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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완행열차의 아련한 추억 글/사진: 이종원
대학시절 괜한 방황을 했다. 무슨 고민이 그리 많았고, 무엇에 그리 목말라 했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시시콜콜한 일일텐데 당시에는 나를 위협한 심각한 문제였나보다.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숨 막히면 나는 춘천행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연어가 회귀하는 것처럼 무작정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니 억지로 고민을 짜내어 기차에 올라타고 싶었는지 모른다. 기차는 즐겁다기 보다는 늘 힘들었었던 기억만 떠오른다. 언제가는 내가 사랑했던 여인이 저 기차를 훌쩍 떠나 버릴 것 같은 그 불안감 말이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정태춘의 '북한강에서' 란 노래가 녹음했다. 이 노래는 내가 가장 좋아한 그리고 유일한 친구였다. 털컹거리는 기차안에서 낡아빠진 워크맨에서 찌찍거리는 잡음과 함게 전해오는 그 음률이 아직도 귀에 머물고 있었다.
육중한 쇠바퀴가 굴러가듯 내 인생도 40년을 넘게 달려왔다. 이름도 선한 비둘기호, 알록달록한 무궁화호, 초록색 새마을호 그리고 시속 300km의 KTX까지....빠른 것이 내 인생 제일의 목표임을 정하고 스스로 가속기를 밟아대었다. 탈선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온 내가 대견스러울 정도다. 짧은 연륜이지만 가장 늦은 열차가 가장 빠르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깨달았을 때는 비둘기호가 사라졌다. 1955년 당시 가장 빠른 급행열차인 통일호도 60년 95km 고속 무궁화호에게 자리를 내주더니 1969년 120km의 새마을호가 등장하면서 완행열차로 전락하게 된다. 2000년 11월 증산-구절리 구간을 운행하던 정선선을 마지막으로 비둘기호가 사라지고, 통일호는 가장 느린 열차로 명맥을 잇다가, 2004년 4월 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니까 현재 가장 늦게 가는 기차는 무궁화호다. 조치원역이었다. 할머니와 부산을 가는데 비둘기호를 타잖다. 무려 10시간이나 썰렁한 기차에서 떨고 떨었다. 역명이 있는 모든 곳에서는 다 멈춰섰고 큰 역에서는 빠른 열차를 보내기 위해 10분이고 20분이고 마냥 기다렸다. 그 지옥같은 기차를 다시는 타고 싶지 않았다. '죽어도 다시는 이 기차를 타지 않을거야.' 할머니가 조치원으로 돌아 가실 때도 굳이 비둘기호에 타고 가시겠다고 한다. 부산역 가는 버스안이다. 할머니 안주머니에서 꼬질꼬질한 지폐 몇장을 꺼내 내 손에 쥐어준다. 그 따뜻한 손길을 나는 잊을 수 없었다. 이 돈이야말로 느림의 대가였다. 거기엔 대물림 되어온 정이 있었고 핏줄에 대한 애뜻한 사랑이 묻어 있었다. KTX 타고 달리니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대구에 도착했다. 몸은 벌써 왔건만 내 영혼과 情은 인간이 만들어낸 빠른 이기에는 올라타지 못했다보다. 느림의 미학을 깨닫는 순간 가장 느려터진, 할머니의 그 비릿한 생선 내음이 스며든 비둘기호는 더 이상 탈 수 없었고 먼 은하속에 사라진 999호 열차처럼 추억속에 기차가 되어 버렸다. 간이역에서 나만 달랑 내려 놓고 아련히 떠나 버린 기차는 이젠 퇴색되어 버린 내 기억속에서 끄집어내야 한다.
대전역이었을거다. 어머님이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저 습기 낀 창 안의 모습처럼 아른거린다. 3분밖에 남지 않아 맘이 급해졌다. 어머님은 가락국수 한 줄을 내 입에 넣어줘야지, 당신의 입에서 후루훅 구겨 넣어야지. 기차가 출발하지 않나 가끔은 고개를 돌려줘야지. 단무지는 왜이리 질긴 거야. 기차는 금방이라도 떠나려고 기적소리를 울려댄다. 깃발을 들고 있는 역무원이 빨리 탑승하라고 재촉한다. 이때 우동집 아저씨의 한마디. "그냥 들고 타세요." 객차에 앉아 가져온 국수그릇을 자세히 보니 그것은 생전 처음보는 1회용 그릇였다. 어머님은 그것이 마냥 신기했나보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그릇값을 안 줬는데...." 배는 부르지만 부드러운 유부가 얹혀진 우동 한 그릇이 먹고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차 시간에 쫓겨 국수 한그릇 먹지 못하는 신세가 가련하다.
청량리는 나의 MT 출발지이기도 했다. 과묵한데다 잘 생긴 조교형이 우리 MT때 막걸리를 두말 들고 찾아 와서 함께 어울려 주거니 받거니...그런데 사고치지 않나 감시해야할 조교형이 너무 오버했나보다. 우리가 자고 있는데 갑자기 2단 옆차기를 하면서 문을 부수웠다. 그런데 다음날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군대를 다녀왔더니 조교형은 강사가 되어 교단에 올라섰다. "형..저는요. 형이 2단 옆차기 했들 때가 제일 멋있었어요." "쉿" 옆 과인 불문과에는 예쁜 여학생이 많던데 우리과(중문과)에는 여학생도 별로 없는데다가 유난히 지방출신 여학생이 많았다. 그중 가장 건강하게 생긴 여학생에게 처음으로 말을 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저는 이종원입니다. 이름이 뭐예요?" "김부자입니더" "이름이 참 향토스럽네요. 고향이 어디세요?' "점촌인데요" 세상에 점촌이 어디 붙었지. 점순이도 아니고...김부자란 이름도...어쨌든 20년이 지난 지금 김부자가 가장 부자가 되었다. ^^ 내 이름도 '이재벌'로 바꿔볼까?
차표를 손에 꼭 쥐었다. 쥐포틀에 구웠는지 표는 두배는 커지고 얊아졌다. 작고 투툼해야 손톱에 끼인 까만 때를 긁어낼 수 있는데.... 구둔이 어디있는지 모른다. 인제의 살둔처럼 높은 산속 엉덩이를 댈 만한 평평한 땅이겠지...
6번홈 7시 기차다. 개표소만 봐도 가슴이 설레온다.
디지털보다 이런 아나로그가 더 좋다. 철컥철컥 넘어가는 소리덕에 내가 여태 살아 있음을 알게하기 때문이다.
열차에도 이렇게 이름표를 달고 있다. 무궁화호 청량리발 제천행열차다. 내가 탈 수 있는 가장 느린 열차에 올라탔다.
의외로 너른 공간이 나온다. 남녀 화장실도 있고.....세면대도 있고. 무엇보다 너른 창이 있어 기분이 좋다. 맥주 한깡 들고 계단에서 마셔야지.
핸드폰이 생기면서 쓸모 없어진 공중전화박스가 기차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한 때는 달리면서 전화하는 것을 보고 참 신기해 했는데...들고 다니는 전화가 나올 줄은...... 전화박스는 10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괜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20대 退妓처럼 안스러워 보인다.
늘씬한 KTX보다는 디자인이 떨어지지만 색깔은 더 좋은 것 같다. 기관차는 5량짜리 열차를 달고 달려야한다.
드디어 출발. 아직도 일상의 작은 행복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스쳐간다.
추억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어둠속 잔영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기쁜일 슬픈일도 터널속에 스쳐지나가는 조명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작은 간이역을 지나칠 때마다 정갈한 백자가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 그 짧은 찰나에 내 마음은 달항아리처럼 맑아졌다.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20대 젊은이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본다. 느린 기차를 탄 기념을 남기고 싶어졌다. 이런걸 셀프촬영이라고 하지. 양평역에서 사람들을 쏟아내고 기차는 또 달린다. 단선이기에 기다리기 일쑤다. 불평하는 사람 하나 없다. 백두산 가기위해 통화역에 도착했을 때 열차는 2시간을 넘게 연착했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표정짓는 사람은 역시 한국사람. 사람이 빠져나가니 기차도 어두워졌다. 사람이야말로 기차를 밝히는 등불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용문사가 가까운 용문역이다. 만원으로 청량리에서 출발했던 기차는 용문역에서 마지막 사람을 쏟아내더니 객실엔 이젠 2할도 남지 않았다. 짜증났던 그 인간들이 그리워진다.
대학 2학년 MT때다. 기차에서 예쁜 여학생이 홀로 기차를 탔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아... 방황하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다. 춘천행 열차에서 눈이 맞았는데 대성리에서 나를 따라 내리는 것이 아닌가? 우리과 여학생의 무서운 눈초리가 없었다면 난 MT도 뭐고 그녀와 함께 방랑길에 나섰는지도 모른다. ^^
아득히 멀어져가는 기차길. 군대를 마치고 대학 3학년때 나는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도 행복한 결정을 내렸다. 영어 학원에서 만난 그녀와 나는 기차를 타고 강촌까지 가서 북한강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강을 바라보며 과감히 프로포즈를 했다. 그때의 떨림과 설레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춘천의 이름 모를 성당에 쳐들어가 신부님께 다짜고짜 '축복'을 해달라고 떼를 썼다. "신부님..우린 6년 후에 결혼할 예정입니다. 아내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면 결혼 할 겁니다. 우리 둘을 위해 축복해 주세요." 신부님은 빙그레 웃으신다. 난 아직도 그 미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쨌든 신부님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솔직히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 기도의 힘이 6년을 버티게 했는지도 모른다. 다음날 김포공항에서 아내를 미국으로 보낸 후 비행기를 바라보고 펑펑 울었다. 힘겨울 때마다 나는 텅빈 객실을 헤메고 다녔고 아내가 가버린 북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길에 내 희망과 인생을 걸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후 그녀는 약속대로 내 아내가 되었고 정수 성수의 엄마가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 그것은 내 일생 최대의 도박이었다. 하얀 조명이 '구둔'이라는 역명을 비추고 있다. 그 따뜻한 조명불빛 하나가 구둔역을 내 고향으로 만들어주었다. 하루에 3번 운행하는 막차가 이제 떠나 버렸으니 저 저 불도 꺼질지 모른다. 1940년대 세워진 역사니까 거의 60년을 이땅에 버티고 서 있던 것이다. 달랑 4명만 기차에서 내렸다. 역까지 걸어가는 동안만은 우린 운명공동체다. 역을 벗어나면서 이제는 제 갈길을 가야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으로 말이다. |
내가 꿈꾸는 그곳은 / 배 송희
내가 꿈꾸는 그곳은
나의 님이 계신곳
정다운 그의 얼굴 바라보면 마음껏 미소지을꺼야
나의 사랑하는 님이여 나를 놓지마오
사랑하는 님이여
나에 귀에 속삭여 주오
나를 가장 사랑하여 모든 것을 내여놓은
나의 사랑하는 님이여
내가 꿈꾸는 그곳에 나의
입맞추는곳
정다운 그에 팔에 안기어 마음껏 웃어 댈꺼야
나의 사랑하는 님이여 나를 놓지 마오
사랑하는 님이여 나에 귀에 속삭여 주오
나를 가장
사랑하여 모든것을 내여 놓은
나의 사랑하는 님이여
내가 꿈꾸는 그곳에 나의 님과 속삭이는 곳
정다운 그의 손을 잡고
밤새 노래 할꺼야
나의 사랑하는 님이여 나를 놓지 마오
사랑하는 님이여 나의 입술에 꿀같은 당신
당신의 그 사랑안에서
나를 녹여주오
나의 사랑하는 님이여
나의 사랑하는 님이여
첫댓글 아 기차의 출발과 달림은 마치 인생의 한 파노라마 같습니다... 종원행님의 연애시절 이야기가 왜이렇게 애절하게 들릴까요....저도 그런 용기가 필요할텐데...^^
기차 타본지가 좀 됐네요...춘천가는 기차는 1999년에 마지막으로 타보고 여태껏 자가용으로 다니네요...기회가 되면 기차를 타봐야겠어요...대성리로...청평으로...강촌으로...춘천으로...엠티다닐때가 생각나네요...양평으로 기차타고 아빠랑 용문산에 갔던 기억이 나네요...^^
읽으면서 가슴 떨리게 하는 완행열차 속 에 얼킨 추억...아름다워요 멋진 이원님 오래 행복하세요 대서양변 Annapolis 에서 합장
참으로 예쁘고 멋진 추억을 간직하고 계시네요. 글을 읽는 내내 옛추억을 끄집어 내어 회상하며 행복해 하는 대장님의 모습을 상상해 봤어요. 완행열차처럼 예쁘고 멋진 추억 계속해서 만들어 가고, 가끔은 조금씩 꺼내어 회상해 보는 멋진 우리 대장님이시기를....
젊은 날의 추억은 아름답기 그지없지요. 그 사랑 오래토록 변치 않기를.....
추억이네요... 아련한 추억~
근데 무궁화호가 완행 입니까? 통일호, 비둘기호는 아예 없어진건가요? 옛날엔 완행열차 바로 윗 단계를 [보급] 이라고 불렀는데...기차여행.....그립습니다.......멀리 캐나다에서....
그렇습니다. 비둘기호는 200년11월 증산-구절리 구간을 마지막으로 사라지고, 통일호는 2004년 4월 ktx가 다니면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완행은 무궁화호겠지요. ^^ 오늘 기차이야기는 외국에서 더 관심을 주시는 군요. 미국 미네아폴리스, 캐나다...^^
그 아련한 추억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나이까, 올 여름 허준아우에게 치료받기 위해 남해에서 진주역으로 그리고 덜렁거리는 기차타고 부산 부전역까지 3시간 넘게 여행을 했었네요, 고2때 설악산 수학여행(부산-강릉), 완행열차 그 추억속으로 다시 떠나고 싶어~ ^^*
참으로 아련한 추억같은 여행이네요.부럽습니다.저희 꼬맹이들과 기차여행을 하고 싶은데 쉽지 않네요.
경인선 통학시 1시간에 1대 였는데 중학교 2학년때 복선이 개통 되었답니다. 학교에 경인선, 교외선, 경부선 통학생들이 꽤 많았었답니다. 노량진에서 기차 통학 하던 친구도 있었고.. 기차 놓치고나면 옆 대기차 타고 기다리다 잠이 듭니다. 그러다 또 놓치고 집에 오면 놀다온다고 박살나고,,, 종원님 글 읽고있으려니 그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워 집니다. 1973년도인가 친구있는 마산에 비둘기호타고 25시간 걸려 놀러 가던일,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 12시간 걸려 피서 다니던 일 기차 놓칠까봐 뛰어타다가 떨어질뻔 한 일(떨어지면 최하가 중상) 딸네미 시집 보내고, 아들네미 군대가는 올 겨울, 간만에 집사람과 기차여행 준비해야 겠습니다.
기차여행...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이 기차여행이라 하던데 대장님께서 테입을 끊으셨네요. 저 역시도 이번 겨울에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만 글을 통해 그 아련한 추억이 묻어옵니다. 지난 젊은날. 서울 생활하며 막연히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때 몸을 실었던 기차여행. 청량리역앞 광장은 휴일이면 청바지 차림에 기타를 둘러맨 젊은이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웠죠. 춘천호반.강촌.청평.대성리의 경춘선도 좋았고, 연천,한탄강으로 떠났던 경원선도 좋았고, 온 세상이 눈으로 뒤 덮였던 태백선도 좋았던 그 시절....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직접 눈으로 보며 누렸던 그 시절의 기차여행이 눈에 선합니다...좋은 글과 사진 고맙습니다..
멜 받고 뛰어 왔어요. 저는 성남에서 직장 생활하면서 주말을 이용해 엄마 보러 갈 때 주로 밤 열차를 탔지요. 그 때 이용했던 차가 통일호 & 무궁화호...그 때는 무궁화호도 고급...지금은 빨리병에 걸려서...빠른 것만 찾게 되네요.
대장의 글을 통해서 나를 보게 되네요, 특히 용돈이 없어서 노량진역에서 기차를 몰래타고 어디던 다니던 생각이... 그래서 생각해 낸것이 그당시 유행하던 "무전여행"... 을 하기위해서 내가 가고픈 도시마다에 펜팔친구 만들기에 열중했던 시절... 하하 갑자기 50여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떠 오르네요. 모놀대장 늘 감사!!!.
제고향에는 기차가 다니지 않아 방학때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는 언니집에 가기위해 하동까지 와서 밤새도록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갔던 기억이..근데 내려올때 경전선 기차를 타야 되는데 경부선기차를 타는 바람에 천안역에 내려 기차를 갈아탔던 기억이 납니다..그때 하동으로 가지않고 부산으로 갔더라면 아마 미아가 되지않았을까요..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합니다..그때 승무원이 하시는 말씀..조금만 늦었더라면 큰일날뻔했다고..지금은 철도에 몸담고 있는 옆지기랑 살다보니 기차가 다니는 선로 200m를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ㅎㅎ
기차??? 태어나서 몇번이나 탓을까^^* 기차없는곳에서 태어나 철도없는곳에서 자라 직장생활은 기차역이 있는곳이지만 마땅히 기차타고 갈일이 없다 기차타고 갈곳이 없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도 기차를 못타보았단다^^*
대장님과 언제 꼭 같은 여행을 해보고 싶어하는 딸기아지매의 마음은 아직도 느긋해요.. 아이들이 커가고 있으니 그때가 꼭 오겠죠.. 기차여행이라도 좋을텐데.. 가족과 함께 달려봐야겠어요. 이번주에 한번 떠나볼꺼나요.. 건강하시어요. ^^
정말... 왜? 사진과 글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도는 걸까요? 님들은 아시나요~~~~?
나는 기차를 몇번이나 탔을까 다른 추억도 없이 갇혀만 지냈던 날들,공부로 출세하지도...재벌이 된 것도 아닌데..왜....나다시 돌아가고 시포
기차의 추억도 좋구...6년을 기다리신.용기두 멋지네요.... 항상 글만 읽다.오늘은 짠..해서 이렇게 글을 쓰네요
대장님...글이 넘 좋습니다. 문재가 출중하시고 독자를 감동시키는 재주도 있으시니 이다음에 다시한번 엮어주십시요 이글을 읽고 모놀에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드네요 올겨울엔 아들넘과 기차여행 해야겠습니다, 건강하시구 좋은 글과 여행...많이하시길 바랍니다.
이곳에 오면 맘에 위로가 되요... 좋은 사진과 글 감동의 물결...빼곡이 적힌 글들을 보면서 또한번의 잔잔한 감동을..받습니다.. 모놀을 통해 혼자여행을 시작했고 댓글도 시작하네요... 대장님 추운데 감기조심하세요
옛날 생각이 절로 나는 사진, 글이군요. 감사 감사...
아련한 젊은 시절로 잠시나마 돌아가 봅니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니까 이제 느린게 그립습니다. ^^
정말로 추억이~~~~~~ 생각나네영 ㅎㅎ감사해영 옛 추억을 생각나게해조소요^^
역시 대장님은 여행대장만이 아니라 연애대장도 되시는군요, 한편의 흑백영화를 보는것처럼 마치 내추억처럼 옛사람들이 기억속에 떠오르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곳에서 작가협회 송년회가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