ㅋㅋㅋ 성경진실님이 갖는 의문때문에 저도 지금 고민중입니다.
사후체험이라는 또는 입신체험이라는 기독교에서는 거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이러한 체험이(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라고 사방팔방 광고하는 쪽인 것 같기도 하고)
얼마전 미국의 의료연구기관에서 꿈을 조종하는 훈련을 20명에게 시키고서 꿈을 꾸게 했더니 일부 몇 명에게서 똑같은 현상을 경험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지요
즉 소위 말하는 사후체험이나 입신의 체험이 사실은 자신의 자의식 안에서 만들어진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이런 기사나 과거 성경 문건들에 대한 많은 단편적인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우리가 그동안 믿었던 성경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이라는 것 표적이라는 것이 기독교만의 전유물도 아니고 예언이라는 것도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여기 예향에 오시는 분들 중 대개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사실은 제가 알고 있는 말씀에 대한 어떤 깨달음이나 지식에 대하여 그것의 성격을 솔직하게 분명하게 이것이다! 라고 아직은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정말 위험한 발언인데요 현제 저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지 조차 심각하게 의심하고 있는 중입니다.(전 이단을 넘어 삼단 사단인 것 같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로 수만 수억명의 사람들에게 화려한 조명을 받고 섬김과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지극히 싫어 하실 것 같고 또한 기독교의 지난 2000년의 역사에서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인도자였을까 하는 의심을 하면 절대로 아니다 라는 참 말하기 뭐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성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경배하라고 하신 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나는 너희들에 형제요 친구요 너희는 내 형제요 친구요 자매니 더 이상 종이 아닌 자유자라고 했던 말씀은 많은 것 같습니다.
친구가 친구를 섬기고 경배한다?
형제가 형제를 섬기고 경배한다?
사랑해야지요(=아가페)
암튼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이제는 없어져도 상관없는 종교다??
하나님은???
타이탄의 분노 2편에서 사람들이 신에게 더 이상 기도하지 않게 되자 신들이 소멸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올림포스 신들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신의 존재 가치가 아닌 그냥 이야기거리에 불과할 뿐이죠
올림포스 신들에게 기도하는 사람 더 이상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수천년이 지나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도 소멸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본 것도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즉 계시록의 최후가 아닐까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가페가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지요 ^^
님 진실을 만날 때까지는 철저하게 부정을 하시고 또 부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님 안에 이것이다! 하고 느껴질 때까지 깨달아질 때까지 부정하십시오 ^^:
종교라는 신앙이라는 최면에 빠져서 앞뒤 분간 못하는 것 보다 백배 천배 낫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전 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동경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가페라고 하는 상태에 대한 동경
말이 두서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글쓰는 능력이 젠병이거든요
그리고 님이 말씀하시는 여러가지 능력들 뭐 신유의 은사니 예언의 은사니 방언의 은사니 하는 것 등등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존재 유무를 나타내는 것 들 중 하나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능력들이 하나님과 나와의 1:1 관계에서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예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병고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방언합니다.
그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 중 하나님의 사람이 아님에도 그런 능력을 행했던 인물들 참 많습니다.
사울이 그랬고 발람이 그랬고.... 기타등등(살짝 모세도 포함)
이러한 것들은 물론 자신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 방편으로서는 대단한 가치가 있겠네요
하지만 반대로 다른 이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에 이만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예수 그리스도(=말씀)가 내주하게 되면 이러한 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왜 이런 것들에 신경을 쓰시는지요
아 저도 처음에는 이러한 것들이 참 대단해보였습니다만
이런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도 아닐 뿐더러 구원의 그 어떤 표징도 아닙니다.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잘못 알고서 비롯되어진 오해에서 대단해 보이는 것일 뿐 사실 자녀적 입장에서는 귀찬게까지 느껴지는 것일 뿐입니다.
원어성경을 접할 수 있고 그럴 기회가 준어진다면 성령(프뉴마)앞에 엔(영어의 in) 전치사가 붙을 때와 에피(영어의 on) 전치사가 붙을 때 성령의 역사와 역할이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간단하게 엔 전치사가 붙은 성령은 진리의 성령으로 속에 거하는 성령으로 오직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들어가시고 한 번 들어가시면 영원히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속성 즉 하나님의 세계의 속성이나 말씀을 깨닫게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성령입니다.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자신만 알 수 있고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통하여 알 수 있을 뿐인데 그 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만 또한 알 수 있지요
에피 전치사가 붙은 성령은 대개 오순절 성령으로 겉에 머물며 대체적으로 능력을 행합니다.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고 능력들을 행하는데 안에 들어오지 않고 겉에만 머물며 몇 시간 또는 며칠 또는 몇 달 또는 몇 년을 머물 수도 있으나 반드시 떠나게 되고 다시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주 올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데 좋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일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나 누구에게나 임하기도 합니다.
구약에서 신약에서 그러한 인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그러한 인물중 하나입니다.
아! 그렇다고 해서 두 성령이 전혀 다른 성질의 성령이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같은 성령이신데 속에 들어오느냐와 밖에 잠시 머무느냐의 차이일뿐 같은 한 성령이십니다.
님의 신앙이 많은 과정을 거쳐서 어느 곳에 이르게 되면 더 이상 이러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님의 자세에 대하여는 긍정적으로 말씀드리고 싶고 객관적 진실과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의 많은 말들(제 말까지 포함하여) 신경쓰지 마시고 교회에 관한 성경에 관한 모든 것들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시고 판단하여 자기의 것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 몇 절에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어두워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라는 구절이 있는데(성경이 옆에 없는 관계로 아마 이런 말씀의 구절일 것입니다.)
여기서 깨닫다가 원어로 카타람바노인데 직역하면 붙잡다(아주 강하게), 움켜쥐다, 낚아채다(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챌 때) 라는 뜻입니다.
직역하여 빛을 낚아채지 못하다 움켜잡지 못하다 붙잡지 못하다 라는 말과 깨닫지 못하다 라는 말에는 분명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땐가 그 빛이 님에게 비추일 때 그것을 하늘에서 금덩이가 떨어질 때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붙잡기 바랍니다.
첫댓글 님의 질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만 제 글도 질문의 논지를 벗어난 것 같네요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찬스가 와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깨닫게 하시는 이가 존재함으로 사람은 피동적으로 깨닫게 될 뿐입니다.
그분이 없다면 사람이 노력을 해서 잡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체를 통해 사람을 은혜를 받는 입장에 놓습니다.
이것이 입구에 해당하고.
안으로 들어가보면 예수그리스도의 완벽한 행함을 인정하느냐 아님 일부 사람의 행위가 필요하느냐의 선택을 강요 당합니다.
철저히 사람이 하는 일이 죄성에서 출발한 것이 확인 되면 전자의 선택이 필수요 그래도 인간에게 가치 잇는 선이 있다고 생각 하시면 후자의 선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둘중 하나만 믿어지게 선택 당하는 것이 우리의 옵션입니다.
이 둘중 사람들의 상식 선에서 선택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체가 선택하는 잘 못 된 길입니다.
백성에게 잠자는 영을 준 것이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이용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계략이 먹혀 들게 됩니다.
결국 진리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입니다.
이 의는 철저히 인간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화영검으로 지키게 한 것이 계속 연결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아주 특별한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 하고 오직 십자가의 의 만이 더 나은 의라 고백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이 의라는 뜻은 성령을 받아도 육은 죄의 법을 따르고 영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엇박자의 속에서 나의 죄 됨을 처절하게 경험하게 됨으로 아하 십자가의 의 자체가 니의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라
는 것을 눈치채게 됩니다.
십자가의 의 완벽성을 인정하는 일이 쉬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치않습니다.
즉각적으로 나의 행위를 찾아 또 나서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그 본성을 예수께서 제거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행위에 빠지고 맙니다.
그 행위가 사랑하자입니다.
성전을 짓고, 주일을 지키고, 절기를 지켜 행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자이고, 구제를 하고 헌금을 내며 기도로서 이웃을 사랑하자입니다.
이 아름다운 것을 인간이 어찌 버리겠습니까?
님의 답변이 깊이가 있어 천국의 가장 깊은 곳을 댓글로 붙혀 보았습니다.
엉뚱한 댓글 죄송합니다
네 거치는 돌림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십자가의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의 것입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것도 털 끝 만한 것이라도 인간의 것은 전혀 없습니다.
있어서도 안 되야 합니다.
털 끝 만큼이라도 허용이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의미 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위대하심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감히 감히....
오직 그분 안에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오셔야 했고요
어디로 어떻게 오셨느냐가 참 중요한데 그것을 교회에서는 잘 설명을 안 해주는 것 같습니다.
님 말씀대로 그 기회라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동등하다고 말은 해야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저도 혼란스럽스
니다.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어진 자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사항 같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해당되는 자들은 그것을 놓치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파수꾼이 성을 지키는 것처럼 지켜야 합니다.
이 지키다 라는 단어를 우리말 성경이 참 오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는 바람에 한국 기독교가 행위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명령을 따라 행하라 라는 뜻으로 다들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보존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암튼 이 기회라는 것이 사람의 그 어떠한 것으로도 주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말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죄성의 제거라고 하는 것이 님의 표현인 것 같은데 제는 치환과 같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음 설명하기가 참 어렵고 난해한 것 같습니다.
인간의 속성을 하나씩 하나씩 그리스도의 속성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과정
바닥에서 아구까지 차오르는 과정
그리고 주체는 주님의 말씀
그 변화가 100% 주의 의지로 주의 공로로 이루어 진다면 아이러니 하게 사람에게서는 물리적 행위가 안나옴이 증명되어야합니다.
죄 중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루는 줄 인정 할 때 십자가가 무엇인지 비로소 인식케 됩니다.
마지막까지 인간의 행위는 놓지 못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성화다 하며 또 행위를 들고 나오지만 역시 그 화자나 나 속에는 탐심이 그득합니다.
잠시도 그 내 것이라는 탐심을 놓치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 나의 근본적 변화를 믿는 다면 이것은 딜레마입니다.
성령님의 강권하심이 그리 약할리가 없기에 변화를 이야기 한다면 성령님이 없다는 것을 인정 할 뿐입니다.
오직 변화는 100% 십자가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 외는 없다고 봅니다.
야보고의 행위 또한 그러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십자가의 공로만이 천국 가게 한다고 인정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행위의 실체입니다.
변화의 요체도 같은 말씀이며 어떤 물리적 변화를 생각하면 탐심이 부딪쳐 성령은 없다로 귀결 되어 버립니다.
야고보서의 행함이나 행위도 십자가의 공로 이후를 말하는 것이지 십자가 이전의 것을 말함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그렇다고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성령을 받아서 하나가 된 자들에 삶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진리의 성령이 내 속에 거하게 됨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자체도 마치 하나의 존재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인간의 의지나 그런것 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가페도 그렇고 모든 것이 주님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므로 인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 주님 즉 진리의 성령이 내게 들어 올 때 같이 들어와서 주님이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는 것인데 그것을 주님은 아버지의 유산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고 내 것 자체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이루어짐이 내 안에 들어와서(영원한 영접) 내 것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닦아내져야 합니다.
이처럼 발 씻김의 의미(=침례)가 진리의 영이신 주님에 대한 영원한 영접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런 중요한 사실을 그저 겸손의 가르침 정도로만 치부해버리는 기독교도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에 대한 영원한 영접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영원히 영접하는 것입니다.
항상 주어는 주님입니다. ^^;;
몇가지 결함이 있어 보입니다.
야보고서의 행함이 십자가 이후에 행함으로 인정하신다면 십자가는 무용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전 글에서 행함에 의지하면 성령님이 없다는 논리와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전능인데 사람 속에 탐심하나를 제거하지 못하는 능이라면 어떻게 생각 합니까?
또 나의 생각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좌충 우돌하는데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이 이 제거하지 못하는 증거가 각자의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지어신 이께 거짓말을 하면 안되겠지요.
그리고 이 탐심과 정욕을 제어 못한다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주께 나아가 발을 씻어야한다는 말씀이 따당
합니다.
발씻김의 뜻은 몸 전체를 씻김과 차의가 있습니다.
따라서 침례로 보는 것 보다 당일 당일 죄를 씻음으로 보아야 더 따당합니다.
발씻김이 있어야 한다면 역시 탐심과 정욕은 여전히 존재하니 야보고의 행함을 만약 십자가 이후의 행위로 본다면 성경이 오류입니다.
따라서 야보고이 뜻은 너희가 성령을 받았다면 전적으로 십자가의 공로임을 인정하고 예수그리스도만 높이는 행위가 나올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조금이라도 모자라는 것이 있어 우리의 행함(사랑을 )더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 믿음은 허탄한 믿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의는 완벽합니다.
침례도 예수그리스도가 믿어지면 예수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세례요한의 침례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지 내가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치 않습니다
세례에 대해서 생각 난 김에 교회개혁방에 따로 제목을 부쳐 남깁니다.
야고보의 행함에 대한 저의 말에 거치는 돌님 께서 오해를 하신 듯 합니다.
야고보서의 행함이라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의를 말하고 있다는 뜻에서 십자가 이후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행함이 바로 이 그리스도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그리스도는 독생과 다생의 차이입니다.
예수는 오직 독생이지만 그리스도는 예수 이후의 자녀요 형제요 친구를 말함입니다.
이 자녀된 친구된 형제된 그리스도들의 삶을 야고보서는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가 없었다면 이러한 삶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야고보서의 행함도 십자가의 완전한 의를 말하고 있
것입니다.
독생하신 예수께서 진리의 영(=말씀)으로 어느 누군가의 육체 속에 들어가시면 그가 바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세계에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있을 수 있으나 그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죄성이라는 것도 역시 이 세계의 개념이지 하나님 세계의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씻김(=침례)의 의미가 바로 이 세계의 개념을 닦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이고 주님이 주인으로서의 가지고 계신 권리 즉 주권이기 때문입니다.(씻김 이전에는 주종의 관계이기 때문이죠)
거치는 돌님도 아실 테지만 진리의 영이신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온 이들이라면 자연스럽게 나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냥 그분이 모든 것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를 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이것을 당신과 동등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신분상승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주인의 신분을 부여하는 것 과는 또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냥 동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암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고요 진리의 영이 들어와서 내 속에서 나를 씻겨내시면 님이 말씀하신 탐심이니 정욕이니 하는 것들이 소멸되어지고 의미가 없어져버
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고 할까요
그 탐심과 정욕의 옭아매임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거치는 돌님도 아실 것입니다.
그 옭아매진 그 지독한 끈들이 뜨거운 물에 눈이 녹아지는 것처럼 사라져버립니다.
암튼 님이 말씀하신 십자가에 의에 대한 모든 것은 십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죄를 씻어내는지에 대한 원리는 아직 이해가 부족합니다.
이렇게 심도 있는 묵상을 하는 이가 몇 있을까요?
모든 증거는 내 속에 있습니다.
나를 살펴 봄으로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보고서의 행위라함은 에수님의 행위이다
예 바른 말씀입니다.
내가 할 수 없었던 그사랑을 하신 그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게 나타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행위 자체로 나타난 것이지 나의 육체를 통해 보여 주는 행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조금의 죄도 들어 있지 않은 순수 그차체로 사람으로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내속에 탐심은 잠시 한순간도 버리는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제산을 팔아 가난한이를 도우라 하시고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말씀
지키고 역사 했다면 내재산을 벌써 처분 되야 함에도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내속에 성령이 없거나 아님 나는 여전히 죄인이나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덮은 바 되었기에 의인되었다고 인정받거나 둘중 하나입니다.
기존 교회에서 주장하는 성령 받고 인도 받는 다면 사랑을 할 수 있다 그 것이 구원의 증거다 라고 한다면 이세상 사람은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탐심 없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불완전한 사랑도 받으신다고 주장하는데 그 역시 잘못 된 말입니다.
주께서는 조금의 죄도 허용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제 결론으로 접근하는데 사람은 죄를 날마다 짓지만 십자가의 의는 그 죄를 완벽히
씻고 더불어 의롭다고 인정까지 하기에 우리가 천국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길이 없다면 구원은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처럼 나를 통해 죄를 관찰하면 죄인 중에 괴수임이 드러나는데 이를 자기부인이라합니다.
자기부인 한 자만이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히 볼 수 있습니다.
앞에 기존교회의 그같은 주장은 자기 속 증거를 볼때 명백히 이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게 나타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행위 자체로 나타난 것이지 나의 육체를 통해 보여 주는 행위는 아닙니다
네 이 말씀 정말 핵심입니다.
은혜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유리를 비유로 한다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을 어떤 색 뭐 파란색이라든지 암튼 그런 색이라고 한다면
내가 세상에 태어나 성장하면서 이 세상의 색깔이 덧입혀지게 됩니다.
그 색깔이 죄성이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원죄라고 생각합니다.
그 색깔을 벗겨내어 투명한 원래의 유리로 돌아가는 것이 씻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씻김은 진리의 성령(=말씀)이 즉 주님께서 들어오시면서 씻겨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가진 색깔
이 점차 드러나게 되는데 뭐 이것을 교회에서 말하는 성화라고 치죠 ^^;;
중요한 것은 그 색깔을 내는 것이 내가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진 색깔이 내 몸인 유리가 투명해짐으로써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주님 자신 때문이지요
완전히 투명해졌을 때 나는 사라지고 주님의 색깔만을 띠게 됩니다.
즉 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유리병인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아가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비유도 제가 느끼는 것을 다 전달했다고 표현하기는 부족합니다만
나의 어떤 것을 통하여 주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떤 것들이 사라지면서 주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죄를 대신하여 짊어지고 광야로 내보내지는 아사셀 양이 종종 뇌리속에 떠오릅니다.
아멘아멘!
감사합니다.
(마 28:17, 개정)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님은 형제이기전에 우리의 주님, 주인임이십니다.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죠.
영적인 방황이 있는 것 같은데요. 예수님이 얼마나 탁월하신 분이신지 최고인지 모르시면 방황이 계속될수 밖에 없습니다.
유기성목사님 설교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