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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보호 센터에서 섬겼던 어르신을 요양원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전 시간에는 별일 없이 잘 지내다가도 점심만 드시고 나면 집에 가야한다며 쉬지 않고 방황하는 분이셨습니다. 요양원에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서너 살밖에 되지 않은 자식들이 집에서 밥도 먹지 못한 채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부르짖음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어깨를 들썩이며 저녁 시간 내내 그야말로 서럽게 우셨습니다. 치매로 인해 자신이 아닌 전혀 원치 않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어린 자식들 걱정을 놓을 수 없는 어머니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저를 눈을 감는 순간까지 무던히도 그리워하셨던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여인이 자신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신이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너는 나의 두 손바닥에 새겨져 있고 너 시온의 성벽은 항상 나의 눈앞에 있다.”(사49:15-16)라는 증거대로, 당신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보다 훨씬 큽니다.
높습니다. 깊습니다. 사례를 찾아보기가 정말로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혹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식을 잊어버리는 일이 벌어질 수는 있습니다. 인륜人倫이 땅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오늘날의 세태世態에서도 어쩌다 한 번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운 나머지 어린 자녀를 죽도록 버려두는 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본질이 사랑이신 여호와에게는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히려 여호와께서는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하십니다. 지극히 짧은 순간인 찰나刹那조차도 시선을 떼지 못하십니다.
당신 백성을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꺼지지 않는 불과 유황이 타는 지옥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십니다. “내 백성은 나를 잊고 우상 앞에 향을 피웠다.”(렘18:15a)라는 증거에 따르면, 성민 이스라엘은 달랐습니다. “어느새 그 일들을 잊어버렸다..사막에서 먹을 것을 내라고 투정하였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다.”(시105:13-14)라는 고발에 따르면,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자처하면서도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행하신 수없이 많은 일들이 마치 일어나지도 않은 것처럼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의도적이었습니다. 의지적이었습니다. 못된 습관들 가운데 하나로 굳어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갖추어지기만 하면 여지없이 여호와로부터 떠났습니다. 여호와께서 무엇보다 싫어하시고 가증스럽게 여기는 우상숭배에 완전히 매몰埋沒되었습니다.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탐욕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심지어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다함이 없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시던 여호와를 의도적으로 시험하는 파렴치한 죄까지도 서슴지 않고 저질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민으로 불리는 그들의 역사는 여호와에 대한 배신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Ep1. 홍해에서
여호와께서 이집트로부터 나와서 줄곧 북동쪽으로 행진하고 있던 성민 이스라엘에게 남동쪽으로 진로를 바꾸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긴박하고 갑작스럽게 방향 전환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부드러운 권고勸告가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강권적인 명령이었습니다. 앞은 홍해가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좌우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습니다. 삼면이 완전히 막혀 있는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이었습니다. 거기다 들어온 입구는 사막이었습니다. 소식을 전해들은 바로가 즉시 군대를 동원해서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이상한 명령이었습니다. 한편,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스스로는 돌이킬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 속으로 집어넣으실 때는 반드시 그것에 걸 맞는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우며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실제로, 사면초가에 빠진 것 같은 성민 이스라엘의 상황을 본 바로의 완악하고 강퍅하며 고집스러운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추격의 의지를 불태우게 만드셨습니다. 막다른 길로 유인하셨습니다. 넘쳐흐르고 있었던 홍해를 완벽하게 갈라 마른 땅 같이 걷게 하시는 위대한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빠져나온 사건이 그들의 어떤 수고와 공로가 아니라 오직 언약에 따라서 행동하시는 당신으로부터 시작된 위대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무장시키셨습니다. 바로에게는 최후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열방에게는 여호와의 위대한 능력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영원히 계시는 완전하고도 무궁한 당신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오직 당신 한 분만 천상천하에 유일한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성민 이스라엘이 책임지고 지켜주시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온 천하에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이해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 속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시원하게 설명해 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온전히 순종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특히, 바로는 열 가지 재앙 앞에서 두 손을 들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압제로부터 풀어주었습니다. 숨을 돌릴 만한 여유가 생김과 동시에 원래의 타락한 기질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부녀와 아이, 노인을 제외한 장정만 육십만 명이나 되는 노동력에 대한 탐욕에 완전히 매몰되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막다른 길로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노예로 만들 수 있도록 하늘이 내려준 그야말로 좋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기회라고 확신했습니다. 즉시 병거와 마병으로 구성된 특별 병거 육백 승을 포함한 최정예 부대를 꾸렸습니다. 이미 육일 전에 출발했던 성민 이스라엘을 불과 이틀 만에 완전히 따라잡았습니다. 한편, 성민 이스라엘은 싸울 수 있는 장정보다는 보호를 받아야 될 아녀자와 노인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장비나 전력 면에서 볼 때, 바로의 최정예 부대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조차도 되지 않았습니다. 창과 칼, 갑옷과 투구, 방패와 전차 등 완전한 전투 장비를 갖춘 이집트 채 군대가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자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 있었던 노예근성이 순식간에 살아났습니다. 사기는 완전히 곤두박질쳤습니다.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무엇보다 이집트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결정적 역할을 해주셨던 여호와에 대한 믿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심히מְאֹד(메오드)” 곧 더 이상 비교할 것이 없을 정도로 큰 두려움과 공포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이집트에는 묻힐 데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로 끌어내어 여기에서 죽이려는 것이냐?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이렇게 만드느냐? 우리가 이럴 줄 알고...이집트인들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하지 않더냐?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편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느냐?”(출14:11-12)라고 외쳤습니다. 광야에서 죽느니 차라리 노예 생활을 하게 되더라도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었습니다. 제발 좀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상달될 정도로 기도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다시 고된 노동이 기다리고 있는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었습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온갖 오해와 함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듣게 될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도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열 가지나 되는 재앙을 내려주셨던 여호와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서슴없이 쏟아 부었습니다. 여호와의 구속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불신앙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은 일방적입니다. 강권적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풍성하게 부어지는 은혜는 불가항력적입니다.
EpⅡ. 마라에서
여호와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성민 이스라엘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세상 어떤 민족도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섭리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들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직접 눈으로 목격할 수 있다면 감사와 감격과 감동이 넘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난과 시험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넌 성민 이스라엘은 이집트 동편 지역을 걷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시내 산에서 당신을 섬길 수 있도록 미리 예정하여 인도해주신 길이었습니다.
사흘째가 되었습니다. 마치 살을 익혀버릴 것 같은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고 있었습니다.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갈 정도로 건조했습니다. 지역적인 특성상 어디에서도 마실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리 준비해서 가져온 물이 동이 난지도 이미 오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서서히 고통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마라에 이르렀습니다. 물을 얻었지만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쓰기까지 했습니다. 마실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이미 스며들기 시작한 고통을 겨우 참고 있던 성민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무엇을 마시라는 말이냐?”(출15:24b)라는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모세에게”에서 “에게עַל(알)”는 “머리 꼭대기 위로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원망לון(룬)”은 “밤새도록 고집스럽게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으며 중얼거린다.”는 뜻입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죄 곧 나, 나 곧 죄”된 타락한 본성에 충실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지도자로 세워주신 모세 머리 꼭대기로 올라섰습니다.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홍해로 이끌어 주셨던, 그들이 생각할 수 없었던 놀라운 방법으로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셨던 여호와를 경외하거나 믿기는커녕 오히려 무시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끊임없이 중얼거렸습니다. 너나 할 것 없었습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습니다. 무려 200-3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마치 한 명처럼 행동했습니다. 쉬지 않고 부어주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순간순간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작은 어려움 앞에서 너무나 쉽게 원망과 불평을 터뜨리고 마는 간교하고도 변덕스러우며 타락한 인간의 더러운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타는 것 같은 갈증과 육체의 피로 앞에서 불과 삼일 전 홍해에서 맛보았던 벅찬 기쁨과 감사와 감격과 감동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인도해주고 계시는 여호와를 거역했습니다.
EpⅢ. 신 광야에서
이집트로부터 나온 지 한 달이 되었습니다. 준비해 온 양식이 거의 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어김없이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이번에는 모세에게만 쏟아놓지 않았습니다. 아론에게까지도 쏟아놓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원망과 불평의 정도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커지고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환경과 상황과 조건만 무르익으면 언제든지 쏟아낼 수 있을 정도로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여호와의 놀라운 능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바로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넘실대고 있었던 홍해를 마치 마른 땅처럼 걸어서 건널 수 있었습니다. 악취가 진동하고 쓰디썼던 물을 달게 해주시는 기적도 맛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준비해온 양식이 떨어져 가자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여호와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출16:3)라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집트 관리들의 혹독한 감독을 받으며 고기를 끓이고 떡을 구웠습니다. 약간의 고기와 떡을 맛볼 수는 있었습니다. 감질 날 정도였습니다.
절대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화려하거나 배불리 먹었다고 자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과장입니다. 왜곡입니다. 이집트에서의 종살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비굴한 노예근성이 묻어있는 부끄러운 고백에 불과과합니다. 특히,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여호와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라는 주장은, 열 번째 재앙 때 이집트 사람들과 같이 죽는 편이 좋았다는 뜻입니다.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욕을 끼치는, 구속의 은혜를 누릴 가치조차도 없는 패역한 태도입니다. 그야말로 구역질나는 불신앙적인 태도입니다.
현세적인 안일만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적인 태도입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은혜를 부어주고 계시던 여호와를 거역하는 지극히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태도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어 주기로, 너와 대대로 네 뒤를 이을 후손들과 나 사이에 나의 계약을 세워 이를 영원한 계약으로 삼으리라. 네가 몸 붙여 살고 있는 가나안 온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리라.”(창17:7-8)라는 언약을 기억하고 오랫동안 참아주지 않으셨다면,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태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거역하는 성민 이스라엘의 배은망덕하고 불신앙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꾸짖기에 앞서 먼저 그들의 양식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만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켜야할 법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그날 필요한 만큼만 거둬야했습니다.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아야했습니다. 이는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육일 째 되는 날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육일 째 되는 날 이틀 치를 거둬야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평소처럼 거둬야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순종하면 안식일에도 부족하지 않도록 갑절이 되게 하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믿음 없이는 절대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에도 만나를 얻기 위하여 들로 나갔습니다. 얻지 못했습니다. “너희는 언제까지 나의 명령과 지시를 따르지 않으려느냐?”(출16:28b)라는 책망을 자초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하루하루의 양식이 부족하지 않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육일 째 거둔 것은 두 배가 되도록 역사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 한 분만 믿고 의지하는 백성의 필요를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습관적으로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 배은망덕한 죄를 저질렀던 성민 이스라엘의 필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침에는 만나를,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먹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부족하지 않도록 충분히 채워주셨습니다. 내일의 삶 특히 의식주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여호와께 온전히 맡길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두어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6:34)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경지로까지 자랄 수 있어야합니다.
EpⅣ. 르비딤에서
성민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약속해 주신 땅 가나안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여러 개의 샘과 개울이 있어 평소에는 물이 넉넉한 지역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달랐습니다. 샘과 개울이 말라 있었습니다. 동시에 성민 이스라엘은 원망과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모세에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느냐? 자식들과 가축들과 함께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출17:3b)라고 따졌습니다. 당장 먹을 물을 내놓으라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모세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곧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에 대한 시험이 하나님에 대한 시험이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전능하신 여호와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습니다. 자신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끌어주고 계시는 여호와를 정면으로 거역했습니다. “이 모든 백성은 내 영광을 보았고, 내가 이집트와 광야에서 일으킨 기적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말을 따르지 않고 열 번씩이나 나를 시험했다”(민14:22)라는 증거에 따르면, 그들의 원망과 불평은 습관이었습니다.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한 땅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나를 노하게 한 사람은 그 누구도 그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다.”(민14:23)라는 증거대로, 그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누구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구보다 많이, 충분히, 넘치도록 풍성하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건망증Amnesia”은 기억 장애 가운데 하나입니다.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 잊어버리는 정도가 심각한 병적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여호와께서 때에 따라 베풀어주신 은혜를 빠짐없이 다 기억하고 있습니까? 혹 받은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시인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고 그분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잊지 마라.”(시103:2)라고 외쳤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만큼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물리학자와 수학자와 과학자, 신학자와 종교학자, 최후의 연금술사와 천재 등으로 알려진 그Isaac Newton는 세상을 떠날 때쯤, 심각한 건망증을 앓았습니다.
나이도, 생일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친구나 후배들이 찾아와 인사를 해도 이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조차도 누구냐고 물어봐야할 정도였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주라는 사실만큼은 기억하고 있다고 또렷하게 대답했습니다. 사도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15:10)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의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필요한 은혜를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이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한 오히려 영원히 버림받아야 마땅한 자신에게 때를 따라 베풀어주신 크고 놀라운 은혜만큼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고 반드시 기억할 수 있는 복된 삶, 열방 가운데 바로 그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