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교 역사의 문을 연 외국인 선교사들
한국선교의 문을 연 의료선교사 알렌
의료선교사 알렌(Dr. Horace N. Allen 1858-1932)은 한국선교의 관문을 연 장본인입니다. 1884년 9월 20일, 알렌이 중국에서 조선으로 들어옴으로써 공식적 개신교 한국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호레스 알렌은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 주 딜러웨어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리고 1881년 오하이오 주 웨슬리언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후,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는 서울에 오기 1년 전부터 중국 청나라에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어 상해, 남경 등지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벌여왔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쇄국 정책을 버리고 문호를 개방한 지 얼마 안 된 조선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또 많은 신자들의 권유도 있어, 조선선교사 파송을 자청했던 것입니다.
알렌은 미국 북장로회 소속 의료선교사로서 1884년 9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하였습니다. 내한할 때 자신이 선교사인 것을 감추고 미국 공사관 소속 공의로 행세했습니다. 1884년 12월 4일, 개화파에 의한 쿠데타 사건인 '갑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 그 정변이 있던 그 날밤 보수파의 거두이며 왕비의 친척인 민영익이 칼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중상을 입은 민영익은 석 달 동안 알렌으로부터 헌신적인 치료를 받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서양의술의 효과는 왕가의 신망을 얻게 되었고, 알렌은 고종 황제의 담당의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서양의학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알리는 데 공을 세운 의사 알렌은 종교적 신념이 강할 뿐 아니라 처세에도 능해, 조선으로부터 큰 신임을 얻어 궁정 전의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1885년 4월 10일, 의사 알렌은 서울 재동에 위치한 홍영식 대감의 사택을 하사 받아 개조하여 '광혜원'(개원 13일 후에 제중원으로 개칭)이란 이름의 병원을 개원하게 되었습니다. 이 병원은 일종의 국립병원으로서 한국 최초의 서양 근대식 병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병원은 의료기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다른 선교사역을 위해서도 훌륭한 선교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즉 국왕에 의해 공인된 이 병원을 통해 달느 선교사들도 쉽게 선교활동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알렌은 제중원을 설립함으로써 조선의 심장부인 수도 서울에 공개적인 개신교 선교 활동의 교두보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1886년 3월 29일, '제중원의학교'가 개교함에 따라 의사 알렌, 의사 헤론 외에도 언더우드 목사가 교육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선교 역사 상 처음으로 개신교 선교본부가 구축된 것입니다.
그 후 의사 알렌은 동료 선교사들과의 갈등으로 의료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887년 최초 주미 한국 공사관 고문으로 미국 워싱턴에 근무했습니다. 3년 후인 1890년 7월에 알렌은 미북장로회 선교사로서 다시 한국에 돌아와 몇 개월 간 의사선교사로 활동했습니다. 같은 해 그는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대리 공사직을 맡았고, 1901년에는 주한 미국 공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습니다. 이렇듯 의사 알렌은 의료선교사로서 뿐만 아니라, 외교관으로서도 미국과 한국 정부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습니다. 1905년 6월 10일, 의사 알렌은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의료직에 봉사하다가, 1932년 12월 11일 오하이오 주 돌레도에서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언더우드 목사와 의료선교사 릴리아스 언더우드
언더우드 목사(Rev. Horace G. Underwood 1859-1916)는 1885년 4월 5일 장로교 목사로서는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내한했습니다. 그는 제중원에 있는 학교의 교사자격으로 학생들을 만나 화학과 물리학을 강의하면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언더우드 목사가 사역에 힘을 얻고, 새문안교회, 연희전문학교 등을 세워 언더우드 선교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삭막한 선교지에서 1889년에 여의사 릴리어스 호르톤(Dr. Lillias S. Horton)양과 결혼하여 부부가 됨으로 가능했었습니다. 언더우드 목사의 위대한 사역은 부인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의료선교 사역에의 영향이 컸던 것입니다.
최초 민간병원- 시병원과 의료선교사 스크랜튼
우리나라 역사 상 어둡고 힘든 시기에,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 병들고 상처받은 몸과 영혼을 가진 자들에게 찾아 와서, 마치 횃불처럼 빛을 밝힌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분이 바로 '의료선교사 스크랜튼'(Dr. 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입니다.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은 1885년 5월 3일 미북감리교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두번째로 들어온 의사였습니다. 그는 민중 특히 빈곤층을 주 대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885년 서울 정동에 최초의 서양인 민간의료기관을 세웠고 1886년 6월 15일 시병원을 설립했습니다. 1887에는 여의사 하워드와 함께 여자와 아이들을 위한 부인전용병원을 세웠다. 그는 민간계층을 위해 시병원을 남대분 빈민지역으로 이전하여 민중선교의 교두보가 된 '남대문 상동병원'을 설립했습니다. 그는 1892년 상동병원 내에 상동교회를 설립하고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22년 간 한국에 머물면서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의 친구로서 헌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