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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때 아산 공세리 지역의 순교자들
보석은 비록 일시적으로 땅속에 묻히어 빛을 받지 못한다 해도 캐내면 역시 빛난다.
순교자는 박해로 일시 역사의 암흑 속에 묻힌다 해도 반드시 언젠가는 찬란한 광채로 드러난다.
걸매리에서 살다가 1867년에 순교한 밀양박씨집안의 순교자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이마리아, 박인서, 박제환, 박홍갑, 조 모니카, 박화진, 이씨 부인 등 열 분은
하느님이 땅에 묻으신 보석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수원, 발안, 아산만을 지나면 충청남도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성당이 나온다.
이 성당 앞뜰에는 치명일기(致命日記) 수원 387 박의서와 388 박원서와 389 박익서, 세 분 순교자의 묘가 있다.
이 분들은 모두 걸매리에서 살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난 이듬해인 1867년에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이 분들의 묘는 본디는 인주면 해암리 맹령(속칭 맹고개)에 있었는데,
1988년 9월 20일 공세리 성당 변갑철 신부의 주관하에 성당 앞뜰로 이장해 왔다.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세 분 순교자는 옛날 걸매리에 살던 밀양 박씨 의암공파의 후손이다.
이 집안에는 이미 치명일기에 기록된 이 세분 순교자 말고도
이마리아, 박인서, 박제환, 박홍갑, 조 모니카, 박화진, 이씨 부인 등 일곱분의 순교자가 더 있다.
그리고 그 주변 마을에서 살던 순교자들이 12명이나 더 있다.
이들의 순교는 어떠한 한 개인의 죽음, 가령 병들어 죽은 죽음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천주교 박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의 죽음이다.
따라서 그들의 순교는 한국천주교회사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공세리는 조선시대에 충청도 일대에서 관곡을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해 가던 창고집이 있던 곳이다.
마을 이름도 세금을 바치던 공세 창고가 있는 곳이라는 데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공세리는 충청도 일대의 공세 관곡을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하던 나루였기 때문에
일찍이 마을이 형성되고 또 번창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걸매리는 물이 앝아져 공세나루가 폐쇄되고 아산만에서 삽교천에 이르는
방조제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공세리 앞 방조제 공사는 걸매리에서 살다가 순교한 박씨 3형제의 증조부이신 박만선이
통진 부사에서 물러나온 뒤 시작하여 준공하지 못하고 1782년에 돌아가시자,
그의 아들 박종학이 1784년부터 뒤를 이어 계속하여 준공하고
유민 수 백집을 모아 개간한 논을 나누어주고 살게 함으로서
모원리, 신성리, 신밀두리, 서강리, 신원리, 걸매리의 여섯마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종학은 걸매리로 이사오기 전에 면천에서 살고 있었다.
이 면천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면천과 이존창이 살던 예산 여사울은 거리가 약 8킬로미터이지만
넓은 평야를 사이에 두었을 뿐 옛날 같으면 하루 아침에 오갈 수 있는 거리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존창(신유박해 때 내포지방의 사도)과 서로 지면이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지면으로 인하여 전교가 이루어져 일찍부터 천주교를 신앙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박씨 3형제의 묘
1. 박씨 3형제의 순교
O 박의서 (사바스)
- 치명일기 수원조 387번
후덕한 인품과 굳은 신앙심으로 죽음이 두려워 신앙심이 흔들리거나
배교하려는 마음없이 깨끗하게 주를 증거하고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다.
박의서3형제가 수원 걸매리에 살았으며,
그 후손들이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에서 살고있는 밀양박씨 집안임을 알수 있다.
이 후손들은 박해를 피해 일부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으로,
일부는 충남 강경으로, 또 일부는 평택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 후손들 중에서 박상래, 박성팔, 박노헌, 박중신 신부 등 네 분의 사제가 배출되었다.
O 박원서 (마르코)
- 한국교회사 연구소에서 정리 중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제3부]에 의하면
그는 본디 태중 교우로되 마음이 우람하기로 수계를 잘못하고,
노름도 약간하고, 서털구털 지내므로 그 형님이 항상 걱정하며 살다가
병인년에 3형제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갈 때 말하기를,
“내 평생에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하고
즐거워하며,
장차(將差)더러
“나를 이번에 올려 가거든 갑작스럽게 하지 말고 바로 죽여주면 우리 주모께로 가서 살겠다.“하며,
오히려 그 형님과 아우를 권면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교하였다.
O 박익서 (세례명 미상)
- 박상래 신부의 증조부
(비문) 천성이 곱고 순결하여 오로지 한 마음으로 천주를 공경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들 삼형제와 이 마리아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가 1867년 3월 8일 순교하였다.
시체는 그 당질 웅진씨 바오로와 양성우씨가 거두어 아산시 인주면 맹고개 선영에 안장하였다가
1988년 9월 20일에 맹고개 묘지에서 공세리 본당으로 이장하였다.
2. 밀양박씨 집안의 순교자들 (7명)
- 이 마리아 (박원서의 부인)
- 박인서 (박의서의 사촌동생)
- 박제환 기천 베드로
- 박홍갑 (박의서의 아들)
- 조 모니카 (박덕여의 부인)
- 박화진 알렉산데르 (박덕여의 아들)
- 이씨부인 (박의서의 종제수)
3. 박씨 외의 걸매리 지방 순교자들
- 김중백
- 김지득
- 이학습
- 김장복 (박덕여의 생질)
- 김씨 (김장복의 아내)
- 오인악
- 장원심과 그의 아들 장팔보
- 김흥서 토마 - 지금의 수원교구 남양성당에 성지화
- 김 필립보(비리버)와 그의 아내 박 마리아 - 남양에서 순교
- 최사도 요한
순서 성명(세례명) 나이 거주지 순교일 순교지 기타
1 박홍갑 18 걸매(수원) 1866 서울 박의서의 아들
2 김중백 걸매(수원) 1866.10 수원
3 지글라라 58 아산구말리 1867 공주 병인박해때 공주로 피신
4 박의서(사바) 60 걸매 1867.8.8 수원 걸매회장
5 박원서(마르코) 51 아산 신성리 1867.8.8 수원 박의서의 둘째동생
6 박익서 45 아산 걸매 1867.8.8 수원 박의서의 셋째동생
7 박인서 38 아산 걸매 1867.8.8 수원 박의서의 사촌, 옥중 영세
8 이씨(여) 38 아산 걸매 1868.8.8 수원 박의서의 종제수, 옥사
9 이마리아 아산 걸매 1867.8.8 수원 박마르코의 처
10 박제환(베드로) 18 아산 걸매 1867 서울 처가에서
11 김필립보 57 아산 걸매 1868.8.3 남양
12 박마리아 57 아산 걸매 1868 남양 김필립보의 처
13 김흥서(토마) 38 아산 걸매 1868.8.3 남양
14 조모니카 50 아산 걸매 1868 수원 옥사
15 박알렉산도 31 아산 걸매 1868 서울 조모니카의 장자
16 이학습 42 아산 걸매 1867.9 수원
17 김지득 47 새원여 1867.가을 수원
18 김장복 인주 밀머리 1867.12 서울
19 김씨 인주 밀머리 1867.12 수원 김장복의 처
20 장원심 50 아산 걸매 1868 수원 신문 교우
21 장팔보 아산 걸매 1868 수원 아산 용봉골 피난후
22 오인악 18 아산 걸매 1868.6 수원 모친은 방면됨
23 최사도요한 45 아산 걸매 1869.8.25 수원
24 유요셉 28 아산 산솟말 1879 서울 아사
25 함베드로 20 아산 뒷내 1876.4.9 공주 함요한의 아들
26 이요한 아산 쇠재 1871.3.16 서울 이베드로의 부친
27 이프란치스코 아산 쇠재 1871.3.16 서울 이베드로의 아들
28 이베드로 아산 쇠재 1871.3.16 서울 이요한의 아들
출처 : [무명 순교자의 뿌리를 찾아서, 걸매리 밀양박씨 순교자연구] 하성래 지음,
가톨릭 출판사 1995년 9월 25일 초판인쇄
고딕양식이 가장 아름다운 성당 공세리성당
공세리성당이 자리한 인주면은 역사가 깊은 곳입니다.
백제를 세운 주몽의 아들 비류가 고구려에서 남하해 처음 정착한 미추홀이 이곳이며
지금은 밀두리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 백제의 멸망을 이끈 나당연합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청일전쟁 때도 전란의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공세리 성지.성당 박물관은 도지정문화재 144호인 구사제관을 개보수하여 봉헌된 곳으로
대전교구 최초의 감실을 비롯한 1,500여점의 유물을 모시고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의 태동에서부터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의 교우촌 생활모습과
신유.병인 박해때의 순교자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성직자 들의 생활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공세리성당 초대 신부인 에밀 드비즈 신부의 유물과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샹스땅 신부의 유해와 성녀 루이스 드 마릴락의 유해 뿐만 아니라
32순위 순교자 유해를 모시고 있습니다.
박물관 관람은 화요일~주일 오전10시~오후4시(매주 월요일 휴관)이며,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4대박해(신유, 기해, 병오, 병인)를 통해 만 여명의 순교자를 낳게 되는데
그 대부분이 내포 천주교에서 나왔습니다.
신유박해 때는 아산 최초의 순교자인 하 발바라가 있고, 또 병인박해 때는
박씨 삼형제인 박의서(사바스), 박원서(마르코), 박익서(세레명 미상)를 비롯하여
부부 순교자인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그리고 삼부자인 이 요한, 이 베드로, 이 프란치스코가
영광스럽게 순교합니다.
이들을 포함한 병인박해 때 아산지역 출신 순교자는 모두 32명이었으며
각각은 서울, 수원, 공주 등으로 끌려가 고문, 옥사, 참수형 등으로 순교합니다.
봉헌된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에는 박의서 사바, 박원서 마르코, 박익서 세 분의 유해와
박인서, 이 마리아, 이씨 부인, 박홍갑, 박화진 알렉산데르와 조 모니카의 묘표석,
그리고 순교자 김중백을 포함한 스물세 분의 묘석이 모셔져 있습니다.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충남 아산군 인주면에 위치한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조 때 아산. 서산. 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 문의. 옥천. 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를 쌓아 두던 공세창고가 있던 곳입니다.
이 창고 건물이 1523년(중종 18년)에 개설됐다가 고종 때 폐지됨으로써 80간짜리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1897년 구본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성당은 붉은 벽돌과 먹빛 벽돌이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지붕 귀퉁이에는 하얀 석고상을 장식물로 앉혔습니다.
드라마 <모래시계>, <불새>, <에덴의 동쪽>,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고스트 맘마>, <신부수업> 등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곳입니다.
공세리성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116년 전인 1895년. 당시에는 마을의 가정집을 개조해 미사를 드렸습니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현재의 성당은 1922년 프랑스 출신의 드비즈 신부가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지은 것입니다.
1890년 한국 천주교회에서 아홉 번째이자, 대전교구에서 첫번째로 설립된 공세리성지.
성당은 12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순교성지. 성당답게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144호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본당은 1층 적벽돌 건물로, 정면에는 높은 첨탑이 있고, 내부에는 무지개 모양의 회색 천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건축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해 온 공세리 성당 옆에는 오래 된 고목이 한 그루 있습니다.
그 연륜을 알 수 없는 고목은 공세리 본당의 긴 역사를 그저 무심한 듯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성당 둘레로는 한적한 오솔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한 바퀴 도는 데
겨우 5분도 채 안 걸리는 짧은 거리이지만,
온갖 수목으로 둘러싸여 있어 참 포근하게 느껴지는 매력이 있습니다.
여기엔 14처가 조성되어 있어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공세리 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 아산만과 삽교천은 교회 박해 시대에는
내포지방의 입구로 해상과 육로로 연결되는 중요한 포구였으며,
현재 성당이 위치한 9,500여 평의 부지는 예로부터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저장하던 공세 창고가 있던 공세곶 창고지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1895년 이곳에 부임한 에밀 드비즈 신부님는 400년이 지난 세곡 창고 터를 헐고,
그야말로 복음창고인 고딕 양식의 공세리 성당을 1922년 10월 8일 봉헌함으로써
내포지방 신앙의 못자리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아산, 서산, 당진, 홍성, 예산 등 내포 지방은 순교자들이 유독 많은 곳입니다.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하고, 천주교가 다른 지방에 비해 먼저 전래됐기 때문입니다.
조선후기 4대 박해기간 동안 천주교 순교자를 보통 1만 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이중 내포와 충청권이 60~70% 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공세리성당의 초대 신부님이었던 드비즈는 ‘이명래 고약’의 개발자로도 유명합니다.
당시 이곳에는 80여년에 걸친 간척사업이 진행됐는데, 드비즈 신부님는 고된 노동으로 몸이 헐어
고생하는 이들을 위해 한방의술을 활용, 자신이 직접 한약을 조제합니다.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님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 고약’으로 불렀습니다.
그 후 자신의 심부름꾼이었던 이명래(요한)에게 고약의 비법을 전수해 준 뒤
‘이명래 고약’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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