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6 : 21. 보물이 있는 곳 22. 눈은 몸의 등불
마 6 : 21. 보물이 있는 곳 -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
우리의 보물과 우리의 마음은 같이 간다. 우리는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일들을 위해 마음을 쓰고 돈도 쓴다.
자녀를 보물로 여기는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아내를 보물로 여기는 사람은 부인 위해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고 처갓집을 위해 돈을 쓰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젊을 때 어려운 유학생활 중에, 비록 먹을 것은 많이 사지 못하고 입을 옷은 때때로 헌옷을 사 입었지만, 사명자로서 성경과 신학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책들을 사려고 애썼다.
1]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신앙인의 영원한 경구인 본문의 요지는,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그 사람 인격의 중심, 즉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지(知). 정(精), 의(義)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그의 마음에 틈타서 반드시 그의 행동의 방향과 그의 가치관을 결정짓고 만다.
이에 대해 칼뱅(Calvin)은 말하기를 명예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는 분명 야망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고, 돈을 최고로 여기는 자는 돈의 노예가 되며, 쾌락을 제일 좋아하는 자는 필연코 방탕에 빠지게 된다.'라고 가르친 바 있다.
그러나 위의 것을 늘 생각하고 천국의 법에 지배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항상 선한 일에 힘쓰게 되며, 또한 그들의 행적(行蹟)이 언제까지나 남아 그에게 영원한 기쁨이 될 것이다.
* 골 3: 1-2 –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 계 14: 13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전도와 교회 설립을 위해, 주의 이름으로 하는 구제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더 귀하시다. 그는 우리의 가장 귀한 보화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우리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그의 사랑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이 크다.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가 얻은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신분의 회복과 영생과 천국 기업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이 크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전도를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교회 설립과 부흥을 위해, 신학교 설립과 운영을 위해, 문서 사역, 인터넷 사역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다.
2] 물질을 좇는 사람
현대를 가리켜 물질 지상주의라고 말한다. 이는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에서 비롯된 사상으로서 오직 물질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배격하고 물질만을 좇는 어리석은 군상들은 오늘도 부자가 되려는 욕망으로 물질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다. 물질은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지만 물질만을 중요시하여 물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영혼은 황폐하고 비참하다. 우리는 본문을 중심으로 물질과 신앙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주위에도 있을 '물질만을 좇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자.
(1) 물질과 신앙
① 물질은 신앙생활을 방해한다.
물질 때문에 예수 믿기가 어렵다는 사람들의 말을 종종 들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틀린 말이다. 기독교 신앙은 물질의 많고 적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 물질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즉 물질에 마음이 있다 보니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하나님을 멀리하니 그 틈을 타서 마귀가 유혹하게 된다.
실제로 영리적인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질적 축복만을 바라고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다. 물질이 목적이 되어 버린 이러한 신앙은 모두 잘못된 신앙이다. 우리는 물질과 신앙을 잘 구별하여 물질로 인하여 신앙이 위축되거나 방해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② 물질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어떤 부자가 풍년이 들어 많은 곡물을 추수하여 막대한 재물을 창고에 들였다. 그는 벌어들인 재물을 믿고 이제부터는 평안히 쉬면서 인생을 즐기고자 마음먹었다. 이러한 사람을 보고 예수께서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 20)라고 말씀하셨다.
부자는 물질을 믿었다. 물질을 좇는 사람들은 물질을 그들의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신다.
* 막 10: 25 -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물질은 믿을 바가 아니다. 있다가도 없는 것이 물질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 재물이다. 물질은 변한다. 그리고 유동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과 은총을 그의 백성에게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인간의 믿음의 대상이 되신다.
(2) 물질이 주는 피해
① 황금 만능주의는 잘못된 사상을 팽배하게 하였다.
현대 교회의 적 그리스도는 황금 만능주의다. 물질이면 다 된다는 물질주의는 어느덧 교회 안에까지 흘러들어와 복음을 변질시키고 신앙을 호도하고 있다. 곧 하나님의 축복은 물질적인 부요로만 이해하고 물량 위주의 외형만을 취하여 모든 것을 판단한다. 이러한 황금만능주의는 우리가 배척해야 하는 반기독교적인 사상이다.
② 물질은 불평등을 조성한다.
평온하던 가정이 재물로 인하여 불화하게 되고 다정했던 두 사람의 관계가 물질 때문에 깨지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누가복음의 탕자도 순전히 아버지의 유산이 탐이 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재물을 취하여 먼 나라로 떠났다. 물질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변하게 한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아나니아 부부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 생명까지 잃게 되었다.
(3) 성도의 물질
① 성도는 물질을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 가장 귀한 존재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 창 1: 28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물질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를 알지 못하고 물질을 사람의 자리에 놓고 오히려 물질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 그래서 물질에 끌려다니고 있다. 성도는 물질을 정복해야 한다. 그리고 다스려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② 성도는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스리고 인간은 만물(물질)을 다스려야 한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의 위치에다 물질을 끌어올려 하나님을 대신케 하고 물질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금하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물질을 우상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 24) 우리는 물질을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마 6 : 22. 눈은 몸의 등불 -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은 몸의 등불과 같다. 우리의 눈이 좋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지만, 우리의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네게 있는 빛’은 우리의 영안(靈眼), 마음의 눈, 곧 영적 지식, 진리의 지식, 깨달음, 분별력을 가리킨다고 본다.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르고 힘있게 살 수 있으나,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크게 여기고 그 헛된 것들을 위해 시간과 돈과 힘을 낭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 대신에 세상의 것들과 세상일들을 가치 있게 여기는 자들은 영안이 어두운 자들이다.
1]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을 통해 몸이 갈 길을 찾고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눈은 '몸의 등불'이다.
본문에서는 이 '눈'이 은유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지칭하는 것임이 분명하다(Philo). 그러나 '눈'을 단지 상징적 의미뿐 아니라 실제적인 육체의 눈 그 자체의 역할에 대해서도 간과(onerlooking)해서는 안 된다.
육체의 '눈'이 보는 바는 '마음'이 보는 바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육체의 눈이 세상의 것에 심취한다면 그 마음 역시 타락의 늪으로 빠져들 것이며, 반면 육체의 눈이 하늘의 것을 바란다면 그 마음은 신령한 것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2]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하프루스)
이 말은 '주름 없는'이란 뜻으로서 일차적으로는 '건강한', 이차적으로는 '진실한, 단일한, 풍부한, 관대한' 등의 복합적 의미가 있다.
* 고후 11: 3 -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 약 1: 5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이 말은 빛을 받아들이는 '눈'의 상태를 지칭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눈과 마음은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하면'이란 적어도 육체와 마음에 궁극적으로 유익을 얻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건전하다'(is sound, RSV)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두 개의 물체(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를 동시에 바라보는 혼란하고 난시안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직 한 방향으로 '단일한'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진실하고 성실한 상태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3] 온 몸이 밝을 것이요
건전하고 진실한 눈을 통하여 얻은 밝은 빛으로 인하여 몸은 바른 판단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유익을 얻게 하는 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빛 되신 하나님의 신령한 진리를 굴절 없이, 혼선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참으로 신령한 것과 속된 것을 바로 구분할 뿐 아니라 그 빛 안에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진리 그대로 분별하고 평가하며, 또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혜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