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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 15-17
여호와 하나님이
오늘은 제가 어릴 때 이야기를 조금 하겠는데 용서하시면서 들으십시요. 제가 어릴 때 공부는 꽤 했는데 인정받을 수 없는 조건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것은 키가 작고 병약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잘난 놈들이 너무 많아서 뜻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는 수협전무 딸인 채송희를 좋아했는데 실패했습니다. 4-6학년까지는 한 동네 사는 정임이를 좋아했는데 가까운데도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제법 똑똑하기는 하였는데 명예를 얻는데도 늘 실패하였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에서 4학년 초까지는 우체국장 아들 안창주가 반장이었고, 그 후에는 김성탁이가 반장이었는데 한결같이 저의 경쟁자들은 잘 생기고 키 크고 그 부모들도 잘났고 부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4학년 학기말인데 우체국장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4학년 1반 1학기 통지표를 대표로 교장 선생님께로부터 받는데, 그때 담임이셨던 마동민 선생님이 저를 시켜 주신 것입니다. 딱 1회용 반장이었습니다. 그것은 잊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다 잊었는데 마동민 선생님은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안 것은 그분이 저희 둘째 누나를 좋아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후에 소년의 때에도 분수를 모르고 학생회장을 나섰다가 표를 모으지 못해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맡은 일처럼 어릴 때부터 교회 안에서는 인정을 받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 사실은 그를 에덴의 관리자로 임명하신 데 있습니다.하나님의 임명과 하나님의 맡기심은 통합적인 방식입니다. 때문에 무슨 학자가 연구를 맡은 것과도 그 성질이 다른 것입니다. 정부의 어떤 요직을 맡은 것을 훨씬 넘어서는 일입니다. 솔로몬이 모든 것을 논 할 수 있었던 그런 일입니다.
1. 본문 15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입니다.
모세는 이제 땅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주시는 조건은 그가 땅을 경작하는데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활동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며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일에 종사하도록 창조되었다고 결론짓게 합니다. 사실 본래 하나님이 내신 일은 유쾌하고 즐거움이 가득하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고생과 싫증이 완전히 배제된 기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땅을 경작하는 일에 단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태한 모든 안일은 정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서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에만 인생을 허비하는 것보다 자연의 질서에 위배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잡초가 무성한 집의 전답을 “나간 놈의 집의 전답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아담에게 동산을 지키는 책임이 주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규모 있고 적절하게 이용하여 만족을 느끼고 남은 것은 잘 지켜야 한다는 조건으로 주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밭을 소유하는 사람은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인해 땅이 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매년 소출을 거두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자기가 받은 대로 자기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잘 개간된 땅을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 실과도 사치스럽게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요, 또 부주의로 인해 유실되거나 망가지는 일이 없도록 잘 가꾸어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라고 주신 훌륭한 것과 관련된 이러한 근면과 경영이 우리 가운데 팽배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다루는데 있어서 자신을 하나님의 청지기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방종한 행동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존되도록 명령하신 것을 남용함으로써 타락시키지도 않을 것입니다.
2. 본문 16-1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입니다.
1) 이제 모세는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 사실과 함께 인간이 이 세상의 통치자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율법은 인간의 복종의 표시로 부여된 것입니다. 인간이 어느 과실이든지 마음대로 먹었다 해도 하나님에게는 전혀 차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금단의 나무는 순종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이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신성을 경외하는 일에 익숙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한편 그처럼 놀라운 선물로 풍요해지고 장식된 인간이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제재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실 아담이 자기 분수 이상으로 지혜롭게 되기를 원하지 않도록 하려는 특별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보편적인 의도로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권위에 종속시키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않고 절제한다는 것은 순종에 있어서 첫째 가는 교훈이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생을 인도하시며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그분의 명령에 묵묵히 따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은 합리적이고 올바른 생활의 유일한 법칙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마치 바울 사도를 통해서 주신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사도는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딤전1:9)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담이 아직 무죄하고 순전했을 때에는 율법이 전혀 필요 없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거기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일반적인 관례에 따라서 자유분방한 사람들이 율법의 필요성에 의해 강요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좋은 법은 나쁜 관습에서 유래한다’ 라는 일반적인 격언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한편 바울은 하나님께서 당연한 권리를 지키시기 위해서 인간에게 태초로부터 율법을 부여하셨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을 반박하여 ‘율법은 사망의 사역자다’(고후3:7)라는 바울의 말을 제시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반대가 아주 우발적이며 우리의 부패한 본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 시간에 인간에게 한 법칙이 부여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소한 문제를 가볍게 지나치려 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은 매우 중요하므로 자주 기억하고 숙고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모든 감정을 주재한다면 우리의 생활도 올바른 질서를 갖추리라는 것입니다.
2) “각종 나무의 실과는” 이라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더 자발적으로 순응하도록 자신의 관대함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산출되는 모든 실과와 온갖 종류의 나무에서 열리는 실과를 모두 너에게 준다. 그러나 이같이 풍부하고 다양한 것 중에서 한 나무만은 제외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권위를 확증시키기 위해 징벌을 공표하심으로써 공포를 불어넣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더 사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로운 선물을 깨닫지 못하고 징벌의 무서움도 느끼지 못한 채 본분을 저버렸습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이 여기에서 의미하시는 것이 어떤 유의 죽음인가 하는 문제가 야기됩니다.
우리는 이 죽음의 정의가 반대편으로부터 추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인간이 어떤 유의 생명을 받았는지를 먼저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행복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명은 육체와 정신에 연관된 유사성에 있습니다. 그의 영혼에는 올바른 판단력과 감정을 다스리는 고유한 통제력이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생명도 위세를 떨쳤습니다. 한편 그의 신체에도 전혀 결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그의 지상생활은 정말로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지도 상처를 받지도 않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죽음이 공포의 대상입니다. 육신과 관련된 일종의 파멸이 존재하며 영혼도 하나님의 저주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의 원인, 곧 하나님과의 결별이 무엇 때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죽음이라는 이름 아래 아담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자초한 모든 불행이 포함된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배반하자마자 이전의 상태에서 쫓겨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하고 곤고한지를 느끼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가 죽음의 상태와 다름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생명의 상실이야말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즉,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다면 당연히 죽음의 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적절한 표현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영혼과 육체의 처참함과 불행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겪는다면 그것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종의 문턱과 같습니다.
죽음은 결국 인간을 완전히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죄악과 사단의 폭정으로 압제를 받는 사람들이 오직 멸망될 때만을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것과 같은 자라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오랫동안 징벌을 연기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담에게 그 실과를 만지는 날에는 죽게 되리라고 위협하셨는지에 대한 질문은 불필요합니다. 충만한 은총으로 구제가 되기까지는 아담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죽음이 그를 다스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내용을 다시 한번 종합 정리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이끄셔서 에덴동산에 두시고 하나님의 창조하시고 창설하신 것에 대한 관리자로 삼으셨습니다(15).
이 관리직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 일은 그가 먼저 하나님을 순종함으로서만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16-17). 먼저 하나님은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 면전에 가까이 있게 하셨습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명하신 것을 따르고 하나님이 뜻하시지 않으신 것은 거절하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생명을 매개하는 자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을 수호하는 책임자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 대행” 이라는 영광스럽고 복스러운 일은 그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면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존재임을 확인하며 살아갈 때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먼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 곧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유를 마음껏 누림으로서만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신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창조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피조된 한계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유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넘을 수 없는 “제한된 자유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불순종할 때에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참 생명에서 거절될 존재였습니다.
사람이 불순종할 때에는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끊어질 존재였습니다. 아담에게는 생명과 생명 누림이 주어졌습니다. ‘그의 육신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따라 땅을 경작하여 얻는 식물로 유지됩니다.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음으로써 유지하며 누립니다(5, 9상). 그러나 참 생명의 누림은 5절이나 9절 상반절이 말씀하고 있는 의, 식, 주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9절 하반절이 말하는 바를 실제적으로 이해하고 믿음으로 누립니다. 이렇게 참 생명의 상징으로 에덴동산이 실제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육신의 생명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영혼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자입니다. 에덴에서 누려야 하는 참 생명은 우리가 밥을 먹고사는 생명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나무를 에덴의 한복판에 두셨습니다. 이것이 에덴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동산에서 누리는 생명이 선함과 악함에 관계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선과 악은 그 본질이 윤리적이요 영적인 차원입니다. 그러니까 9절 하반절에서 17절까지는 사실상 영적 생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담에 육신의 생명은 땅에서 나는 소산을 먹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핵심인 그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유래되는 그 나무에 의해서 살게 하셨습니다(3:22-24). 영혼이 먼저 살아남으로써 육신까지도 참으로 의미 있는 생명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성경 말씀이 말씀하는 생명은 몸의 생명을 이야기하면서도 영적인 생명을 더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13:1절에는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한 샘이 열려서 그 백성의 그 백성의 죄와 더러움을 씻을 것이라 합니다. 이때에도 영적인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도 에덴은 계시록 21장 22장의 신천 신지의 원형인 셈입니다. 특히 계시록 22:1-5절의 생명수 강, 생명나무 등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누리는 상황을 묘사하였습니다. 14절 말씀도 “옷을 빠는 것” 즉 “정결케 함”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며 그 생명을 누리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19절까지를 이사야서 등과 관련시켜서 말한다면 “복음으로 말미암은 생명의 은혜를 사모함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그것 곧 영적 생명을 사모한 자마다 받아서 누릴 것이라 합니다.
특히 19절은 복음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그 생명나무에 참여함을 어디에다 연결시키고 있습니까? “거룩한 성” 곧 “하나님의 나라에 참예 함” 에다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생명수” “예언의 말씀(생명의 말씀)” “생명 나무” “거룩한 성”이 누구에게로 연결되어 있습니까? “주 예수의 오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을 “지금도 주 예수님의 은혜 아래서 맛보며 누리는 것” 입니다(21). 주 예수님의 은혜로 죄 씻음을 받은 새 생명은 에덴 동산에 있었던 생명의 회복인 셈입니다.그러므로 에덴의 생명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은 같은 질의 영적 생명입니다
2)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영적 생명은 그가 어떤 특별한 상태에 있느냐? 로 결정됩니다(사28:1, 창2:16-17).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관계할 때만 참 생명이라 부릅니다. 계시록 22:1절은 생명수가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른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에덴 동산이 생명의 강이나 생명 나무를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에덴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근원지였다는 사실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은 단순히 육신의 생명의 차원을 넘어선 하나님의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생명을 어떻게 받아서 누리게 하셨는가?
(1) 육신은 하나님이 내신 것, 곧 식물이나 열매를 먹음으로서 누리게 하셨습니다.
(2) 그러나 참으로 본질적인 생명, 곧 영적인 참 생명은 어떻게 누리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참 생명을 상징하는 생명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서 누리게 하셨습니다. 선악과 나 생명 나무는 실제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을 누리는 수단임에는 분명하나 그 나무열매에 무슨 신비한 요소가 있어서 그것을 먹은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참으로 살게 하고 참 생명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성례전 적이다” 혹은 “성례전 과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1년에 서너 차례 행하는 성만찬이 그 사실을 잘 설명해 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적 은혜를 실제적으로 누리려 할 때에 성만찬을 통해서 누립니다. 성찬을 통해서 그것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영적인 은혜를 기념함으로서 실제적으로 누립니다. 성만찬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은혜와 실제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누구라도 떡과 포도주에 영적 생명이 들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신자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것을 누리되 영적으로 누립니다. 이렇게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성례전과 연결시킨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사는 실제 삶이요, 그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삶이 에덴에서의 생명과 그 생명의 누림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때마다 자기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고백하여야 했습니다. 또 그것을 먹을 때마다 영육간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야 했습니다. “선과 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삶을 총괄하여 붙인 명칭입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당연히 추구하고 취해야 할 모든 것입니다. 악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멀리하고 버려야 할 모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덴 동산에는 처음부터 인간의 생사가 무엇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께 붙어 있음, 곧 그분에게 의존해 있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 순종 여부에 있습니다.
인생이 참 생명을 누림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순종함에 달려있습니다. 에덴의 참 생명은 순종함에 달려있습니다.
1) 순종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구속주로서 표현하는 고백적인 삶의 형태입니다.
2) 순종은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은 인생의 마땅한 감사 표현 양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늘날도 이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