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강산을 그리다(6)-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특별전
135. 수옥정(潄玉亭)
이인문(李寅文, 1745~1821), 조선 18세기 후반~ 19세기 전반, 축, 편화, 비단에 엷은 색
(絹本淡彩), 77.0×45.0cm
충북 괴산의 수옥정은 조유수(趙裕壽, 1663~1741)가 1711년 연풍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관
내에 있는 수옥폭포를 바라보는 위치에 건립한 정자이다. 이인문의 이 그림에는 폭포 앞 정
자의 모습이 표현되지 않았다.
이인문은 중인 출신의 화원으로 자는 문욱(文郁), 호는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이
다. <강산무진도>를 비롯해 뛰어난 정형산수(定型山水)를 많이 남겼고, 신위(申緯, 1769~
1845)가 정조 때 화원 중 묘수(妙手)로 김홍도와 김인문을 꼽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
다. 이인문의 산수화는 섬세한 필선과 잘 짜인 구도, 담백한 설채(設彩) 효과가 특징이다.
(이재호)
136. 낙화담(落花潭)
이인문(李寅文, 1745~1821), 조선 18세기 후반~ 19세기 전반, 축, 편화, 비단에 엷은 색
(絹本淡彩), 77.0×45.0cm
낙화담은 가야산 홍류동 계곡에 자리하는데, 오봉산 봉우리를 배경으로 계곡물이 바위 사이
로 떨어져 못을 이룬다. 낙화담은 이 작품 이외에 실경산수로 표현된 예를 찾기 어렵다.
(이재호)
서쪽 높은 언덕을 학사대(學士臺)라 하는데 이곳에 오르면 해인사의 경내(境內)를 다 볼 수
가 있다. 산이 좌우로 감쌌으며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다. 시냇물은 앞으로 쏜살같이 흐르는
데, 종이 만드는 갑문(閘門)과 곡식을 찧는 물방아가 물가를 따라 여기저기에 있다. 시내의
서쪽 높은 절벽에 또 깨끗한 절이 있는데 이름은 원당(願堂)이라 한다. 중이 ‘이곳은 애장왕
이 머무른 곳이다.’ 한다.
가마를 타고 홍하문(紅霞門)으로 나오니 뾰족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시냇물 양
쪽에 서 있다. 홍류동(紅流洞)과 낙화담(落花潭)의 폭포는 하얗게 떨어지고 물에는 녹음이
잠겼으며 나무와 돌이 모두 성낸 듯하고 연하(煙霞)도 사람을 싫어하는 듯하다. 푸른 절벽에
는 이름을 여기저기 새겨 놓아 사람의 흥취(興趣)를 깬다. 원중랑(袁中郞, 명나라 원굉도(袁
宏道)를 가리킨다)이 ‘푸른 산의 흰 돌이 죄 없이 묵형(墨刑)을 받았네.’ 한 말이 참으로 빈
말이 아니다.
―― 청장관 이덕무(靑莊館 李德懋, 1741~1793), 「가야산기(伽倻山記)」에서
137. 경구팔경도(京口八景圖)
심사정(沈師正, 1707~1769), 조선 1768년, 액자,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彩), 27.3×23.8cm
심사정이 서울 근교의 경치를 그린 ≪경구팔경첩≫ 중 한 장면이다. 화면 왼쪽에는 그이 평
생지기이자 당대 최고의 서화가 중 한 명인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화평(畵評)이 함
께 전해지고 있다. 총 8면이었을 ≪경구팔경첩≫은 현재 4점이 전한다.
근경부터 원경까지 꽉 찬 구도로 험준한 암산과 토산 아래 작은 마을의 전경을 그린 이 작품
은 심사정 특유의 습윤한 먹과 푸른색과 담황색의 담채가 돋보인다. 이 시기 실경을 그린 화
가들은 대체로 화면에 지면을 남기는 것에 비해, 이 작품은 구체적인 지명이 남아있지 않아
어디를 그린 것이 알 수 없다.(권혜은)
未知寫得何處眞景 其似與不似始不暇論第 煙雲唵靄 大有幽深靜寂之 趣 是玄齋筆 豹菴
(어느 곳의 실제 풍경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같고 같지 않고는 논할 것이 못 된다.
연기와 구름이 자욱이 피어올라 유심하고 정적인 멋이 있으니 바로 현재(심사정)의 득의작
이로구나. 표암)
138. 피금정도(披襟亭圖)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조선 1789년, 축, 비단에 엷은 색(絹本淡彩), 126.7×69.4cm
1788년 9월 강세황은 장남 인이 강원도 회양부사로 부임하자, 그곳에 머물며 그토록 직접
보고 싶어 했던 금강산을 비롯한 명승지를 여러 차례 유람하였다. 강원도 금화군 금성 남대
천변에 위치한 정자인 피금정은 과거 금강산을 오르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곳으로, 겸재
정선을 비롯하여 많은 화가가 그림으로 남긴 곳이기도 하다. 강세황은 76세의 나이로 금강
산을 유람한 이래, 1788년, 1789년 두 차례 피금정도를 남겼는데, 이 작품은 1789년 작이다.
이 시기 강세황은 실경을 그리는 데 있어 현실적인 묘사보다는 관념산수화에 가깝게 표현하
고자 했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70대 고령의 나이였음에도 실험적인 구도를 시도했던 강세
황의 원숙한 경지에 이른 화격(畫格)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권혜은)
余自幼少 每聞城東之妙嶺 未嘗不心醉 但恨年歲 遇與香齋 過金城之被襟亭 江岸陰陰古木齋
征車暫駐夕陽低 悤悤未暇被襟坐 後約留憑短句題 來坐淮廨之臥治軒 追寫此圖 己酉秋八月 豹翁
(내가 어릴 적부터 성의 동쪽에 묘령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다만 세월이 지나는 것을 유감으로 여겼다. 우연히 향재와 금성의 피금정을 지나가
다 강 언덕이 침침하고 고목들이 가지런한데 지나가는 수레를 잠깐 멈추니 석양이 나지막하
다. 바빠서 미처 피금정에서 옷깃을 헤치고 앉지 못하고 뒷날의 약속을 남겨 두고 짤막한 글
을 쓰노라. 회양의 와치헌에 와 앉아 기억을 더듬어 이 그림을 그린다.
기유년(1789) 가을 8월 표옹)
140. 삼각산 노적봉도(三角山 露積峯圖)
김득신(金得臣, 1754~1822), 조선 1800년, 액자, 비단에 엷은 색(絹本淡彩), 그림 20.3×
14.3cm, 발문 각 20.3×13.8cm
원경의 삼각산 봉우리 아래에 거대한 종과 같은 모습의 노적봉이 솟아있다. 근경에는 왼쪽에
치우쳐 눈 쌓인 소나무 그루가 솟아있으며, 원경의 봉우리 바깥쪽은 먹을 선염(渲染)하여 겨
울밤의 정감을 드러내었다. 실경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담박한 남종문인화풍으로 해석
한 그림이다.
화면 좌우에는 정조와 이태영(李泰永, 1744~1803)의 칠언시가 함께 꾸며져 있다. 정조의
시 「차석름봉운(次石廩峰韻)」은 주희(朱熹, 1130~1200)의 「석름봉(石廩峰)」을 차운
한 것으로, 노적봉을 중국 후난성의 형산의 석름봉에 빗대어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이태영
은 정조의 시를 다시 차운하여 삼각산의 겨울풍경과 풍년에 대한 바람을 노래하였다.
낙관의 ‘경신 칠월 그믐날(庚申七月晦日)’은 정조가 승하한 다음날로, 이태영이 정조를 추모
하는 뜻을 담아 어제시를 옮겨 쓰고, 김득신에게 시의(詩意)를 그림으로 옮기도록 하였을 가
능성이 있다. 김득신은 김홍도, 이인문 등과 함께 정조의 총애를 입었던 화원이다.
(우 정조의 어제시)
漢陽三角際靑天 한양 삼각산 푸른 하늘에 닿았는데
露積峰如石廩傳 노적봉은 석름봉 같다고 전해오네
積廩四方謌笑裏 낟가리 사방에 쌓아놓고 웃고 노래하는 속에
立春新帖願豊年 입춘 신첩 붙이고 풍년을 기원하네
右次石廩峰韻(오른쪽은 석름봉을 차운한 시이다)
(좌 이태영의 시)
雪裏芙蓉聳半天 눈 속 부용꽃이 반쯤 하늘로 솟으니
誰將石廩畵圖傳 누가 석름을 그림으로 전하였나
聖賢一揆詩中意 성현이 한 마음으로 시에 담은 뜻은
祇爲蒼生願有年 오직 백성들의 풍년을 바라네
臣 泰永(신하 이태영)
141.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송도전경(松都全景)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조선 1757년, 17면 첩,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彩),
각 32.8×26.7cm
≪송도기행첩≫은 강세황이 송도(지금의 개성)와 그 북쪽의 오관산(五冠山), 천마산, 성거
산(聖居山) 주변에 위치한 명승지들을 유람하며 남긴 서화첩으로, 총 16점의 그림과 3건의
글로 이루어져있다. 개성은 예로부터 승경기가 많기로 이름난 곳으로 당대 문인들이 선호하
던 여행지 중이 하나였다. 강세황은 1757년 7월에 45세의 나이로 송도를 여행하게 되었는
데, 당시 개성유수였던 오랜 벗 오수채(吳遂采, 1692~1759)가 개성으로 초청하여 함께 송
도를 유람하고 ≪송도기행첩≫을 제작할 수 있었다.
강세황 스스로가 ‘이 첩은 세상 사람들이 일찍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此帖世人不曾一目
擊)’이라 밝힌 바와 같이 ≪송도기행첩≫ 속 그림들은 새롭고 다양한 기법을 시도한 화면들
로 구성되었다. ≪송도기행첩≫은 개성 주변의 명승지를 한데 모은 현존하는 유일한 서화첩
이자 조선 후기 화단에서 실경산수화의 발전과 함께 서양화법의 적극적인 수용이라는 주목
할 만한 업적을 남긴 강세황의 대표작이다.(권혜은)
142.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화담(花潭)
그림 위쪽에 쓴 제발(題跋)이다.
潭以花名 或者潭傍舊有山花之戱耶 此爲徐先生遺址 地以人傳 非但境奇而己 有釣臺 爲先生釣
遊處 後人建逝斯亭
(연못을 ‘꽃’으로 이름 붙였는데 어떤 이는 연못 곁에 예부터 산꽃이 빼어났기 때문이라고 한
다. 이곳은 서경덕 선생의 유지이다. 땅은 그곳과 인연을 맺은 유명한 사람 때문에 후세에 전
해지는 것이지 다만 경치가 빼어나서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낚시하던 대가 있는데 선생께서
낚시하며 노닐던 곳이며 후인이 ‘서사정’을 세웠다.)
143.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백석담(白石潭)
그림 위 오른쪽에 쓴 제발(題跋)이다.
白石潭亦在靈通路倣 白石如雪 方如棊局 淸流布其上四山蒼翠欲滴余時微雨乍晴 景尤絶勝 每
不能忘也
(백석담도 역시 영통으로 가는 길옆에 있다. 돌이 눈처럼 희고 바둑판처럼 네모났다. 맑은 물
이 그 위로 흐르고 사방의 푸른 산 빛이 나에게 뚝뚝 떨어지는 듯하였다. 그때 가랑비가 잠깐
개이자 경치가 더욱 뛰어나 매양 잊을 수가 없다.)
144.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백화담(百花潭)
그림 위 왼쪽에 쓴 제발(題跋)이다.
百花潭石上 有窠臼 俗傳仙人所游 石白泉駛 爲長湍地云 今屬大興山城
(백화담 바위 위에는 구멍이 나 있는데, 선인이 놀던 곳이라고 세간에 전해온다. 바위는 희고
샘물이 세차게 흘러가 경기도 장단지역이 된다고 한다. 지금은 대흥산성에 속한다.)
단풍 벼랑에 말 세우고 시내 따라 걷노라니 歇馬楓厓逐磵行
맑은 소와 흰 바위 몇 굽이나 돌고 돌았는지 澄潭白石幾廻縈
사람을 만나면 깨끗한 모습에 응당 놀라리니 逢人應怪淸眉髮
아침 내내 실컷 물가에 누워 있어서라오 贏得終朝臥水聲
―― 삼산재 김이안(三山齋 金履安, 1722~1791), 「백화담에서 잠시 쉬다(百花潭少憩)」
145.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청심담(淸心潭)
대흥사(大興寺)를 지나 관음굴(觀音窟)에 당도하니, 굴 앞에 마치 방실(房室)처럼 생긴 바
위가 있고 두 석인(石人)이 서 있는데 관음(觀音)이라 하였다. 그 위의 반석은 백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은데 태종대(太宗臺)라 하였으며, 대(臺) 아래에는 시냇물이 고여 있고 수백
마리의 고기가 노니는 것이 환히 보였다. 시내는 보현동(普賢洞)에서 흘러나와 많은 골짜기
들의 물이 모여서 치달리는 것이 마치 만 마리의 말이 적진(敵陣)을 향해 달려가는 듯하며,
바위가 노한 모습으로 불쑥 솟아 거만하게 버티고 서서 다투어 기이한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세찬 물살이 이 바위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충돌하고, 충돌하면 물의 기세가 더욱 세차게 되
어 겹겹의 모래톱을 이루고 급한 여울을 이룬다. 지세가 평평한 곳에서는 물이 깊고 검푸르
며 지세가 험준한 곳에서는 물이 거품을 일으키고 희니, 바로 청심담(淸心潭)이니 기담(妓
潭)이니 마담(馬潭)이니 구담(龜潭)이니 하는 것들로, 갖가지 자태가 모두 기절(奇絶)하다.
이것이 바로 대흥동(大興洞)의 천석(泉石)이다.
―― 월사 이정귀(月沙 李廷龜, 1564~1635), 「유박연기(遊朴淵記)」에서
146.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산성남초(山城南譙)
147.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대흥사(大興寺)
절 뒤편에 있는 큰 고개를 넘으면서 적멸암(寂滅庵)을 굽어보니, 암자가 미륵봉(彌勒峯) 아
래에 있었다. 지름길로 조금 질러가서 박연폭포를 빨리 보고자 하여 곧장 대흥사(大興寺)로
향하였다. 깊은 숲 사이에 한 줄기 길이 나 있는데 소나무와 전나무가 하늘을 가렸으며, 백
줄기로 갈라져서 물이 흘렀으며, 바위와 꽃이 물에 아로비쳤는바, 계곡의 아름다움은 일찍이
보지 못한 바였다. 바위 위에서 잠시 쉬다가 중을 만나서 자세한 말을 듣고 드디어 대흥사로
들어갔다. 개성암(開聖庵) 쪽을 바라다보니 암자는 개성령(開聖嶺) 허리쯤에 있어서 아주
높았으며, 텅 비어서 중이 없었다.
―― 잠곡 김육(潛谷 金堉, 1580~1658), 「천성일록(天聖日錄) 」에서
148.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대승당(大乘堂)
149.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영통동구(靈通洞口)
≪송도기행첩≫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영통동구>는 그림에 강세황이 ‘영통동구에 놓인
돌이 웅장하고 집체만큼 크다. 푸른 이끼가 덮여 있어 얼핏 보면 놀란다.’고 적은 바와 같이,
거대한 바위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는 대담한 구도와 바위에 가한 황색과 청록색을 섞은 선염
(渲染)은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참신하다. 여기에 마치 서양의 수채화처럼 바위에 농
담의 차이를 이용한 음영 표현을 더해 대상을 입체감 있게 재현 하고자 했다.(권혜은)
그림 위 왼쪽에 쓴 제발(題跋)이다.
靈通洞口 亂石壯偉 大如屋子 蒼蘇覆之 乍見駭眼 俗傳龍起於湫底未必信然 然瓌偉之觀 亦所
稀有
(영통동 입구에 커다란 돌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 크기가 집채만 하고 푸른 이끼가 덮여 있
어 잠깐만 봐도 눈을 깜짝 놀라게 한다. 속설에 용이 못 밑에서 나왔다고 전하는데 믿을 만한
것은 못 된다. 그러나 진귀하고 웅장한 구경거리는 보기 드문 것이다.)
150.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마담(馬潭)
저녁 무렵에 대흥동으로 들어가선 晩入大興洞
한바탕 담소하며 술잔을 기울일 뿐 一笑只空罍
이 산의 수석 경치 절로 빼어나니 水石自奇絶
고금에 몇 사람이나 배회하였을꼬 今古幾徘徊
가슴속 쌓인 회포 씻어야겠는데 胸懷政須澆
마담의 물이 마치 잘 익은 술인 듯 馬潭如潑醅
서둘러 오솔길 잡아 돌아가노라니 卒卒取微徑
저녁 비가 높은 산봉우리 적시더라 暮雨濕崔嵬
―― 용재 이행(容齋 李荇, 1478~1534), 「보현봉(普賢峯)에 올라)」에서
151.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태종대(太宗臺)
여기서부터(馬潭) 아래로는 물과 돌이 더욱 많아져서, 지형을 따라 기이한 모습을 드러내어
여울과 폭포를 이루기도 하고 깊은 못을 이루기도 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
는 곳을 만날 적이면 늘 흐뭇한 마음으로 가마에서 내리곤 하였는데, 앉으면 일어설 줄을 모
르고 일어서면 걸음을 뗄 줄을 몰랐다. 그때마다 종자가 앞길이 멀다고 재촉하였지만, 유감
없이 즐긴 뒤에야 떠나고, 가다가 또 멈추곤 하였다.
이렇게 몇 리를 가서 태종대(太宗臺)를 보게 되었는데, 시냇물이 깍지처럼 둘러싸 흐르고 대
(臺) 곁에 서 있는 바위 위에는 늙은 소나무가 기이하고 예스러운 자태로 서려 있었다.
――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1651~1708), 「송경(松京) 유람기」에서
152.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박연(朴淵)
제발(題跋)이다.
天半卉流劈不來 하늘에서 세차게 흘러서 땅을 쪼갤 듯 내려오니
驚雷咫尺廓氛埃 지척의 천둥소리에 속세의 티끌을 시원하게 쓸어버렸네
駭禽辟易飛何向 놀란 새들은 물러나 어디로 날아가려나?
爀日愁陰黯不開 붉은 해도 짙은 그늘 속에 가리어 어둡기만 하구나
153.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왼쪽은 낙월봉(落月峰), 오른쪽은 태안창(泰安倉)
낙월봉 제발(題跋)이다.
泰安倉望見落月峰 峰勢崷崒揷雲 乍見駭魂 山底水濱 有募村數三十戶
(태안창에서 낙월봉을 바라보니 봉우리 형세가 높고 험준하여 구름 속으로 들어가 있는 듯
하여 얼핏 보면 정신이 아찔하다. 산 아래 물가에는 삼십호가 사는 마을이 있다.)
태안창 제발(題跋)이다.
泰安倉斜對負兒峰
(태안창은 부아봉을 비스듬히 마주하고 있다)
154.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왼쪽은 만경대(萬景臺), 오른쪽은 태안석벽(泰安石壁)
만경대 제발(題跋)이다.
入泰安洞門 左右石壁 多奇
(태안동문으로 들어가면 좌우로 석벽이 있는데 기이한 것이 많다)
태안석벽 제발(題跋)이다.
自泰安倉左望山城 有萬景臺 峰極尖秀 亭亭雲表
(태안창에서 왼편으로 산성을 바라보니 만경대가 있는데 봉우리가 매우 뾰족하여 구름 밖으
로 솟아있다.)
첫댓글 송도도 좋은 곳이 많은 가 보네요. 언제 가볼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