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참고말씀: 마8:29; 막1:23,24; 3:11,12; 약2:19
읽을말씀: 계3:20
주제말씀: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첫째, 지적인 앎으로는 부족합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행19:15)
여러분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곧 크리스천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입니까? 소위 ‘가나안 교인들’은 “내가 비록 교회에는 안 나가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 같은 교회 밖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진실한 크리스천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들은 것은 있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지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제대로 만나지는 못한 것입니다.
한 번 물어봅시다. 요즘 잘 나가는 연예인 한 사람을 알고 있다고 칩시다. 그를 단순히 알고만 있는 것과 직접 그를 만나서 교제한 것이 같습니까? 전혀 같지 않습니다. 그를 직접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리 매스컴을 통해 그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습득한다고 해도, 진정으로 그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를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순 없습니다. 사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알까요? 모를까요? 당연히 알고 있지요. 이는 성경 여기저기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될 수 있습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행19:15) /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특히 복음서를 보면, 귀신들이 예수님의 신분을 대놓고 떠들어서 골치가 아플 정도였으니까요.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마8:29) /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1:23,24) /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막3:11,12)
혹자는 예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아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상관이 있습니다. 지적인 앎만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탄과 귀신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결국 그것들은 마지막 날에 어떻게 되고 말 것입니까? 그들을 위해 예비 된 영원한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지고 말 것입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20:10)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예수님을 단순히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크리스천입니까? 이제라도 진정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려면, 지식적으로 아는 단계를 넘어서 어떤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까? 인격적으로 만나는 단계입니다. 한 연예인을 단순히 알고 있는 단계를 넘어서 그를 직접 만나서 교제해야 하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단순히 알지만 말고 제대로 만나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까? 스스로 예수님께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엶으로써 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지금도 예수님은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시는데,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3:20 상) 내가 먼저 열지 않으시면 그분은 절대로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왜 우리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으십니까? 그분은 인격적인 만남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여러분의 집에 쳐들어오고, 여러분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여러분과 강제로 함께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마음이 별로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여러분이 초대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고, 여러분이 마음 문을 열 때까지 밖에 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까지 그분을 기다리게 할 작정이며, 어느 때까지 그분을 밖에서 세워두실 작정입니까? 이제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초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라도 문을 열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시고 우리와 계속 교제를 이어가시게 됩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하) 이런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예배시간이 기다려지고, 스스로 성경 말씀을 읽고 싶고, 스스로 기도하고 싶고, 화려한 음악이 없이도 찬양하고 싶어집니다. 우리의 경우도 그렇습니까? 혹 아직까지 나에게 이런 것이 없으면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사람들은 왜 예수님께 문을 잘 열지 않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다른 데 한 눈을 팔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이나 사람들, 현란한 사운드나 화려한 영상에 심취해 있느라, 도무지 예수님을 바라볼 눈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배당 안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 안에 있다고 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작 뒷전인 채 종일 사람들만 보고 있다가 집에 갑니다. 앞에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찬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노래 실력을 뽐내는 자리이고, 악기로 찬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악기연주만 할 뿐 전혀 찬양하지 않고 있으며, 예배당에 와서 예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억지로 와서 앉아 있을 뿐 전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고 있으며, 현란한 사운드에 맞춰서 찬양한다고 하지만 가사 묵상은 전혀 하지 않으며, 종일 예배당에 남아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것 같지만 한 번도 주님과의 대화를 하지 않은 채 집에 돌아갑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왜 교회에 오셨습니까? 왜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누구를 만나기 위해 오셨습니까? 사람입니까? 사람들은 교회 밖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현란한 사운드입니까? 그런 건은 교회 밖에서도 훨씬 더 많이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이제라도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간절히 찾는 자가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명심하십시오. ‘예수님을 만나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믿음도 성장하고, ‘예수님을 만나야’ 기도가 시작되며, ‘예수님을 만나야’ 말씀을 읽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야’ 새 노래로 찬양하게 되며, ‘예수님을 만나야’ 소원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원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예수님부터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나님의 소원을 받을 수 있고 ‘매일같이 예수님을 만나야’ 그 소원을 이루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