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미완으로 끝나다
제2차 대전 후에 있었던 아르헨티나의 제트기 개발은 동시다발(同時多發)적이라 표현(表現)할 수 있을 만큼 활발(活潑)했습니다.
본격(本格) 전투기인 풀퀴 II가 양산(量産)되기 전인 1954년에 초음속(超音速)으로 비행할 수 있는 IAe 43 풀퀴 III의 개발에 나섰을 정도였는데, 혁신적(革新的)인 델타윙(Delta Wing)만으로도 모든 이의 경탄(敬歎)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이는 전익기(全翼機, Flying wing aircraft) 개발의 선구자(先驅者)였던 호르텐(Reimar Horten, 1915~1994)이었습니다
↑혁신적인 델타윙 구조의 풀퀴 III
탕크처럼 독일에서 이주(移住)한 호르텐은 독일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비록 미완(未完)으로 끝났지만 지금 보아도 감탄(感歎)을 불러일으키는 Ho 229 전익기를 개발하던 주역(主役)이었습니다.
이처럼 1950년대 전후(戰後)의 시기(時期)에 있었던 아르헨티나의 제트전투기 개발은 생각지도 않았던 독일 출신 엔지니어들을 대거 수용(受用)한 덕분에 가능(可能)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榮華)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전익기 역사의 선구자 중 하나인 레이마르 호르텐
가장 큰 이유는 정치 싱황(政治狀況) 때문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는 틈을 타서 강국(强國)의 반열(班列)에 올랐으나 그렇게 형성(形成)된 엄청난 국부(國富)를 정권 유지(政權維持)에 낭비(浪費)했습니다.
이른바 포퓰리즘(大衆主義, populism) 정책(政策)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페론(Juan Peron, 1895~1974) 정권의 등장(登場)으로 말미암아 국가 경제 정책에 심각(深刻)한 왜곡(歪曲)이 발생(發生)했고 이 때문에 막대한 비용(費用)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투자(投資)가 중단(中斷)되거나 제한(際限)되었습니다.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던 아르헨티나 집권층, 후안 페론, 에바 페론
그렇게 양산(量産)을 목전(目前)에 두었던 풀퀴 II는 불과 5기의 실험기(實驗機)만 제작(製作)된 상태로 개발이 멈추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이 F-86를 파격적(破格的)인 절반 가격(折半價格)에 공급(供給)하겠다고 나서자 프로젝트는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제트전투기 분야에서 아르헨티나의 부상(浮想)을 견제(牽制)하기 위해 미국이 벌인 일종(一種)의 공작(工作)이었습니다.
이때 혁신적인 풀퀴 III도 목업 단계(木業段階)에서 계획(計畫)을 접었고 아르헨티나는 제트전투기의 선도국가 반열(先導國家班列)에서 이탈(離脫)하게 됩니다.
↑혁신적이었던 풀퀴 III의 개발도 중단되었습니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이외에 동일(同一)한 시기(時期)에 비슷한 성능(性能)의 제트전투기를 선보였던 나라로는 스웨덴(Sweden)과 아르헨티나가 있었습니다.
스웨덴이 J 29를 시작으로 J 32, J 35, J 37 전투기를 연이어 히트시킨 후 오늘날 명품(名品) JAS39으로 자국 수요(自國需要)를 충당(充當)하고 해외(海外)에 수출(輸出)에 나서고 있는 점을 고려(考慮)한다면 아르헨티나는 항공 무기 역사(航空武器歷史)에서 가장 중요(重要)한 시기(時期)를 잃어버린 것이라 평가(平價)할 수 있습니다.
↑4.5세대로 평가받는 스웨덴의 JAS 39 그리펜
만일 제2차 대전 후 아르헨티나가 정치적 혼란기(混亂期)를 겪지 않고 축적(蓄積)된 부(富)를 이용하여 농업 국가(農業國家)에서 고도(高度)의 산업 국가(産業國家)로 경제 체질(經濟體質)을 전환(轉換)하는데 완벽(完璧)하게 성공했다면 지금도 전투기를 생산할 수 있는 토대(土臺)를 충분히 구축(構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갈수록 최신 전투기의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작금(昨今)의 현실(現實)을 고려한다면 너무 낙관적(樂觀的)인 시나리오라고 평(評)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아르헨티나의 출발 여건(出發餘件)은 누구보다 좋았습니다.
↑속도로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던 풀퀴 II
아르헨티나처럼 독일 기술진(技術陣)들이 피난처(避難處)로 삼았던 나라에는 스페인도 있었습니다.
전쟁 내내 중립(中立)을 유지(維持)했지만 내전(內電) 당시부터 추축국(樞軸國)과 긴밀(緊密)한 관계(關契)를 맺고 비공식적(非公式的)으로 동부전선(東部戰線)에 병력(兵力)을 파견(派遣)하기도 했던 스페인은 여전히 철권 독재자(鐵券獨裁者)가 정권이 통치(痛治)하는 파시스트(fascist) 국가였습니다.
따라서 많은 독일 엔지니어들이 이곳으로 갔고 스페인도 이들의 기술을 빌려 제트전투기 개발에 나섰습니다.
↑스페인에서 전투기 개발을 이어 간 빌리 메셔슈미트
스페인으로 갔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너무나도 유명한 메셔슈미트(Willy Messerschmitt, 1898~1978)였습니다. 그는 스페인 공군(空軍)의 요구(要求)로 HA(Hispano-Aviacion)에서 제트기 제작에 착수(着手)했는데 마침 이곳은 엔진 공급(供給)이 되지 않아 완성품(完成品) 제작이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지만[전후 영국제 롤스로이스(Rolls-Royce) 엔진을 장착(裝着)하여 완성 됨] 유일하게 전쟁 중 Bf 109의 라이선스(License) 생산(生産)을 허락(許諾)받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