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수학의 특징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
▶3대 작도 문제
▶유클리드의 <원론>
▶유클리드 이후의 그리스 수학
◆그리스 수학의 특징
수학이 학문 또는 과학으로서 주목되는 것은 고대 그리스시대로 대략 기원전 6세기경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일찍 문명의 꽃을 피운 고대의 인도, 중국, 바빌로니아에서는 수학을 비롯하여 괄목할 만한 문화가 발달되었다. 그리스 인들은 이집트에서 기하학을 바빌로니아에서 대수학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의 탈레스나 피타고라스, 또 플라톤도 이집트에 유학하여 그 문화에 접하였다. 그리스는 이들 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문명의 한 시기를 형성하여 수학에서 불멸의 업적을 남기고 있다.
유클리드의 <원론>, 아르키메데스의 많은 연구 업적, 아폴로니우스의 <원추곡선론>, 디오판투스의 <산학>등이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 등으로 대표되는 여러 학자들의 관심사는 철학과 수학이었다. 플라톤이 그의 강당의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써 붙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유클리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원론>은 역사상 처음으로 수학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체계화한 것으로서 유럽에서는 19세기 말경까지 교과서로 쓰이고 있었다. 이 책은 공리에서 출발하여 차례차례로 정리를 증명하여 체계화하여 나가는 오늘날의 수학의 형식에 가까운 것을 이미 기원전 3세기경에 보여주었다. 이 체계에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여러가지 결점도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수학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게 크다.
그런데 그리스 수학은 이론적으로 매우 뛰어났으나, 수나 계산 방면에는 큰 진전이 없었다. 디오판투스의 대수 방면의 연구도 역시 이론 적인 면이 현저하였다. 그 후, 10세기경까지의 유럽은 인도나 근동 여러 나라에서 발전한 산술·대수를 수입하는 상태였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은 정수가 만물의 근원이라는 가정위에서 세워졌다. 이것이 수의 성질에 대한 찬미와 연구를 초래했고 기하학, 음악, 천문학과 더불어 (수론으로 생각되는) 산술이 피타고라스 학파의 연구에 있어서의 기초가 되었다.
피타고라스의 교육은 완전히 구두로 행해진 데다가 모든 발견의 업적이 숭배하는 단체의 설립자에게로 돌려졌던 관습 때문에 수학적 발견이 정말 피타고라스에 의해서 발견된 것이지 아니면 학파의 어떤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발견된 것인지 정확히 알길이 없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산술 :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론의 발전에 첫걸음을 내딛었으며 또한 미래의 수 신비주의의 많은 기초를 쌓았다. 그들은 친화수(서로의 진약수의 합이 되는 두 수, 220과 284), 완전수, 부족수, 과잉수(진약수의 합과 같으냐, 작으냐, 크냐에 따라 구분된다. 그래서 신은 세상을 6일동안에 창조했으며 6=1+2+3이므로 6은 완전수라는 것이다.)를 발견하였고 이것으로 점을 치거나 부적으로 이용하였다. 또한 형상수가 피타고라스 학파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 수들은 어떤 기하학적 배열에서의 점의 개수에 의해 나타내어지며 이것이 바로 당시의 기하학과 산술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피타고라스 학파에 의해 만들어진 수에 관한 매우 놀랄만한 발견은 음정이 수의 비에 따른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동일한 장력 아래서 현의 길이가 2대 1일때 8도음정, 3대2일때 5도 음정, 4대3일때 4도 음정임을 발견하여 음계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를 불러일으켰다.
●피타고라스 정리와 무리수의 발견 :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피타고라스 시대 이래로 이 정리에 대한 수 많은 증명이 나왔으며 루미스(E.S.Loomis)는 <피타고라스 명제>에서 370개의 증명을 분류하였다.
피타고라스 정리는 얼핏 보기에는 넓이에 관한 정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직각을 이루는 각 변의 길이의 관계 또는 거꾸로 말해서 직각을 만들기 위한 3변의 길이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직각삼각형의 세 변이 되는 정수 a,b,c를 피타고라스 3쌍이라고 부른다.
이 정리에 의하여 "같은 표준으로 잴 수 없는 선분"이 존재하며 이것은 '무리수'의 발견이라는 수학사의 거대한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지만 모든 것이 정수에 따른다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에 위배되는 무리수의 존재에 대한 발견은 피타고라스 학파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연습문제
●정다면체 : 정다면체는 면들이 합동인 정다각형이고 다면각들이 모두 합동인 다면체이다. 정다면체는 정4면체, 정6면체, 정8면체, 정12면체, 정20면체의 오직 다섯개 뿐이다. 그 중 정4,6,12면체가 피타고라스 학파에 의해 발견된 것이며 플라톤은 각각에 불, 흙, 공기, 우주, 물과 신비스럽게 결합시켰다.
연습문제
◆3대 작도 문제
기원전 600년경 탈레스가 처음 논증기하학을 시도한 이후로 기원전 300년경 유클리드의 놀랄만한 <원론>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는 그리스 수학의 처음 삼백년 동안의 발전에는 세 가지 특징적인 경향인
(1)<원론>으로 통합된 자료의 발전
(2)무한소, 극한, 합의 과정 등과 관련된 개념의 발전
(3)고등기하학(원이나 직선, 평면에 대한 것보다는 곡선이나 곡면에 대한 기하학)의 발전
이 있는데 이 고등기하학은 사실 오늘날까지 유명한 3대 작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전으로 부터 연유되었다. 이러한 도전 덕분에 새로운 수학의 발전과 창조가 이루어졌다.
●3대 작도 문제: 그리스 인들은 논리적인 사고를 중시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실용적인 가치보다도 바른 지식 체계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의외로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를 어렵게 푸는 경우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3대 작도 문제이다.
1. 정6면체의 배적 : 주어진 정6면체 부피의 두 배의 부피를 갖는 정6면체의 모서리를 작도하는 문제
2. 각의 삼등분 : 임의의 각을 삼등분하는 문제
3. 원적 : 주어진 원과 동일한 면적을 갖는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문제
이 세가지 문제는 (눈금이 없는)자와 컴파스 만으로 해결해야 하는 데 자와 컴파스만으로는 이 세 가지 작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2천년 동안 미해결 문제로 있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밝혀졌다.
이 세가지 문제를 풀기 위한 왕성한 연구가 결국 그리스 기하학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 밖의 원추곡선, 3차 또는 4차 곡선, 초월곡선과 같은 많은 풍부한 발견을 초래했으며 훨씬 뒤에는 유리수성의 문제, 대수적 수, 군론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π의 역사 : 원의 넓이를 구하는데는 π라는 기호가 사용된다. 이것을 원주율이라고 한다. 원주율은 원의 지름(2r)에 대한 원의 둘레(ℓ)의 배율인 데 원주율은 어떤 원에서도 항상 일정하다. 원주율을 π라고 쓰기 시작(1737년)한 사람은 오일러이다.
실제로 아르키메데스의 방법으로 원의 넓이를 구하려면 원주율 π의 값을 알아야 한다.
아르키메데스는 원주율의 값을 정확히 구할 수가 없자(물론 누구라도 무리수 π의 값을 구할 수 없지만) 그에 가까운 근사치를 구하였다.
그는 내·외접 정6각형으로부터 출발하여 단위직경을 갖는 원에 내접하는 정96각형까지 그리고, 또 그 원에 외접하는 정96각형을 그렸다. 그러면 원의 둘레는 내접96각형의 둘레보다는 길고, 외접96각형의 둘레보다는 작음을 알 수 있다. 즉,
(내접96각형의 둘레) < 2πr(외접96각형의 둘레)
3·1/7 < π < 3·10/71
이것은 약 3.14084 < π < 3.142858 이니 꽤 정확한 값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원주율의 근사값으로 3.14를 이용하였다.
유클리드는 열 가지 이상의 저작을 남겼는데 그 중 다섯 가지는 거의 완전한 원본으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아무래도 그의 <원론 Elements>일 것 이다. 이 경탄할 만한 저작은 그 이전의 모든 원론들을 망라하고 있다. 사실 유클리드 이전에 또 다른 역작이 있었다는 흔적은 전혀 없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그것은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유클리드의 단순한 인용과 명제의 번호들이 그대로 하나의 특별한 정리나 작도로 이용될 정도였다. 성경을 빼놓고 어떤 책도 이 <원론>보다 널리 연구된 것은 없으며 아마 어떤 책도 과학적 사고에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없을 것이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1482년에 초판이 인쇄되었고, 그 후 지금까지 1천판이 넘을 정도로 인쇄되었으며 2천년 이상 기하학의 교과서로서 군림해 왔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유클리드의 <원론>은 기하학뿐만 아니라 수론과 약간의 (기하학적)대수의 내용도 담고 있다. <원론>은 열세권의 책으로 되어 있고 모두 465개의 명제가 수록되어 있다. 일반 고등학교 기하학 교과서의 내용은 주로 <원론>의 제Ⅰ, Ⅲ, Ⅳ, Ⅵ, XI, XII 권의 내용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초기 그리스 수학자들에 의한 가장 위대한 성취 중의 하나는 틀립 없이 공준적 사고의 창조일 것이다. 연역적 체계안에서 한 명제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 명제가 보다 이전에 입증된 어떤 다른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유도되는 필연적 결과임을 보여야 하고 다시 여기에 사용된 명제도 그 이전에 이미 입증된 또 다른 명제로부터 유도되어야 하고, 계속해서 이 과정이 반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을 무한히 계속할 수는 없으므로 처음에 증명없이 인정해야 하는 어떤 유한 개의 명제를 약속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명제 B로부터 A를 추론하고, 다시 명제 A로부터 명제B를 추론하는 회귀현상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이 최초에 가정된 명제를 '공준' 또는 '공리'라고 부르는 데 그 밖의 모든 명제는 이것들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명제들이 배열되었을 때 그 논리는 공준적 형태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유클리드의 <원론>의 형식체계가 그 다음 세대에 준 인상이 너무 강렬했던 나머지 그후로는 이 작품이 엄격한 수학적 논증의 한 모델이 되었다.
유클리드가 <원론>을 처음 썼을 때 공준과 공리로서 택한 명제가 무엇인지, 또 정확하게 몇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후세의 <원론> 번역자들이 그것을 다소 수정하거나 가감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클리드가 다음 열개의 명제 ─ 다섯개는 '공리(axiom) 혹은 통념, 다섯개는 기하학의 '공준'(postulate) ─ 와 통치인 명제를 가정했었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있다.
A1. 동일한 것과 같은 것들은 모두 서로 같다.
A2. 같은 것에 어떤 같은 것을 더하면 그 전체는 서로 같다.
A3. 같은 것에서 어떤 같은 것을 빼면 나머지는 서로 같다.
A4. 서로 일치하는 것은 서로 같다.
A5.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P1. 한 점에서 또 다른 한 점으로 직선을 그릴 수 있다.
P2. 유한직선을 무한히 연장시킬 수 있다.
P3. 임의의 점을 중심으로 하고 그 중심으로부터 그려진 임의의 유한 직선과 동일한 반경을 갖는 원을 그릴 수 있다.
P4. 모든 직각은 서로 같다.
P5. 한 직선이 두 직선과 만날때 어느 한 쪽에 있는 내각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으면 이 두 직선은 무한히 연장될 때 그 쪽에서 만난다.
◆유클리드 이후의 그리스 수학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며 또 가장 위대한 고대인 이었던 아르키메데스는 포물선(곡선)과 그 현(직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인 포물선 구적에서 그리스 특유의 엄밀한 논법으로써, 오늘의 적분학의 기초에 관련되는 생각을 보이고 있다. 그의 원기둥과 구의 문제도 훌륭한 업적이며, 역학에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와 더불어 기원전 3세기의 수학에 있어서 3대거인이었던 아폴로니우스는 그를 위대한 기하학자로 불리게한 <원추곡선론>에서 원뿔의 절단 자국으로서의 원추곡선을 논하고 있다. 이 방면은 <원론>에는 빠져 있는 분야로서 후세의 해석기하학에서 2차곡선론이라고 불리는 것의 대부분을 해석기하학의 방법을 방불케하는 생각을 써서 거의 대성하고 있다.
기원전 212년에 아르키메데스가 로마의 병사에 의해 살해 당하고, 그 이후 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를 병합하고 지중해를 제패하였으나, 그리스 과학의 꽃인 수학은 그로부터 오히려 시들기 시작했다. 로마는 그리스의 문화를 강탈하기는 했으나, 제대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특히 수학 분야에서는 번거롭기만 한 5진법의 로마 숫자만 남겼을 뿐 독자적인 성과를 거둔 일이 거의 없었고, 단순히 피정복국인 그리스, 이집트, 카르타고 등의 문화를 흡수하고 모방하는 일에 그쳤다. 그리스에서 창출된 수학의 전통은 로마에서는 질식하고 말았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전쟁으로 학문에 대한 열기는 식었지만, 그래도 알렉산드리아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동서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항해술이 필요해지자 천문학과 삼각법의 연구가 왕성해졌다. 오늘날 각도를 나타내는 60진법도 삼각법에 도입되었다.
당시의 천문학자로는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B.C.280) ,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히파르쿠스(Hipparchus. B.C.150)등이 활약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있으면서 하지날 정오에 태양의 고도를 측정하여 지구의 크기를 측정해냈다.
또, 고대에서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인 히파르쿠스는 천문학을 위해 삼각법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는 오늘날의 삼각함수표에 해당하는 것을 만들었고, 구면천문학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천문학에 관한 뛰어난 그리스 저작은 15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rolemy)에 의해 쓰여진 <수학대계>이다. 이책은 이후 아라비아인들에 의하여 번역되면서 <알마게스트, Almagest>로 알려졌으며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천문학의 표준서로 간주되어 왔다.
당시는 그리스의 이론적인 수학과 동방의 실용적인 수학이 함께 어울린 '공존의 시대'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수학자로는 삼각형의 넓이에 관한 '헤론의 공식'으로 유명한 헤론(Heron, B.C.250∼150), 그리고 기호를 도입하여 수의 이론(=정수론)과 방정식(주로 1,2차 방정식)을 연구한 '대수학의 아버지' 디오판투스(Diophantus)를 꼽을 수 있다.
그 외에 시들해진 그리스의 기하학 전통에 다시 불 붙인 <수학집성, Mathematical Collection>의 저자 파푸스와 주석가인 테온의 딸 히파티아(Hypatia)가 있다.
641년에 이르러 알렉산드리아 학교가 아라비아인들에 의하여 불질러지므로 결국 길고 긴 영광의 그리스 수학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