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억 작사 최영섭 작곡 그리운 금강산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소프라노 홍혜경 노래
조수미 노래
(1절)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 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2절)
비로봉 그 봉우리 예대로 있나
흰 구름 솔 바람도 무심히 가나
발 아래 산해만리 보이지 마라
우리 다 맺힌 슬픔 풀릴 때까지
(후렴)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 가본지 그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그리운 금강산은
한상억이 작사하고
최영섭이 작곡한 한국의 가곡이다.
1962년 초연된 칸타타
아름다운 내강산(한상억 시, 최영섭 작곡)
11곡 중에 포함되었다.
작곡 당시 한상억은 은행원이자
시인이었고,
최영섭은 음악교사였는데,
고향이 강화도로 같은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였다.
KBS(당시 중앙방송)에서는
이주일의 코너에서
매주마다 창작곡을 선보였는데,
1961년에는
한국 전쟁 11주년으로
조국강산을 주제로 한 곡을
이들에 의뢰하였다.
그리운 금강산은
중국과 구 소련의 교포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노래로서
가사는 금강산의 절경과
분단으로 인하여 가지 못하는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진행되자
남북화해 분위기 속에
전파를 많이 타서
국민적인 가곡이 되었다.
19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 방문 예술단 교환 공연에서도
불렸는데,
북한의 전 관중이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가사의 내용 중에는
'더럽힌 지 몇 해',
'우리 다 맺힌 원한',
'더럽힌 자리',
'발 아래 산해만리 보이지 마라,
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 때까지'라는
북한 정권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있어
민족 화합을 조성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이후 가사를 바꾸어
'더립힌 지 몇 해'를
'못 가본 지 몇 해'로,
'우리 다 맺힌 원한'을
'우리 다 맺힌 슬픔',
'더럽힌 자리'가
'예대로인가'로 부르고 있다.
북한에서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있다.
세계적 인지도
그리운 금강산은
국내외의 유명한 성악가 50여 명의
음반에 담겨져 있다.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홍혜경이 함께 부른 음반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안젤라 게오르기우의
'My World'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 독주곡에도
들어 있다.
한편, 스위스 취리히 톤할레 관현악단
내한 공연시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적도 있었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의 탄생은
1962년 6.25 전쟁 12주년 기념식에 연주하려고
당시 문교부가 일년 전 1961년
KBS 방송국에 의뢰하여 세상에 나왔다.
당시 작곡가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최영섭 선생님께 의뢰를 했는데
최영섭 선생님은
고향 선배인 한상억 시인께
노랫말을 부탁하여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한상억 시인의 노랫말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최영섭 선생님은
하룻밤에 작곡을 마쳤다고 전한다.
그리운 금강산은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의 삽입곡
즉 교향적인 합창 모음곡 중 하나였다 한다.
한상억 선생님과 최영섭 선생님은
강화의 자랑이다.
작사자 시인 한상억 선생님은
1915년 강화군 양도면 도장리 출생.
인천고등학교 전신
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우리나라 강산을 예찬하는
시를 주로 써왔다.
인천시 문학상 등을 받았고
시집 평행선의 대결을 출간하는 등
많은 문학활동을 하였다.
선생님은 1992년
아들이 사는 미국에서 돌아가셨다.
작곡가 최영섭 선생님은
1929년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출생,
인천중학교에서 공부하다
경복중학교에 편입하여
6학년 때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서 공부했고
오스트리아 빈 음대로 유학해
지휘와 작곡을 공부하였다.
최영섭 선생님은 90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 건강하시다.
강화에는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두 곳에 있다.
금강산이 멀리 보이는 곳
강화평화전망대에 먼저 세워졌다.
망향의 그리움과 통일의 염원을 담아
비상하는 날개 짓 형태로 제작됐다.
노래비 앞에 서면
조수미, 박인수 등
국, 내외 유명 성악가의 목소리가 담긴
그리운 금강산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또 한곳은
최근에 한상억 선생님 고향
양도면 건평공원에 세워져 있다.
양도면 건평공원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강화 평화전망대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금강산 만물상(萬物相)의 가을 절경
조선중앙통신은
금강산 만물상(萬物相)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천선대(天仙臺)의 가을 풍경 사진을
11월 4일 공개했다.
천선대는 해발 높이 936m의 봉우리로
벼랑 중턱에는
선녀들이 내려와 치장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오는 ‘선녀화장호‘가 있다.
금강산(金剛山)은
태백산맥 북부 강원도(북한)
금강군, 고성군, 통천군에 걸쳐
광범위하게 펼쳐진 산으로,
계절에 따른 아름다움이 각각 달라,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이라 한다.
내금강, 외금강, 신금강, 해금강의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최고봉 비로봉이 솟아 있는
중앙 연봉을 경계로
서쪽은 내금강,
동쪽은 외금강,
외금강의 남쪽 계곡은 신금강,
동단의 해안부는 해금강이다.
1998년 9월부터
바닷길을 통한 해로관광이 시작되었으나
2004년 1월에 중단되었고,
육로 관광은 2003년 9월부터 개방되었다.
2008년 7월 북한군의 피격으로
관광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모든 관광이 잠정 중단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산수 다니기를 즐겨하였고
산수기(山水記) 읽기를 좋아하였다.
와류산수(臥遊山水)라는 말이 있다.
중국 당나라 미술사가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에는
‘화가인 종병(宗炳)이
자신의 늙고 병듦을 슬퍼하면서
산수를 즐기고 싶으나
그곳으로 갈 수 없을 때,
산수화를 감상하는 것으로
그 느낌을 대신할 수 있겠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와유(臥遊)라는 말이 이에서 유래되었다.
강세황은 그의 ‘유금강산기’에서
‘금강산을 그림으로 남긴다면
훗날 누워서도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17세기 조선의 시인 묵객 사이에는
산수 유람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첫손에 꼽히는
유람지가 바로 금강산이었다.
조선시대 명산 탐방의 정점에 있던
금강산의 경우 ‘금강산 문학’이라고 할 만큼
각양각색의 수많은 문학작품을 탄생시켰다.
금강산만큼은 아니지만
이른바 명산이라 불리는 곳은
어디든지 흠모와 묘사의 대상이 되어
많은 작품을 낳았다.
명산 탐방은 일종의 구도 행위였다.
옛사람들의 금강산 기행문 제목에는
‘유(遊)’자가 많다.
남효온(1454~1492년)의 ‘유금강산기’,
김창협(1651~1708년)의 ‘동유기’,
이정구의 ‘유금강산기’,
법종의 ‘유금강록’,
이이의 ‘금강산관유기’,
홍여하의 ‘유풍악기(遊楓嶽記)’,
이옥의 ‘중흥유기(重興遊記)’,
이광수의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
문일평의 ‘동해유기(東海遊記)’ 등
거의 대부분 ‘기(記)’ 앞에 ‘유(遊)’가 붙었다.
근대에 이르러
금강산에 대한 글을 쓴 사람들 중에는
친일 분자들이 꽤 있다.
춘원의 금강산유기,
육당의 금강예찬,
노산의 금강시가 그것이다.
금강산에 관한 글은 많다.
위당 정인보는
1933년 8월 초부터
두 달 동안 금강산 일대를 여행하고
조선일보 1933년 8월 3일~9월 7일자에
‘관동해산록(關東海山錄)’을 연재하였다.
1934년에 박한영은
스승인 난곡 이건방, 이희종, 성완혁 등과
같이 다녀와서
단발령, 만폭동, 표훈사, 마의태자 릉,
신계사, 해금강 등에 관한
금강산기행시를 썼다.
정지용은 박용철과 함께
금강산을 다녀와서
조선일보 1937년 2월 10일~17일에
‘내금강 소묘(內金剛 素描)’ 1, 2,
‘수수어(愁誰語)’를 게재하였다.
금강산을 두 번 다녀왔는데
‘수수어’에서
‘꽃같이 스러진다 해도 아프지 않을 만’하게
산과 하나가 되었으며
‘내 골수에 비치어 사라질 수 없는’
금강산이 되었다고 하였다.
만해 한용운도 경원선을 타고
금강산을 다녀와서
‘만 이천 봉! 무양(無恙)하냐,
금강산아, 너는 너의 님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라고
노래하였다.
조선 말기에 태어나 팔도를 방랑하며
수많은 시와 일화를 남긴
난고(蘭皐) 김병연(1807~1864년)),
속칭 김삿갓도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을 살면서
유독 자주 들렸던 곳이 금강산이라고 한다.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허균, 이황, 이이, 송시열, 이상수,
김창협, 박지원, 김정희, 김삿갓,
최남선, 이광수, 문일평, 이은상,
정비석, 이만부(1664~1732년)의
금강산기 등 수많은 답사기 중에서
특히 어당 이상수의
동행산수기(東行山水記)와
육당 최남선의 금강예찬은
기행문학의 고전이고,
백미라 할 천하의 명작이라고 하였다.
둘 중에서도 육당의 금강예찬이
최고의 명문이라고 극찬하였다.
육당이 금강예찬을 쓰던 시절은
사실상 그의 학문과 문학이 절정에 달한
최고의 경지였다고 한다.
심지어 유홍준은
친일한 ‘육당은 육당이고,
금강예찬은 금강예찬이다’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고 한다.
육당은 자신이 창간한 시대일보
사장직을 사임한 직후인
1924년 가을에는
금강산에 올랐고
1925년 봄에는
백암산과 변산, 무등산, 조계산 등을 거쳐
지리산에 올랐다.
이상수의 동행산수기는
가장 자세하기도 하고,
경험한 바를
섬세하고 기품 있게 표현한 글로
평가받고 있다.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금강산을 다섯 번 다녀왔다.
1998년부터 2년간
현대금강호를 타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모두 보고 왔다.
그는 ‘글로서 다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얻을 수 없다’
(서부진 화부득, 書不盡 畵不得)는
옛말을 생각하며 걱정을 하였으나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5권-
다시 금강을 예찬하다를
해박한 지식과 멋진 문장으로 출판하였다.
동서길이 약 40km,
남북길이 약 60km,
면적은 약 530㎢이다.
최고봉 비로봉(1,638m)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오봉산, 옥녀봉,
상등봉, 선창산, 금수봉,
서쪽에는
영랑봉, 용허봉(룡허봉),
남쪽에는
월출봉, 일출봉, 차일봉, 백마봉,
동쪽에는
세존봉 등이 솟아 있다.
1952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회양(淮陽), 통천(通川), 고성(高城), 인제(麟蹄)의
4개군에 걸쳐 있다.
신생대 제3기 중신세 이후에 진행된
경동성 요곡운동으로 형성되었으며,
화강편마암이 노출된
신금강(新金剛)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조립질(粗粒質)의 흑운모 화강암과
반상(斑狀) 화강암으로 형성되어 있어
절리가 발달되고 풍화침식이 쉽다.
남북으로 뻗은 대단층선을 따라
지층이 단락(斷落)하여
기복이 천수백m에 달하는
단층지괴를 형성함으로써
경관의 골격이 구성되었다.
화강암체가 식어서 굳어질 때 생긴
무수한 수직, 경사, 판상, 궁융상 틈결이
오랜 세월 풍화, 삭박 작용으로
다종다양한 절리가
조밀하게 진행되어,
1만 2000봉이라 일컫는
기묘한 봉우리를 비롯한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을 이루고,
거대한 암괴(岩塊), 암판(岩板) 등이
변화무쌍한 계곡을 이룬다.
수많은 계곡 곳곳에는
폭포, 소, 여울을 이루는
맑은 물이 흐른다.
금강산에는
동해로 흘러드는
남강, 온정천, 천불천, 선창천과
서해로 흘러드는
금강천, 동금강천 등의 하천이 있다.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폭포들이 많은데
그 중 4대 폭포로 이름난
구룡연계곡의 구룡폭포와 비봉폭포,
구성계곡의 옥영폭포,
석문동계곡의 십이폭포 등이 있다.
또 관동팔경의 하나로 이름난
삼일포를 비롯하여
영랑호, 감호 등
자연호수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