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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사실에 근거한 가정입니다. 청나라가 궁굼해서 ...
변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청나라 입니다.
변발의 풍속으로 추정해보는 청나라는 어디일까?
대부분의 청나라 풍속(대륙에서 얻은 그림/사진 들) 그들은 변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있는사실외에도 또다른 사실들이 있읍니다.
이 그림들은 이당시에 그려진 혹은 찍어진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파악하는데 유용합니다.
아래그림진은 19세기 후반 아시안이라고 유럽인(영국)이 그린 그림입니다.
사진위 집 시 / 인도인 1 /인도인2 /아프칸인 / 인도인3 <그림 1>
사진아래 유대인女 /유대인 1 / 몽골인 / 유대인 2 / 아랍인
1885년에 그려진 아시아인들에 대한 초상화 입니다.
사진의 배열로 봐서 중앙아시아 인도 중동에서 거주하는 사람들 위주로 그린것 입니다.
이당시는 산업혁명의 성과로 동점이 본격화 되어가던 싯점입니다.
집시인들의 모자를 보면 대개 북방에 거주한 자들로 보입니다. 전에 tv다큐에서 이모습은 소그드인 처럼 보였읍니다. 인도인은 3종류로 확연히 구분이 됩니다. 인도인 3은 그 모자의 형태로 봐서 무슬림계열처럼 보입니다.
유대인은 그당시 이지역에 상당히 많이 분포한듯 합니다. 유일하게 여자모습까지 실린것으로 봐 무슨 내막이 있는듯 합니다.
가장 관심을 끄는 모습이 몽골인 입니다. 저자가 진정 몽고인인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아무리 봐도 동양인은 아닙니다 몽골인은 이지역에 살던 자들 같읍니다. 특히 인도에 새운 무굴제국의 지배계층이 몽골인인데 이들은 원나라의 후예라면 원나라는 동양의 징키스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몽고는 중아아시아에 존재하였던 나라임이 틀림없읍니다..
아래의 기록은 연행기의 일부로 그 기록에 묘사된 모습입니다.
연행기(燕行紀) 제1권
진강성에서 열하까지[起鎭江城至熱河] ○ 경술년(1790, 정조 14) 7월[1일-15일] 4일(임오)
▷삼사(三使)가 나뉘어 타 정오(正午)가 되어서야 겨우 신점에서 숙박할 수 있었다.
신점의 뒤 언덕에서 정서쪽 소흑산(小黑山)으로 뚫린 것이 산해관(山海關)으로 가는 길이고, 서북쪽 백대자로 뚫린 것이 열하로 가는 길이다. 백대자 이후로는 요야(遼野)가 끝나고 구릉(丘陵)이 점점 높아지며, 2, 3리, 혹은 5, 6리에 명(明) 나라 때의 연돈(煙墩)이 많이 있다. 척계광(戚繼光), 이성량(李成梁)의 지나간 자취가 생각하면 어제 같은데, 청(淸) 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몽고(蒙古), 회회(回回) 등의 여러 부족들을 섞어서 등용하니, 조정의 태반(太半)이 색목인(色目人)이다. 중화(中華)의 이로움을 외이(外夷)와 더불어 함께하므로, 변방의 소요를 경계하지 않은 지가 이미 100여 년이 되었다. 이제는 밭과 들이 서로 이어지고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서 낮에는 길을 가고 밤에는 숙박하는데 조금도 경계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삼위(三衛)의 백전지지(百戰之地)가 모두 변하여 낙토(樂土)가 되었으니, 이것은 역대의 제왕이 하지 못하였던 일이다.
---> 청나라의 조정 반이상이 색목인이라는데... 관연 현재의 북경에서 그런일이 일어났을까?
수백명의 관리가 북경성 안에 있을경우 가족 도 많을 것이며 이에 따라 상인 ..등등
200년 이상이렇게 지속이 되면 조정만이 아니라 청나라 북경성안에도 수만명의
외국인이 있었을것입니다. 극동의 외진 현재의 북경에 그렇게 외국인이 많았을까?
2연행기(燕行紀) 제2권
열하에서 원명원까지[起熱河至圓明園] ○ 경술년(1790, 정조 14) 7월[16일-26일]
몽고(蒙古)는 곧 원(元) 나라의 유종(遺種)으로 예전의 달단(韃靼 타타르)이다. 동쪽은 흑룡강(黑龍江)으로부터 서쪽은 바다에 이르고 북은 장성(長城) 밖을 따라 영고탑(寧古塔) 근처에 이르는 사이가 모두 그들의 소굴이다. 우리들의 역로(歷路)로 말하면 산해관 이동은 몽고 지방이 가장 가까운데 큰길에서 먼 것이 50리에 불과하다. 청인(淸人)에게 복속(服屬)한 것이 모두 46부(部)인데, 청인이 처음 일어나자 그 부락(部落)을 거느리고 와서 붙은 것이었다
----> 이기록만으로는 몽고라는 말이 최근에 생긴 말이라는 것입니다.
원나라가 망해 그 유종이 달단이 되었는데 그들이 이제 몽고로 불리운다는 것입니다.
기록상으로 좀 당겨서 1700년 이전에 기록된 몽고라는 단어는 의심해 볼 필요가
있은것 같읍니다.
귀순 복종한 몽고(蒙古)는 그 종락(種落)이 본래 적은데 대접하기는 만주와 같이 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과 외번(外番) 색목인(色目人)과의 혼인은 엄금하지마는 이들과는 서로 혼인한다.(중략).
몽고인은 청인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그리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 아주 추운 때라도 단지 수레 위에 장막을 치고 길에서 자며 아침에는 눈을 털고 일어난다. 배가 고프면 다만 낙타의 고기를 먹을 뿐이고 또 개와 한그릇에 먹는다. 강한(强悍)하고 추악(醜惡)하기가 이와 같기 때문에 청인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천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꾸짖고 욕할 때, 그를 몽고 사람에게 비교하면 반드시 불끈 성을 내고 큰 욕이라고 하니, 몽고인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비달자(大鼻韃子)는 곧 아라사[鄂羅斯]인데, 몽고(蒙古)의 별종(別種)으로 나라가 사막(沙漠) 바깥 지극히 먼 땅에 있다. 그들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健壯)하여 상모가 극히 흉한(凶悍) 영악(獰惡)하다. 눈은 푸르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가 주먹같이 높고 붉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났다. 그리고 모두 몇 사람을 합한 것같이 힘이 세다. 사람이 있어도 오줌을 누며 부녀자를 피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는데 입으로 연기를 뿜지 않고 코로 내보낸다. 모두 코가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대비달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
--> 아라사도 몽고이며 달단(타타르)입니다 고지도에 유라시아 북쪽에 타타르라고 기록된것이
러시아가 시베리아 진출후 그곳에 깃발을 꽂은 것이 달단의 후예라서 그리 표기한 것인가?
황태길(黃台吉)ㆍ청태길(靑台吉)은 곧 ‘태극달자(太極㺚子)’라는 뜻이다. 몽고말로 태극(太極)을 태길(台吉)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몽고(蒙古) 추장(酋長)의 호가 된 것이다. 저희들 몽고 관작 중에 있는 소위 태길(台吉)이라는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명 나라 영종(英宗)이 오랑캐에게 잡혀 있을 때 야선(也先)의 누이를 들여다가 자식을 낳았는데 그 뒤에 청(靑)ㆍ황(黃) 두 태길(台吉)이 되었기 때문에 황명(皇明)의 후예라고 자칭한다. 그는 매우 강성한데 강희(康煕 청 성조)의 태후(太后)는 곧 태길(台吉)의 고모이다
---> 요즘말로 하면 타타르왕(태길)은 명나라의 후예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이라트(오랄)에 잡힌 영종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자들이 타타르의 왕(추장)들이 되었고
강희제의 엄마가 타타르 왕손이라니 ...
아버지 청태종(홍타시)은 타타르 공주와 결혼한 셈입니다.
강희제의 엄마가 타타르 라는 말입니다. (귀순 복종한 몽고(蒙古)는 그 종락(種落)이
본래 적은데 대접하기는 만주와 같이 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과 외번(外番) 색목인(色目人)과의 혼인은 엄금하지마는 이들과는 서로
혼인한다-) 여진(만주/청)은 달단(타타르)과 붙어있었다는 말입니다.
타타르의 주무대는 중앙아시아 북쪽 러시아 남부입니다
주견제사(主見諸事) 인물(人物)
▷만인과 한인은 모두 머리를 깎고 호복(胡服)을 입는데, 머리의 사면은 깎아 버리고 가운데 긴머리는 묶어서 뒤로 늘어뜨린다. 몽고는 머리를 모두 깎고 승니(僧尼)도 마찬가지이다. 유구(琉球 류큐. 현재 일본의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의 옛 이름)ㆍ회자(回刺)는 모두 머리를 깎지 않고 높이 상투를 틀며, 소위 도사(道士)라는 자들 역시 그렇게 한다.
남녀간 노는 자는 귀천을 막론하고 열 손가락의 손톱을 한 치가 넘도록 기른다. 아름다운 부녀는 아주 귀한데, 도로의 수레 속에서 얼굴을 내미는 자는 맑고 예쁜 이가 자못 많다. 책문으로부터 연경에 이르기까지 연로에서 본 바로는 근사한 자가 거의 없고, 산해관 밖에는 부녀의 턱밑에 대부분 혹[癭]이 있는데 크기가 병[罌]만한 것도 있으니 풍토 때문인 듯하다.
----> 물이 좋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연행기에 북경인들은 독주를 못 마시고 모두
순한술을 마십니 다. 혹시 맥주류? 또한 물맛이 짜고 쓰다고 합니다.
북경 서쪽에 옥천이 있는데 옥천의 이름유래가 물맛이 좋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북경지방은 석회와 석탄이 풍성한 지역이라고 묘사하고 있읍니다.
집에는 건물에는 석회를 발라 건물이 희고 소주에 석회를 넣기도 합니다.
물맛이 좋지 않은 것은 이 석회성분이 물에 많이 잔류 하여 생긴 현상이며 또한 염수가 많은
현상을 말하고 있읍니다. 턱밑의 혹은 이러한 물을 많이 마셔 생긴 현상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이는 곳은 어디일까?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프랑스 독일 등의 유럽?
또 다른 지역은 없을까? 혹시 중앙아시아는 어떤지?
▷.이[齒]는 아름답지 않고 눈알은 반드시 푸르고 검은데 겉돌며 귀에는 몇 개의 구멍을 뚫어 귀고리를 달았다/
그림<2,4,5,6>은 Cossacks of the Napoleonic Wars 1805 - 1815 에서 퍼왔읍니다.
Picture: Cossacks writing incredibly insulting reply to Turkish Sultan's demand for surrender (1675). They laugh their socks off over each word. (터키의 술탄이 항복하라는 문서에 믿을수 없는 모욕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그들은 비웃으며 양말을 벗어들고 온갖말을 한다.) <그림 2>
- 이그림은 1675년에 그려진 것인데 코작인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연행기의 기록과 유사합니다.
실제로 책상에 기대어 등을 보이고 있는 대머리도 귀고리를 하고 있읍니다.
이들은 몽고인(달단인/타타르) 표현과 같읍니다.
연행기에 기록된 야만인 모습이 이런것 같읍니다.
이사진은 최근의 것으로 코작민족이라합니다.<그림 3>
아래 그림은 러시아 용병으로 활약하는 코작인 들입니다.
Don Cossack- Bug Cossack
<그림 5>
코작인들이 러시아에 복속하기 전의 모습입니다. 익숙한 그림... 북방 고구려의 벽화..
<그림 6>
코작의 경기병 명성은 유럽에 공포의 대상이였나 봅니다.
아래 인용문은 Cossacks of the Napoleonic Wars 1805 - 1815에서 발췌번역한 것입니다.
"If Napoleon had had Cossacks in his army he'd have been Emperor of China long ago."
"나폴레온이 코작병사를 가졌다면 오래전에 중국의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1812년 코작 장교
"Cossacks are the best light troops among all that exist.If I had then in my army,
I would go through all the world with them." - Napoleon
코작은 현재최고의 병사다 내가 그들을 가졌다면 세계를 정복했을 것이다. - 나폴레온
그중 일부발췌한 번역문은 아래와 같으니다.
1. 코작의 분포는 러시아남부 우크라이나 돈강유역 우랄과 시베리아지역 흑해 코카서스 지역이다
2. 18세기초에 이들은 타타르의 중앙지배에 항거해 러시아의 지배를 받지만 독립심을 잃은 것도 아니고 러시아를 믿은 것도 아니였다.. 코작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과 코카서스 아시아진출시에 그들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가이드 역할을 하였다
3. 코작의 기마술은 유럽에서 최고이다.달리는 말에서 땅에 떨어진 동전도 줕을수 있고 말의 배밑에서 총도 쏠수있다. 코작의 말은 그리 크지않다, 말 위에서 남의 주머니에 든 물건도 잘 꺼내고하는데 이태리와 독일에서는 환영나온 사람들의 옷을 재빠르게 벗기거나 강탈해 벌거벗은 남녀가 공포에 떨어 도망치기도 했다.
4. 1813년 러시아가 독일을 침공했을때 코작들은 지나는 마을은 모두 초토화하였다.
독일의 전역에 소문이 나고 코작은 진짜 악마라고 교회에서 말하였다.
5 바쉬키르, 타타르, 칼묵들은 코작 보다 더 심했다. 코작은 이들을 감시를 했는데 안내자 없이 마을에
돌아다니는 것을 막았다. 여성들을 말위에서 강간하고 다른 성추행들이 아시아 의 침입자들에게
당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 코작인을 아시아인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 대체적으로 코작병사의 놀라운 기마기술과 점령지에 대한 초토화등 공포의 확산입니다.
마치 징기스칸의 정벌스토리와 비슷합니다. 16세기 17세기 세계지도를 보면 (조작의심)
거대한 유라시아 북부가 동타타리 서타타리로 표시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이 지역을 안내
하는 코작으로 이들의 도움으로 러시아가 팽창한 것입니다. 코작인들이 타타르 인과 같지
않다면 타타르 지역을 이렇게 활보 할수 없었을 겁니다. 타타르에 저항하였다는 발췌문2
를 보면 추정할 수있읍니다. 따라서 코작은 또다른 창조물 아닌가 합니다.
코작은 일설에 카작, 카자흐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실제로 이들 코작의 거주지는
카자흐스탄의 서,북,동에 있읍니다. 코작은 타타르( 달단)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아니면
달단의 유종.. 연행기에 이들은 대비달자(러시아)와 구분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러시아와깊은 관계를 가진 이들은 코작이면서 달자(달단, 타타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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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그림은 청나라가 변발을 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인데 과연 대륙에 있던자들인가 ?
사진의 중국인 모습인데 변발을 한 전형적인 청나라 모습입니다. <그림 7>
그러나 얼굴은 동양인일 수가 없읍니다. 저 얼굴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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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그림은 변발이 정말 청나라의 고유한 것이라면 청나라의 위치는 의심이 갑니다.
<사진설명> <그림 8>
1.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코작 통로. 2. 원주민 전신국직원 3. 기차역에서 목욕하는 모습
4. 원주민 철도원 5. ...?
The Grapjic(영국잡지)에 실린 삽화입니다.
1번 그림이 코작(kojak)으로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철자가 다르긴합니다. (cossack)
지명2 번 그림과 4 번 그림을 보면 이들은 분명 변발입니다. 원주민이라 하였으니 ...
이들은 인도인입니다. 사진제목이 "인도-군수운반팀 " 입니다. 아마도 인도 용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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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그림은 영국군과 함께하고 있는 용병입니다. 놀라운 그림입니다.
<그림 9>
이 그림들은 그 신기에 가까운 말타기 묘기 입니다. 모두 변발입니다.
말타기 묘기그림은 우리가 알고있는 북방민족의 모습입니다. 옆에서 도와주는 인도인은 터번을 쓰고 있읍니다.
이들은 어디에 살고 있는자들이기에 함께 공존 했을까요? 저 터번 을 벗겨보고 싶읍니다.
그러나 이들의 변발모습은 위 <그림 2>의 코작인들의 모습과 똑 같아 보입니다.
말타는 기술도 그렇고...기록상으로도 몽고인들은 말을 자유자재로 타고 놀았다고 합니다.
이곳은 suakim 이라는 곳인데 suakin 으로도 불리며 놀랍게도 이곳은 아프리카의 수단입니다
현재의 suakim인지 아니면 다른 지역인지는 분명치않으나 현재의 suakim이라면....
영국군이 이곳 수단을 점령하기위하여 인도의 용병을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 처럼 해석이 됩니다..
실제로 영국은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면서 인도인을 용병으로 고용합니다. 그들이 세포이 입니다.이들중 일부 세포이들이 영국에 불만을 품고 무굴제국의 왕권 확립을 위해 일으킨 난이 세포이난입니다. 이걸 기화로 영국은 무굴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리고 인도를 실질적 지배을 합니다. 그 당시 세포이 용병수는 23만명을 상회하였다고 합니다.
영국이 인도에서 얼마되지도 않은 인력으로(주둔군45,000)그 넓은 땅을 통제하기도 바쁠것인데 그들은 중국까지 넘보고 있읍니다.
어느국가도 혼자서는 감당이 되지 않으니 8개국연합국이 결성되고 북경을 점령합니다.
청나라는 1900년 이전에 이미 식물인간이 되었읍니다.
의화단사건이 났을때 유럽은 공포에 떨었다고 합니다. 의화단이 청나라 부흥을 위해 일어났으니까요...그래서 유럽은 연합군을 결성하여 총력을 펼친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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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0>
의화단 사건으로 연합군이 중국에 갔을때 그린 것으로 중국에서 1901년때의 모습이랍니다.
중국인들이 말을 타고 강도짖을 하늗데 뱅갈 기병대가 추격하는 모습입니다.
뱅갈이 어디인데 ... 인도 동부의 버마와의 사이.. 지금의 뱅글라데시 근처입니다.
영국군이 북경에 갈때 뱅갈군 용병도 동원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청나라는 그 근처 어디에 있었다는 것인지... 하여튼 이 변발의 정체는 누구인지 정말 궁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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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아프카니스탄전쟁시 야외게임중입니다. 잘라라바드 둘리 라고하네요 <그림 11>
모두들 터번을 쓰고 있는 인도인이지만 중앙 좌측의 한명이 모자가 벗겨져 있읍니다.
격렬한 경기중에 벗겨진 것인데 변발이 틀림 없읍니다.
저 터번을 벗기면 모두 변발이라는 방증입니다.
그림제일 밑의 수게를 끄는 모습인데 인도 델리에서1886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 12>
뒤에 미는 사람은 모자가 벗겨있읍니다. 앞사람과 복장이 똑같읍니다.
인도 원주민들은 모두 변발이였다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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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청나라의 토속경기라고 하는데 귀뚜라미 싸움이라고 합니다. <그림 13>
귀뚜라미종자가 상당히 크군요....이정도의 귀뚜라미는 어디에서 볼수 있는지 궁굼합니다.
이들은 모두 청나라인일것입니다. 모두 변발을 하고 있는데 도저히 동양인의 얼굴이 아닙니다.
혹자는 화가가 서양인이니 그림을 그리 그렸을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당시 이곳 청나라에 파견된 화가는 일종의 특파원처럼 현지 의 풍경을 실사처럼 담아내는 사람들이며동양인의 얼굴특징을 못잡아낼 리가 없읍니다. 변발한 모습으로 중국전래의 귀뚜라미 싸움을 하는 이들 서양인들을 진정코 어디에서 목격한 걸까?
아래 링크는 귀뚜라미싸움 동영상입미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03Qsdd291sk 귀뚜라미 크기와 통
Shanghai fish and fowl market cricket fighting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iE__uuFyPnU 귀뚜라미 싸움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N8D5ge4HT7c
Cricket fighting in China dates back to the Tang Dynasty.
In southern China, particularly around Macau, cricket fighting had been a popular pastime. Many famous hotels around Macau held cricket fights where bets up to thousands of patacas would be waged on a single fight. .(중략) the fights themselves are legal and occur in most big cities in China. Crickets are sold openly in street markets.(위키백과)
당나라때 유래한것으로 중국남부 특히 마카오에서 오랬동안 유행했던 경기이다. 마카오 유명호텔등처에서 이 싸움이 벌어지고 수천파타카가 걸리곤한다. (중략) 이 경기는 중국의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벌어지고 귀뚜라미는 길러리에서 팔고있다.
서식장소 - 인가 주위, 초원이나 정원의 돌 밑,
분포지역 - 아시아 대륙 남부 지방
주서식지가 아시아 남부지방이며 싸움에 사용된 귀뚜라미는 상당히 큰놈으로 5센티 정도는
되어보입니다.이정도의 크기는 대륙남부입니다. 인도/현재의 인도차이나 /광동 등처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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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거한은 어느사람일까요?
이 거대한 서양인도 중국인입니다. 북경의 풍경이라는데정말 청나라는 어디일까요? <그림 13>
마주본사람사이로 원숭이가 보입니다. 연행기에 자주등장하는 모습의 풍속입니다.
그 기록에서 원숭이 묘기가 있고 새점을 치는 사람도 등장합니다
청나라 시대의 연행기에는 북경사람들이 3종류인데 몽고인/청인(만주인)/한인 으로 크게 구분되고 있읍니다. 청인들은 스스로 달자(달단/달달/=타타르)라고도 말합니다.
청인과 몽고인은 누가봐도 구분이 되는 것으로 기록합니다.
이 거대한 덩치는 몽골인/ 청인 / 한인 중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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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은 청나라 황제 입니다.
이 그림은 1667년에 그려진 청황제 그는 왜 이런 몽타쥬를 갖고있을까?
1667년이면 유명한 강희제 제위기간입니다.
서양인.. 이가 강희제 라고?? 앞서 인용한 기록 다시 봅니다.
황태길(黃台吉)ㆍ청태길(靑台吉)은 곧 ‘태극달자(太極㺚子)’라는 뜻이다. 몽고말로 태극(太極)을 태길(台吉)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몽고(蒙古) 추장(酋長)의 호가 된 것이다. 저희들 몽고 관작 중에 있는 소위 태길(台吉)이라는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명 나라 영종(英宗)이 오랑캐에게 잡혀 있을 때 야선(也先)의 누이를 들여다가 자식을 낳았는데 그 뒤에 청(靑)ㆍ황(黃) 두 태길(台吉)이 되었기 때문에 황명(皇明)의 후예라고 자칭한다. 그는 매우 강성한데 강희(康煕 청 성조)의 태후(太后)는 곧 태길(台吉)의 고모이다
---> 요즘말로 하면 타타르왕(태길)은 명나라의 후예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이라트(오랄)에 잡힌 영종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자들이 타타르의 왕(추장)들이 되었고
강희제의 엄마가 타타르 귀족이라니... 아버지 청태종(홍타시)은 타타르 가문과 결혼합니다.
강희제의 엄마가 타타르 라는 말입니다. 여진(청)은 달단(타타르)과 붙어있었다는 말입니다.
타타르의 주무대는 중앙아시아 북쪽 러시아 남부입니다
<그림 14>
아래그림은 또 다른 강희제 입니다.
<말년의 모습> <중년의 모습> < 그림 15>
1667년에 청나라 황제는 강희제인데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읍니다. 전형적 동양인 얼굴..
위의 그림에서 콧수염은 카이젤 수염이라고 하는 모양을 갖고있고 턱수염이 턱중앙에 짙게 붙어있고
아래그림의 콧수염은 전형적인 八자 수염이며 턱수염도 턱 아래에 나 있읍니다.
어느 그림이 조작품일까?
강희제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라틴어공부하여 그에 정통하였다고 합니다.
신하한데 일일이 라틴어를 묻기 귀찮아서 직접 배워서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당시 청나라에는 라틴어 전문가도 있었다는 것인데....과연 사실일까? 그가 라틴어를 배운것은 라틴어 영향권과 가까워서 아닐까? 쉽게 책도 구할수 있고 전문가도 지근에서 구할 수 잇는 곳...
또한 그 유명한 강희자전을 편찬하였는데..강희자전의 목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일까?
네르친스크조약이 1689년에중국과 맺었다는데(물론 그 이름은 china) 그곳이 강가에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름이라고 하는데 그곳이 어딘인지 궁굼합니다. 그당시의 병참능력이나 기후 등으로 봐서 시베리아 동정을 할 만한 여력이 되었을까? 지금 러시아 1억 3천억인구(해체전 소련은 2억이상)와 15억 중국인국가 그때300년전에는 얼마나 될까? 지금의 20%라면2.5천만/3억의 차이이다. 산업화전의 군대가 혹독한 시베리아를 정복하는게 가능했을까 ... ? 동정병력이 수만명도 아니였을테고 청나라 전성기에 청나라에서 그정도 제압도 못했을까?
아마도 조작된 역사가 아닐까? 우랄산맥까지 진출하고 동남쪽으로 중앙아시아로 접근하면서 그당시 그곳에 있던 청나라와 맺은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아닐까? 중앙아시아의 청과 ...
러시아의 동방진출/남방진출(네이버 지식 펌)
러시아라는 지명이 역사상 나타나기 훨씬 전에 중앙아시아, 트랜스코카서스, 흑해 연안 등지에는 발달된 문명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국가는 지금의 키예프 부근에 형성되었다. 8세기경 슬라브족과 9세기 초 바랑고이족(북유럽계의 방랑족 부족)이 드네프르강과 볼호프강 및 볼가강 상류지역으로 유입해와서 정착하였다. 두 종족은 스텝의 유목민들로부터 자주 약탈을 당하자 점차로 서로 결집하여 루스(Rus)라는 국가를 형성하였다. 이 국가는 처음에는 노브고로드를 수도로 하였지만 882년 키예프로 옮겼다.
키예프 공국은 13세기 타타르인(몽골인)의 침입으로 결정적으로 멸망하였다.
몽골 침략 후 키예프 주민들은 서쪽의 폴란드·리투아니아로 이동하거나, 북쪽 볼가강 상류로 이동하였다. 서쪽으로 이동해 간 난민들은 거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으나, 볼가강 상류로 유입한 난민들은 후에 모스크바 공국의 성장에 적지않은 역할을 하였다. 모스크바 공국은 원래 키예프 공국에 속해 있었지만 1147년부터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모스크바는 척박한 토양, 울창한 삼림, 늪지, 혹독한 기후 등으로 인해 키예프보다 조건이 열악하였지만, 바로 이 때문에 외부의 침입을 적게 받아 세력확장이 용이하였다.
또한 모스크바 주위로 교통로 역할을 하는 하천들이 발달하였고, 타타르인과 융화함으로써 후에 몽골로부터 러시아 전역의 통치권을 위임받았다. 또한 동방정교회의 대주교가 1310년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옴으로써 모스크바 공국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인에 의해 멸망하자 모스크바는 세번째 로마가 되었으며, 유럽과 다른 독자적인 발전경로를 밟았다.
모스크바는 주변의 하천망을 따라 계속 영토를 확장하였다. 1478년 노브고로트 공국을, 1485년 칼리닌 공국, 1489년 뱌트캬, 1521년 랴잔을 각각 정복하였다. 1533년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북서쪽의 발트해까지, 북쪽의 북극해 연안, 동쪽의 우랄 접경지대까지 확대되었다. 한편 16세기경에는 과거 몽골 침입시 서쪽으로 이주해 간 슬라브족들이 드네프르 중상류 지역에 다시 정착하기 시작하여,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라는 민족국가를 형성하였다. 16세기 후반 무렵에는 비록 서쪽 지역 영토를 상실하였지만 남쪽과 동쪽으로는 각각 카스피해와 시베리아 접경지대까지 진출하는 등 영토확장이 계속 이루어졌다. 이때 많은 러시아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시베리아 정복은 급속히 이루어졌다.
1581년 러시아인의 동진이 시작되어 1640년에는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하였다. 1652년 바이칼호 지역을 합병한 뒤, 1689년 중국과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어 스타노보이산맥 이북의 모든 땅을 러시아 영토로 삼았다. 1689년 남쪽의 중앙아시아·몽골 접경지대까지, 동쪽으로 연해주와 캄차카반도를 제외한 전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것은 러시아인의 통치, 관료제도, 종교와 관습 등을 주변의 비(非)러시아계 지역에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재위 1689~1725)는 서쪽으로 영토를 계속 확장해나갔다. 그 결과 표트르 대제는 현재의 러시아 영토 대부분을 지배하는 최초의 러시아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1703년 네바강 하구 부근에 상트페테르부르크(후에 레닌그라드로 바꾼 후 최근에 다시 원래의 지명으로 복귀)를 건설한 뒤, 1713년 제국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한편 표트르 대제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개혁을 단행하면서 유럽과 본격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가 외부세계로 진출하는 창구역할을 하였으며, 이곳을 통해 무역이 성행하였다. 또한 이 무렵부터 우랄산맥 일대에 철강과 군수공업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해군의 창설과 군의 근대화 및 행정조직개혁 등이 표트르 대제 때 이루어졌다.
18세기 말 예카테리나 여제(재위 1762~1796)는 폴란드의 분할(1772년, 1793년, 1795년 세차례 이루어졌다)에 참가하면서 서쪽으로 영토를 더욱 확장시켰으며, 흑해 카프카스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알렉산드르 2세는 제국의 영토를 중앙아시아까지 확장하여 14세기 모스크바 공국보다 약 1,300배 넘는 광대한 영토를 성립시켰다. 남쪽으로 카프카스와 카자흐스탄 및 아랄해까지,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과 베링해를 건너 미국의 캘리포니아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19세기에 러시아는 중요한 경제적 변화를 겪는다. 비옥한 흑토지대의 획득과 흑해 연안의 항구건설로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곡창지대가 되었으며,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돈바스 지방에 공업이 크게 성장하였다. 한편 유럽의 목재수요가 늘어나면서 북쪽의 아르항겔스크항이 크게 번성하였다. 또한 광활하고 잘 통합된 영토를 개척함으로써, 후의 소비에트 정권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1891년 착공하여 1917년 건설된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광활한 국가를 통합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의 패배에 자극받아 일어난 노동자들의 혁명은 차르 체제를 급속히 약화시켰으며, 1917년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 현재 정착된 역사입니다. 완전히 믿어야 하는지 .. !!
여러정황으로보아. 어쩌면 청나라는 인도/동남아시아의 서부까지 영향력을 발휘한 무굴제국(1530년 즈음 - 1900년즈음)의 별칭이던가. 인도북부(펀잡/라자스탄)에서 아프칸 우즈벡 카자흐에 걸쳐 존재한 국가가 아닌가 합니다. 위 중앙아시아의 ~~스탄 계열의 국가들. 국명이 이렇게 된다는 것은 문화적 동질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현재의 국가 :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투르크메니스탄.터키스탄, 우즈베키스탄,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모든국가가 한 덩어리로 국경을 접하고 있읍니다. 다른한편으로 그당시의"~~아" 로끝나는 나라들,,, 이름 서쪽에 아라비아(사우디/시리아/예멘..), 페르시아(이란/이라크), 남쪽에 인디아 북쪽에 러시아, 북서에 아르메니아,그루지아,불가리아,루마니아 그 중앙에 여러 ~~스탄 국가들 이 스탄국가의 해체전 모습이 친아(지나, 차이나,청나라)가 아닐까? 淸은 영어로 Qing 또는 Chin 으로 표기됩니다. 그리고 모두 모두 합쳐서 아시아 이러한 중앙아시아(친아/지나:차이나)의 주변에는 .... 남쪽 인도를 점령하고 수십만의 인도 용병 세포이를 보유한 영국, 북쪽에는 코작인을 용병으로 쓴 러시아 , 서쪽에서는 알제리 용병 쥬아브를 고용한 프랑스, 독일(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미국, 이태리 등이 연합군을 만들어 밀어붙여 차이나(~~스탄 나라들)를 무장해제 한것은 아닌가 ??. 1667년에 찍힌 청나라황제의 모습은 영락없는 서양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변발한 자들의 모습이 모두 인도인/서양인에서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더우기 북경성의 내부모습은 크게 북쪽의 타타르 시티, 남쪽은 차이니즈 시티 라고 8연합국의 자료에 기록되어 있으며, 더우기 황궁(자금성)은 타타르시티 안에 있읍니다. 이는 타타르와 차이나가 같은 문화 지역권은 아닐까? 북경성 내/외부는 낙타가 활개치고 다니고 외부에는 사막(?)이 이어지는 광활한 풍경입니다. 이러한 풍광이 어울리는 곳은 중아아시아 일듯합니다 이그림은 1904년 프랑스에서 발행된 엽서입니다. 의화단 사건이 그당시 유럽국가들에게는 악몽(나이트메어)였다고 써있읍니다. ----> 의화단이 1900년에 생긴 사건이니 1904년쯤에 옛날 이야기 하면서 만든 기념엽서로 보입니다. 청나라가 유럽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인데 중국이 유럽에게 위협이 되었을까? 아마도 그당시의 청나라 라고 하는 것이 유럽과 가까이 있을때나 가능한 말이 아닐까? 그럴경우 청나라는 지금의 중앙아시아 어름이 아닐까 의심이 됩니다.. /끝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특히 코사크 사람의 사진은 충격이었습니다. 건강하셔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위 내용으로 보면, 조선은 동방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청의 북경 역시 그동안 여러차례에 걸쳐 주장한 대로 현 신강의 서쪽(서북, 서남, 정서)지방에 있었을 것이란 확신이 섭니다. 특히 역사서에 기록된 몽고인은 현재의 몽골인과는 전혀 다른 인종이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징기스칸의 대정복 전쟁이란 글은 다시 써져야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기록한 개인 문집속의 기록들이 빛을 내기 시작합니다. 이 분들이 기록한 내용과 서양의 개척자들이 그린 삽화의 모습과 대동소이한 것 같으니 말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리며,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천자국대륙조선>님! 동방은 당연히 조선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 동방의 기준이 어디인가? 그게 문제지요. 설마 중앙아시아의 서쪽이나 서북쪽에 "조선"이 있었다는 말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조선의 서쪽 또는 서북쪽에 청(존재했다면)이 있을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위치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주장이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한 증거는 없으며, 다만 그럴 개연성이 많다는 정확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증거되지 않은 주장을 사실인냥 하는 것도 일종의 왜곡이라 말할 수 잇습니다. 최두환 선생의 주장 역시 개연성과 정황입니다. 아직 증거나 근거는 없습니다. 객관적 시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스탈린이 코작인들을 거의 다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코카사스 부근에서 유목하던 사람들을 중앙아시아로 보내서 나라이름 하나씩 붙여줬지요. 코작이 카자흐 맞고 (19세기 똘스또이 소설들에도 나옴), 키르기즈도 코카사스 이북에 있었지 중앙아시아에 안있었습니다. 소련이라는 나라 자체가 고대사 세탁작업의 하나로 보여지네요.
결국 폴권님 의견은 황인들의 중앙아시아 역사도 조작된 것이라고 비춰지는군요.역사에 대해서 정확한 사료제시와 물증을 들이대야하겠지만 저의 생각도 그와 비슷합니다. 황인들에게는 아주 열받는 사실이고 저도 황인으로 태어났지만 과거 조선인을 그린 그림들이나 본문의 청인들 모습또한 황인들의 모습과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금단의나라 조선에서 코카서스 인종이 갓 쓰고 있는 모습을 보면 황당하죠. 인정할건 인정해야합니다. 사료에도 조선인은 키가크고 피부가 하얗고 코가 높다는 기록도 자주 보입니다. 그들은 결코 지금의 황인들의 모습은 아니죠.
몽골인들이 눈이 파랗고 수염이 붉다고 묘사된건 오이라트 부족을 묘사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몽골 어린이들은 머리카락이 갈색인 애도 있고요. 서쪽으로 갈수록 이란계 민족의 혼혈로 서구적인 용모를 지닌 아시안이 많습니다.
당장 위구르인만 해도 얼굴은 넙적한 몽골리안인데 수염이 무성하고 꼽슬인 이국적인 용모가 섞여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해모수님은 조선인이 황인이 아니라는데, 구한말의 사진만 봐도 영락없는 황인종입니다. 물론 조선인이 키가크고 피부가 하얀건 사실이지만 그걸 황인종이 아닌 백인종의 특징이라고 보는건, 믿고 싶은것만 믿겠다는 의지로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글은 억지로 짜맞춘 기색이 역력해보입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믿기 싫은 것은 안믿으면서 기존의 상식을 현저히 뒤바꿔놓겠다는 역사 음모론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임진왜란 때 '서경(평양)으로 몽천하십시오.' 라는 기록이 있는것을 서쪽으로 몽천하십시오 = 왜군이 쳐들어왔는데 왜 서쪽으로 피신하는가 그건 조선이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다. 라고 해석하는 바보들도 있더군요.
또 예부상서 홍계준이 올린 상소에 절강성 등 중국 지명이 나온다면서 조선이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황당한 소리도 있더군요. 예부상서라는 관직만 봐도 명나라 관직인데 그걸 조선 관직으로 착각해서 온 사태죠.
그리고 북경성에 낙타 어쩌고 하는데, 북경이 있는 화북은 황토 고원지대입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고비사막이 펼쳐져있고, 중국에서도 낙타(쌍봉낙타라고 하는 중앙아시아산, 단봉낙타는 서남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저 글을 쓴 사람은 일반인 수준에도 못 미치는 지적 수준을 가지고 글을 썼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관심을 끌기 위해 전혀 상식에 안맞는 허황된 글을 쓴거라고 봐야 합니다.
이런말이 있죠. 증거가 없으면 모든 추측이 가능하다. = 깔린 상식이 없으면 어떤 가정이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귀뚜라미 싸움을 지켜보는 중국인의 모습이 동양인이 아니라뇨. 딱 봐도 동양인처럼 보이는데요?
저 글을 쓴 사람은 동양인의 사진을 갖다놔도 동양인이 아니라고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사람입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믿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자기가 모르면 없는거고, 자기가 아는 상식선에서 모든걸 결정짓는 성격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