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그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수년 전의 일이다.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로 문학기행을 떠났다. 시인 서정주님의 고택과 시비를 둘러보는 문학 기행이었다. 총무를 맡았던 나는 무언가 의미있는 추억을 남기려고 50개의 테입을 사서 선물로 나누었다. 가수 송창식이 부른 노래 ‘선운사’였다.
먼 남행길에 동백꽃을 노래한 ‘선운사’ 테입은 차안에서 하루 종일 울려 퍼졌다. 서정주님의 시비를 둘러보고 일행은 선운사 대웅전 뒤편의 동백 숲으로 향했다.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선운산 동백 숲은 수령 약 500년 정도의 나무 3천 그루가 산자락에 군락을 이룬다. 개화 시기가 늦은 선운사 동백꽃은 3월 하순부터 5월 초순까지 꽃을 피운다. 문학기행에 나선 것이 4월 하순이었는데 선운사 동백꽃은 후두둑 후두둑 지고 있었다. 동백꽃을 하나 둘 주워 든 회원들이 선운사 동백꽃을 흥얼거렸다.
동백꽃이 지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꽃잎 하나 상하지 않은 붉은 꽃이 덩어리째 툭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백꽃이 지는 모습을 가장 극적인 아름다움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제주도와 일본에서는 이 모습을 불길하게 여겼다고 한다.
제주도 사람들은 동백꽃이 떨어지는 모습에서 목이 잘려 사형을 당하는 일을 연상했다. 조선 말기에는 천주교 신앙 금지로 절두형의 박해가 많았다. 일본인들 동백꽃이 갑자기 떨어지는 것을 보고 불행한 일이 닥치는 것을 연상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지진과 태풍에 일본인은 늘 불안하게 살았다.
동백나무는 동양의 꽃나무이지만 서양에 소개 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 정열적인 붉은 꽃으로 소설과 노래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프랑스의 작가 뒤마의 소설「춘희」와 이탈리아의 음악가 베르디의 오페라「춘희」가 바로 동백꽃을 소재로 한 것이다. 춘희의 원제는「라-트라비아타」이다. 붉은 꽃인 채 툭툭 떨어지는 동백꽃의 모습에 비운의 여주인공「비올레타」가 오버랩 되는 이야기이다.
동백나무의 학명은 카멜리아 자포니카(Camellia japonica)이다. 동백나무를 총칭하는 속명 카멜리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선교사 카멜(kamell)을 의미한다. 카멜은 17세기경 동양을 여행하면서 여러 종류의 동백을 수집하여 유럽에 소개하였다.
종소명 자포니카는 일본산이라는 뜻이다. 일본은 동백나무를 여러 품종으로 개발하였다. 겹꽃 홑꽃은 물론 다양한 색깔과 크기로 만들어 유럽에 수출하였다. 우리나라 화단에 자라는 동백꽃은 대부분 일본에서 개발한 것이다. 그러나 동백꽃은 홑겹으로 피는 것이 으뜸이다. 자생지에서 붉게 피는 동백나무의 단아한 품격을 따를 수 있는 개량품은 없다.
늘 푸른 나무인 동백나무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도 자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의 섬 지방에 분포한다. 바닷가에서는 따뜻한 해류의 영향으로 중부 지방에까지 올라간다.
동백나무가 크게 자라면 7-8m에 이른다. 사철 푸른 상록수이어서 남도에서는 정원수로 많이 가꾼다. 사철나무 잎을 닮은 푸르고 도톰한 이파리는 반짝거리며 윤이 난다. 잎 가장자리의 거치는 작은 톱니가 물결치는 모습을 보인다. 다섯 장의 붉은 꽃잎은 조금씩 겹쳐져 언뜻 한 장으로 보인다. 그 안에 노란 빛깔의 수술이 다발을 이룬다. 짙푸른 잎사귀, 붉은 꽃잎, 샛노란 꽃술이 이루는 색의 조화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동백나무의 아름다움이다.
동백나무의 꽃봉오리는 가을에 맺힌다. 그러다가 동지가 지나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지방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남도의 섬에서는 1월이면 본격적으로 개화한다.
동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 지역은 내륙과 바다와 섬에 따라 북한계선이 다르다. 내륙에서는 지리산화엄사가 한계선이고 해안으로는 충남 서산이며 섬으로는 대청도까지 올라가고 동해로는 울릉도가 북한계선이다.
우리나라에 곳곳에는 사연과 전설을 간직한 동백 숲이 있다. 서천 마량리의 동백정은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되었다. 3백 년 전, 마량 첨사의 꿈에 바다에서 밀려온 꽃다발을 보았다. 이 꽃을 심으면 만세에 웃음꽃이 핀다고 하였다. 첨사가 바다에 나가 동백나무 꽃을 가져와 동백꽃 동산을 가꾸었다고 한다.
여수 오동도의 동백 숲, 온산 앞바다 목도의 동백 숲, 팔색조가 사는 거제도의 동백 숲, 해남 대흥사의 동백 숲, 거문도의 동백 숲, 제주도의 동백 숲 등이 이름 난 동백 숲이다.
남해의 섬 거문도의 동백꽃은 어느 것보다 검붉은 빛을 띤다. 거문도에 자생하는 동백꽃에는 흰색과 분홍색도 있어 아주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동백나무 숲이 분재 등으로 수난을 당하여 이제는 자생지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분홍색의 꽃이 피는 동백나무는 이미 거문도에서 사라졌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안타까운 일이다.
동백꽃은 겨울에 피기 때문에 벌 나비가 찾지 않는다. 벌 나비가 할 수분을 동박새가 대신하는 조매화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동백나무가 유일한 조매화일 것이다. 항도 부산의 노른 자리에 위치한 동백섬에도 동백꽃이 자생한다. 그리고 이곳에는 녹색, 금색, 흰색 깃털이 아름다운 동박새가 서식한다. 동박새는 작은 곤충도 잡아 먹지만 동백꽃의 꿀을 따고 동백나무의 열매를 먹고 산다. 동백나무와는 뗄 수 없는 사이다. 동백나무와 동박새에 얽힌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나라에 포악한 왕이 있었다. 왕에게는 왕위를 물려줄 후손이 없었다. 자신이 죽으면 동생의 두 아들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 포악한 왕은 그것이 싫어 동생의 두 아들을 죽일 궁리를 하였다. 동생이 이를 알고 자신의 두 아들을 멀리 떠나보내고 아들을 닮은 두 소년 데려다 놓았다. 포악한 왕이 이 사실을 눈치 채고 두 왕자를 잡아다가 왕자가 아니니 직접 죽이라고 동생에게 명령하였다. 차마 자신의 아들을 죽이지 못한 동생은 스스로 자결하여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고 두 아들은 새가 되어 날아갔다. 왕의 동생은 죽어서 동백나무가 되어 크게 자랐고 두 아들은 동박새가 되어 날아왔다. 동백나무에 둥지를 틀고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았다.
늦가을의 정취를 맞으려고 동짓달에 전라남도 장흥에 위치한 천관산에 갔다. 천관산은 동백 숲과 억새 군락이 자랑인 호남의 명산이다. 산이름은 봉우리를 이룬 바윗돌이 천자가 보관을 쓴 것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수원에서 5시간을 달려 장흥에 이르니 남도의 계절은 아직 가을이다. 천관산자연휴양림에 동백 숲이 있다지만 오늘 산행은 그 반대 길이다. 산 입구에 支提靈山이란 표석이 산객을 맞는다. 지제영산이라? 호남정맥 끝에 우뚝 들어 올린 영산이란 말인가?
산길에 이르자 귤나무를 가꾼 농장이 띈다. 이어 동백나무 숲이 눈에 띈다. 인공으로 조림한 동백 숲과 자연산의 혼합림이다.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은 살얼음 어는 계절이지만 남도의 11월은 아직 빛좋은 가을이었다.
대부분의 동백나무는 위로 높이 자란다. 은행나무 수놈처럼 길쭉하게 자란다. 암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백나무도 위로 쭉 뻗는 것과 옆으로 푹 퍼지는 개체가 있다. 위로 죽 뻗는 개체는 가로수로 좋고 옆으로 푹 퍼지는 개체는 정원수로 좋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동백나무의 우듬지를 뚝 자른다. 아담한 정원나 가로수로 가꾸려는 생각이다. 키는 크지 말고 옆으로 소담하게 퍼지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행위이다. 동백나무는 스스로 아름답게 크는 나무이다. 남에게 전지 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남도의 명산에는 동백나무가 자생한다. 또 남도의 사찰에는 서너 그루의 동백나무가 서서 어김없이 아늑한 뜰을 지킨다. 대부분 주변의 산에서 수형이 좋은 동백나무를 캐다 심은 것이다.
남도를 여행하기에는 동백꽃이 피기 시작하는 초겨울이 제격일 것이다. 이때에는 윤기 나는 이파리와 맑고 붉은 동백꽃을 감상할 수 있다. 자칫 꾸물거리다가 늦게 찾아가면 붉고 선명한 동백꽃을 만나기 어렵다. 엄동설한의 날씨에 동백나무 이파리는 후줄근해지고 붉은 꽃잎의 가장자리는 얼어 있는 경우가 많다.
낙엽이 진 초겨울에 남도를 찾아가자. 가수 이미자의 대표곡 '동백아가씨'를 흥얼거리며 찾아가자. 붉은 치마에 샛노란 저고리를 받쳐 입은 동백 아가씨가 기다린다
첫댓글 남부지방에선 겨울에도 볼 수 있는 동백꽃이 선운사에선 4월에야 피어나는군요.
붉은색이 참 곱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