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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극의 정체성- 도리스 레씽의 『풀잎은 노래한다』의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 1)
유 제 분
I. 지난 10년간 페미니즘 담론은 탈식민담론과의 교차점을 부단히 모색해왔다. 그 이유는 이 두 담론이 지역, 역사, 그리고 정치에 깊은 관심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담론은 거부되거나 소외된 주체를 주장하고 확인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두 담론은 모두 지배적인 것에 대하여 주변화된 것을 강화하려한다는 것이다. 여성과 식민지는 모두 다같이 재현 그 자체의 밖에 존재해왔다.
여성이란 부재, 부정성, 어두운 대륙, 기껏해야 열등한 남성으로 표현되듯이, 가부장적, 유럽 중심적, 남근 중심적 문화에서, 여성과 탈식민지 모두가 타자성의 어두운 영역에 위치지워져 온 것이다. 세자르와 레오폴드 생고르가 주도한 네그리튜드운동에 엘렌 식수스와 루스 이리구레이 등의 페미니스트들이 적극 동조한 사실은,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와의 깊은 연대를 상기시키는 부분이다.
"탈식민지적 여성" 내지는 "탈식민적 페미니즘"이라는 근간의 표현은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의 이같은 밀월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 표현들은 탈식민주의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상이한 접근방식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가부장제사회에서 '식민화된 타자'의 위치를 점유해왔다는 보편적 합의를 보여준다. 또한 여성은 피식민지처럼 억압과 폭력의 정치학을 경험해왔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렇듯 페미니즘 담론과 탈식민 담론의 긴밀함에도 불구하고, 이 두 담론이 이상적으로 화합할 수 있는 이론을 마련했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특히 최근 탈식민담론을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문제점과 두 담론간에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지적되고 있다. 구체적 검증이나 분석없이 탈식민의 개념과 '젠더'가 결합할 때, 위험부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사라 술레리는, 탈식민담론의 원래 의미는 특정 지역의 식민지화라는 역사 사실에서 결과된 담론 행위만을 지칭한 것인데, 지금은 지나치게 추상화된 나머지, 주변부를 재정의하는 전략상의 비유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술레리 274). 이같은 경우, 탈식민의 개념은 페미니즘 담론을 위한 전제 알레고리로 기능하여, 그 역사적 구체성을 박탈당한다는 것이다. 특히 페미니즘담론의 문맥 속에서 탈식민주의는 국가와 인종의 역사성과 별상관없이 부유하는 메타포이면서 용도폐기된 지시물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술레리는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의 의심없는 화합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 예로, 그녀는 파키스탄의 지한미나라는 한 소녀에게 가해진 후두드율법을 소개한다. 후두드 율법은 탈식민주의의 소산이지만, 이 율법이 지닌 가혹한 여성학대적 성격은 결국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의 낙천적 연계 가능성에 대한 짙은 회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술레리와 같은 결론은 아니더라도, 찬드라 탈피드 모한티(Chandra Talpade Mohanty) 역시 탈식민주의에 보이는 페미니즘의 낙천적 친밀감에 대해 조심스러움을 표시한다. 그녀에 의하면, 여성이라는 개념은 '억압'이라는 사회 개념에 의해 동질적인 그룹으로 묶여 버리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자신의 역사를 가진 물질적 주체로서의 여성과 억압이라는 담론으로 구성된 개념의 여성이 뭉뚱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특정한 역사를 지닌 개별 여성 그룹의 물질적 리얼리티는 잊혀진 채, 여성은 모두 억압받는 그룹으로 동질화된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항상 무력하고 착취받으며 성적으로 억압받는 그룹으로 가설화된다는 것이다(모한티 200).
따라서 여성은 모두 남성 폭력의 희생자이자 의존자이며, 결혼한 여성은 식민지배의 희생자로 분석된다. 그러나 모한티에 따르면, 한 사회와 국가의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는 여성 현실이 설명될 수 없다. 한 예로, 미국중산층에서 여가장의 증가가 여성의 독립을 의미하는 변화로 평가되는 반면, 흑인 여성의 가장화는 여성의 빈곤화와 직결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로라 도날슨(Laura Donaldson)은 여성을 피식민지로, 남성을 식민지배자로 고정시켜 보는 시각이, 성이나 식민주의를 사회 정치적 층위로 보는 인식을 결여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이해한다. 그녀에 의하면, 여성의 (그리고 남성의) 성 정체성은 결코 고정되거나 일관된 것이 아니다. 그 대표적 예로 백인 중산층여성은 피식민적 가부장제 아래 억압의 대상인 동시에 식민지배라는 인종적 특권을 누리는 주체라는, 모순된 사회 위치에 놓인 존재인 것이다(도날슨 6).
이들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모두 여성/남성, 피지배자/지배자라는 단순한 병치를 떠나서 보다 구체적으로 사회, 역사적, 지역적 층위를 검증하여 탈식민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과의 관계를 면밀히 살필 것을 요구한다. 이에 대한 대답이 획일적일 수는 없다. 지역적 특수성과 인종적 차이를 포함한 무수한 차이들이 내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미니즘과 탈식민담론이 화합뿐 아니라 갈등도 유발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본 연구는 도리스 레씽의 처녀작『풀잎은 노래한다』(The Grass Is Singing)를 대상으로, 페미니즘 담론과 탈식민 담론이 조우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모습을 살펴보려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파생되는 여주인공의 정체성 문제도 논의할 것이다.
II. 빌 애쉬크로프트는 『제국 되받아 쓰기』(Empire Writes Back)에서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를 독립 이후의 시기를 지칭하는 용어인 '후기식민주의'와 구별한다. 다시 말해서, 탈식민주의는 식민주의 시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모든 문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애쉬크로프트 2). 제임슨(Fredric Jameson)등이 규정한 바처럼 시대구분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과 달리, 헬렌 티핀(Helen Tiffin)은 탈식민주의의 "탈"(post)을 아직도 도처에 현존하는 식민주의(colonialism)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해석한다(티핀 vii).
바꾸어 말하면, 탈식민주의는 단순한 시대구분의 의미를 지니기 보다는 독립 후에도 여전히 도처에 산재하는 식민성을 폭로하여 이를 극복하는데 그 의의를 둔다는 것이다. 애쉬크로프트와 티핀의 탈식민주의에 대한 이같은 개념은 『풀잎은 노래한다』의 탈식민성을 거론하는데 원용될 수 있다. 비록 독립 이전의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 작품은 아프리카에서의 유럽의 제국주의의 실상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탈식민 담론을 거론하는데 매우 적절한 작품이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반담론으로서의 탈식민주의 담론이 페미니즘의 주요 현안인 여성의 자아해방의 문제와 밀도있게 얽혀 전개되는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해방이전까지 남아프리카 백인사회는 영국의 권력이 단순히 이식된 것만은 아니다. 미국 식민지처럼, 명확한 식민지 정체성이 형성되고 문화가 출현했으며 그에 따라 정치의 합법성을 획득할 수 있는 터전도 마련되었다. 권력의 외적 자원은 대영제국이었으나, 이와 구분되는 백인 정치력의 내부 원천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아프리카 내부의 백인 군인과 선교사, 부유한 상인들, 토지소유자들이 비교적 독자적 권력의 중심을 구성하는 형태로 나타났다(톨톤 197).
레씽의 『풀잎은 노래한다』에 등장하는 슬레터는 바로 남아프리카 백인 권력의 중심부를 이루는 토지소유자로 묘사된다. 작품은 초반부터, 메어리의 죽음을 둘러싸고 냉냉한 반응을 보이는 남아프리카 백인 집단과 영국본토에서 이제 갓 건너와 아직 영국사회의 시선으로 사건을 지켜보는 마스턴과의 대립되는 관점을 극화시킨다. 이를 통해 저자는 남아프리카 백인 사회와 영국 본토와의 괴리를 느끼게 만든다.
남아프리카 백인들은 영국 본토의 제국주의의 권력을 등에 업고 살아가는 영국 이주민들이다. 원주민들을 고용하여 땅을 개척하고 토질의 척박화를 고려하지 않은 채 최대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자들이자 제국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본토로부터의 탈공간화(dislocation)경험으로 탈식민주의 문학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정체성의 위기를 보여준다. 영국본토는 이들에게 문화적 모델로서 암묵적으로 우위에 선다. 따라서 자신들이 설자리에 서지 않았다는 전치(displacement)의 감정은 소외된 삶의 비전과 자아 이미지의 위기를 생산한다.
이주민 1세대의 후예들로 내려갈수록, 전치가 불러일으키는 위기감은 더욱 증폭된다. 영국 본토에 대해 1세대가 지녔던 애착도 없고,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소외감과 열등감뿐이다. 이들은 호미 바바(Bhabha)가 "양가성"으로 의미하는 삶의 경계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아프리카 원주민과의 관계는 철저하게 식민지배자로 군림하지만, 영국본토로 부터는 소외된 채 피식민지적 자기정체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백인 여성의 입장은 보다 복합적일 수 밖에 없다. 가부장제 아래 피지배자의 위치에 놓인 여성은, 백인 지배자와 원주민 사이에서 보다 양가적인 존재가 된다. 이들의 정체성은 영국과 아프리카, 백인과 흑인간의 관계뿐 아니라, 여성과 가부장제라는 또 다른 층위로 인해 다층의 틈새에 끼인 양상을 보인다. 요컨대 백인여성은 흑인 원주민과의 관계에서는 남성 못지않은 식민지배자로 행세하지만, 그의 여성적 삶은 식민지인 원주민들의 타자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는『풀잎은 노래한다』에서 여주인공 메어리와 원주민 하인 모세, 그리고 메어리를 둘러싼 가부장제 백인 사회와의 관계로 조명된다.
술로 세월을 보내는 아버지와 가난에 찌든 어머니 사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메어리는 혼자의 삶에 만족하며 지내는 노처녀 직장여성이다. 뼈아픈 어린시절을 보낸 그녀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반복하는 것으로 연상된다. 따라서 성인여성이 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억누르며 메어리는 소녀와도 같은 삶을 지탱해간다.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번도 남성들의 시선의 대상으로 스스로를 살펴본 적도 없다. 그러나 친구들의 속삭임에서 자신이 친구들과 사회의 눈에 성적 대상이 되고, 노처녀라는 사실이 가부장제 사회의 잣대에 어긋난 이미지임을 깨닫는다. 이리하여 자신을 주체로서가 아니라 대상으로 파악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자주 다니는 영화 속의 여주인공들의 이미지와 친구들의 비아냥은, 그녀로 하여금 결혼만이 자신의 손상된 이미지를 회복시키고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게 해줄 것으로 생각하도록 부추긴다. 결혼에 대한 강박관념에 걸린 상태에서 메어리는 첫 번째 구혼자와 결혼한다.물론 이같은 결혼은 궁극적으로 그녀가 정신분열증을 일으키는 주요인이다. 요컨대, 메어리는 원하지 않던 결혼을 사회로부터 암묵적으로 강요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듯 비주체적이고도 피동적인 결혼생활에서, 가부장제 아래 예속된 여성의 삶과 식민지의 삶이 동격화되고 있다. 슬레터의 다음 언급은 남아프리카 사회에서의 백인여성의 취약점을 말해준다.
"검둥이들을 다루려면 남자가 필요해. 검둥이들은 여자가 명령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던. 그것들은 여자를 제자리에 놓을줄 안다구"(19). 여자라는 취약점 때문에 메어리는 흑인 일꾼과의 주종 관계에서 타인의 자유를 허용치 않는 지배자의 역할을 가차없이 해낸다. 그녀는 흑인 일꾼들의 그 어떤 불복종 기미도 견딜 수 없어한다. 자신과 어머니를 등한시했던 아버지와 무능력한 남편 그리고 자신을 결혼으로 몰고간 가부장제 사회를 향한 억압된 분노와 공포가, 흑인 일꾼을 향하여 히스테리적 폭력으로 분출된다. 더욱이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 자아 이미지는 흑인 일꾼을 더욱 매몰차게 몰아부치는 요인이다. 메어리의 소외와 잠재적 폭력을 통해 저자는 흑백 문제가 안은 폭력성과 가부장제 결혼에 내포된 심리적 폭력성을 동위선상에 놓는다.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대변하는 백인 찰리 슬래터가 농장을 경영하는데 사용하는 좌우명은 "필요하다면 죽여도 좋다"(17)이다. 이 작품에서 메어리의 잠재적 폭력은 거칠은 백인 농장 경영주의 폭력과 다를 바 없다. 이렇듯 여주인공을 지배자인 동시에 피식민지인으로 그리는 저자의 관점은, 여성을 피식민지로 일반화시키는 통념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레씽은 백인과 아프리카 원주민 사이의 간극에 존재하는 여주인공의 삶을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상점'을 통해 극화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브루너(Christopher Bruner)는 이 작품의 주요 상징인 '상점'을 남아프리카를 표현하는 유사 이미지(para image)로 제시한다(Bruner 16-18). 작품에서 아프리카의 거대한 공간이 철도와 농장으로 갈라지고 그 전초지에 상점이 위치한다. 기차에서 머리를 내밀면, 상점은 그곳에 있다. 철로 위의 한 지점으로 상점은 식민지의 내부와 바깥 세계 사이에 존재한다. 또한 그곳은 외부인, 다시 말해서, 그리이스인이나 유태인 혹은 인도인들의 살아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들은 지배적인 영국인이나 네덜란드 민족의 배경을 공유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프리카 백인의 상징으로서, 불안한 정치 사회 현실을 사는 백인 식민지의 애매모호한 위치를 구현한다. 대륙과 원주민을 미약하게 붙들고 서서, 문자 그대로 기생충적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철로가 남아프리카 전역에 퍼지면서, 얽히고 갈라진 곳을 따라 몇 마일 안되는 거리에는 작은 촌락이 생겨났다. 여행자의 눈에는 이것이 보잘 것 없이 다닥다닥 붙은 추한 건물들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한 이백마일에 걸쳐 뻗어 있는 농장지역의 중심이다. 여기에는 정거장 건물과 우체국, 때로는 호텔 그리고 항상 상점이 있다.
만약 누군가 남아프리카를 표현하는 상징을 하나 구한다면, 그것은 상점이리라. 계산대 뒤에는 그리이스인이나 유태인 또는 인디안이 있다. ..이들은 예외없이 모리배와 이방인으로 미움을 받는다 (36-7). 이 작품에서 상점이 지니는 의미는 메어리의 간극의 삶과 직결된다. 메어리는 어렸을 적부터 술취한 아버지의 바지주머니를 뒤져 잔돈을 찾아낸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양식이나 필수품을 사러 상점에 가야했다. 그러므로 상점은 그녀가 필사적으로 기피하려한 어머니의 운명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메어리는 남편 딕의 간청으로 어쩔 수 없이 상점 카운터에서 원주민에게 물건을 팔아야만 하는 신세가 된다. 그리하여 남편과 원주민에 대한 메어리의 혐오심은 극도에 달한다. 상점은 식민주의가 일어나는 장소이다. 식민지배자들은 형편없는 저임금으로 원주민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들이 만든 물질로 아프리카인들의 정신을 현혹하면서, 이들의 임금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두 세계의 경계에 놓인 상점의 위치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놓인 메어리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상점의 카운터 뒤에는 미움받는 "이방인"들이 주로 앉아있듯이, 영국 식민지의 소외되고 도태된 백인 여성으로, 메어리는 백인들과 원주민들 쌍방에게 이방인이 된다. 경계로서의 상점의 공간적 의미는, 메어리의 정체성과 직결된다. 한 사회의 경계가 지닌 전복성과 위험은 작품의 끝에서 모세가 메어리를 죽이기 위해 하루종일 기다린 곳이 상점이라는 사실로 극화된다.
메어리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백인 집단을 객관적으로 성찰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녀가 몸담아온 백인사회의 클럽은, 원주민들을 철저하게 격리한 채 백인 식민지배자들의 편견과 인종차별주의를 키워주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공통된 편견과 사고를 통해 클럽은 백인 집단정신을 고취하고 자기 성찰의 고통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개인의 사고나 성찰은, 집단이라는 성역에 의해 배타시되고 백인 부르죠아 중심의 안정만 추구된다. 클럽의 안정된 공간에서 농부 딕 터너의 농장부엌으로 옮겨가는 것은, 원주민과 그 어떤 실제적 경험도 겪지 않은 여성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일 수 있다. 양립할 수 없는 결혼을 한 남편 딕과의 마찰보다, 메어리는 집안일을 돌보는 원주민과 훨씬 더 빈번하게 마찰을 일으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메어리의 비극은 자기 집안의 원주민과 더 이상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순간에 시작한다. 그녀는 집안일을 돌보는 원주민 모세에게 지금껏 경험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한 성적 매력을 느끼면서(물론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설명 조차할 수 없지만), 남아프리카 백인여성에게 가장 금기시되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매력과 동시에 모세에게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그에 대한 감정이 알고싶지 않았던 자아인식을 일깨우는 동시에 그가 언제라도 지배자인 자신에게 반격할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포감은 물론 메어리뿐 아니라 백인 지배자들도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임을 작품은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다.
한편, "모세"라는 이름은, 원주민 개인을 넘어서 상징성이 강한 이름이다. 저자는 원주민 청년을 이스라엘인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킨 모세로 지칭함으로써, 메어리에 대해 그가 지닌 잠재적 구원력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한편 모세라는 이름은 비록 흑인 원주민이지만, 그가 기독교 교육와 문명화를 거쳤음도 시사한다. 원주민은 주로 야만인이나 이교도로 묘사되는데 반해서 흑인 육체에 부과된 기독교적 이름은 그의 양가적 위치를 보여준다.
레씽의 모세에 대한 묘사와 관련하여 장 라이스(Jean Rhys)의 『드넓은 사르가소 해변』(Wide Sargaso Sea)의 작중 인물 크리스토핀(Christophine)을 둘러싼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과 베니타 페리(Benita Parry)의 논쟁은 유익할 것 같다. 스피박은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Three Women's Texts and a Critique of Imperialism")에서 『제인에어』의 크레올 여성 버사에 대한 제국주의적 묘사 (동물/인간의 중간지대)가 『제인에어』를 비판한 장 라이스의『 드넓은 사르가소 해변』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작품의 원주민 여성 크리스토핀은, 말하는 주체와 해설자로서 모종의 결정적 기능을 할당받지만 흐지부지 처리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스피박이 보기에 그녀는 아무런 언급이나 인물론적 설명도 없이 이야기에서 사라져버린다: "나는 읽고 쓸 줄을 모른다. 다른 것들은 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않고 걸어가 버렸다"(스피박 252-3).
그러나 베니타 페리는 식민주의에서는 원주민이 자아로 나타나기 어렵기 때문에 크리스토핀의 정체성이 작품에서 충분히 구현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한 스피박의 논의를 적절하지 못하다고 논박한다. 페리는 오히려 "이곳은 자유 국가이고 나는 자유 여성입니다"이라고 말하는 크리스토핀에게서, 지배담론에 저항하는 반담론을 발견한다. 페리는 스피박이 이 작품이 들려주는 원주민의 목소리에 일부러 귀를 막는다면서, 이는 서구 페미니스트 비평에서 말하지 않는 것을 예민하게 듣는 그녀의 평소의 기민함과는 모순된다고 꼬집는다(페리 39-41).
이러한 스피박과 페리의 논의는, 『풀잎은 노래한다』의 원주민 모세에 설정된 역할에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모세가 이 작품의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해설자로서의 주체적 기능을 부여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 기록은 유럽인들과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서로를 보는 시각이 다르다고 전한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하나의 통일된 집합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에게 유럽인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로 나타난다. 실제로 아프리카인들에게 설교사와 교사, 상인, 제도권의 유럽 대리인들은 각기 영적, 성적, 물질적 차이를 나타낸다. 따라서 "백인"(white)이라는 것은 개별적 종류의 접근을 요구하는, 개별적 권위를 의미하는 이름이 되었다(톨톤 203). "유럽인", "백인", "서구인"들은 단일하고 동질적인 개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톨톤 199). 이 작품의 원주민들도 집합적으로 그려진다. 인물을 묘사할 때도 그것은 아프리카 집단에 대한 서구의 통념을 드러낸다. 흑인여성이 젖가슴을 늘어뜨리고 젖을 먹이는 광경은, 아프리카 사막의 동물 묘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 개성은 없고 정형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아래 이브 벌탤슨(Eve Bertelsen)은 메어리가 모세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이 작품의 귀결을 콘라드와 더불어 영문학의 전통을 보여주는 실례로 지적하기도 한다. 레씽은 모세로 대표되는 아프리카를 백인의 야만적 과거와 백인의 어린 시절, 그리고 여러 면에서 문명사회의 억압과 절제에 때묻지 않은 원시상태로 그린다. 동시에 적의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무질서하고 두려우며 파괴적인 에너지의 원천으로 그린다. 그리하여 유럽의 전통 속에서 아프리카를 재현한다.
그의 선구자 컬츠(Mr. Kurtz)처럼 메어리 터너는 밀림의 원시력에 굴복당하고 역사의 흐름에 따라 우리가 칭송하는 문명화된 절제, 그 표면의 바로 밑에 잠적한 끔찍한 광기에 휩싸이게 된다(벌텔슨 653). 다시 말해서 벌탤슨은 이 작품을 콘라드의 『어둠의 속』(Heart of Darkness)처럼 서구의 진화론적 인지에 바탕을 둔 영국의 문학전통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비합리적이며 원시상태인 아프리카를 대표한다는 벌탤슨의 논의는 무리가 있다. 모세는 두가지 관점에서 그려지고 있다. 하나는 메어리의 눈을 통해 또 하나는 거리를 둔 3인칭 화자에 의해서이다. 메어리에게 모세는 두려우며 파괴적인 육체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일반 아프리카 원주민이다. 또 다른 서술은 모세가 메어리에게 보이는 것보다 다면적 인간임을 희미하게나마 암암리에 전달한다. 모세에 대한 이같은 서술양식은 백인작가로서는 드문 일이며, 저자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통찰력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모세는 아프리카에서 서구인이 경영하는 미션 스쿨에서 글을 배운 원주민이다.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이기적이기도한 백인 여주인에 비해, 흑인인 그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인간적으로 그려진다. 여주인이 비인간적으로 자신을 대하자 그는 일자리가 모자라는 아프리카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가겠다고 주장한다. 어느 일꾼보다도 그는 나무랄데없이 일을 해낸다. 여주인의 비정상적인 정신상태와 고독을 감지할 줄 알고 그녀에게 인간애를 주며 또한 그 보답으로 인격적으로 대우받을 것을 요구하는 합리성을 보인다. 이들을 통해 저자는 흑/백의 전복을 꾀하는 듯 하다. 문명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이성적인 흑인 원주민과 문명혜택을 받았으나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백인여성과의 대조는 흑/백, 문명/비문명의 서구중심적 관점을 전복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모세가 메어리를 향해 던지는 질문 몇마디는 리차드 터디만(Richard Terdiman)의 저항 담론(counter-discourse)을 연상시킨다. 한 예로 그는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주인에게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것을 예수가 옳다고 생각했는가?"(180)라고 미션스쿨에서 교육받은 원주민 영어로 메어리에게 묻는다. 질문 자체가 서구 기독교 문화라는 지배담론에 대한 반담론으로, 그의 영어는 지배 담론인 대문자 영어(English)를 되받아치는 주변부 영어(english)인 셈이다.
영국인에게 배운 원주민 영어가, 영국의 토대가 되는 기독교 문화를 풍자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것은 호미 바바의 "모방"(mimicry) 기능과 유사하다. 영어를 모방하면서 영어가 지닌 인종적, 문화적 우월성, 역사적 불멸성을 문제삼는 것이다. 동시에 영어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는 권위, 다시 말해서 모방할 수 있는 것으로 상정하도록 만드는 권위를 조롱한다(바바 87-88). 이러한 모방은 식민담론의 애매함을 드러내고 또한 그 권위를 전복시키는 이중적 비젼을 제시한다.
III. 원주민 모세를 둘러싼 탈식민 담론은, 곧 페미니즘 이슈가 되는 여주인공의 정체성 찾기와 병행한다. 메어리는 단단한 백인 우월주의의 벽에 갖혀 원주민을 동물에 가까운 철저한 타자로 인식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모세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며 그를 인간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아 인식이 혼동되기 시작한다. 모세를 통한 메어리의 자기 인식은, 그녀에게 너무 힘에 부치는 여정이며 광기를 동반하기까지 한다. 그녀의 혼동은 부쩍 늘어나는 꿈으로 드러난다. 꿈 속에서 메어리의 性에 대한 의식은 아버지에 의해 차단되고, 모세와의 관계는 근친상간으로 연결된다. 메어리는 흑인과의 인간 관계를 사회에서 가장 타부시하는 근친상간의 차원으로까지 내면화시킨다. 모세를 향한 거의 무의식적 열망은 의식 수준에서는 감내할 수 없는 타부가 되는 것이다.
여주인공의 연속되는 꿈들은 그녀의 유럽적 단일지향적 사고를 전복시키며 자신이 거부하고 싶은 또 하나의 자신을 드러내는 서술요소가 된다. 윌슨 해리스(Wilson Harris)는 장 라이스의『드넓은 사르가소 해변』과 패트릭 화이트(Patrick White)의 『보스』(Voss)와 폴 마샬 (Paul Marshall) 의 『선택받은 장소, 영원한 사람들』(The Chosen Place, The Timeless People) 등에 대한 작품 분석에서 어떤 "집요한 직관적 요소"(persistent intuitive elements)가 등장 인물과 사건의 표층 구조를 통제하는 제국주의를 전복하는 공모에 가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 요소가 의도적인 것이건 혹은 그렇지 않건 간에, 모든 창조적인 통문화적 작품에서 그 자체의 불편부당함을 해체하려고 애쓰는 탈식민주의적 충동을 의미심장하게 내재화시킨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표면적 리얼리티를 파헤치면, 통문화성, 크레올화, 혼합화, 촉매작용을 향한 상상적인 지향이 그 심층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들은 직관과 꿈의 이름으로 변신하여 표피를 지배하는 제국주의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이러한 "직관적 요소"는 해리스가 인지하는 데리다의 "틈새"로, 언어와 텍스트 자체가 지닌 불가피한 특성이 아니라 유럽의 단일지향적 형식과 존재론, 그리고 인식론의 탈제국주의화를 향해 열린 양가적인 "지옥의 문(limbo Gateway)"인 것이다(애쉬크로프트 재인용 152-3)2).
해리스의 "직관적 요소"는 레씽의 작품에서 꿈이 하는 역할과 유사하다. 꿈은 평소 백인 가해자로서 이성과 합리성을 주장한 메어리가 논박하는 아프리카적인 것이 자신의 것임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표피를 이루는 제국주의 지배 담론은 훼손된다. 그녀의 자기 정체성이 혼란스러워지면서 꿈은 반복되는데, 이것은 이 작품의 탈식민주의 충동이 내재화한 것이다. 꿈과 관련하여 이후 작품에서 새로 시도되는 복합적 서술 스타일은, 여주인공들의 자기 정체성 찾기와 맞물린 탈식민주의적 충동을 반영하는 폭발적 형태로 레씽의 걸작『황금노트북』(Golden Notebook)에 재현된다.
자기 정체성의 발견은, 자아 속에 타자의 공존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를 바바의 탈식민론으로 설명한다면, 식민 지배자 주체의 정체성에는 이미 피지배자가 섞여 있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형태의 정체성은 혼성체로 존재한다. 흑인 일꾼 모세는 바로 백인 여성인 메어리의 자기 투사이며, 융의 이론을 빌린다면, 그녀의 "그림자"(shadow)가 된다. 모세는 메어리의 학대에 피식민자의 자기 방어책인 침묵과 무반응으로 대응한다. 이러한 무반응은 바로 메어리가 가부장제 사회에 대해 스스로 선택한 자신의 방어 책략이다.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무책임, 그리고 아버지에 의존한 자신의 어머니의 삶(메어리에게는 여성의 역사로 보였던)에서 벗어나는 방편은, 무감각과 무개성적 삶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메어리는 모세를 자신으로 인식하는 대신 노예 더 나아가 물건이나 동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끌리면 끌릴수록 자신을 직시하는 대신, 광기로 발전한다. 이렇듯 메어리와 모세의 관계는 정신병리학적이면서도 탈식민주의적 주제를 강하게 전달한다. 그녀의 정신 분열은 원주민 모세를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데서, 원주민 흑인을 백인의 한 부분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이 정신적, 문화적 전복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데서 서서히 심화된다.
이렇듯 메어리가 놓인 틈새는 위험하고 취약하며 그녀를 광기로 몰아갈 수도 있는 공간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숨어있는 내면을 인지하여 보다 성숙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공간은 모세와 그녀 개인간의 틈새를 넘어, 지배식민지와 피식민지 사이에 놓인 양가적인 제 삼의 공간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는 호미 바바가 의미하는 "제 삼의 공간"(the third space)으로도 통하는 것이다. 바바가 의사소통 행위와의 관계에서 설명하는 제 삼의 공간은, 메어리가 놓여있는 식민과 피식민 사이의 양가성의 공간이며 문턱(liminality)의 공간이다.
해석의 협약은 결코 단순히 진술 속에 규정된 나와 너 사이의 의사소통 행위가 아니다. 의미가 생산되려면 이 두 장소가 제 삼의 공간을 통한 통로에서 상호 유통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제 삼의 공간은 언어의 일반적 상황과 그것 자체로 의식할 수 없는 기능적이고 제도적인 전략 속에서 발화의 특정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무의식의 관계가 소개하는 것은, 해석 행위 속에 내재하는 양가성이다(바바 36).
제 삼의 공간의 개입(중재, intervention)은 의사소통행위에서 의미구조를 양가적 과정으로 만들어 문화적 지식을 계속 통합, 개방, 확장하는 기호로서, 타자라는 재현의 거울을 파괴한다. 중재는 문화의 역사적 정체성을 동질적인 통일력으로 느끼는 우리의 감각에 도전한다. 이 공간은 항상 정형과 범주화를 거부하는 무정형과 비정체성의 공간이며 열려진 공간이기에, 중재의 잠재력을 지닌 공간이 된다(바바 37). 또한 바바는 이 제 삼의 공간을 "통로"(passage)라는 용어로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완결' 아닌 '과정'의 의미로 이해한다. 사회학자 겔너에 의하면, "통로"는 항상 위험하다.
또한 잡종의 공간이며 혼합주의의 공간이므로, 동질성을 요구하는 국가나 한 집단사회의 중심부에서 볼 때는 항상 전복의 잠재력을 지닌 위험 공간이 된다. 바바는 우리가 국가 담론의 나르시스적 신경증을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문턱의 공간, 즉 확실성이 붕괴되는 견딜 수 없는 시련에서 라고 말한다(바바 149). 이러한 주변부의 위험 공간은 도태되거나 희생양으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인지 인류학체서는 지적한다. 그녀 자신이 그 의미를 이해하고 수용한다면, 메어리가 놓인 공간은 바로 바바가 의미하는 제 삼의 공간이 된다. 이는 여성의 정체성을 과정과 열려진 정체성, 다시 말해서 불확실성의 원리로 규정하는 보들리아르의 주장과도 연결될 것이다.
위험 공간에서 희생양이 요구된다면, 이 작품의 종결에서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사회에서 소멸되는 메어리의 운명은, 이 작품을 자연주의 작품으로 인상지운다. 작품의 종결부에는 비가 내리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비는 희생양을 바친 기우제 후에 내리는 비와도 같다. 그러나 기후제가 비를 약속하지는 않듯이, 이 비 또한 무슨 새로운 약속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메어리는 죽기 전에 자기 인식에 어느 정도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이 희생양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구제할 어떠한 힘도 지니지 않음은 확실하다. 그 이유는 아프리카 백인 공동체가 메어리를 희생양으로 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서두에서 아프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하여 제국주의의 비합리한 인종차별을 목격한 말스턴은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그〔말스턴〕는 이 〔비합리적인〕지식을 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귀찮고 다양한 암시를 지닌 인종차별 아래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많은 것에 닫아두어야함을 의미한다. 만약 사회의 일원으로 남고 싶다면. 찰리 스레터와 경관의 태도가 암시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려고 투쟁하는 백인문명이다. 백인 문명은 백인이, 특히 백인 여성이 선을 위해서건, 악을 위해서건 그 어떤 형태로든지 흑인과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결코,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22)
위의 인용은 아프리카 식민지 사회에서는 백인들의 동질적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죽음을 대수롭게 보지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말스톤을 소개하고 있다. 더우기 공동체의 질서를 위배하고 공동체 밖에서 살았던 메어리의 희생을 공동체는 요구한다는 것이다.3)
그러나 이 작품이 자연주의적 귀결만을 유도한다면, 희생양으로서의 메어리의 동정심을 유발하여야할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흑인 원주민에 대한 메어리의 태도와 삶의 자세가 비록 백인 식민지의 소산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이기성과 자기성찰의 부족은 독자의 호감을 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의 여주인공에 대한 관점 역시 양가적이다. 따라서 여주인공은 사회의 희생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녀 자신의 내적 결함이 자신의 비극을 부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작품의 거의 끝 부분까지 메어리는 별로 변하지 않는다. 끝까지 신경증적인, 강박증세의 처녀, 버진 메어리로 남는다. 우여곡절 끝에 작품의 끝부분인 10장에서 그녀가 모세를 인간으로 대우하는 부분이 잠시 나온다. 그러나 이내 영국에서 새로 건너온 백인 말스톤에 의지하여 모세를 내쫓는 일에 동조해버린다. 그럼으로써 모세를 배반하고 이제 간신히 출현할 수도 있는 본래의 자아를 배반한다.
메어리가 잠시나마 자신을 되돌아 보는 순간은 죽기 직전에나 희미하게 찾아온다. 모세가 배반감과 복수심에서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집 안팎을 배회할 때, 메어리는 남편이나 말스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자신이 과거에 딕에게 결혼하면 스스로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라고 착각했던 것을 회상하면서, 이제 죽음에 직면하여 짧은 시간이나마 비로소 홀로서기를 배운 것이다.
메어리는 작품의 끝에서 모세에게 죽을 것을 예감한다. 이때 처음으로 아프리카의 풀냄새를 맡으며 숲의 바람소리를 공포와 환멸감없이 받아들이면서, 처음으로 아프리카와 자신과의 일체감을 경험한다. 풀잎의 소리, 매미의 소리를 듣는 것은, 백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무너지면서 대지와 원주민과 합일이 되는, 금기의 영역이자 "제 삼의 공간"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 경험은 순간적인 것으로 이미 너무 늦었다. 이제 메어리를 더 이상 여주인으로 섬기기 보다는 자신의 여성으로 생각하는 모세는, 배반감과 복수심에서 그녀를 살해한다.
아이로니칼하게도 메어리는 이 작품의 탈식민주의의 저항담론을 구성하는 피식민자인 모세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의 화합은 좌절되는 셈이다. 작품이 전개되는 동안 아프리카 백인 식민지 사회와 메어리 그리고 모세와의 관계의 저변에서 이 두 담론은 계속 병치되면서 만나기도 하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지배국과 피지배 원주민 사회가 공유한 가부장제 사회 현실은, 여성의 정체성을 추구해온 페미니즘과는 혹시 애초부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의 결말은 바로 이러한 의문을 확인시켜준다. 모세에 의한 여주인공의 죽음을 통해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의 간극을 꿰뚫는 저자의 혜안이 분명히 전해지고 있다.
메어리의 죽음을 둘러싼 종결부분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애매한 부분으로 꼽힐 것이다. 독자들은 작품의 종결에서 모세가 메어리를 살해하는 이유를 선뜻 이해하지 못한다. 서술의 대부분이 여주인공의 어깨 넘어 행해져 왔는데, 여주인공이 죽자 서술자의 위치가 애매해진 이유도 있을 것이다. 작품의 끝까지 모세는 서술자로서의 기능을 부여받지 못하고 그의 내면도 묘사되지 않는다. 모세의 몇 마디가 저항담론을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가 보다 다면적 주체로 극화되지 못한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백인의 작품에는 원주민이 주체로서 설정되기 어렵다는 스피박의 관점을 상기시키는 부분이다.
이같은 갑작스런 결말은 벌텔슨(Bertelsen)의 지적을 상기시키는 면도 없지 않다. 그는 레씽이 작품에서 제국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이에 따른 문제들을 사회 현실 차원에서 통찰력을 갖고 그리는 반면, 작품의 종결은 백인의 상상력 속에 존재하는 모든 공포와 불길한 예감을 실현한다고 주장한다. 백인의 공포에는, 영국문학 전통에 꾸준히 표출된 것처럼, 흑인 원주민이 백인 여성의 강간자 내지 살인 가능자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모세에 의한 메어리의 죽음은, 모세와의 관계에서 그녀의 행위가 흑인에게 걸맞는 대우를 넘어섰기 때문에, 타당하다는 백인들의 감상을 노출시킨다는 것이다(벌텔슨 654).
그러나 이 작품의 결말은, 레씽이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쓴 다음 작품들,『폭력의 아이들』5부작과 연계하여 읽는다면, 벌탤슨의 지적과는 다른 해석이 제기될 수 있다. 『폭력의 아이들』은 저자가 얼마나 인간 관계와 제도, 그리고 역사에서 폭력을 읽고 있는가를 상기시킨다. 이 연작소설의 배경이 되는 2차대전과 등장 인물의 부모 세대가 겪은 1차 대전 뿐 아니라, 인습과 기관, 그리고 개인에 미치는 집단사회의 영향, 남녀관계 이 모든 내외 관계를 레씽은 폭력으로 규정한다.『풀잎은 노래한다』는 뒤의 5부작처럼 폭력의 문제를 명시하지는 않지만, 식민지배자와 피식민지라는 권력의 주종관계에, 또한 가부장제 아래 남녀 관계에 폭력이 잠재되어있음을 결말을 통해 뚜렷이 상기시키는 것이다. 폭력은『폭력의 아이들』이라는 다음 연작에 제목으로 명시되기 전에 이미 이 작품에 강한 메시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은 권력의 주종관계가 성립되는 어느 곳이나 잠재한다. 그러므로, 생전 폭력을 휘둘러본 경험이 없는 메어리가 남편 및 백인집단의 지배권리를 등에 업고 원주민 일꾼들을 지휘하는 위치에 놓이면서 그녀는 백인남성보다 더 가차없이 지배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지배자와 피식민지의 권력관계에서 이른바 여성성이 노출되면, 그 권력관계는 역전된다. 메어리가 모세에게 눈물을 보이고 마침내 자신의 공포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지배자로서의 그녀의 위치는 회복할 수 없이 취약해진다. 여주인의 눈물과 공포를 본 이후 모세의 어조는 반쯤 다정하면서 반쯤 무례하고 오만하게 변해간다.
그들 사이에는 이제 새로운 관계가 열렸다. 그녀는 그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그것은 마치 그 앞에서 훌쩍거린 행위자체가 체념 - 그녀의 권위의 체념 - 의 행위였던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는 그 권위를 되돌려주지 않는 것이다.(179)
위의 순간부터 백인 사회와 흑인 원주민의 사이에 끼인 메어리의 정체성은 더욱 애매해진다. 백인으로서 메어리는, 모세에 대해 지배자로서 군림할 수 있지만, 눈물을 내보이는 하나의 나약한 여성으로서는 또 하나의 가부장사회에 존재하는 원주민 모세의 힘 아래 종속되는 피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이 장면이 지나고 그간 몇년의 세월이 지난 것으로 설정된 10장에서는, 메어리는 더 이상 모세에게 군림하는 백인 지배자가 아닌 애원하고 달래는 여성으로 나타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원하지 않았던 타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백인 여성 메어리나 백인 지배자에 종속된 흑인 원주민 모세 모두 주체적 삶을 살지못했다는 점에서 피식민자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혼자 서기위한 메어리의 진정한 독립은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녀의 남편이나 말스턴 그리고 같은 피식민자였던 모세까지도. 작품의 종결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메어리는 지금껏 자신을 구원해주리라 의존했던 그 모든 것이 헛되었음을 깨닫는다. 여성의 진정한 자기 해방은 결국 여성 자신 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인식인 것이다. VI.
『풀잎은 노래한다』의 여주인공 메어리는 가부장제의 폭력과 불합리에 항거하는 페미니스트 모델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운명에 항거하지도 않고 가부장제의 요구에서 피동적 삶을 고수하였다는 점에서 반 페미니스트적 메시지를 전달할 요소도 있다. 그녀의 비극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녀의 이기성과 비합리성은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페미니스트 작품이 요구하는 적극적 여성상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설정이다.
이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여주인공의 비극을 가부장제 사회와 밀접하게 관련시켜 그린 점에서 분명 페미니스트 작품으로 규정할 수 있다. 사회의 요구에 따라 타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심약한 여성의 정체성이 붕괴되어가는 모습을 밀도있게 묘사한 점은 독자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하다. 여주인공이 흑인 모세를 통해 비록 꿈 속에서나마 자신을 직시하는 사실은 그녀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페미니즘담론과 모세를 둘러싼 탈식민담론이 분명 조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흑인 모세가 백인 메어리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타자라는 메시지는 이 작품의 탈식민 담론을 형성한다. 더 나아가 메어리와 모세가 공유하는 타자의 삶은 이들을 각기 둘러싼 탈식민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이 조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메어리의 자아인식은 모세의 식민상태를 이해할 때 완성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페미니즘에서 지향하는 여성의 정체성은 자신의 타자성과 피식민성을 이해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페미니즘 담론과 탈식민 담론의 관계를 천편일률적으로 낙천적으로 그리지만은 않았다. 메어리가 모세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작품의 귀결은 식민주의에 내재한 부메랑과 같은 폭력의 위험을 식민지배국인 유럽에 암시하고 경고하는 메시지를 담는다. 동시에 탈식민 담론이 가부장제의 전통아래에서 이루어진다면, 페미니즘 담론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담론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모세의 아프리카가 보다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라는 것, 그리고 메어리와의 관계에서 모세가 우위를 차지해가는 모습등을 통해 구체화된다. 따라서 이 작품의 귀결은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의 두 담론이 별문제 없이 연결될 수 있다는 비판없는 인식을 문제시한 작가의 통찰력을 전달한다. 요컨대, 이 두 담론은 그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쉽게 화합하여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담론이 되기가 쉽지않음을 이 작품의 귀결은 암시한 것이다.
...............(영어로 된 “인용문”은 따로 파일로 첨부하였음)
영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는 자유정착민이었던 1세대와 이들의 후예가 보여주는 소외감은 자유/종속, 지배자/피지배자등과 같은 사회적 소외의 이분법적상용범주를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서 인지인류학의 "경계"개념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류학에서 "경계"(boundary) 개념은 문화의 식민적 이원구조를 극복하는 탈식민성의 계기로 종종 이해된다. 이 논문에서 거론된 "간극"과 "경계"의 차이를 명확히 하기위해 경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까지 문화의 지역성은 메트로폴리탄의 중심과 주변이라는 이원적 공간구도에 의해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경계는 중심/주변, 여기/저기의 구분을 초월하는 제 3의 공간이다. 경계(the border)의 개념은 터너의 한계 공간(the liminal space)과 마찬가지로 한 문화의 상태가 변화하는 지점이다. 여기에서는 기존의 국경과 공동체의 한계를 초월하는 제 3의 문화가 창출된다. ....경계에서의 문화적 소통, 즉 공중문화는 중심과 주변의 문화가 평등한 수준에서 교류(circuit)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 혼성과 분절, 두 가지 상반된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 곧, 문화의 경계는 야누스 얼굴과 같아 맥락에 따라 다르게 문화적 의미가 생성되고 상호번역되는 분계점을 조성하면서 또한 이질적인 요소를 혼합하는 특성이 있다. (김성례 79-111)
이러한 경계개념과 이 논문에서 거론하는 "간극"(interstice)의 개념은 매우 유사하면서도 다소 다른 개념으로 쓰였다. 경계 개념이 이원적 공간구도를 초월하는 제 3의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간극도 같은 의미에서 사용하였다. 또한 이 공간은 기존의 국경과 공동체의 한계를 초월하는 제 3의 문화가 창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간극의 개념과 통한다. 그러나 간극은 가부장제하에 놓인 여성의 한계적 위치와 상황을 보다 전면으로 부각시킨 개념으로 이 논문에서 상정하였다. 제국주의이거나 식민지원주민 사회이거나 여성은 가부장제하에 놓인 존재이며 따라서 그가 위치한 "골"은 여성 특유의 한계적 삶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한계만이 아니라 한계를 초월하는 제 3의 문화가 창출되는 지점이 될 수 도 있다.
경계와 간극의 개념은 막스 베버가 논의한 "주변"의 개념과 중복되면서도 구별된다. 주변인의 경우에는 중심 권력에 반대되는 이원론적 개념으로 쓰였지만, "간극의 존재"는 한 사회계층과 다른 사회계층, 집단과 집단, 그리고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끼여 있는 또 다른 주변적 차원을 상정하는 것이다.
1) 이 논문은 1997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공모과제 연구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2) 보다 자세한 설명은 윌슨의 『공간의 자궁』(The Womb of Space) 참조.Wilson Harris, The Womb of Space: The Cross-Cultural Imagination. Westport, Connecticut: Greenwood. 3) 메어리가 희생양이 되는 것과 관련하여 이 논지에 도움이 되었던 인류학자 메어리 더글라스의 도덕질서와 인지분류체계, 그리고 제의와의 관계를 잠시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더글라스에 따르면, 도덕적 실재는 사회적 실재와 매우 인접해있어서, 사물은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도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게 원래 그래 라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단지 자연(nature)의 습관적인 타당성에 대한 사실적인 진술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질서의 도덕적인 평가를 내린다는 것이다. 도덕적 질서는 우리가 현실을 구성하는 속으로 너무도 주입되어서 분류하고 청소하고 정화하고 일반적으로 사물을 제자리에 놓는 것과 같은 행위들은 사회현실의 구조뿐 만 아니라 도덕감정의 구조까지도 강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적 행위들은 또한 예식적이고 제식적인 의미를 지닌다. 도덕질서는 인지분류체계-- 사물을 제자리에 놓는 사회적 업무-를 정기적인 재생을 위한 제의적 기재로 요구한다. 이론상으로, 어떤 질서를 불러오는 모든 행위는 사회적 제식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질서를 재건하는 행위는 사회를 재건하기위한 하나의 수단이며, 사회란 그 자체가 단지 질서잡힌 관계일 뿐이다.
따라서 만약 한 집단이 자신이 상징하는 것이나 그 집단의 정체성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집단의 중심가치에 반대할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집단의 도덕적 목적을 강화시키는 수단이 된다. 전복자들을 만들어내기위해 활용되는 정치적 쇼나 재판, 숙청 국회조사들은 모두 사회질서를 정기적으로 재생시키는 제의적 기재인 것이다. 닫혀진 유럽 식민사회에서 메어리라는 인물이 만들어지고 그녀의 죽음이 희생양으로 해석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그러나 그녀가 자기 집단에 의해 살해되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에 의해 살해되는 사실에서 탈식민담론과 페미니즘은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현실에서 화합되기는 쉽지 않은 별개의 담론임을 시사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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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성문학은 오로지 페미니즘을 떠나서는 담론이 안된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