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젠킨스의 귀 전쟁과 오스트리아 계승전쟁프리드리히 대왕, 유럽 제1의 군대를 거느리다(1739년 ~ 1748년)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3. 13.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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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젠킨스의 귀 전쟁과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프리드리히 대왕, 유럽 제1의 군대를 거느리다(1739년 ~ 1748년)
요약 유럽의 식민지 전쟁은 ‘젠킨스의 귀 전쟁’과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기술의 수준이 대체로 낮았던 18세기의 상황에서 군사적 천재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 군을 유럽 제1의 군대로 만들며 기강과 훈련을 통해 최고의 전쟁기계를 만들어냈다.
무역과 식민지 문제로 유럽 국가들의 갈등이 이어지다
1713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마무리 수순으로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 유럽은 한 나라의 지나친 세력을 어느 정도 예방하면서 세력균형에 의한 평화시대를 한동안 누렸다. 하지만 무역과 식민지 문제는 다시 일부 지역에서 갈등과 긴장을 유발시켰다. 지브롤터 · 지중해 · 서아프리카 · 아메리카 · 인도 등이 바로 그러한 곳이었다.
영국 선장 젠킨스, 스페인 경비대에 귀가 잘리면서 귀 전쟁이 시작되다
스페인 령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밀수에 관여하게 된 영국 상인들은 스페인 해안경비대로부터 가혹한 대우를 받고 본국정부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또한 1738년 영국의회에서 레베카 호 선장 젠킨스(Robert Jenkins)는 1731년 서인도에서 스페인 경비대에게 한쪽 귀를 잘리었다고 보고했다. 이 사건은 영국에서 곧 정치 쟁점화되고 반스페인 여론을 조장시켰다. 이리하여 드디어 영국은 1739년 10월 스페인을 상대로 '젠킨스의 귀 전쟁'을 시작했다. 한 인간의 '귀'가 원인이 된 유별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영국과 스페인의 해군 경쟁이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악화시키다
이 전쟁에서 영국함대는 카리브 해에서 스페인 함대에게 크게 패했다. 양국은 카리브 해가 아닌 여러 곳에서도 해전을 벌였고, 양국 간의 해군 경쟁은 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한편 영국과 스페인의 관계악화는 연쇄적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프랑스는 스페인 범선을 이용하여 상품을 아메리카에 수출했고, 영국의 값싼 밀수품은 프랑스 시장을 침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가의 영토 분할을 위한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벌어지다
유럽의 식민지전쟁은 1740년에 대륙 내의 큰 분쟁이었던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으로 연결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가 죽고 23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자, 독일 여러 군주들은 이를 부정하고 합스부르크 가의 영토를 분할하는 데 관심을 둠으로써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유럽 각국이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 참여했으나 서로 약한 결속력을 보이다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독일 군주는 프리드리히 2세(대왕)였다. 그는 호엔촐레른 가의 권리를 주장하며 1740년 12월 슐레지엔을 침입했다.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에 경제적 ·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후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를 맺고, 프랑스 · 스페인 · 바바리아는 프로이센 편에 가세하여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양편 다 동맹 내에서 각국 간 복잡한 이해관계로 별로 보잘것없는 결속력을 보였다. 프랑스는 프로이센 지원을 표방했으나, 합스부르크 제국과 싸운다는 명분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영국도 오스트리아 편을 선언했으나, 결코 군대를 파견할 만큼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
과다한 전투가 기피되던 시대, 군대의 기강이 약화되다
그런데 18세기의 전쟁기술은 대체로 수준이 낮았다. 이성을 중시하고 자기만족을 누리던 시대에서 전략가들은 과다한 전투와 섬멸전을 기피하고 포위 기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질이 떨어진 병사들로 충원된 군대는 탈영을 예방하기 위해 고된 훈련과 엄한 기강 확립이 요구되었으나, 장교들에게는 무사안일과 부정부패가 몸에 배어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 최고의 전쟁기계들을 만들어 내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적 천재인 프리드리히 2세와 그가 이끄는 막강한 군대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호엔촐레른 가의 선조들로부터 행정적 · 사회적 조직이 튼튼한 정부와 막강한 군대에 기반을 둔 절대왕정과 군국주의의 전통을 상속받았다.
대왕은 군의 중추인 장교들을 애국심이 높은 프로이센 귀족출신들 가운데서 선발하고, 병사들은 인구가 워낙 적었기 때문에 대부분을 국외에서 끌어모았다. '융커'라고 불린 귀족들은 특권을 받은 대가로 기꺼이 장교 복무를 지원했다. 모든 융커 가문들은 최소한 한 명의 아들을 사관학교에 보냈다. 이들을 최대로 활용하여 대왕은 프로이센군을 유럽 제1의 군대로 만들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전쟁보다 장교들을 더 두려워하도록 하는 기강과 훈련을 통하여 최고의 전쟁기계를 만들어냈다.
프로이센 군, 무자비한 군사훈련으로 기강과 기동성을 확립하다
무자비한 군사훈련에는 두 가지 확고한 목적이 있었다. 첫째, 대부분 질이 낮은 외국용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통제하는 데는 강제력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당시 전쟁에서 승리의 관건은 기동성에 달려 있었는데, 기동성은 엄격한 훈련 아니고는 결코 향상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기 사용도 고도의 훈련으로 기민한 동작을 취하게 함으로써 화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얻어냈다.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군은 움직이는 포대다··· 다른 어느 군대보다 화승총을 세 배는 빨리 장전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군대보다 세 배나 우세하다"고 자신 있게 말한 적이 있었다.
몰비츠 전투
1741년 프로이센은 몰비츠 전투에서 승리했다.
프로이센, 슐레지엔을 점령하고 유럽 강국으로 부상하다
슐레지엔을 전격적으로 점령한 프로이센군은 몰비츠 전투(1741)와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1745)에서도 승리하고 슐레지엔 점령을 완전히 기정사실화했다. 이 전쟁을 통해 프로이센은 당당히 유럽 강국으로 부상했다. 1748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 상실을 인정함으로써 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의 휴전에 지나지 않았으며, 175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다시 7년전쟁에서 맞싸우게 되었다.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
1745년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의 승리로 슐레지엔 지역 점령을 기정사실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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