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학회(創価学会, Soka Gakkai International)는 일본의 승려 니치렌(日蓮, 1222~1282)이 주창한 불법(仏法)을 신앙의 근간으로 하는 불교계열의 종교단체다. 1930년 11월 18일에 창립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국제창가학회다. 1930년 11월 18일 설립 당시에는 명칭이 창가교육학회였고, 1947년에 창가학회로, 다시 1960년대 초에 국제창가학회(SGI)로 바뀌었다.
창가(創價, Soka)란 가치를 창조한다는 의미이다. 학회(學會, Gakkai)는 배우는 모임이라는 의미. 종합하면 창가학회라는 조직명은 '가치를 창조하고, 배우기 위한 모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수행할 때 암송하는 기도문이며,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이름을 남묘호렌게쿄라고 오해하지만 이는 정식 명칭이 아니다.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의 일본식 발음인 '나무묘호렌게쿄'에서 유래한 것으로 묘법연화경에 귀의한다는 의미다.
창가학회는 처음엔 종교단체가 아니라 창가교육학회(創價敎育學會)라는 교육자들의 모임이었다.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1871~1944)가 가진 교육 철학이 가치창조였다. 창가교육학회의 회원은 모두 각자 자신의 현장에서 마키구치의 창가교육을 실험하고 검증하며 교육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자신의 독창적인 교육이론을 자신의 애제자 도다 조세이(戸田城聖)와 함께 체계화하여 남기고자 했다. 그래서 출판한 책이 바로 '창가교육학체계'이며 이 책의 발간일인 '1930년 11월 18일'을 훗날 창가교육학회의 창립일로 정했다.
1947년 도다 조세이가 조직을 창가학회로 개명한 후에는 니치렌 불법의 사상을 배우고 실천하는 종교단체로 거듭나게 된다. 도다는 20세기 초 앙리 베르그송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떠오르던 생명주의를 통해 니치렌 불법을 이해하려 했고, '법신불(法身佛)은 곧 생명 그 자체'라고 보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붓다는 생명력 그 자체이며, 현세의 이익을 실현시켜 준다. 이로 인해 창가학회는 불교계 단체 중에서도 유독 현세구복적이고 현실참여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창가학회는 법화경을 중시한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한국 불교에서는 흔히 법화경(法華經)이라고 줄여 부르는, 전 세계적으로 수백 가지 언어로 번역되고 관련 문화유산도 많아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대승불교 경전이다. 다른 경전들과 마찬가지로 대략 서기 1세기쯤부터 석존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제자들이 글로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법화경은 총 10권이며, 개경인 무량의경과 결경인 보현보살행법경(普賢菩薩行法經) 각각 1권씩을 제외하면 총 8권 28품(品, 경전에서 장(章)의 구분을 나타내는 말)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화경은 워낙 민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법화경을 신앙하는 사찰은 한국에서도 아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 꽃이라 이 연꽃으로 사찰 주변을 장식해 놓는 경우가 많은데,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연화가 바로 이 연꽃을 의미한다. 부처를 형상화한 그림에서도 부처가 연꽃 위에 앉아있거나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석존이 연꽃을 자신의 깨달음을 대변하는 꽃으로 여겨 소중히 했기 때문이다.
니치렌은 법화경의 제목을 따 '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독송하는 창제행(唱題行)을 통해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성을 몸에 나타내어 이번 생애에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어에 따라 읽으면 "남묘호렌게쿄"가 된다. 창가학회는 이 남묘호렌게쿄를 신앙하는 단체이므로, 니치렌의 저술을 모아 정리한 '어서(御書)'를 법화경보다 훨씬 더 많이 인용하며, 이를 공부한다. 니치렌은 그 누구보다도 법화경을 소중히 하고 깊이 공부했기에 이 니치렌의 저술인 어서는 법화경의 해석과 인용이 주이며, 경전의 원문을 중시하여 어서공부는 그대로 법화경 공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니치렌은 어릴 때 출가하여 사찰을 돌아다니며 수학했으며 그 유학의 계기는 두 가지 의문 때문이었다. 하나는, 그 당시 일본은 불교가 많이 융성한 불교국가였는데 "왜 자연재해가 심하고 기아와 전염병에 의해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으며, 1221년 막부와 조정의 대립으로 조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왜 불교 승려들의 기원을 등에 업은 조정이 막부의 무사들에게 패배하여 쫓겨났는가."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교주 석존은 단 한 명인데 현재 불교의 가르침은 왜 수십 가지로 나뉘어져 서로 대립하는가"였다.
전국 각지를 돌면서 수많은 경전을 독파한 니치렌은 그 이유가 당시의 일본이 불교국가이긴 하지만 불교를 잘못 신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전염병이 돌며, 내전이 일어나고, 불교의 기원이 힘을 잃어 조정이 패배하고, 불교 종파가 갖가지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는 등 당시 일본 사회의 어지러운 모습들은 전부 석존이 예언했던 '말법'이라는 시대의 모습과 완벽히 일치한다고 통찰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석존이 예언했던 말법시대에 태어났다는 점을 인지한 후, 석존이 예언한 대로 말법시대의 새로운 불법이 도래해야 한다는 것까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처음 일으켜 넓히는 일은 다름 아닌 자신의 역할이라는 점을 자각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1253년 4월 28일 정오의 시각, 세이초사(清澄寺)에 모인 대중들 앞에 '남묘호렌게쿄'라는 말법의 법화경을 처음 선언했다. 그날의 입종선언(立宗宣言) 이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약 30여년간 온갖 종파의 지도자 결탁한 권력자들의 탄압을 받았다. 머리에 칼을 맞거나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그의 제자들도 법화경을 신앙한다는 이유로 그 지방의 권력자에게 끌려가 고문당하다가 참수되고, 니치렌 본인은 사형장에 끌려가거나 두 번이나 유배당하는 등 갖은 고생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런 모든 괴롭힘들은 당시 권력자와 결탁한 기성불교 지도자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니치렌을 국주에게 모함하고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치렌 자신은 평생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위해를 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사형장에 끌려가서도 참수당하기 직전에 모함이 드러나 풀려났고, 두 번의 유배도 모두 각각 2년 정도 귀양가 있다가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 다사다난한 인생이었지만 그는 말년엔 강의도 하고 후배도 육성하고 저작을 남기다가 1282년 10월 13일 제자의 집에서 요양하던 중에 편히 눈을 감았다.
창가학회의 모태는 일련종(日蓮宗)이다. 1282년 나치렌이 숨을 거두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 일련종(日蓮宗)이 생겨났으며, 그 후 1279년 니치렌의 여섯 제자 중 한명인 닛코(日興)가 일련정종(日蓮正宗)이라는 종파를 세웠다. 현재 일본의 신도 수는 1,500만 명가량 되며, 자민당과 공명당이 창가학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 종교로는 천리교와 함께 거의 유이하게 뿌리내린 케이스인데, 창가학회 측이 밝힌 바로는 추정 신도 수가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