새롭게 갱신된 교체의 회복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본 구절은 곧 성전 완공의 마지막 단계인 성전 봉헌식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Delitzsch).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 이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현현 때 나타나는 장중한 소리에 대한 비유적 표현입니다(1:24;시 29:3;93:4;계 1:15;14:2).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의 봉헌 때 있었던 하나님의 현현 묘사와 다소 차이를 보이는 부분으로 그곳에서 언급된 '가득찬 구름'대신 '영광의 빛'이 언급되었습니다.
'구름'이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으므로 내용상 본 구절의 '영광'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땅'이 성전 입구나 이스라엘 등 국부적인 장소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는 모든 곳, 곧 전우주적 의미의 지역을 포괄하여 지칭한 것이라는 사실(사 6:3,;40:1)과 함께 에스겔 성전이 역사적으로 세워졌던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과는 달리 선재적으로 성취된 미래의 성전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종말론적 특성을 가진다는 사실이 조금 특이할 뿐입니다(계 18:1;21:11, 23, Delitzsch, Schroder).
(2)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렀습니다(3절)
“[3] 그 모양이 내가 본 환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환상 같고 그발 강 가에서 보던 환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
그 모양이...환상과도 같기로. - 1장에 나타난 그룹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이라는 사실이 '...와 같다', '...와 마찬가지이다'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 '카'의 반복을 통해 설명됩니다.
곧 이는 대조적으로, 동일한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이 처음에는 예루사렘에 대한 심판을 위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온전한 회복과 영광의 회귀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갑니다(4절)
“[4]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
2절 내용의 구체적인 진행을 보여줍니다.
곧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들어갔다는 기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의 당위적인 성취를 암시합니다.
(4) 에스겔은 ‘성전’이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 찬 것을 봅니다(5절)
“[5]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안뜰에 들어가서 그 영광의 현현을 보는 데는 성령의 인도(3:12, 14)가 필요하였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제사장 출신인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 영광의 현현을 보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Schroder).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 출40:35-38;왕상 8:10,11을 참조하라.
3) 경고와 약속의 말씀(6~9절)
(1) 에스겔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을 때 천사가 곁에 있습니다(6절)
“[6] 성전에서 내게 하는 말을 내가 듣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내 곁에 서 있더라 ”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에 이어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 성전의 제일 원리인 거룩을 설파하는 성전 신학의 원리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12절까지 선포됩니다.
어떤 사람이 내 곁에 서 있더라. - 혹자는 7절 이하의 단락을 하나님께서 직접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으로 이해합니다(Kliefoth).
그러나 이는 선지자 곁에 섰던 '사람'인 천사로서 중간자의 입장에서 선지자에게 대언했습니다.
따라서 7절 이하의 실제적 화자는 이 천사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이 천사는 알 수 없는 한 천사가 아니라 40장부터 계속 선지자를 안내하고 그와 대화했던 '척량하던 천사'(40:3)를 가리키는 듯합니다(Schroder).
(2) 선재적으로 성취된 에스겔 성전의 성격을 규정합니다(7절)
“[7]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들의 왕들이 음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 .-
'내 보좌의 처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의 핵심이 되는 곳을,
'내 발을 두는 처소'는 하나님의 안식처가 되는 곳을,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삶을 지배하시며 그들과 교제하시는 곳이란 의미를 각각 내포합니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내 보좌의 처소'와 '내 발을 두는 처소'(나의 발등 상-시 132:7;사 60:13;66:1)는 모두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를 지칭하는 말로 쓰여졌습니다(출25:22;삼상 4:4;대상 28:2;시 132:7, 8).
여기서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언약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영원함'(레올람)의 적용 여부에 따른 것이며(37:26, 28) 에스겔 성전의 영원성과 완전함을 암시합니다.
곧 이전 성전에서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가 될 수 없었다는 점과 에스겔 성전의 완성 때인 메시아 시대에는 그 언약궤가 필요치 않다는 점, 궁극적인 의미에서 메시아 시대의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을, '하나님의 발등상'은 '땅'을 상징한다는 점(사 66:1;마 5:35)에서 언약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죽은 왕들의 시체'를 혹자는 성전 근처에 매장된 왕들의 시체로 해석하나(Ewald, Hitzig, Kliefoth) 성경의 어느 곳에도 성전 내부나 근처에 왕들의 매장지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죽은 왕들'을 므낫세나 아몬같이 우상을 숭배했던 왕으로(왕하 21:4-7), '시체'는 극히 무력한 시체와 같은 '우상'으로 이해해 '이미 죽은 그 왕들이 섬겼던 죽은 시체와 같은 우상'이란 뜻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Delitzsch, Havernick, Rosenmuller).
(3) 이스라엘의 패역한 우상 숭배 행위를 질타합니다(8~9절)
“[8] 그들이 그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두며 그 문설주를 내 문설주 곁에 두어서 그들과 나 사이에 겨우 한 담이 막히게 하였고 또 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노하여 멸망시켰거니와 [9]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거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에 영원히 살리라 ”
이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던 이스라엘의 가증한 행위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상기시킴으로써 새 성전에서 다시는 그러한 행위를 행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그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두며 그 문설주를 내 문설주 곁에 두어서 그들과 나 사이에 겨우 한 담이 막히게 하였고. - 여기서 '그 문지방'과 '그 문설주'는 이스라엘의 패역한 왕들이 성전 바로 옆에 세웠던 이방 신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Delitzsch).
또한 '담'(키르)은 '금지하다'란 뜻을 지닌 동사 '쿠르'에서 파생된 말로 여기서는 특별히 성전의 담과 관련되어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 구별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본 구절은 그 이방 신전이 문지방과 문설주가 닿을 만큼 성전과 너무 가까이 있어서 단지 그 성전의 벽만이 성전과 이방 신전의 경계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토로합니다.
이는 곧 상징적으로 죽은 시체와 같은 우상들의 위상을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일한 위치에 놓았던 이스라엘의 패역한 우상 숭배 행위를 질타하는 것입니다.
(4)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합니다(10절)
“[10]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 - '보여서'(하기드)는 원어상 '입증하다', '알리다', '선언하다'란 뜻이므로 본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성전의 계시를 선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철회되었고 이제 다시 회복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새 성전의 계시가 함축하고 있는 소망의 메시지를 통해 선포하라는 것입니다(사 40:2, 9).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 상반절에서 제시된 새 성전에 관한 계시 선포의 목적입니다.
'측량하게 하라'는 단순한 성전 구조물의 측량이라는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그 새 성전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숙고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계시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들의 이전 악행을 부끄러워하며 회개하게 함과(36:31, 32;롬 2:4) 동시에 그들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려 보게 하라는 뜻입니다(Delitzsch, Schroder, Hengstenberg).
(5)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11절)
“[11]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 '제도와 식양과 그 출입하는 곳'은 40장 이하에서 이미 측량된 바 있는 성전의 상세한 부분들을, '그 모든 형상'에서 '형상'(추라트)은 어떤 물체의 전체적인 외양을 뜻하는 말이란 점에서 성전 전체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이미 에스겔 선지자가 측량하는 사람으로부터 그 성전에 대해 보고 듣고 생각한 모든 사실들을 알려주라는 의미로 그 성전의 모든 구조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심중한 뜻이 계시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Delitzsch).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 상반절이 성전의 구조적 특징, 곧 성전 자체에 대한 외양과 그 의미에 관계된 것이라면 본 구절은 그러한 성전에서 지켜야 할 영적, 윤리적 규범들의 제시와 그 실행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절 전체는 새 성전의 내적 규범과 외적 실재 모두를 동시에 언급함으로써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의 성결한 삶'이란 성전의 근원적인 원리로 집약시킨 12절을 적극적으로 수식하고 있습니다.
(6) 성전의 법입니다(12절)
“[12] 성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산 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리라 성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본절에서 에스겔은 40장부터 지속된 새 성전에 관한 기사를 일단락 합니다.
성전의 법. - '법'(토리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극한 부담과 외식의 빌미를 제공했던 불완전한 율법으로서의 모세 율법과 대조되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메시아 시대의 새 법입니다(요 1:17;롬 3:19-31;엡 2:15;히 8:6, 7).
그러한 법의 사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의 상징인 새 성전에 있어서 성전의 제일 원리인 '거룩'으로 요약됩니다(레 6:16;7:6;24:9;고전 3:17).
바로 이어서 언급되는 '산 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리라'란 구절에서 '산꼭대기 지점'은 그 성전의 핵심으로서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지성소'를 가리키며, 상징적으로 모든 법의 정점인 '거룩'을 의미합니다(Delitzsch, Schroder).
따라서 그 주위 또한 지극히 거룩하게 되리란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거처의 장소가 지성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성전 전체가 될 것이란 의미로 이는 이전 모세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과 특별하게 구별되는 점입니다.
곧 이전에 제사장만이 밟을 수 있었던 하나님의 처소가 모든 일반 백성에게까지 확산되고 개방된다는 것은 에스겔 성전이 모든 믿는 성도들에게 개방될 메시야 시대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상징함을 보여줍니다(Fairbairn).
2. 번제단의 모양과 크기(13~17절)
에스겔 성전에 대한 모든 내적, 외적 지침에 이어 본절부터 46장까지는 그 부가적인 설명으로 새 성전에서 드려질 거룩한 예배의 새로운 규범들을 제시합니다.
이는 곧 에스겔 성전이 궁극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처소인 점과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관계 또한 새롭게 회복되고 갱신되었다는 점에서 그에 합당한 하나님과의 교제 방법을 지침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지침은 먼저 번제단의 규모(13-17절)와 그 봉헌 규례(18-27절)로 시작됩니다.
1) 제단 주변의 도랑(13절)
“[13] 제단의 크기는 이러하니라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것이라 제단 밑받침의 높이는 한 척이요 그 사방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그 가로 둘린 턱의 너비는 한 뼘이니 이는 제단 밑받침이요”
제단의 크기는 이러하니라. - '제단'(미즈베아흐)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번제단을 가리킵니다(9:2;40:47;출 30:28).
2) 제단 각층의 높이(14~15절)
“[14] 이 땅에 닿은 밑받침 면에서 아래층의 높이는 두 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이 아래층 면에서 이 층의 높이는 네 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15] 그 번제단 위층의 높이는 네 척이며 그 번제하는 바닥에서 솟은 뿔이 넷이며 ”
3) 제단 각층의 길이와 너비(16~17a절)
“[16] 그 번제하는 바닥의 길이는 열두 척이요 너비도 열두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17] 그 아래층의 길이는 열네 척이요 너비는 열네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그 밑받침에 둘린 턱의 너비는 반 척이며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니라 ”
4) 제단의 층계(17b절)
“그 층계는 동쪽을 향하게 할지니라”
또한 이 번제단의 기준 척수 역시 성전 측량 때와 같은 왕실 규빗입니다(40:5).
한편 여타 성전 기물들이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는 에스겔 성전 기사에서 유독 이 번제단만이 상세하게 설명, 기술되고 있는 이유는 성전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바로 속죄란 점에서 그 속죄가 수행되는 번제단의 중요성을 주지시키기 위한 의도로 보여집니다(히 9:22).
한편 이 번제단은 밑받침을 제외하고 모두 정방형의 3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층의 변의 길이는 각각 16, 14, 12 규빗으로 그 아래층보다 2규빗씩 짧습니다(본장 13-27절 문단 강해, 번제단 도면 참조).
3. 번제단의 봉헌(18~27절)
1) 도입부(18절)
“[1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는 이러하니라”
성막 제단과 솔로몬 성전 제단의 봉헌(레 8:11, 15, 19, 33;왕상 8:62-66;대하 7:4 -10)과 마찬가지로 에스겔 성전의 제단 또한 그 봉헌이 명령됩니다.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 - 성전 건립 시기에 대한 최초의 언급으로 이 제단을 포함한 성전의 미래적 실재를 확신시켜 주는 말입니다.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는 이러하니라. - 본절 이하에서 지시될 '규례'는 일반적인 번제의 규례가 아닌 제단 봉헌에 국한된 규례입니다(Delitzsch).
그리고 이 에스겔 성전 제단의 봉헌식은 성막 제단의 봉헌식(출 29장;레 8장)과 비교해서 다음과 같은 상이점을 가집니다.
(1) 제단의 성결을 위한 기름부음 의식이 없다(20절;레 8:11).
(2) 성막의 제단 봉헌식에서 수송아지는 7일간의 봉헌식에서 매일의 속죄 제물이었으나(출 29:36) 여기서는 첫날에만 국한되었으며 그 이후는 번제물로 언급되고 있다(19-24절).
(3) 성막 제단의 경우 그 속죄 제물의 피는 제단의 뿔에만 발랐으나(출 29:12;레 8:15) 여기서는 뿔을 비롯해서 제단의 각 모퉁이와 사면 가장자리까지 발랐다(20절).
(4) 성막 제단의 매일의 번제물은 어린 양이었으나(출 29:15-18) 여기서는 수송아지가 추가되었다(23, 24절).
(5) 성막 제단 봉헌식은 제사장 위임식과 함께 행하여졌던 바 어린양이 그 위임식 제물로 드려졌으나(출 29:19 이하) 여기서는 그 위임식 자체가 생략되고 있다.
이는 에스겔 성전에 있어 제단 봉헌식 이전에 이미 그 제사장직의 직분과 직책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19절).
2) 첫째 날(19~21절)
(1)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 속죄제물을 삼으라(19절)
“[19]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 속죄제물을 삼되 ”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 - 본래적으로 제사장직은 아론의 자손에게 계승되었으나(출 28:1-3) 특별하게 레위인 중 '사독의 자손'이 제사장직을 위임받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서 이들만이 신실하게 여호와 신앙을 수호한 사실에 기인한 것입니다(44:15;왕상 12:28-32).
(2) 제단을 정결하게 하라(20절)
“[20] 네가 그 피를 가져다가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 네 모퉁이와 사방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하게 하고 ”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하게 하고 - '제단의 정결'은 백성들의 생명과 관계된 것으로서(레 17:11) 하나님의 거룩에 합당한 백성들의 정결과 동일시됩니다.
여기에 언급된 '속죄'와 '정결' 역시 그와 같은 의미에서 백성들의 완전한 성결을 의미합니다(Schroder).
(3) 성소 밖에서 불사르라(21절)
“[21]그 속죄제물의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성전의 정한 처소 곧 성소 밖에서 불사를지며 ”
성전의 정한 처소 곧 성소 밖에서 불사를지며 - 이 '처소'는 일반적으로 제물을 태우는 곳입니다(레 4:12;8:17).
에발트(Ewald)는 이를 46:19에 언급된 제사장들의 부엌으로 보나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제물의 고기를 요리하는 성별된 곳이란 점에서 여기서는 성소와는 분리된 건무로서 41:12에 언급된 일종의 '창고'(기즈라)의 한 장소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Kliefoth, Delitzsch).
3) 둘째 날(22~24절)
(1)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삼아 드려라(22절)
“[22] 다음 날에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삼아 드려서 그 제단을 정결하게 하기를 수송아지로 정결하게 함과 같이 하고 ”
수송아지를 통한 제단의 정결 의식에 이은 두 번째 날의 제사 규례가 기술됩니다.
첫날의 속죄 제물이 수송아지였던 데 반해,
둘째 날부터 봉헌의 마지막 날까지는 숫염소가 속죄 제물로 드려지게 됩니다.
이는 본래적으로 숫염소가 족장의 속죄 제물이었으나(레 4:22, 23) 모든 회중의 속죄를 위한 대속죄일에 이 숫염소가 속죄 제물로 사용되었다(레 16:5)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새 성전에 출입하는 모든 백성의 온전한 속죄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2) 정결 후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를 드리라(23절)
“[23] 정결하게 하기를 마친 후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드리되 ”
정결하게 하기를 마친 후에는 - 이는 해석에 따라 번제단 봉헌식의 거행 일수가 달라집니다(25절 주석 참조).
(3)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라(24절)
“[24]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
그 위에 소금을 쳐서. - 모세 율법에 나타난 제사 규례에서와 같이, 번제물에 대한 '소금'의 사용을 명시합니다(레 2:13).
곧 '소금'은 그 맛과 함께 부패함을 방지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부정을 제거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민 18:19).
4) 칠 일의 예식(25~26절)
(1) 매일 염소 한 마리와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갖출 것이라(25절)
“[25] 칠 일 동안은 매일 염소 한 마리를 갖추어 속죄제물을 삼고 또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갖출 것이며 ”
본절은 23절에서 이미 밝힌 바 있듯이 학자들 간이 견해가 분분한 부분입니다.
혹자는 '정결하게 하기를 마친 후에'(23절 주석 참조)란 구절과 본절에 언급된 칠 일 동안의 제물이 첫날의 제물과 다르다는 점을 들어 제단에 대한 정결의 의미로서의 속죄 제사가 이틀에 걸쳐 수행되었으며(19-24절) 본절의 '칠 일 동안'은 그 이틀을 제외한 별도의 칠 일로 봅니다(Hitzig, Kiefoth).
이 견해에 따르면 제단 봉헌식의 총 일 수는 9일이 되며, 27절에 언급된 '제 팔 일'은 봉헌의 시작으로부터 '제 십 일'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전 모세 성막의 제단 봉헌(출 29:37;레 8:33)이나 솔로몬 성전 제단 봉헌(대하 7:9)이 모두 7일 동안 지켜졌다는 점에서 봉헌 제사는 7일간 드려졌음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본절은 염소가 7일 동안 제물로 드려졌음을 제시하므로 수송아지가 드려진 첫날에도 염소가 드려졌음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본절의 날짜 계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첫날에 염소가 제물로 바쳐진 기록이 없는 점을 들어 '7'(쉐바)은 '6'(쉐쉬)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Keith).
(2) 칠 일 동안 제단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 정결하게 하라(26절)
“[26] 이같이 칠 일 동안 제단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 정결하게 하며 드릴 것이요 ”
본절은 18절에서 25절까지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여 언급한 독립적인 문장으로 에스겔 성전의 제단 봉헌이 7일에 걸쳐 수행된 사실을 재삼 확인시켜 줍니다. 또한 '칠 일 동안 매일 수행된 속죄제를 드려 정결케'란 말이 시사하듯 히찌히(Hitzig)나 클리포스(Kliefoth) 등이 제단의 정결을 이틀에 국한시켜 언급한 것이 모순임을 보여줍니다.
드릴 것이요 . - 18절부터 제시된 규례가 곧 제단 봉헌식임을 결론적으로 밝혀줍니다.
5) 제사를 기쁘게 받으실 여호와(27절)
“[27] 이 모든 날이 찬 후 제팔일과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모든 날이 찬 후 제팔일과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 칠 일 동안 제단 봉헌식이 끝난 다음날부터 일상적이고 정규적인 제사를 수행하게 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특히 여기서 '번제'와 '감사제'가 그 정규적인 제사로 언급된 것은 '번제'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유지와 백성들의 온전한 헌신을, '감사제'가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선지자에게 계시된 새 성전에 가장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묵상 Point
1) 온전한 예배
죄인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에서 예배는 시작된다.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데서부터 예배는 이뤄지는 것이다.
그 회개는 거룩한 삶을 동반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는 예배자의 거룩함을 요구한다.
예배 장소와 형식, 제단보다 예배자가 중요하다.
그 이름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는 자가 예배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말씀을 듣지 않고 내 뜻대로, 내 기분대로, 내 만족에 겨워 사는 삶은 ‘하나님 경배’가 아닌 ‘우상숭배’다.
왕의 보좌에서 내려올 때까지 나를 향한 주의 말씀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2) 온전한 예배자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배자는 먼저 예배의 자리에 서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그가 먼저 죄인을 찾으시고 그를 예배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은혜를 진심으로 깨달은 자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겸비하게 그에게 나아가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을 만족시키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하시는 예배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예배의 특권이 권태로운 일상으로 전략하고 탐욕스러운 충동에 마음을 내줄 때 하나님의 축복은 손가라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떠나고 말 것이다.
조아림과 겸손한 청종이 없어서 이스라엘이 멸망했기에 이제 엎드려 듣는 데서 회복은 시작될 것이다.
3) 온전한 제단
성전 제의는 제단을 중심으로 수행된다.
이는 제단에서 속죄, 헌신, 교재를 위한 제사가 드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전한 예배를 위해서는 제단을 갖추어야 한다.
제단을 거룩하게 사용하기 위해 정결과 속죄의 과정이 필요했다.
하나님이 규정하신 제단이어야 한다.
성전 형상을 보여주고 성전 규례를 들려주시는 것은 성전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예배의 회복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가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에서 바로 이 제단의 모습을 내다보게 된다.
세상의 다른 방법으로는 속죄가 없고, 속죄가 없이는 온전한 예배가 없다.
진정한 제단 준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는 일이다.
그분을 왕으로, 구주로 온전히 대접하는 일이다.
말씀 가이드
에스겔의 성정을 가득 채운 하나님의 영광은 오늘 우리 삶에도 개입하고 싶어 하신다.
건물로만은 부족하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성전이 아무리 아름답고 웅대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쓸쓸하고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성전 그 자체인 우리 몸과 삶에(고전3:16) 하나님의 영광이 차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영광의 회복. - 성전 동쪽 문(10:18)에 머물렀다가 동쪽 산(11:23)으로 떠나갔던 하나님의 영광은, 동쪽에서 성전 동쪽 문으로 들어와 성전 전체를 가득 메운다.
성전에서 떠나가실 때는 머뭇거리셨지만, 성전으로 돌아오실 때는 서두르신다.
영적 침체에 빠진 우리의 회복도 신속할 것이다.
경계의 회복. -거룩이란 분리다.
이스라엘은 자기 욕망의 집과 하나님 집 사이를 겨우 ‘한 담이 막히게’(8절)하였기 때문에 멸망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전적 타자’로 모시고 구별하면, 우리 안이 추악한 우상숭배가 드러난다.
내 꿈을 하나님의 꿈인 양 포장하지 말자.
예배의 회복. - 에스겔이 보고 있는 새 성전에 예배의 기능을 발휘하려면, 이전 성전에서 자행된 거짓 예배의 찌꺼기를 씻어내야 한다.
우리 예배가 하나님께 닿지 못하게 하는 영적 장애물들은 무엇인가.
에스겔이 수행하는 일주일간의 정결 의식을 따라 우리는 무엇을 씻어내야 할까.
불순물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닦아내는 게 아니라 다는 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시의 거룩한 영광을 지금도 우리 삶에 채우고 싶어 하신다.
머뭇거리며 떠나셨던 그분은 우리가 문만 열면(계3:20) 달려와 다시 처음처럼 자리 잡으실 분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5절 여호와의 영광으로 성전을 가득 채우십니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고 그의 영광으로 땅이 빛을 발하는데, 이는 성전을 떠나실 때나 성전으로 돌아오실 때나 매한가지입니다.
성전은 그 자체로 영광의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떠난 성전은 폐허에 불과했으나 하나님이 돌아온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을 발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주님의 영광의 빛을 반영(反映)하는 것일 뿐입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을 발하는 교회를 이루어갑시다.
6-9절 주님의 처소를 더럽히는 왕들의 음행과 주검을 제거하라 하십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왕궁과 문지방, 문설주 하나를 두고 지어졌습니다.
성전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담 너머 왕궁에서는 온갖 가증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증한 행위를 제거해야 그들과 영원히 거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담 하나를 두고 하나님을 기만했던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일과 평일이 다르고 교회와 세상에서의 모습이 다르지 않는지 돌아봅시다.
10,11절 ‘자기 행위를 부끄러워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성전의 법을 알려주십니다.
성전의 법은 이스라엘에게서 부정을 씻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입니다.
죄를 슬퍼하는 마음이 없는 형식적인 속죄의식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기에 먼저 자기 죄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12-27절 제단을 만든 후에 칠 일 동안 제단을 정결하게 하는 속죄제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수송아지와 숫염소의 피로 제단을 정결하게 하고, 칠 일 동안 매일 흠 없는 염소 한 마리와 수송아지, 숫양을 속죄제물로 드리면서, 자신들의 죄와 부정을 들여다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일은 이처럼 부정한 죄인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번제단 삼아 영원한 속죄의 제물이 되어주셨으니,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6).
우리가 언제든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은총은 주님의 큰 희생과 놀라운 사랑의 결과입니다.
[기도]
공동체-예배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비추시고, 삶에서 그 빛을 발하게 하소서.
열방-세계 각국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의 주요 세력은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며, 시위의 이유는 부족한 일자리다.
각국 정부가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책을 잘 펼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