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佛像) 불사와 화장실(化粧室) 불사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셨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四句偈)만 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에게 말하여 주면 그 복덕은 저 칠보(七寶)를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殊勝)하리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수보리야, 여러 부처님과 부처님들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 모두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니라.”
이것은 법시(法施)의 복덕이 재시(財施)의 복덕보다 더 크다는 말씀이다.
물질의 복이나 물질의 공덕보다는 진리의 복과 공덕, 법의 복과 공덕이 더 크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우리 불자들이 흔히들 동참하는 불사와 연결하여 보시하는 마음가짐에 대하여 언급해 보자.
불사(佛事)에 시주하면 복이 깃든다고 한다. 그래서 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시주를 즐겨 한다.
그런데 시주를 할 때 참으로 이상한 일이 있다.
그것은 불상을 모신다고 할 때 돈 많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부처님을 모시는 데 필요한 경비는 저 혼자 모두 내겠습니다.
스님! 절대로 다른 사람의 돈을 받으시면 안 됩니다.”
화장실을 만들거나 길을 닦거나 계단을 만들 때는 보시하고자 하지 않으면서
불상을 모시는 대는 왜 혼자 독차지하려는 것인가? 바로 복덕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조성하여 길이길이 축복받으며 잘살아 보겠다는 바로 그 욕심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보시에도 복덕은 뒤따른다.
하지만 끝이 있는 복을 지을지언정 자신의 깨달음과는 전혀 무관하다.
오히려 복덕을 독차지하고자 하는 그 욕심에 대한 과보는 “나”의 몫이 된다.
따라서 참으로 잘 보시하고자 하면 평소에 정성껏 축원하며 모은 돈이나 물질로 시주를 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나를 자주 찾아오는 한 사람의 예를 들어 보겠다.
박봉의 남편 월급으로 아들딸 넷을 기르며 살았던 보살은 절에는 다니고 있었으나 보시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어느 해 정월 대보름날 보살은 서울- 성북동의 정법사에 갔다가
한 신도가 부처님 전에 쌀 두 가마니를 기부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도 부처님께 바치고 싶다!”
하지만 쌀 한 되 따로 살 형편이 되지 않았던 보살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가족의 아침밥을 하고 저녁밥을 지을 때 쌀 한 숟가락만 덜어내어 따로 모으자.
그것을 부처님께 바쳐야지.’
그날부터 보살은 밥을 지을 때마다 쌀 한 숟가락씩을 덜어 다른 봉지에 담으면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축원을 올렸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절에 가지고 가서 쌀 봉지를 부처님께 바쳤다.
그런데 묘한 일이 일어났다. 그 이후로는 양식 때문에 고생하는 일이 없어졌고
남편 일도 잘 풀리고 자식들은 모두 대학을 나와 결혼하고 아들딸 낳고 아무런 탈 없이 잘살게 된 것이다.
그 뒤 보살은 꾸준히 쌀을 모으면서 염한 축원과 보시 공덕의 체험담을 주변의 신도들에게 들려주며 권했다.
“내가 그렇게 해보니 참으로 영험이 있습디다.
한번 해보세요, 정말 기대 이상의 가피가 따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주변의 사람들도 그 보살처럼 축원하고 훌륭한 결실을 거뒀다는 것이다.
이 보살처럼 정성이 깃든 공양미,
“나”의 축원이 깃든 공양미를 부처님 전에 올릴 때 복덕이 함께 갖추어진다.
복덕은 물질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성이 깃들어야 한다.
돈이 있다고 하여 불사(佛事)에 마구 돈을 희사하기보다는 정성이 깃들고 축원이 깃든 돈을 바쳐야 한다.
오히려 평소 불사에 쓸 돈을 모으십시오.
가족이 셋이면 셋, 넷이면 넷, 한 사람당 오백 원도 좋고 천원도 좋다.
형편대로 쉽게 할 수 있는 액수를 정하여 저금통에 넣어라. 그런데 절대로 그 돈을 그냥 넣지 마라.
남편 몫으로 돈을 넣으면서 남편을 축원해 드리고, 아들 몫으로 돈을 넣으면서 아들을 축원해 주고,
딸의 몫으로 돈을 넣으면서 딸을 축원해 주고, 내 몫으로 돈을 넣으면서 내 축원을 해라.
“부처님! 이 돈은 ○○의 몫입니다. ○○가 항상 건강하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하옵소서.”
하루 이틀 생각하다가 말고 답답하면 하는 축원이 아니라 매일매일 꾸준히 하는 축원이라야 결실을 거둔다.
거듭거듭 끈기 있게 밀고 나가는 축원이라야 힘이 모이고,
힘이 모여야 능히 어려움과 장애를 돌파할 수 있는 것이다.
간절히 축원해라. 그리고 모은 돈으로 불사(佛事)하라.
스님에게 드려서 불사에 쓰도록 하여도 좋고 법공양에 사용하여도 좋고 가난한 이웃에게 주어도 좋다.
특히 법보시(法布施)에 사용하면 그 복과 공덕은 더욱 커진다.
왜냐하면 법보시(法布施)를 통하여 서로의 깨달음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법보시(法布施)야말로 서로를 근원적으로 살리고
근원적으로 복덕을 쌓게 해 주는 진정한 불사(佛事)라는 걸 잊지 마라.
하지만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이 법보시에 대한 집착까지도 허락하지 않으셨고
그 집착을 비우기 위하여 말씀 하셨다.
“수보리야,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니라.”
법이란 그 이름이 법일 뿐 절대로 집착하지 말라는 뜻에서 이렇게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면 이제까지 공부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자.
『금강경』의 대의는 철두철미하게 대우주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절대 공(空)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금강경』의 법문은 현재 우상과 계급과 착각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을 철저히 부정하여 털어내고자 한다.
곧 우상과 착각이라는 병(病)을 치료하기 위하여 끝없는 부정의 법문을 펼치는 것이다.
가만히 자신을 되돌아보자. 우리는 언제나 상대적인 생각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다.
있다, 없다, 부처다, 중생(衆生)이다, 스님이다, 신도(信徒)다, 깨쳤다, 미(迷) 했다, 안다, 모른다,
영리하다, 둔하다, 좋다, 나쁘다, 등등의 두 극단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인 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이상에는 대우주의 보편타당한 진리를 체험할 수도 없고
절대적인 자유나 행복도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상대적인 세계에 빠져-있는 인간의 집착을 모두 놓아 버릴 것을 가르치고 있다.
“무주상(無住相) 하라.”
“무위법(無爲法)으로 살아라.”
“신상(身相)은 신상(身相)이 아니다.”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불법(佛法)이 아니다.”
정녕 『금강경』을 공부하는 우리는 부처님에 대한 모습의 집착도
내가 아는 불법에 대한 집착도 넘어서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나”와 진리에 대한 집착까지 완전히 놓아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상에 집착함이 없는 무주상(無住相)을 실천하고
봄바람과 같은 무위법(無爲法)을 쓰며 살아야 한다.
봄바람은 “저 나무의 꽃을 붉게 만들어야겠다. 노랗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없다.
그냥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나무에 따스한 바람을 안겨 준다.
『금강경』을 공부하는 우리도 이 봄바람처럼 되어야 한다.
아들이니까 이렇게 해 주고 딸이니까 저렇게 해 준다는 차별적인 생각을 놓아 버리고
“내 자식이다, 내 남편이고 내 아내다”는 집착을 놓아 버리고 봄바람처럼 해 주어야 한다.
정성을 다하는 봄바람이 되어 아들은 아들 대로, 딸은 딸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각각 자기의 본성에 따라 계발을 할 수 있도록 해드리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하냐?
처음부터 “나”의 쪽에서 상대에 대한 희망과 관념을 만들어 놓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이렇게 하는데 우리의 실천이 어떻게 바를 수가 있나?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하고 위한다면 봄바람처럼 해 줄 뿐 “나”의 관념이나 희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으면서 기도하고 절하고 매달리면서도 뜻과 같이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누가 이 문제를 풀어야 하나? 열쇠를 쥔 사람이 풀어야 하며 그 열쇠를 쥔 사람은 바로 “나”이다.
열쇠!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을 확 풀어 버리면 된다.
얽히고설킨 나의 마음을 풀고 봄바람이 되는 것, 봄바람이 되어 모두 함께 살아나는 것,
이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 <우룡 스님 – 금강경 강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