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한테 돌려받은 숙제 공책에 ‘참 잘했어요’ 도장이 쾅 찍혀 있기를 바라는 심정 아세요?”
‘국화꽃향기’(감독 이정욱) 개봉(28일)을 앞둔 박해일의 속마음은 이랬다. 아직 앳된 얼굴의 이 청년에게는 올봄 숙제가 몰린 감이 있다. ‘국화꽃…’ 외에도 ‘질투는 나의 힘’(박찬옥)과 ‘살인의 추억’(봉준호)이 잇달아 극장가에 걸릴 예정이기 때문이다.
연극동네에서 ‘청춘예찬’(99년)으로 주목받은 그가 영화 관객들에게 처음 얼굴을 내민 건 2001년.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찬 고교생 성우 역으로 데뷔한
박해일은 곧장 주연급으로 떠올랐다.
“연극 무대는 놀이터 같았는데, 카메라 앞에 서면 머릿속이 백지(白紙)가 돼요. 이번 영화에서도 누나가 ‘풀어라’ 하고 툭툭 던지는 말 덕에 쓸데없는 긴장을 덜 수 있었습니다.”
‘누나’란 상대역 장진영을 말한다. ‘국화꽃…’은 대학 동아리 선후배로 만난 인하(박해일)와 희재(장진영)가 나누는 슬픈 사랑을 그린 영화. 박해일은 이번에도 사랑을 잃어버린다.
순진한 열정에 사로잡힌 ‘와이키키…’의 성우에서부터 연인을 거듭 빼앗기는 ‘질투는…’의 대학원생 원상, ‘살인의…’의 음울한 용의자 현규까지 박해일은 어둡고 절망적인 캐릭터들을 맡고 있다.
일본 영화 ‘우나기’에서 야쿠쇼 코지가 보여준 연기를 첫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그는 어둠에 익숙하다.
“볕이 쨍쨍한 날보다 흐린 날을 좋아해요. 혼자 방구석에 처박혀 음악을 듣거나 기타줄을 튕기면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외로움이 서려 있다. “바다를 무서워하는 희재가 불 같다면, 제가 맡은 인하는 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박해일은 ‘국화꽃…’에서 정말이지 물을 떠올리게 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제일
곤혹스러웠던 장면은 죽음을 앞둔 희재를 목욕시키는데 희재가 덜컥 “손톱깎이는 누가 챙겨주지?”라며 울먹일 때.
“결혼은커녕 가까운 사람을 저승으로 떠나보낸 적도 없는 제게 그 감정이 고일 리가 없지요.”
애늙은이. 나이답지 않게 신중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느리고 어눌한 말투의 박해일은 대답을 생각할 때 미간을 찌푸리는 버릇이 있었다. 77년생인 그가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는 함중아의 ‘내게도 사랑이’나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처럼 해묵은 곡들이다.
같이 작업했던 감독들은 그에게 어떤 인상으로 남았을까. “임순례 감독님은 어머니나 부처 같은 이미지였고, 어린 시절 학교 담벼락 위로 올라가 걸어다니곤 했다는 박찬옥 감독님은 양쪽을 다 보는 관찰력을 지닌 분이셨죠. 봉준호 감독에게서는 날카로운 풍자정신을 봤고 이정욱 감독님은 ‘국화꽃향기’의 인하처럼 가정적인 분이더라구요.”
박해일은 고등학교 3학년 수능시험 전날 오토바이를 타다 사고를 당해 무릎을 크게 다쳤었다. 대신 얻은 건 ‘군(軍)면제 판정’. 그는 “그 26개월을 음악과 춤, 연극 등 세상 경험을 쌓는데 고스란히 쏟아부었다”며 “지금 배우로 살고 있는 것도 그 교통사고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 일본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읽고 있다. ‘국화꽃…’에서와 달리 현실에서는 책갈피를 쓰지도 책귀퉁이를 접지도 않는단다. “꼼꼼한 편은 아니고 흔적 안 남기고 덮어버리는 스타일이에요. 어디까지 읽었을까, 다시 찾는 재미도 있구요.”
며칠 전에는 소가 되는 꿈을 꿨다. ‘올해는 소처럼 일만 하라’고 누가 해몽을 해주더란다. 무한한 미래 앞에 선 박해일이 배우로서 일구고 싶은 게 뭘지 궁금했다.
“연기가 삶을 풍요롭게 해주기도 하고 거꾸로 삶을 망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제 막 시작했으니 더 달려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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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기 어린 눈이 매력적인 배우 박해일.즐기는 운동은 탁구다.공격형이 아니라 수비형 탁구를 좋아하는
것도 성격을 닮았다. /사진=조인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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