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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무논의 물결처럼 세상의 떨림을 읽어내기를 - 시인 이정록
대담- 정진희 사진-서지나
1964년 충남 홍성 출생. 공주사범대학교 한문교육과 졸업.
1989년 《대전일보》,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풋사과의 주름살》《버드나무 껍질에 세 들고 싶다》
《제비꽃 여인숙》《의자》《정말》
동화집- 《귀신골 송사리》《십 원짜리 똥탑》
동시집- 《콧구멍만 바쁘다》
2001년 김수영 문학상, 2002년 김달진 문학상 수상.
현재 충남 아산시 설화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
느낌표가 전부여 한세상 접을 땐 느낌표만 남는 거여
그는 정말, 하찮은 것들 속에 얼마나 많은 삶의 비밀이 있는지 말하고 싶은 게다. 그는 정말, 스쳐가는 인연들이 미처 풀지 못한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게다. 그는 정말, 한 눈 팔며 외면한 것들이 어떻게 뒤통수를 치는지 보여주고 싶은 게다. 그는 정말, 살아있는 시에는 밥상과 그늘과 눈물이 어떤 무늬로 있는지 그리고 싶은 게다. 그리하여 그는 정말, 우리가 키득 거리며 웃다가 가슴 먹먹해지는 꼴을 보고 싶은 거다. 우리들 가슴에 “느낌표가 전부여 한세상 접을 땐, 느낌표만 남는 거여”라며 느낌표 하나 던지고픈 거다.
이정록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정말>>속에 ‘정말’이라는 시는 없다. 모든 시가 ‘정록의 말’인 ‘정말’이다. 삶의 애환과 고달픔도 그의 능청스런 충청도 사투리로 옷을 입으면 한바탕 연극이며 잔치다. 춤으로 치자면 섹시한 브루스요, 노래로 치자면 눈물 설움 구성진 뽕짝이요, 운동으로 치자면 짓궂은 삶과 한 판 뜨자고 팔소매 걷어 부친 씨름이다.
자연과 사물, 일상의 소소함에서 근원적 존재 의미를 끌어내 발밑의 삶과 연결하는 ‘따뜻한 구성(상)’의 시인 이정록. 그가 한문선생님으로 근무하는 충남 아산시 설화고등학교에 도착했을 땐 살갗에 닿는 햇살이 고슴도치처럼 따가웠다.
내가 유일하게 믿는 운명은 가족이니까
‘학생복지부’란 이름이 달린 교무실 창가 쪽 자리에 그가 앉아 있다. 가르치는 한문 외에 행사와 축제를 기획하고 학생 지도를 담당한다며 수거한 담배로 가득한 양동이를 보여준다.
지난 봄 ‘북콘서트’에서 시와 교육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독자의 질문에 ‘교육’이라며 교육은 시기가 중요하므로 교육을 더 받들어 모신다던 그의 대답이 떠오른다.
“시는 나를 먹여 살리는 거고 교육은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거지요. 양자택일을 하라면 가족을 선택하지, 나와 민중을 살리려 가족을 내팽겨 칠 순 없죠. 내가 유일하게 믿는 운명은 가족이니깐. 그건 지랄발광을 떨어도 못 바꿔요.” 그가 쓰고 있는 것들이 모두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며 삶에 대한 속 깊은 울음임을, 그가 힘주어 말하는 ‘가족’이라는 것이 그의 아픈 뼈이며 동시에 ‘숨통’임을 짐작케 한다.
학교를 나와 그의 집 근처 일식집(참치사또)에 자리를 잡는다. 집에 있는 아픈 큰 아들을 위해 집에서 500미터 반경 안에서만 술을 먹는단다. 시인 백석을 좋아해서 ‘백석대로’ 옆
'백석현대아파트'에 살면서 '백석농원’집 과일만 사먹고 두 아들 모두 ‘백석중학교’를 보냈다고, 500미터 안에 있는 모든 상가와 상점을 다 섭렵 했는데 딱 한군데만 못 가봤다고, 그건 ‘산부인과’라며 농(弄)을 친다. <<정말>>의 발문에서 소설가 한창훈은 그에 대해 “어제 입국한 외국 관광객들을 한국말로 웃기는 것으로 봐서 위트가 가히 범지구적이다. 수출을 해도 될 정도이다.”라고 쓴 것을 그와 헤어질 때까지 체험하게 될 줄이야.
충청도 말은 시간예술이여~ 끄느름~ 혀잖아유~~
“상상력을 이길 수 있는 건 없어요. 모든 사람들이 구름을 철판이라고 할 때 핥아 먹고 빨아 먹는 아이스크림으로 보는 것, 우유를 마시면서 소의 뼈마디를 생각하는 것이 시에요. 그리고 충청도 말은 시간예술이여~끄느름~혀잖아유~.” 씨익 웃는 모습이 마애불을 닮았다.
‘생의 지극한 슬픔이나 고통을 익살로 불러’내는 그의 타고난 재능이 충청도 방언의 의뭉스러움과 만나 뻐근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웃음 짓게 한다.
조개를 구워 먹으며 “사랑도 조개구이 같은 겨/ 내리 불길만 쏴붙이다간/ 칼집 안 낸 군밤처럼 거품 물다가/ 팍 뛰쳐나간단 말이지” 그러면서 “산 조개만이 혀 깨무는 고통이 있는 겨” <조개구이집에서>. “허리가 아프니까/세상이 다 의자 로 보여야/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중략/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다가/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의자>. “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 밤늦도록 홍어 좆만 주물럭거렸다고/ 만만한 게 홍어 좆 밖에 없었다고/ 얼음막걸리를 젓는다 / 얼어 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박복한 이년을 합치면/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홍어>. 슬픔도 아픔도 하르르 쏟아버릴 수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인연으로 묶인 현실이 필요로 하는 체념이고, 인정이고, 달관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지켜 온 거대한 측은지심은 가정, 식구여. 이것도 못 지키는 문학은 폼이고 개뿔이여.” 술잔이 몇 순배 돌자 경어가 사라지고 화기(火氣)위에 화기(和氣)가 생겨난다. 기타 연주회 연습으로 귀가가 늦는 부인 대신 집에 있는 아들의 저녁을 걱정하더니 통닭 한 마리를 배달시키곤 마음이 편해졌나보다.
시인은 괴로움을 메고 가는 존재여, 근데 아픈 게 좋은 거여
어머니의 화법과 아버지의 욕, 술집작부의 얘기가 그대로 시가 되는가 하면 온몸으로 받아 모신 듯한 깊은 성찰의 시들에선 “한풍(寒風)에 배를 밀고 가는 새떼들”같은 그의 삶의 체험들이 면면히 펼쳐진다.
포대기에 싸여 울었던 울음이 사랑을 앓는 나이가 되면 “제 어둠을 팔베개하고 등짝으로 운다.” 그러다 “손차양 아득한 세월의 어미 아비”가 되면 “손발 고요해진다 등 돌려 마른 눈자위 훔친다 이제야 울음은 진화의 꼭지에 다다른다” 는 <울음의 진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의 마지막을 부려 놓았던 수덕 여관에서 유언으로 주신 지팡이에 얹힌 걸레를 보며 “그래, 걸레가 돼야지 걸레는 저렇게 숭엄하지/ (중략) 그렇지, 꼭 필요한 게 뭐여 지팡이, 걸레, 행주, 발수건이지 나는/ 이 넷에다 주소를 둬야지 그러면 삶이란 녀석도 지팡이 짚으며 따라오겠지”라는 <느낌표>, 병석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맞이한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진리는 내 머릿속이 아니라 내 머리맡에 있던 따뜻한 손길과 목소리란 것을”깨닫는 <머리맡에 대하여>등은 지극히 자기 고백적인 시이다.
“원자력 병원에 계시던 아버지를 문안하고 집에 가려고 서울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저기 서 있는 거야. 환자복에 슬리퍼를 신고... 방울 달린 손자의 털모자를 사들고.... 세상에서 가장 추운 발로....”라고 말한 그가 뒷말을 잇지 못한다. 정리되지 않은 아픔은 면도칼이다. 용암이다.
“시인은 괴로움을 메고 가는 존재여. 근데 아픈 게 좋은 거여.” 잠시 후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눅눅한 습기가 묻어있다. 무리들과 한풍에 배를 밀고 가는 새들도 제 목소리로 우는 법..... 시는 알을 낳듯 쑥쑥 낳아야 하는데 이젠 자궁이 헐었다고 엄살을 부리는 그에게 어린 시절을 듣는다. “내가 태어난 황새울의 어원은 한사(寒沙)여. 차가운 모래가 있는 곳은 샘이 솟는 곳이지. 그곳은 각(角)이 져 있어. 모가 나있지. 모서리마다 빛나는 작은 칼날 같은 모래가 서리 매운 새벽에도 찬물로 세수하는 것처럼 샘솟아. 거기서 썩지 않아야 될 시인의 정신을 봤어야.”
문학이 재미없는 것은 죄여
홍성 황새울 마을에서 태어나 다리 저는 장애우의 시달림을 피해 6살에 초등학교를 간 그는 키도 작고 나이도 어려 늘 모자란 학생이었다. 그가 홍성고교에 입학했을 때 취직한 누나가 첫 월급으로 사준 《한국여류수필문학대계》의 부록 <<님의 침묵>>이 생애 최초의 시집이 되어 그에게 시가 깃들게 된다. 마침 짝사랑하던 시기였고, 연애편지 쓰느라 표절해가며 시작(詩作)한 것이 시작이었다. 십대엔 화가가 되고 싶었고, 방송국 리포터와 각종 행사의 진행을 했던 이십 대 후반엔 개그맨이 되고 싶었고, 삼십대엔 욕망이 너무 커서 삶을 끝장내려고 했던 시기를 지나, 시를 쓰면서 모든 상(償)마다 백댄서 스무 번 이상 하고 나니 사십대 후반이 되었다는 말에선 웃어야할지 말아야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빨리 오십이 되고 싶었지. 꿈은 이루어진다고... 이제 곧 오십이여. 흐흐. 근데 욕망이 점점 커지는 걸 몰랐어. 그래도 이젠 ‘글’에서는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어. 오십 대에 이루고픈 꿈이 생겼거든.” <문학창작강의>라는 희곡을 쓰고 그가 배우가 되어 모노 연극을 하고 싶단다. 제 1강은 시, 제 2강은 소설, 제 3강은 희곡으로. 그리곤 갑자기 표정과 목소리를 바꾸어 술집이 무대인 양 연기를 펼친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당연하다.
문학이 재미없는 것은 죄라며 시가 정말 재미있음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말빨은 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콘돔을 대신할/ 우리말 공모에 애필(愛必)이 뽑혔지만/ 애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결사적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중 한글의 우수성을 맘껏 뽐낸 것들을 모아놓고 보니/ 삼가 존경심마저 든다//똘이옷 고추주머니 거시기장화 밤꽃봉투 남성용고무장갑 정관수술사촌 올챙이그물 정충검문소 방망이투명망토 물안새 그거 고래옷 육봉두루마기 성인용풍선 똘똘이하이바 동굴탐사복 꼬치카바 꿀방망이장갑 정자지우개 버섯덮개 거시기골무 여따찍싸 버섯랩 올챙이수용소 쭈쭈바껍데기 솟아난열정내가막는다 가운뎃다리작업복 즐싸 고무자꾸 무골장군수영복 액가두리 정자감옥 응응응장화 찍하고나온놈이대갈박고기절해// 아, 시쓰는 사람도 작명의 즐거움으로 견디는바/ 나는 한없이 거시기가 위축되는 것이었다// 봄 가뭄에 졸아붙은 올챙이 눈, 그 작고 깊은 끈적임을 천배쯤 키워놓으면 바로 콘돔이거니, 달리 요약 함축할 길 없어/ 개펄 진창에 허벅지까지 빠지던 먹먹함만 떠올려보는 것이었다/ 애보기글렀네 짱뚱어우비 개불장화를 나란히 써놓고/ 머릿속 뻘구녕만 들락거려보는 것이었다”
<작명의 즐거움>
‘모든 노래의 가수 남인수 화(化)’를 목격하고 서울을 향해 가는 늦은 밤, 간간이 전화로 안위를 묻던 그의 잠 묻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웅덩이에서 ‘하늘의 눈’을 보고, 뒷짐 진 손에서 ‘허공 한 채 업고 다니는’ ‘둥근 아름다움’을 보고, 사과의 주름살에서 ‘내부로 가는 길’이며 ‘내면을 버팅겨 주는 힘줄’임을 보는 시인. 배려와 연민이 체득화 되어 자신을 다 내어주고도 오히려 풍성한 한 그루 버드나무 같이, 써레질 끝난 무논같이, 생의 이치에 대한 뼈아픈 긍정으로 막막한 우리들 가슴에 ‘숨통’을 틔우는... 그리하여 정말, 웃음도 눈물도 다 지난 자리로 떨어지는 낮달의 눈물 같은 느낌표! 하나. 이 밤, 그를 향한 기원인 듯 읊어본다.
‘끝내/ 무논의 물결처럼 세상의 떨림을 읽어내기를/ 써레처럼 발목이 젖어 있기를’
(2010년 8월호)
*못 다한 이야기
비를 너무 좋아해서 장마철엔 죽어나~
이정록 시인은 비를 너무 좋아한다. 비 오는 날 술 한 잔 걸치는 것은 당연지사. 다른 도시에 비가 오면 택시를 타고라도 그곳으로 달려간다. “장마철엔 죽어난다.”는 말에 또 폭소를 터트렸다. 내면의 아픔이 해학으로 승화되기까지 오랜 내공이 느껴지는 이정록 시인의 유머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그저 말장난이 아니라 앞 뒤 근거, 문맥이 정확하며 말 속에 숨은 뼈대도 단단하다. 그렇다보니 이 세상 모든 고민은 그 앞에 와서 무릎을 꿇는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고 웃다보니 행복해진다는 말처럼,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질 때까지 웃음보를 열어놓게 하는 시인. 시는 꼬챙이로 뇌를 골골이 판다며 얼굴을 찡그리던 그가, 동화와 동시는 축복의 선물이고 마법의 상자라며 얼굴 근육을 푼다. 21세기의 위대한 책으로 정민의《한시미학산책》과 소로우의 《월든》,《작은 인디언 숲》을 추천하며, 소중한 친구들로는 한창훈 소설가(쌀자루 들어 올리는 저울)와 함민복 시인(쭈꾸미 들어 올리는 저울)을 들었다.
2011년 2월, 천안에서 다시 만난 그는 모노 연극인 <문학창작강의>를 올해 안으로 시작한다고 했다. 전국 투어로 진행될 그의 무대를 생각하니 역시 웃음이 먼저 일어선다. 이야기와 시가 있는 현장에 가서 애정을 줘야 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시인의 열망이 어디로 흘러갈는지...죽음이든 사랑이든, 자기를 몰아붙이는 것이 시인 아니던가. 그 열정이 몰아붙이는 폭풍의 정점에서 생명을 획득하는 것이 예술 아니겠는가.
첫댓글 소교님의 초청으로 글을 올립니다. 그동안 시인과 소설가들을 인터뷰한 것을 모아 책을 냈습니다.
그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 한 분 소개합니다.
문학이 재미없는 것은 죄, 라는 시인의 시 한번 감상해보시지요.^^
죄송~~소교님이 아니라...아이리스님입니다.^^
여기선 소교, 메일에선 아이리스 ~~ ㅎㅎ 잘 읽었습니다.
동서남북을 휘저으며 인터뷰 다니시느라 힘도 드셨을 거고 보람도 있었겠지요.
다시 한 번 축하 드리고 언제쯤 또 産苦를 겪게 되실지 기다려지네요.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엮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