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596
■ 2부 장강의 영웅들 (252)
제10권 오월춘추
제 33장 오월춘추(吳越春秋) (2)
며칠 후, 경기(慶忌)는 부하들을 이끌고 다시 예성으로 내려갔다.
그 곳을 본거지로 삼아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아울러 위(衛)나라에서 얻은 자금으로
전함을 수리했다.훈련은 3개월 동안 계속 되었다.
마침내 경기(慶忌)는 오나라 땅으로 쳐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자서와 내통하여
그의 도움을 받는 것뿐이었다. 그 사이 완전히 심복 부하로 삼은 요이(要離)를 불렀다.
"이제 며칠 후면 우리는 출전할 것이오. 그 전에 그대는 오자서와 연락을 취해 일이 어긋나지
않도록 조처해주시오.""그 점이라면 염려 마십시오. 이미 오자서에게 사람을 보내놨습니다."
경기(慶忌)는 기분이 좋았다. 오강(吳江)에 배를 띄워놓고 요이(要離)와 더불어 올라탔다.
흐르는 물결을 안주 삼아 술을 한잔 하려는 것이었다.
"오늘은 모든 것을 잊고 마음껏 취해봅시다. 지금 내 마음은 천하를 얻은 듯 기쁘오."
날씨는 화창하고 바람은 시원했다.
두 사람을 태운 배는 오강 한복판에 이르렀다. 그 사이 서로 권커니 자커니 하며 술을 마셔댔다.
어느 순간 요이(要離)가 오강 상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경기(慶忌)가 뒤돌아보았다.
과연 저 멀리로 한 척의 배가 나타났다. 워낙 거리가 멀어 어느 쪽의 배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요이(要離)가 다시 말했다."공자의 깃발이 꽂혀 있군요. 우리 쪽 배입니다.
본영에서 무슨 연락할 사항이라도 있는 모양입니다."경기(慶忌)는 시력이 나빴다.
몸을 일으켜 세워 다가오는 배를 바라보았다. 요이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는 것이었다.
호위 무사들도 모두 뱃전에 서서 구경했다.완전 무방비 상태였다.'이때다!'
이런 순간이 오기를 그 동안 얼마나 기다려왔던가.요이(要離)는 술상 옆에 세워둔 짧은 창을 재빨리
집어들었다. 아무도 그의 그런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요이가 경기의 바로 뒤편에 서서 외쳤다.
"공자!"경기(慶忌)가 뒤를 돌아다 보았다.순간 요이의 창날이 번뜩였다.
날카로운 창끝은 경기의 가슴을 그대로 관통했다. 어찌나 세게 찔렀는지 등 뒤까지 뚫고 나갔다.
"으헉!"경기(慶忌)는 앞으로 꼬꾸라졌다.
아니 꼬꾸라지기 전에 요이를 끌어안았다. 무서운 괴력이었다.
요이(要離)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경기가 눈을 부릅뜨고 요이를 노려보다가 중얼거렸다.
"네 놈이.......결국 네 놈은.........?"요이(要離)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렇소. 나 요이는 오왕이 보낸 자객이었소. 내가 끝내 그대의 가슴을 찔렀소. 그대는 나에게 졌소."
"후후후, 아직 끝나지 않았다."그러나 힘이 빠지고 있었다.
경기(慶忌)는 요이(要離)를 끌어안은 채 뱃바닥에 주저않았다. 이번에는 혼잣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렇군. 네가 나를 찔렀군. 천하에 나를 찌르는 자가 있다니.......너는 참으로 용사로구나."
뒤늦게 경기(慶忌)가 창에 찔린 것을 안 좌우의 호위 무사들이 일제히 요이를 둘러싸고
창을 들어 찌르려 했다. 경기(慶忌)가 그런 부하들을 돌아보며 제지했다."그만 두어라.
이 사람은 천하의 용사다. 어찌 하룻동안에 천하의 용사 두 사람을 죽게 할 수 있으리오.
너희들은 이 용사를 죽이지 말고 오(吳)나라로 돌아가도록 놓아주어라. 그러면 그는 돌아가
정표(旌表)를 받고 충성을 빛낼 수 있을 것이다."경기(慶忌)는 요이를 끌어안았던 손을 풀었다.
자기 가슴에 박혀 있는 창을 뽑았다. 그러자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나왔다.
경기는 허탈한 눈길로 허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그는 뱃바닥에 앉은 채로 죽었다.
좌우 군사들은 경기의 유언대로 요이를 죽이지 않았다."공자의 뜻이다. 돌아가라!"
그러나 요이(要離)는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좌우 군사들을 향해 말했다.
"세상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 비록 공자가 나를 용서하여 살려주라고 했지만
내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군사 중 하나가 물었다."세상에 용납되지 않는 세 가지란 무엇이냐?"
요이(要離)가 처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서 왕으로부터 이 일을 맡았으니 이는 인(仁)이 아니며,
새 임금을 위하여 전 임금의 아들을 죽였으니 이는 의(義)가 아니며,
남의 일을 성취시키려고 자기 몸을 해치고 집안 식구를 죽였으니 이는 지(智)가 아니다.
이 세가지 잘못을 저지른 내가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말을 마치자 요이(要離)는 몸을 일으켜 강물 속에 몸을 던졌다.
군사들은 황급히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가 요이를 건져냈다.요이(要離)가 물었다.
"너희들은 왜 나를 건져냈느냐?""너야말로 오(吳)나라로 돌아가면 높은 벼슬과 많은 국록을
받을 터인데, 어째서 그것을 버리고 죽으려 하는 것이냐?"
요이(要離)는 한바탕 통곡을 터뜨렸다.
"아내와 자식에게도 애착이 없었던 내가 그까짓 벼슬과 국록을 탐할 것인가. 나의 뜻은 오로지
공자 경기(慶忌)를 죽이는 일이었다. 이제 나는 그것을 이루었다. 더 이상의 욕심은 없다.
너희들은 나의 시체를 가지고 오(吳)나라로 가라. 그러면 그간의 죄를 씻고 큰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고는 곁에 서 있던 군사의 칼을 빼앗아 자기 목을 찌르고 죽었다.
후세의 한 사관(史官)이 요이(要離)의 이러한 행동을 평한 것이 있다.
- 옛 사람들은 죽는 것을 새털보다도 더 가벼이 여겼다.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아내와 자식의
목숨까지도 가벼이 생각했다.지난날 전제(專諸)는 합려를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지만, 그에게는 아들이 있었다.그러나 슬프다.
요이(要離)는 죽은 후에 남긴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어찌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았는가.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공을 이루고 이름을 남겼으니
죽는 것을 오히려 영화(榮華)로 생각했음일까.-
요이(要離) 이후로 칼을 찬 사람들 사이에는 의협(義俠)이 유행하였다. 죽음의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그에 대한 대가는 바라지 않았다.
그뒤로도 오(吳)나라 사람들은 의기(義氣)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관(史官)은 의협(義俠)의 시조로 요이(要離)를 꼽는 것이다.
967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597
■ 2부 장강의 영웅들 (253)
제10권 오월춘추
제 33장 오월춘추(吳越春秋) (3)
경기(慶忌)의 수하 군사들은 요이(要離)와 경기(慶忌)의 시체를 수습하여 수레에 싣고
오성으로 들어가 오왕 합려(闔閭)에게 투항했다.
합려(闔閭)는 경기의 시체를 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 상을 내려준 후 모두 오군(吳軍)에 편입시켰다.아울러 요이(要離)를 상경 벼슬에 대한
예(禮)로써 창문(閶門) 아래에다 장사 지내주었다. 창문(閶門)이란 오성의 서쪽 문을 말한다.
합려는 조사(弔辭)를 읽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대 영혼의 힘을 빌려 우리의 성(城)을 지키리라!
죽은 요이의 아내와 자식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또 따로이 전제(專諸)와 요이(要離)를 위해 사당을 짓고 해마다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주었다.
합려(闔閭)는 골칫거리인 경기를 처치하고 나자 그처럼 기쁠 수가 없었다.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오자서(伍子胥)가 별안간 눈물을 떨구며 아뢰었다.
"이제 왕의 걱정거리는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지금부터 신의 부형(父兄)의
원수를 갚아주십시오."백비(伯嚭)도 덩달아 울며 청했다.
"그렇습니다. 바라건대 군사를 일으켜 초(楚)나라를 쳐주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의 이러한 청에 합려(闔閭)는 속으로 생각했다.'이들은 원수를 갚기 위해
나를 지극히 섬길 뿐이다. 만일 원수를 갚고 나면 지금처럼 나를 위해 힘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오늘은 즐거운 자리요. 마음껏 술을 마시고, 그 일에 대해서는 내일 아침 맑은 정신으로
다시 의논합시다."다음날 아침, 오자서(伍子胥)와 백비는 함께 궁으로 들어갔다.
전날 약속한 대로 초(楚)나라를 칠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오왕 합려의 표정이 어두웠다.
두 사람을 보아도 반가워하지 않고 창 밖으로 눈길을 돌리며 한숨만 내쉬었다.
오자서(伍子胥)가 지레짐작하고 물었다."왕께서는 초군이 강맹한 것을 염려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의 청을 거절할까 고심하던 합려(闔閭)는 바로 그거라는 듯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그러하오.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과연 우리 군사가 초(楚)나라
군사를 이길지 의문이오. 패하면 원수를 갚기는커녕 오히려 수모만 당할 것이 아니오?"
"그 문제라면 왕께서는 조금도 심려하지 마십시오.""좋은 계책이라도 있소?"
"계책이라기 보다 훌륭한 장수 한 사람을 천거할까 합니다. 그 사람이라면 초나라 군사와 싸워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훌륭한 장수라는 말에 합려(闔閭)는 귀가 솔깃했다.
"경이 천거하려는 사람이 누구요?""그 사람의 성은 손(孫)이요, 이름은 무(武)입니다.
제나라 사람이긴 하지만, 지금은 우리 오나라 땅에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손무(孫武)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그 사람은 무엇에 능하오?"
"신이 알기로, 손무는 어릴 적부터 병학(兵學)을 심도 있게 공부해온 사람입니다.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에 정통하여 귀신도 측량 못 할 전술전략을 지니고 있으며,
천지의 비밀과 묘리를 터득한 사람입니다.""그는 일찍이 병법서 13편을 저술했으나,
세상에서는 그의 재주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제나라에서조차 사마 전양저(田穰苴)만 알 뿐
손무가 있는 줄은 모릅니다.이에 그는 세상을 등지고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지금은 오(吳)나라 땅 나부산 기슭에 은거하고 있습니다."
손무(孫武).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손자병법>의 저자다.손무의 생몰연도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어떤 이는 그가 오(吳)나라 태생이라고도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 <손자오기열전>편을
보면 손무는 제(齊)나라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활동 시기가 오왕 합려(闔閭) 시대인 것이 분명하고 보면, 아마도 그는 제나라의 병법가이자
명장인 사마양저(司馬穰苴, 전양저)와 비슷한 연배이거나 약간 연하임에 틀림없다.
확실치는 않지만 사마양저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 추측된다.
한때 손무(孫武)에 대해서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춘추좌씨전>에 그의 이름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손자병법>의 저자도 그의 손자 손빈(孫臏)의 작품이라는 설이 우위를 점한 때도 있었다.
또 반대로 손빈이 곧 손무라는 설(說)도 있었다.
그러나 1972년 전한시대의 한 묘(墓)에서 손무의 <손자병법>과 손빈의 <손자병법> 두 종류의 병서가
출토됨으로써 이들에 대한 의혹은 말끔하게 사라졌다.다만 이들은 훗날 둘 다
'손자(孫子)'라고 불리었으므로 손무는 '오(吳)나라 손자' 라 하였고, 손빈은 '제(齊)나라 손자' 라 하여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당시 손무(孫武)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으나 오자서와 서로
교류했던 것 같다. 아마도 오자서의 명성에 손무가 자주 방문했을 것이며, 오자서(伍子胥)는
손무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원수를 갚아줄 적임자로 여겼을 것이 분명했다.
오자서(伍子胥)는 오왕 합려에게 손무를 천거하며 이렇게 말했다.
"진실로 이 사람을 얻어 군사(軍師)로 삼는다면 왕께서는 천하를 상대한다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초나라 하나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오자서의 말을 들은 합려(闔閭)의 입은 찢어질 듯 벌어졌다.
"그런 인재가 우리 오(吳)나라 땅에 있었단 말이오? 경은 과인을 위해 지금 당장 그 사람을 불러주오."
오자서가 대답했다."손무(孫武)는 경솔히 벼슬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과 다르니 반드시 예(禮)로써 초빙해야 합니다."
오왕 합려(闔閭)는 오자서의 청을 수락했다. 황금 10일(鎰)과 백옥 한 쌍을 내렸다.
며칠 후 오자서(伍子胥)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비단수레를 타고 나부산으로 가 손무를 만났다.
합려가 내린 예물을 건네고 그에게 간청했다.
"오왕께서 선생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부디 나와 함께 왕에게로 갑시다."
이에 손무(孫武)는 오자서를 따라 나부산을 떠났다.
춘추시대 후기를 장식할 또 하나의 명배우 손무(孫武)가 역사 무대 위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598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