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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안에서 반갑습니다.
백영희 신앙연구를 소개합니다. 사이트는 http://www.pkist.net/ 입니다.
백영희 신앙연구의 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일하심을
강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곳의 글을 읽으면 읽으수록 더욱더 많은 소망과 기쁨과 평안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강해짐을 느낄 수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그뷴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그런 자들을
더욱 거룩하게 하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자주 시간을 내셔서 글과 설교 말씀들을 들으시게 되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평강을
얻게 될것이라 말씀드립니다.
우선 아래 " 우리의 구원" 이라는 글을 한 편 소개합니다.
좀 길지만 천천히 읽어 보신다면 많은 은혜를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제목 " 우리의 구원
1982. 8. 15 주전
본문:베드로전서 1장 20절~22절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구주는 창세 전부터 알리신 바 되었다’ 하신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 구원이 시작되었고, 또 모든 창조를 이 구원 위해서 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구원과 주님은 모든 존재 이전에 있었고, 모든 존재는 이 구원과 구원의 주로 말미암아 생겨졌고 또 주를 위해서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영원 전부터 시작된 이 구원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영원 전부터 시작된 구원, 곧 영계나 물질계나 모든 존재는 이 구원을 위해서 있게 된 것이고 이 구원 때문에 지으신 것들입니다.
20절에,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하는 이 말은, 모든 존재가 존재하기 전 이분이 모든 존재를 구원하는 구주로 인정이 되시고 확정이 되신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마음이 어두워서, 하나님이 이 구원을 위하여 지어 놓으신 그것들은 큰 줄도 알고, 많은 줄도 알고, 또 위대한 줄도 알지만 이 모든 존재가 이 구원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고, 또 인생이 알든지 모르든지 이 구원을 위하여 이용되고 있고, 또 이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각각 자기 위치에서 자기 시대를 따라 이용되어 가고 있는 지극히 크고 광대함을 사람들이 이해도 못 하고 믿지도 않는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선포해 놓은 말씀은 획 하나도 없어지거나 가감이 없는데 에누리 하는 것은 다 자기를 속이고 망치는 것뿐입니다. 이 말씀은 호리도 에누리 해서는 안 될 말씀인데 우리는 너무 에누리를 많이 합니다. 그런고로 모든 존재에 대한 이 지식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말세에 과학은 큰 줄로 알고 또 가치 있게 크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존재케 한 그것들이 움직여 나가는 그것을 가리켜서 세상이라, 국가라, 사회라, 문화라 말합니다.
그런 조그만한 것은 그 폭을 측량하려고 사람들이 생각하나 사람이 아는 것뿐만이 아니고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은 인생이 모르는 것인데, 아는 것 모르는 것, 인생이 친히 체험할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는 이런 것을 무한히 초월한 광대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구원을 사람들은 무시합니다.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제 것과 장래 것,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것 이런 것이 이 그리스도의 구원 하나를 성취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고, 지금도 보존되고 지금도 이용되고 있는 이 지극히 큰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그 사람이 비록 피조물이지만 창조주의 영감으로 크게 넓어지고 큰 사람입니다.
내가 며칠 전에 말 들으니까 미국에서는 4~5년 걸리면 갈 수 있는 그런 별도 있지만 몇백 년을 가야 하는 그런 별들이 있으니 그 별에 갈려고 하면 사람의 수명이 짧기 때문에 가다가 다 죽게 되니까 산 사람을 얼음을 만들어 동면을 시켜서 몇백 년 후에 그때 깨어나도록 그래 가지고 인간이 별에서 별을 건나가 보겠다고 그렇게 말한다는데, 그런 것이 다 소꿉장난입니다. 가 봤자 효력도 없고, 또 인간이 아는 데는 우주의 광선의 속도로 가면 몇백 년 가면 끝을 보겠다 하지만 그것도 무식한 말입니다.
우주도 대단히 크게 하나님이 만드셨고 영계는 더욱 크게 만드셨고 오묘하게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는데 이 구원보다 지음을 받은 것들을 크게 여기고, 또 인간들이 구원은 크게 여기지만 구원보다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매우 무식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 우리의 지식을 활짝 넓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십세기의 문화라는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의 움직임에 억억… 만의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배불리 먹이고 평안하게 살리니까 어린 아이들이 잠꼬대 하는 것처럼, 그것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실은 다 무익한 것들입니다. 가치 없는 것이요 무익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주의 구속으로, 영감 도리로 우리의 마음도 넓히고, 소망도 넓히고, 모든 지식과 견해와 비판과 평가를 넓혀야 합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 물질계 우주에 충만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 구원을 위하여 있다는 이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우주를 주먹 안에 집어넣고 우주를 내 발등상으로 삼아, 이것들의 영원한 주인공이 되어지는 이것들이 다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지식으로 주셔서 하나님의 지식을 참되다 인정케 하시고, 인정한 대로 소망하고, 소망한 대로 취급하는 이것이 우주와 영계에 미래의 영원입니다. 영원의 존재들입니다.
조부랍지 맙시다. 마음을 넓힙시다.
인생은 두 길뿐인데,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그는 벌써 원죄와 본죄로 죽어서 사망의 길뿐인 것입니다. 젊은 아이는 죽음의 힘이 많다는 것입니다. 늙어서 오늘 내일 죽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그런 사람은 죽음의 힘이 다 되고 이제 힘이 빠져 버리고 죽음의 힘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입니다. 얼마 안 남은 것 그것 다 되면 이제 다 죽어 버립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은 성도들은 결단코 썩는 데, 죽는 데 이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모든 난제가 해결됐고, 성령과 진리와 대속의 보증으로 모든 일을 조성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은 영생입니다. 영원히 죽음이 없는 영생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그렇게 하나 하나를 정말 상대하느냐? 네가 그렇게 여기느냐? 그렇게 여기고 그렇게 상대하느냐?’ 이것은 영원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영원을 마련하는 하나의 흔적입니다.
‘세상 짧은 토막 이렇게 저렇게 움직인 그것이 오늘에 영원이 되어 있구나’ 하는 것이 인생이 모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입니다.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곧 구속과 구세주를 말합니다.
21절에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이 말씀은 죽은 것은 대속을 말하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구속을 말합니다.
대속은 모든 사망에서 건져낸 것이요, 구속은 사망에서 벗어난 자에게 생명과 평강과 온전의 것으로 점점 성장시켜 가는 것을 가리켜서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과 구속을 말씀합니다.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이렇게 대속의 역사를 하시는 그 일은 인간 지식으로 볼 때에는 저주 중에 저주요, 패망 중에 패망이요, 미련하고 어리석은 중에 어리석지만 그는 모든 피조물을 재해하는 해독을 완전히 치료하고 승리했습니다.
아버지 우편에 앉았다는 말은 모든 것을 해결짓고, 모든 것을 치료하고, 모든 것을 수리하고, 모든 것을 정비 정돈하여, 이제 하나님이 목적하신 대로 피조물의 영원한 중보자가 된 것을 말씀합니다. 그것이 영광입니다.
영광이라 말은, 피조물 가운데 그로 말미암아 해본 자가 있으면 해본 자는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욕을 할 것입니다.
영광을 주셨다 그말은 주님이 33년 4개월 동안 지상 생애와 창조주로서 피조물의 위치에서 역사한 이 생애는 피조물 중에 크나 작으나 하나도 원망 불평 없이, 중심으로 숭배하고 감사하고 존대하면서 찬양할 수 있는 이것을 가리켜서 “영광을 받았다”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땅위에서 사는 생애가 어떤 사람에게는 감사와 영광을 받을 수 있겠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원망과 불평과 미움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이 걸음은 영광을 이루신 걸음입니다.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이렇게 영원 전부터 계획한 지극히 크고 깊고 길고 높은 이 구원을, 모든 존재들이 환영하고 감사하고 참 감탄하는 이런 영광스러운 구원의 길을 예수님이 먼저 걸어가셨고 다음으로는 우리들로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걸음은 지저분한 이 세상 것을 욕망하여 시비하고 쟁탈하는 가치 적고 일시적인 그런 사소한 생애가 아닙니다. 이는 정말로, 온 세계 인류의 역사와 모든 것이 몰라서 저 잘난 재미로, 저 큰 재미로 날뛰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이 사실을 알면 그 앞에 떨지 아니할 세상은 하나도 없고, 그 앞에 녹아나지 아니할 세상은 하나도 없고, 그 앞에서 자기의 비참을 탄식하지 아니할 세상은 하나도 없건만…
세상이 어두워서 모르고, 악령이 지식을 영 꺼꾸로의 지식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죽는 것은 산다, 수치는 영광이라, 망하는 것은 흥하는 것이라 이렇게 바꾸어 놓은 그 한 사실로 인간들이 안심하고 떠들고 살지 만일 이것이 정상으로 됐다면 모두 다 기절해 죽고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어두워져 있는 것이 아니고 광명의 때가 옵니다.
이렇게 영광의 걸음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무도 말씀이 큽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라,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라.”
하나님을 믿는다 그말은 하나님을 뒤따라가서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믿는다 말은 좇는다 말입니다. 따른다 말이오. 배운다는 말이오. 본받는다는 말이요 닮아간다는 말이오.
우리는 어떤 과학자를 좇아갔고, 어떤 문학가를 좇아갔고, 어떤 정치가를 좇아갔고, 어떤 영웅가와 호걸들을 좇아갔고, 어떤 재벌가를 좇아갔고, 소망하는 것도 그런 것들이요, 부러워하는 것도 그런 것들이요, 우리가 평가 중에 크다 가치 있다 하는 것들이 다 그런 것들이라 그것을 향하여 욕망하면서 한 자욱 두 자욱 배우고 닮아가기를 힘을 써서, 대학자와 비슷하면 성공이라, 대과학자와 비슷하게 닮아갔으면 위대하다, 어떤 참 권세자를 부러워 그와 어깨겨룸이 됐으면 대성공이라 하지만 어리석습니다.그것은 정말로 소망의 대상이 안 됩니다!
의지할 대상도 안 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
오늘이 끝인지 내일이 끝인지, 인류 역사가 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을 역사책에 기록해 놓고 뒤에 읽기도 하고 찬양도 하지만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다 불타 버리고 그런 것은 다 멸망으로 끝을 맺고 마는 것입니다.
다만 완전자, 절대자, 영원자, 자존자 이분을 향하여 이분을 따라간 것, 이분을 본받아가고, 배워가고, 닮아가고, 이분화된 것 이것만이 영원합니다. 이것만이 영원합니다!
이것이 아닌 그런 것들을 소망하는, 어두워 저잘난 재미로 사는 자들은 이 복음을 듣고 회개를 해야 할 것입니다. 천하를 차지하면 제가 어쩔 것입니까? 모든 것을 다 가졌으면 제것입니까? 아니오. 때가 되어 ‘놓고 가라’ 하면 다 손 쭉쭉 펴고 뻐드러져서 갑니다.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또 잡고 있으면 뭣 합니까? 모든 것을 주권하시는 주님이 ‘생명을 바꾸어라, 세계를 바꾸어라, 모든 이치를 바꾸어라.’ 이러니까 홍포 입은 부자가 그렇게 구비했지만 세계와 사정이 바꾸어지고 나니까 물 한방울의 자유가 없고 소유권이 없는데,이렇게 허무하게 악령으로 말미암아 속고 있는 인생들에게 절대자 완전자 그분을 닮은 것은 털끝만한 것도 영원히 변동 없고, 그분을 배운 자, 그분을 본받은 자, 그분화 된 자, 그분에게 속한 자, 창조의 근본대로 그분의 것이 된 자 이것은 다 영생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명철하든지 우둔하든지, 장수를 하든지 단명을 하든지, 제대로 날뛰기는 날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허공을 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상대방을 속이고 망쳐서 해치는, 속이고 속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이것으로써 일생을 분망하게 날뛰어, 공연히 성공 아닌 것을 성공이라, 영광 아닌 것을 영광이라, 제것 아닌 것을 제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유관도 삐뚤어졌기 때문에 소유라는 것 하나도 소유할 대로 바로 소유하지 못하지, 영광도, 존귀도, 권세도, 생명도 … 이렇게 인생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네가 해 아래서 일생을 산 것이 너에게 유익된 것이 무엇이 있느냐? 추호도 없다.” 호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속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영원히 속지 아니할 이 참을 잡고, 참을 소망하고, 참에게 속해서 참을 이루어 나가게 되는 이것이 기독자의 구원인데 이것이 뭣 때문에 된 줄 압니까?
하나님이 인간되어 대신 죽으신 것과 또 창조주가 우리 위해서 피조물로 다시 살아나신 것과 이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완성을 주시려는 이 완성 준공 작업을 책임맡으신 시공자이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믿음과 소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정말로 인생이 어둡고 어리석고 어리고 너무 그릇이 작아서, 없어질 빌딩 한채가 제게 오면 수입인 줄로 알지만 우주의 상속자가 된다 해도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에누리되고 거짓말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짓되기 때문에 인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제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이제 이 모든 병원 치우고 부족하지만 나도 조그만한 시골 교회 가 가지고 봉사하다가 끝을 마치겠다는 생각이 있는데 어떻습니까?’ 하는 것을 묻습디다. 좋은 깨달음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모든 것이 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데, 눈만 가지고 안 되고 발만 가지고 안 되니, 어린 아이의 눈은 어린 아이만치 일하고 유력한 사람의 눈이라면 그 눈은 일도 유력하게 한다. 어쨌건 복음에 더 유익되도록 쓰여지는 자 되는 것이 그것이 가장 자체로서는 복된 길이다’ 하는 그런 뜻의 말을 간단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에누리하지 맙시다.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 말씀은 획 하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 말씀 한 말씀에 ‘요것은 가치가 얼마밖에 없다’ 하면 그대로 믿으십시오. ‘요것은 천하 인간이 다 옳다 해도 요것은 틀렸다’ 하거든 그대로 믿으십시오.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에누리하는 이 죄를 회개해야 모든 저주와 화를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털끝만치도 에누리가 없습니다. 그대로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진 소망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예수님이 땅위에서 이 걸음 걸어갈 때에 이 걸음을 누가 저주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누가 미련타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누가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누가 실패자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생활 방편이 만유주에게 영광을, 모든 피조물들에게 영광을, 만유주를 만족케 하고 피조물을 다 감탄케 하는 그것이 생명의 권위 있는 방편의 길입니다.
이 길을 주셔서 이 길을 성공하게 하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믿는다는 것은 그에게 소망한다는 것이요, 그를 따라간다는 것이오, 믿는다는 말을 한 말로 말하면 좇아간다, 따라간다, 배워간다, 닮아간다, 동화되어 간다, 성화되어 간다 하는 말이요, 그와 같이 되어져 가는 그 과정을 가리켜서 믿는다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거짓된 피조물들에게 소망 두고 그걸 따라서, ‘나는 어떤 이런 위대한 인물을 따라갔다’ 암만 따라갔지만 그런 것이 하나님만은 못합니다. 또 그는 존재의 기간이 짧습니다.
모든 법이 단일법이 나올 때에 전체는 다 정죄받아서 다 저주받을, 자기끼리 만들어 놓은 법에-요새도 보니까 일본 나라에서는 암살자라고 욕을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애국자라고 말하지, 그 시비를 하는데 나는 그 시비하는 것을 뭣 때문에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거야 그렇지. 그 사람들로 말하면 암살자이지. 우리로 말하면 애국자이지. 그 사람들이 암살자라 하는 그 말이 그것은 옳은 말이지. 자기들에게 대해서는 그렇지. 우리에게 대해서는 이렇지.
세상 조직과 단체와 민족과 방언과 모든 나라는 이렇게 국부적으로 돌박돌박 다 이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서로 서로 상치해서 경쟁적으로 살고 있지만 마지막에는 최종 판결이 옵니다. 최종 결정이 옵니다.
이것을 한말로 말해서 모든 것은 불에 타고 모든 것이 다 환하게 드러나서, 오늘은 보니까 이 나라에서는 역적이 저 나라에는 충신인데 이다음에 가서 단일의 나라가 나타나고 보니까 모든 것이 ‘아, 이것도 망해야 되겠다 저것도 망해야 되겠다.’ 완전이라는 하나 외에는 다 망해야 된다는 것을 자기들이 인정하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것들도 다 주라 찬양한다” 했습니다.
이렇게 헛된 소망을 가지고 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의 완전, 지능의 완전,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완전히 닮아서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갖추는, 예수님의 공로를 바탕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이루는 이 작업을 책임맡은 자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성령님이오. 예수님의 공로로 인하여, 공로를 밑천삼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게 하려고 이 역사를 시작하신 이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에게 소망 두게 됐습니다.
이분 아니면 소망해 봤자, 석가모니가 소라 고동이가 머리에 오르기까지 명상을 하고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도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왜? 천하에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얻을 이름이 없다고 단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일편단심 가진다고, 성심 성의 가진다고, 충성과 인내를 가진다고, 안 됩니다. 유한한 자는 아무래도 유한입니다. 유한한 자는 억만 번 되새겨도 유한입니다. 유한의 인간이 무한의 하나님의 것은 받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완전하시고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이 하나님의 형상을 갖추어 가도록 하는 이 공사를 책임맡으시고 나섰습니다. 이분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고, 배워갈 수 있고, 본받아갈 수 있고, 그와 지식이 공통되고, 그와 능력이 동일되고, 그의 형상으로 완전히 동일화될 수 있는 지극히 큰 구원이 우리에게 소망됐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네가 닮아가고 배워가고 본받아갈 …, 앞으로 네가 성화, 동화, 변화될 그 대상이 하나님이 되어 있고, 네가 앞으로 어떤 자 될 것이냐?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입는 자, 하나님같이 될 자입니다. 하나님같이. 하나님 된다 말은 아니오.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서 하나님같이 될 자입니다.
감히 우리가 하나님같이 된다는 이 말이 오늘 세계에 조직신학에 나오지를 아니했습니다. 이 말을 못 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과 그리스도의 깨끗하심과 같이 깨끗하라” 하는 이것은, ‘인간이 이렇게 안 되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되라 하는데 못 됐기 때문에, 다른 일을 아무리 했다 할지라도 이것을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죄받는다, 인간은 다 하나님 법을 행하지 못한 인간이다.’ 정죄하기 위해서 이 말씀이 있지 이 말씀대로 인생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해석한 학자가 대신학자들의 해석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같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꼭 같은 아들이 됩니다. 그러나, 영원히 가도 우리는 피조물이지 창조주 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갖추어 입습니다. 오늘에 이 지극히 큰 일을 우리 단독이는 안 되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입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이 건설, 시은의 구속의 완료의 이 역사의 능력을 힙입어서 우리는 가능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습니다. “믿음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요 말씀도 참 믿어야 되겠는데.
믿음이 하나님께 있게 했다 그말은 우리의 희망이, 당신이 우리의 목표라 그말이오. 그걸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했다 그말은, 피조물의 무슨 열심이나 단합이나 협동이나 이것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에게 이 지극히 큰 것을 해 주실 그분에게 소망을 둡니다. 그분의 솜씨를 믿습니다. 그분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분의 변치 않는 계약을 믿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됩니다.
악령과 죄악이 제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것 때문에 주님이 대속하셨고, 아무리 죄악이 능란한 유혹을 준다 할지라도 우리를 책임지시고 구속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고 남음이 있는 이 소망을 우리는 하나님에게 둡니다!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 그말은 마음과 고기덩어리를 깨끗하게 한다 그말입니다. 육을 깨끗하게 한다 그말입니다.
우리는 오늘에 육을 깨끗하게 할 때요. 깨끗하게 하다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원 형상을 도로 찾는 그것이 우리의 심신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심신에 거짓부리 있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 깨끗해지는 것이요, 갖출 것을 다 갖춘 것이 깨끗해지는 것이는 것이니, 오늘은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할 때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을, 우리의 사상이나 우리의 감정이나 신경이나 이 모든 것을 합해서, 사상이나 기억이나 이런 걸 가리켜서 마음이라 이러는데,과학자들이 인체를 연구하면 아마 놀랄 것입니다. 인간이 오늘은 다 안 줄 알았는데 내일 또 새것이 또 나오지요. 새 발견이 또 나오지요. 이렇게 형언할 수 없는 심의 요소 육의 요소, 한없는 이것을 깨끗하게 조물주 그분의 목적대로,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성질대로, 그분의 속성대로 완전 개조 변화해서 입어야 할 때가 오늘이라.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하라」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영혼도 세계의 신학교가 아직까지 영혼에 대해서 정의가 없습니다. 영도 혼도 몸도 아직까지 통일되지 아니했습니다. ‘마음은 사람의 영이라. 양심이 영이라. 마음은 육덩이 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 이렇게 아직까지 영도 영혼도 마음도 고기덩어리도 여기에 대한 지식이 통일되지 아니했으니, 그것이 분명히 하나인데, 옳은 것은 하나뿐일 것인데 이 삐뚤어진 것들이 세계를 점령하고 인간을 이리 저리 머물게 해 가지고 머뭇거리고 비틀거리면서 바른 길을 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 말세입니다. 듣는 자가 복이 있고 깨닫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영혼을 깨끗하게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얼마든지 우리의 사상을 깨끗하게, 우리의 신경을 깨끗하게, 우리의 감정을 깨끗하게, 우리 욕심을 깨끗하게, 우리의 사상을 깨끗하게, 우리의 비판과 지식을 깨끗하게, 모든 지능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때입니다.
이러니까,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같이, 이 심신이 하나님같이 되어 하나님과 동하고 정하는 것이 일치되도록 이렇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 사랑에 대해서 지난번 대구집회 때 말라기서를 통해서 강조를 했습니다. 사랑을 사람들에게 혼돈 혼잡시키는 데서 하나님의 진노가 제일 크게 쌓여 있습니다.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다니? 무엇을 말합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형제를 죄에서 벗겨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에게 피동되어 하나님과 같이 동하고 정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밀접한 결합이 되어서 한덩어리 만드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것 외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이 일을 얼마든지 해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일 하는 것은 냉수 한 그릇을 대접했으면 내가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않겠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약속과 보상의 계약을 가진 우리들이 얼마든지 형제를 거짓 없이 바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이 지식과 지능을 알았으니 뜨겁게 사랑하라! 사랑해라! 후회 없이 해라!
여러분들, 이 세계 전인류에 거짓부리의 생애 똘똘 다 뭉쳐도 어떤 의인의 하루의 생애 가치를 대조할 수 없는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것이 세상이오. 이렇게 속고 있소. 우물거리니까 큰 줄 알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한 것은 많든지 크든지 다 불살라질 것뿐인 것입니다.
이런고로 하나님 말씀을 에누리하지 맙시다. “뜨겁게 사랑하라” ‘사랑했는데 잘못됐으면 벌이 있을 터인데’ 「후회 없이」 삐뚤어지지 않게 얼마든지 사랑해서, 사랑해서, “냉수 한 그릇에도 그 상을 잃지 않겠다” 하는 이 보상자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 일을 밤낮으로 쉬지 않고 얼마든지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여, 사랑하고 사랑하니까 그 가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있다가 ‘나는 중간반 반사 하는 것이 너무 마음이 눌려서 하지 못하겠다.’ 내가 말하기를 ‘네가 마음이 눌려서 안 하면 못 견디는 그 마음 가지고 하루 이틀 산 것이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일 년을 해 가지고 그 계산을 네가 봤으면 놀랄 것이다.
네가 매인 데 없이 자유롭게 아무인간 구원에 눌리지 아니하고 이래 가지고 하루 산 것이 날아가는 것같이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일 년도 퍼뜩 지나가서, 하나님의 이 진리에, 사랑에 붙들려 책임져서, 눌리지 아니하고 자유하는 그 자유는 살도 찌나 그 별것 없고 나중에 가 보면 참 얼마 놀지 아니했는데 다 허공 쳤고, 네가 붙들려 생활하는 것이 고생스럽지만 그 하루 하루의 수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네가 뒤에 가면 놀랄 것이다. 네가 복 있는 걸음을 망령되지 말고 충성해라.’ 내가 그런 말을 어떤 사람에게 말해 줬습니다.
어리석지 맙시다. 속지 맙시다.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에 사랑하라」 「뜨겁게 사랑하라」 「뜨겁게 사랑하라」 이것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만유의 주재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으로 더불어 밀접한 교제가 되는 것과 그분을 대접하는 것, 그분을 사귀는 것, 그분을 섬기는 것, 그분과 동거 동행하는 것 이것이 오늘에 인간이 멸시하는 이 복음에서 이루어진다는 이 사실을 인간들이 알면 잘난 욕심쟁이들이 다 차지해 버리고 우리에게 올 것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속지 마십시오.
속지 마십시오.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피차에 뜨겁게 사랑하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이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했습니다. 에누리하지 마십시오.
돌아서야 됩니다. 돌아서야 됩니다!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오늘 우리가 보고 좋다고 날뛰고 있는 그 보이는 세계가 이 시간으로 끝날지 모릅니다.무엇을 가리켜서 ‘이는 든든하다, 이는 요동이 없다, 이는 하루는 보존될 것이다.’ 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리석지 마십시오. 젊음도 보증 못 하고 건강도 보증 못 합니다.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마십시오. 오늘에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해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이분이 부산 서교회 목사였던가요? 그렇게 훌륭한 복음을 전하면서도 큰 교회를 목회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불행히 사고사를 당했지만 본인 잘못이 아닌 미치광이의 짓이었음은 하나님이 아시는 일이라 믿어집니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얼마전부터 백영희 목사님의 글과 그곳의 홈피를 운영하시는 목사님의 글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 목사제도가 마음에 걸려 그리 큰 것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글을 읽으면서 백영희 목사님의 경유
야 말로 진정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어린양들을 말씀으로 먹이는 장로님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곳의 홈피 여러곳에서 목사제도에 대한 글들도 있으니 참조하시면 좋을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
저는 목사제도 자체에 대한 비판과 분별의 문제를 실제적인 목사들 개인들의 문제와는 구분합니다. 그것은 개혁주의적인 접근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되고 또 복수 장로제도에서도 두드러진 인물들은 나오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어느 목사이든 성경에 충실하도록 돌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토브님하고 신앙이 맞을 듯하네요.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으로 나눈 신학인데, 삼분설과 신인협동적 성화를 강조하죠
아멘 주 예수여
형제 사랑 하기를 잘 보여 주셨는데
왜 저는 마음이 무거울까요
훌륭한 설교가들의 특징은 구속, 대속, 맏아들 그리스도 닮기, 이웃사랑을 가르치는 말씀들로 가득차있지, 십일조 내라 헌금내라, 건축헌금, 교회 봉사, 목사섬기기( 숭배) 잘하라, 이런 말은 찾아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분의 교회에 어떤 분이 새벽기도때 찾아갔는데 옆에 앉아서 기도하던 고교 학생이 자기 부모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보고 놀랬다고 했습니다. 2만명이 넘는 교회를 운영하면서 복음을 충실히 전했는데 이런 자세와 열정은 소위 구원파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새벽에 어느 정신병자의 칼에 찔려 돌아가셨지요.
제가 백영희 목사님이 서부교회 출신입니다
놀라운 영적 수준의 깊은 내용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설교시 죽는 것에 대한 얘기가 꾸준히 있었고
칼에 맞아 죽을 때의 고통을 미리 조금씩 적응 해야한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결국 본인의 설교 내용대로 돌아 가셨음을 알고 저도 놀랐습니다.
목사님과 그 말씀들을 존경해서 카페도 생겨나고 했습니다만...
일반 교회들 보다는 수준 높은 말씀이었지만
죄사함의 복음 수준에 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회개의 중요성을 그토록 깊이 강조했지만
정작 영원한 속죄의 예수님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진솔된 자세 경건의 모양은 있었지만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속죄와 생명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