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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20년 쯤 전에 빙부님(아내의 친 아버지, 장인)으로부터 처가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빙부님은 현재 작고하고 안 계시지만, 일정때 양정학교(지금의 양정 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세무 공무원을 하섰다. 8.15 해방될 때의 직급이 남양주 세무서장이라고 하셨다. 8.15 해방 후에는 경기도 화성군에서 양조장을 하셨다.
빙부님 말씀이 처가에는 이렿다하게 벼슬한 사람이 없는데 유독 송죽당 정문익 공(본문 참조)만이 눈에 띈단다. 송죽당 정문익 공은 어려운 환경에도 과거 시험공부에 열중하셔서 과거에 장원급제(1등)를 하셨다. 그는 특히 병자호란(1636)때에 공을 많이 세우셨다.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 군인들에게 우리 조선의 양민들이 많이 끌려갔는데,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모습이 차마 눈 뜨고는 보아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지금의 세월호의 참사를 보는 듯하다. 송죽당 정문익 공은 병자호란 후 회답사로서 청나라 심양(봉천)에 가서 청나라에 억류되어있는 우리 조선의 포로들을 구해 내었다.
이제부터 인조 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가 보기로 한다.
1,인조반정(仁祖反正,이귀의 난)(1623,인조 1)
2.이괄의 난(1624, 인조 2)
3, 정묘호란(丁卯胡亂)(1627, 인조 5)
4,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 인조 14~인조 15)
정문익(鄭文翼)(1571~1639 조선 선조 4~ 인조 17), 경기도 화성군 태생, 본관(本官)은 초계(草溪, 경남 합천군에 있는 지명 이름), 자(字)는 위도(衛道), 호(號)는 송죽당(松竹堂), 증별제 사(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승지 경윤(景倫)이고, 아버지는 첨정 응택(應澤)이며, 어머니는 사정(司正) 이인수(李獜壽)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간원정언·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1612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무고하여 강화로 몰아냈던 대북의 영수 이이첨(李爾瞻)으로부터 박승종(朴承宗)과 유희분(柳希奮)의 심복이라 하여 미움을 받았다.
1616년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한찬남(韓纘男)의 상변사건(上變事件, 海州獄事)에 연루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죽산부사로 있던 중 이괄(李适)의 난 평정에 공이 컸으며, 1628년(인조 6) 회답사(回答使)로 심양(瀋陽)에 다녀와 충청감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송죽당집』이 있다.
※ 초계 [草溪] 신라의 초팔혜현(草八兮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팔계(八溪)로 고쳐 강양군(江陽郡 : 지금의 합천)의 영현으로 삼았다. 940년(태조 23) 초계로 고쳤음. 현 소재지 ;경상남도 합천군
1,인조반정(仁祖反正,이귀의 난)(1623,인조 1)
17세기 초, 만주의 신흥세력 후금은 명과 대립하고 있었다.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은 광해군(光海君)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외교정책을 취해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내치에 힘썼다.
임진왜란(1592~1598)의 상처를 씻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 최우선과제였으므로,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매우 적절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사대주의에 젖은 관료들에게 깊은 반감을 사, 광해군은 결국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이 사건이 바로 인조반정(仁祖反正,이귀의 난)(1623,인조 1)이다.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은서인(西人)이었다. 광해군은 북인(北人), 그 중에서도
대북(大北)의 지지를 받았는데, 대북파가 반대세력을 숙청하면서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것이 쿠데타의 구실이 되었다. 쫓겨난 광해군은 역사에 ‘폭군’의 오명을 남긴채 제주도에서 67살의 나이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다시 말하면, 인조반정(仁祖反正,이귀의 난)(1623,인조 1)은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에 이서(李曙)ㆍ이귀(李貴)ㆍ김유(金瑬) 등 서인(西人)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16세기 중엽,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士林) 세력은 서원을 중심으로 결속이 강화되면서 붕당(朋黨)을 형성하였다. 1575년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뉜 사림은 선조 후기에 동인이 다시 낙동강 동쪽의 이황(李滉) 계열은 남인(南人), 서쪽의 조식(曺植) 계열은 북인(北人)으로 당색을 달리하게 되면서 서인과 남인, 북인이 서로를 비판ㆍ견제하는 정국이 형성되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등 조식의 문인들이 의병활동에서 공을 세우면서 북인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으나, 내부의 결속이 약한 북인은 대북(大北)과 소북(小北) 등의 분파로 나뉘었다. 선조는 왕권 유지를 위해 유영경(柳永慶)을 중심으로 한 소북 계열의 척신(戚臣)들을 중용하였고, 이들은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이 빈(嬪) 소생이자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새로 세자로 옹립하려고 했다. 하지만 선조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러한 시도는 실현되지 못했고,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황폐화된 국가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명(明)ㆍ청(淸) 교체기의 국제 현실에서 균형 있는 중립외교를 펼쳐 조선의 안보를 유지하려 했다.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고, 군적(軍籍) 정비를 위해 호패법을 실시했으며,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의 서적을 간행하였다. 하지만 붕당 간의 대립이 심화된 상태에서 왕권의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그래서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을 일으켜 왕위를 위협하던 영창대군(永昌大君) 세력을 제거하고, 1617년에는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존호를 삭탈하고 경운궁(慶運宮)에 연금시키는 등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날카롭게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리학적 윤리관에 기초하고 있던 사림 세력에게 패륜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중립외교로 후금(後金)과 평화관계를 유지한 것도 사림 세력에게는 명나라에 대한 명분과 의리를 저버린 행위로 비판되었다. 계축옥사로 서인과 남인은 대부분 조정에서 쫓겨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김유(金瑬)ㆍ이귀(李貴)ㆍ이괄(李适)ㆍ최명길(崔鳴吉) 등 서인 일파는 사림 세력의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정변을 꾀했다. 1620년 광해군의 사촌인 능양군(綾陽君)과 가까웠던 이서(李曙)ㆍ신경진(申景禛)ㆍ구굉(具宏)ㆍ구인후(具仁垕) 등이 정변을 모의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류(金瑬)ㆍ이귀(李貴)ㆍ최명길(崔鳴吉)ㆍ장유(張維)ㆍ심기원(沈器遠)ㆍ김자점(金自點) 등이 모의에 참여하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김류(金瑬)ㆍ이귀(李貴)ㆍ최명길(崔鳴吉) 등은 1622년(광해군 14) 가을에 이귀가 평산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하지만 대간(臺諫)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으나 심기원과 김자점이 후궁에 청탁을 넣어 사건은 흐지부지되었다. 그 뒤 반정 세력은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있던 이서가 덕진(德津)에 산성을 쌓는 것을 감독하게 되자, 그곳에 군졸을 모아 훈련시키며 정변(政變)을 준비하였다.반정세력은 이듬해인 1623년 음력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리고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을 한편으로 끌어들이고, 장단부사 이서와 이천부사(伊川府使) 이중로(李重老) 등이 군졸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이반(李而攽)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정변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래서 정변이 예정되었던 3월 12일 저녁에 박승종(朴承宗) 등은 추국청(推鞫廳)을 설치해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후궁과 연회를 벌이던 광해군은 이를 재가하지 않았고, 붙잡았던 이흥립마저 풀어주었다. 결국 이이반의 고변으로 상황이 더욱 급박해진 반정세력은 예정대로 정변을 추진하기로 했다. 능양군은 친병(親兵)을 이끌고 연서역(延曙驛)으로 가서 이서 등과 합류하였는데, 무리가 1,400여명이 되었다. 이들은 삼경(三更)(밤 12시 경)에 창의문(彰義門)의 빗장을 부수고 도성으로 들어가 곧바로 창덕궁(昌德宮)으로 갔다. 이흥립은 궁궐을 지키던 병사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내응하였고, 초관(哨官) 이항(李沆)이 돈화문(敦化門)을 열어 반정세력을 궐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정변은 손쉽게 성공하였다.광해군은 후원문(後苑門)으로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피신하였으나 곧바로 붙잡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능양군은 새벽에 조정의 관리들을 소집하여 병조참판 박정길(朴鼎吉) 등을 참수하였으며,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상궁(尙宮) 김씨(金氏)와 승지 박홍도(朴弘道) 등도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리고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회복시켜준 뒤에 그 권위를 빌어서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仁祖)로서 왕위에 올랐다.인조반정 이후 정변에 공을 세운 이귀와 김류 등은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광해군 때의 집권세력이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수십 명이 처형되었고, 200여 명이 유배되었다. 정변 이후 광해군 때에 조정에서 물러났던 서인과 남인의 진출이 활발해지고, 이들이 공존 관계를 형성하면서 붕당정치가 더욱 본격화하였다. 하지만 그해에 인조반정에 반대한 황현(黃玹)과 이유림(李有林) 등의 역모 사건이 벌어지고, 이듬해인 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인조가 공주까지 피난을 가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로 왕권의 기반은 허약하였다. 특히 서인세력은 반정의 주역으로서 정국을 주도하며 왕권을 제약하였다. 또한 성리학적 윤리관에 기초해 명분과 의리를 내세운 인조반정은 광해군 때의 중립외교정책을 패륜으로 비판하면서 친명배금정책을 낳았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불러와 임진왜란 이후 이제 막 수습되어 가던 국가의 기반과 경제를 다시금 파탄 상태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었다.
2.이괄의 난(1624, 인조 2)
송죽당 정문익(鄭文翼)은
“이괄과 같은 역적의 무리에게 우리 고을을 내어줄 수 없다”라며 목숨을 내놓고 결사항전(決死抗戰)을 하였다.
이괄은 혈기방일하고 용맹한 사람으로서 인조반정때에는 군사를 지휘하여 큰 공을 세웠음에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한 뒤에 김류, 김자점 등 몇몇 반대파에서 그를 후참자라하여 공 2등에 봉하였다.
‘나는 왜 정사(靖社)공신 2등인가?’
이렇듯 이괄이 불평을 토로하고 있을 때, 당시는 후금의 강성으로 언제 침략을 받을지 모를 정도로 매우 긴박한 정세였다. 따라서 북방 경비는 가장 중대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군(軍)의 총책임자이었던 도원수 직 못지 않게 부원수 직도 최전방의 군대를 직접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전략에 밝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인물에게 맡겨졌다. 이에 인조 임금은 무과(武科)(조선시대에 무관(武官)을 임용하기 위해 실시된 과거) 출신인 이괄에게 부원수 겸 함경병사를 제수하였다.(이때 도원수는 장만(張晩)이었음.) 이괄의 택정(擇定)은 그만큼 신중한 배려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괄 역시 새 임무의 중요성을 알고 평안도 영변에 출진한 뒤에 군사조련, 성책(城柵) 보수, 진(鎭)의 경비 강화 등 부원수로서의 직책에 충실하였다. 그러므로 인사 조치에 대한 불만은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인조반정 후 반정을 주도해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은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가 심해 무고하게 반역음모 혐의로 잡히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괄도 그 피해자의 하나였다. 1624년 1월에 문회(文晦)·허통(許通)·이우(李佑) 등은 이괄과 아들 전(旃), 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등이 불측한 생각으로 변란을 꾀한다고 고변하였다.
엄중한 조사 끝에 무고임이 밝혀져 조사 담당관들은 고변자들을 사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집권층은 인조에게 이괄을 붙잡아와서 진상을 국문하고 부원수직에서 해임시키자는 건의를 하였다. 인조는 이괄에 대한 논의는 묵살하였으나, 군중(軍中)에 머무르고 있던 이괄의 외아들 전을 모반의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영변으로 보냈다.
이에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로 죽게 되면 본인도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조정의 사자(使者)들을 목베고 병영의 군사 1만여 명과 항복한 왜병(倭兵) 100여 명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사전 계획에 의한 반란이라기보다는 집권층의 의구심에 의한 우발적인 반란이었다. 즉, 난의 원인은 이괄 자신 못지않게 집권층의 잘못으로 야기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이괄은 모반 혐의로 서울로 압송 중이던 구성부사 한명련을 중도에서 구해내어 반란에 가담시켰다. 한명련은 작전에 능한 인물로서 이 후부터 두 사람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1월 22일 이괄은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을 선봉으로 삼고, 휘하의 전병력 1만여 명을 이끌고 영변을 출발하였다.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는 평양을 피하고 샛길로 곧장 서울을 향해 진군하였다.
당시 장만(張晩)은 이괄의 반란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휘하의 군사가 수천 명에 불과해 이괄의 정예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이괄은 한성(서울)으로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였다. 서울로 향하는 요소 요소에 배치된 관군들은 이괄에게 대항해 보기는 커녕 항복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숙천(肅川)(현재 평안남도 평원군에 속함, 평양 바로 위면서 서해안 바닷가에 있음.)에서 부사로 고을의 원님(지금의 군수에 해당함)이었던 정문익(鄭文翼)은
“이괄과 같은 역적의 무리에게 우리 고을을 내어줄 수 없다”라며 목숨을 내놓고 결사항전(決死抗戰)을 하였다.
정문익(鄭文翼)의 근무지인 숙천은 이괄이 있던 영변에서 가까운 지역이면서 이괄이 서울로 진군하는 길목이므로 이괄과의 一戰(일전)이 예상되었으나
“서울로 갈 길이 바쁜 마당에 숙천에서 소모적인 전투를 치를 수 없다.”라고 말하며, 정문익(鄭文翼)과의 일전(一戰)을 피하고 그 곳을 떠났다.
정문익(鄭文翼)은 거느리고 있는 병력(兵力)이 소수인지라 이괄을 뒤쫒지 못하고(당시 안주방어사로 있던 정충신(鄭忠信)(본디 무관 출신으로 이괄과 같은 무관 출신인 정충신은 이괄과 교분이 있었으므로, 세인들의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이같이 자기가 맡고있는 안주방어사 직함을 숙천부사 정문익(鄭文翼)에게 맡기고, 자신은 도원수 장만 밑으로 단기(單騎)(병사를 떼놓고 혼자의 몸)로가서 이괄 토벌에 공을 세우고자 출전했음.).
이와같은 연유로 송죽당 정문익(松竹堂 鄭文翼) 공(公) 은 안주와 자기 고을만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전문가들의 말을 빌면, 정문익(鄭文翼) 장군은 이괄보다 거느린 병력은 적었지만 평소에 독서량이 많아서 손자병법을 꿰뚫고 있었다고 한다.
이괄은 정문익과의 전투로 시간을 허비하기가 싫었다. 이괄의 반란군은 개천·자산 등지를 거쳐 26일에는 강동의 신창(新倉)에 주둔하고, 28일에는 삼등(三登)을 지나 상원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괄군이 관군과 처음 접전하게 된 곳은 황주 신교(薪橋)에서였다. 이괄은 이곳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선봉장인 박영서(朴永緖) 등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 때 서울에서는 이괄의 아내와 동생 돈(遯)을 능지처참하였다. 이괄은 서울로의 진격을 쉬지 않았다. 그의 행군 속도는 무척 빨라 관군측에서는 소재조차 확인하지 못할 경우가 많았다.
이괄은 평산에 관군의 방비가 엄한 것을 알고 봉산 고읍(古邑)에서 전탄(箭灘)을 건너 샛길로 진군시켜 마탄(馬灘 : 예성강 상류, 지금의 猪灘)에서 또 한차례 관군을 대파하였다. 이괄군은 개성을 지나 임진(臨津)을 지키고 있던 관군을 기습 공격해 붕괴시켰다.
이에 인조 이하 대신들은 서울을 떠나 공주로 몽진(蒙塵)하였다. 2월 11일 이괄군은 마침내 서울에 입성, 경복궁의 옛터에 주둔하였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괄은 곧 선조의 아들 흥안군 제(興安君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들로 하여금 각자 생업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새로운 행정 체제를 갖추기도 하였다.
다음날 도원수 장만(張晩)과 그 휘하의 정충신이 대군을 몰아 서울로 향하였다. 장만(張晩)은 한양의 북쪽에 위치한 길마재에 진을 쳤다.
도원수 장만(張晩)이 지휘하는 진압군은 때 맞추어 동남풍이 불어옴으로써―풍향(風向)이 바뀌는 바람에 반란군은 바람과 먼지를 안고 싸우게 되어서 장만(張晩)이 지휘하는 진압군이 전투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진압군은 반란군을 대파(大破)할 수 있었다.
이날 밤 이괄·한명련 등은 수백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 : 지금의 光熙門)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광주(廣州)로 달아났다. 2월 15일 밤 이천의 묵방리(墨坊里)에 이르렀을 때,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이괄과 한명련 등은 그들에게 목이 잘리고 말았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고, 이괄 등의 수급(首級)이 공주의 행재(行在)에 이른 뒤 인조는 22일 환도하였다.
인조는 환도한 뒤 이괄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운 장만·정충신·남이흥(南以興) 등 32인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포상하고, 난의 수습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안으로는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로 집권층·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와 동시에 집권층의 사찰 강화 등으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반란이 실패하자 한명련의 아들인 윤 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이괄의 난을 평정한 뒤에 인조 임금은 대신들 앞에서 덕담(德談)을 하였다.
“모두들 제 한 목숨을 구하기에 급급한 상황에서도 송죽당 공은 역적 이괄의 만행에 초연(超然)(어떤 현실 속에서 벗어나 그것에 대하여 아랑곳하지 아니함.)히 대처하고 오히려 역적 이괄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해주었다. 이 충정(忠正)을 길이 후손들에게 전할지어다.”
그 뒤에 송죽당 공은 인조임금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3, 정묘호란(丁卯胡亂)(1627, 인조 5)
1616년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가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표방하고, 랴오둥[遼東]을 수복하려는 모문룡(毛文龍) 휘하의 명(明)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鐵山)의 가도(椵島)에 주류시켜 이를 은연히 원조하므로, 명나라를치기 위해 중국 본토로 진입하려던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또한 후금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부족에 허덕여 이를 조선과의 통교(通交)로써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李适)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여 후금 태종은 더욱 결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1627년 1월 14일, 드디어 후금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軍)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姜弘立)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龍川) ·선천(宣川)을 거쳐 청천강(淸川江)을 넘었다. 그들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여 안주(安州) ·평산(平山)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黃州)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싸웠으나 조정대신(朝廷大臣)(약자,조신(朝臣))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全州)로 피란하였다. 황주에 이른 후금군은 2월 9일 부장 유해(劉海)를 강화도에 보내 ①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② 왕자를 인질로 할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이에 양측은 ①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②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③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④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고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측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하였다.
4,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 인조 14~인조 15)
”대청(大淸)황제 폐하, 금수(禽獸)(금(禽):날 금. 獸(수):네 발 달린 짐승 수, 금수(禽獸):날 짐승과 길 짐승)도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찾는 마당에 하물며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인 인간임에랴. 지금 우리민족 모두는 헤어진 부모님과 형제·자매 분들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조선 천지가 이들 헤어진 가족들의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졸지에 생이별한 가족들은 매일 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가족을 떠나보내지 아니한 백성들도 마음이 아프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대청황제 폐하, 저들의 울부짖는 통곡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조선 인조 14년, 중국의 후금(後金)(뒤에 청나라)에서는 정묘(丁卯)호란(胡亂)(1627년,1월) 이후 ‘그동안 양국(兩國) 사이에서 맺어왔던, ’형제지국(兄弟之國)‘의 관계를 고쳐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고 군량(軍糧)을 요구하는 등 우리 조정를 압박하였으며, 조선에서는 이에 대하여 청(凊)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자는 주화파(主和派)(당시에 최명길(崔鳴吉) 등.)와 청의 요구는 전혀 들어줄 수 없으니 청(淸)과 전쟁을 벌릴 수밖에 없다는 주전(主戰)파(당시에 김상헌(金尙憲), 삼학사(三學士)등)의 주장이 맞섰다. 결국 주전파가 득세하여 일전(一戰)을 불사하자는 여론이 일었다.
인조 14년 병자(丙子) 1636년 12월 9일, 겨울철의 결빙기(結氷期)를 이용하여 청태종은 친히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그는 조선의 명장(名將) 임경업(林慶業)이 지키는 의주성을 피하여, 옆길로 돌아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서울로 내리닥쳤다. 출정한지 닷새 만에 한양(漢陽)(수도 서울) 근처까지 점령한 것이다.(병자호란(丙子胡亂))(1636~1637)
외적의 침략(侵略)을 알리는 봉화(烽火)(위급을 알리기 위하여 봉홧둑에서 올리던 불)나 장계(狀啓)(각 도의 감사나 지방의 관원이 글로 써서 왕에게 보낸 보고)와 같이 긴급을 전달하는 장치가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인조(仁祖)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허둥지둥 대책회의를 열었다. 주된 논의사힝은 ‘청나라의 대군(大軍)을 효과적으로 막아낼까’가 아니라, ‘청나라의 공격으로부터 어떻게 안전하게 피신하느냐’ 였다.
인조 임금과 신하들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했으나 포위된지 45일 만에 삼전도(三田渡, 송파(送波))에 수항단(受降檀)을 설치하여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근세사상 처음 보는 치욕(恥辱)이었다.
욱일승천(旭日昇天)(아침 해가 하늘에 떠오르는 것과 같은 기세)의 기세로 한껏 뻗어나는 청(淸)나라로부터 국토를 유린당한 조선은 청군(淸軍)에 의한 군사적 피해 못지않게 민간의 피해도 막심했다.
청군(淸軍)은 도적질을 일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철군하면서 50만에 달하는 조선의 여자들을 끌고
갔는데,
이들의
목적은 끌고 간 여자들을 돈을 받고 조선에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렇
지만
끌려간 여자들이 대부분
빈민 출신이라 돈을 낼만한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꽤나 많았는데, 되돌아온 환향녀(還鄕女)(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집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혼 문제가 정치,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또한 남성들도 청나라로 끌려가서 갖은 중노동(重勞動)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 청나라로 끌려간 사람(남,여)이 수없이 많았는데, 추위에 떨고 굶주리고 얻어맞으며 심양(瀋陽, 봉천(奉天))에 붙잡혀 갔다.
나중에 몸값을 바치고 풀려난 숫자만 해도 남녀 통틀어 63만 명(남,여)이었다고 하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백성들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현재의 상태를 모르며 전망이나 방침이 도무지 서지 않아 갈피를 못 잡고 앞길이 아득함의 비유)이었다.
가족을 떠나보낸 백성들은 비통(悲痛)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급기야(及其也), 이러한 국민들의 원성(怨聲)이 인조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인조 임금은 어전회의를 열어서 대책을 논의했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차일피일(此日彼日) 시간을 끌고 있자니 백성들의 원망(怨望)은 높아만 갔다. 그때 한 대신(大臣)이 인조 임금에게 진언(進言)을 했다.
“전하(殿下), 포로송환(捕虜送還)을 원한다면 저희 나라에서 청(淸)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시면 가능할까 사료(思料)됩니다. 단, 사신은 인품이 고매(高邁)(높고 빼어남)한 분이라야만 사태를 무난하게 처리할 것 같습니다.”
“그러하면 사자(使者)로 갈 적임자가 누구일꼬?”
인조 임금은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본 결과, 절대 다수가 송죽당 공(정문익의 호가 송죽당임)을 천거했다. 송죽당 공을 추천한 신하의 추천사를 들어본다.
“전하, 사자(使者)로 갈 사람은 송죽당 정문익(松竹堂 鄭文翼)공이 무난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는 학식과 인품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그 일례(一例)로, 과거에 정문익 공이 벼슬을 하여 거쳐간 고을(죽산부사 등)마다―본인이 신의(信義)가 있어서 주민들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킬줄 알고, 청렴(淸廉)( 성품과 행실이 높고 맑으며, 탐욕이 없음)하며, 백성들을 가족같이 아껴서 돌보는지라―동포(同胞)들의 칭송이 자자합니다. 송죽당 공이라면 능히 청태종을 설득하여 조선의 포로들을 구출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정문익(鄭文翼)은 그때 부친께서 돌아가시어 3년상을 치르고자 벼슬을 반납하고 고향(경기도 화성군)에서 상(喪)을 치르고 있었다. 그 당시, 조선 팔도에서 송죽당 정문익(松竹堂 鄭文翼)공은 인품(人品)이 훌륭하고, 덕망(德望)(덕행으로 얻은 명망)이 높은 인물로 정평(定評)이 나 있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당파 싸움이 극심한 시절이라서 무조건 자기 파벌의 사람을 천거할려고 하였으나. 사안(事案)이 사안인 만큼, 국가 존망(存亡)의 위기에서 신하들은 정문익(鄭文翼) 공을 추천하는데 있어서 망설이지 않았다.
송죽당(松竹堂) 정문익(鄭文翼)은 그의 고향인 화성군에서 급거 상경하여 인조 임금의 어명을 받들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조선에서 청나라에 파견하는 회답사(回答使)가 된 그는 청나라의 수도 심양(瀋陽, 봉천(奉天))에서 청태종을 알현(謁見)할 수가 있었다.
청태종은 조선 사람의 기(氣)를 꺽어버릴 생각으로 청태종이 거처하는 궁궐 입구마다 창검을 든 군사들을 서릿발같이 세우고 커다란 가마솥에 기름을 끓이게 하면서 정문익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정문익은 조금도 겁내지 않고 의젓하게 청태종 앞으로 걸어갔다.
“너의 나라에서는 사람이 그렇게도 없어서 너같은 소소인(小小人)(대수롭지않은 사람)을 보내더냐?"
청태종은 정문익을 향하여 첫마디부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정문익은 놀래기는 커녕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고 껄껄 웃으며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을 쓰는 계제가 따로 있소. 인의와 도덕을 숭상하는 나라에는 대대인을 보내지만, 포악하여 힘만을 주장하는 나라에는 소소인을 보냅니다. 그런데 나같은 소소인이 무엇이 무섭기에 이처럼 창검의 숲을 세우고 맞이하시오?”
청태종도 이 말에는 다시 더 대꾸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정문익을 영접하여 상좌에 앉히었다. 청태종은 정문익의 등을 두드리며 “가아(可兒)”
하고 칭찬하였다. ‘가아(可兒)’란 우리말로 ‘잘난 사람, 훌륭한 인물’ 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크게 잔치를 벌여 정문익을 환대하였다.
그러나 막상 포로 송환 협의에 들어가자 청태종은 또 그의 본성을 드러냈다. 정문익을 조선에서 포로 송환을 위해 보내진 세객(說客, 능란한 말솜씨로 유세(遊說)하러 다니는 사람)이라고 그를 업신여기며 말했다.
“우리 대국(大國, 청나라)에서 귀댁 백성들은 잘 보호하고 있으니 조선 나라 임금께 고하시오. 조선의 포로 송환은 아예 단념하라고 이르시오.”
”대청(大淸)황제 폐하, 금수(禽獸)(금(禽):날 금. 獸(수):네 발 달린 짐승 수, 금수(禽獸):날 짐승과 길 짐승)도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찾는 마당에 하물며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인 인간임에랴. 지금 우리민족 모두는 헤어진 부모님과 형제·자매 분들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조선 천지가 이들 헤어진 가족들의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졸지에 생이별한 가족들은 매일 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가족을 떠나보내지 아니한 백성들도 마음이 아프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대청황제 폐하, 조선의 창생(蒼生)(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울부짖는 통곡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청의 태종(太宗) 홍타이치(皇太極)도 처음에는 조선(朝鮮)의 사신(使臣)의 목을 벨려고 하였으나 스스로 송죽당 공(松竹堂公)에게―공의 진정한 애민(愛民)정신(백성을 사랑하는 정신)과 겸손한 인품에―매료되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청태종이 결단(決斷)을 내렸다, 조선에서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에게 ‘조선 본국에로의 귀환(歸還)’을 명(命)함으로써 조선의 포로들은 3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국(故國)의 가족들의 품에 안길 수가 있었다.
인조 임금은 송죽당 공(松竹堂公) 에게 큰 상을 내렸다.
<주석(註釋)>
1, 부원수(副元首):군(軍)의 제 2인자, 무관(武官)을 임명함.
2,도원수(都元帥):고려나 조선시대에 국난이 있을 때 임시직으로 임명한 군(軍) 최고 사령관임. 보통 문관으로 임명했음
3, 이괄(李适)의 난
1624년(인조 2) 평안병사 이괄이 일으킨 반란. 본문 참조4, 최명길(崔鳴吉)(1586~1647)
본관 전주. 자 자겸(子謙). 호 지천(遲川). 시호 문충(文忠). 영흥부사 기남(起南)의 아들.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에게 배웠고 조익(趙翼) ·장유(張維) ·이시백(李時白)과 교유하였다. 20세 때인 1605년(선조 38) 한 해에 사마시의 생원, 진사시와 문과를 모두 통과하고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는 가장 화려한 경로로 정부에 진출하였다. 광해군대에 북인의 권력독점이 심화되던 중 1614년(광해군 6) 병조좌랑에서 삭직되었으며, 북인의 독주가 선조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에 이르게 되자 이귀(李貴)가 중심이 된 반정계획에 참여하였다. 그 후 김류(金瑬) 계열과의 연합을 통한 반정이 성공하자 이조좌랑이 되고 그 해에 이조참판과 비변사 제조까지 승진하였으며,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녹훈되었다.
5, 모문룡(毛文龍) : 명(明)나라 절강성(浙江省) 인화현(仁和縣) 태생으로, 자(字)는 진남(鎭南)임. 요동 도사(遼東都司)로 재임하던 중에 청 태종(淸太宗)이 요동(遼東)을 공격하자 1622년(광해군 14년)에 우리나라로 쫓겨와서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에 있는 가도(椵島)에 진(鎭)을 설치하였는데, 우리 조정에 청(淸)을 공격하도록 강요하는 등 외교상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고, 이 섬을 거점으로 삼아 청나라의 배후를 자주 위협하였으므로, 청은 1627년(인조 5년)에 조선을 침략함과 동시에 가도(椵島)를 습격하였음. 한편 모문룡은 명(明)나라 조정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고 교만하게 굴다가 원숭환(袁崇煥)에게 살해되었음.
6, 삼학사(三學士),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을 말함. 청나라를 오랑캐라 하며 끝까지 주전론을 펴다가 심양(瀋陽, 봉천(奉天))으로 잡혀가 청태종에게 끝끝내 절조를 굽히지 않고 1638년(인조 15) 3월 5일 그곳에서 참혹하게 피살되었다.
7, 원숭환[ 袁崇煥 ] (1584~1630)
명나라 말기 광동(廣東) 동완(東莞) 사람. 일설에는 광서(廣西) 등현(藤縣) 사람이라고도 한다. 자는 원소(元素)고, 호는 자여(自如)다. 만력(萬曆) 47년(1619) 진사가 되고, 소무지현(昭武知縣)에 올랐다. 천계(天啓) 초에 병부직방사주사(兵部職方司主事)에 발탁되었다. 첨사(僉事)로 승진해 관외(關外)의 군사를 지휘하면서 영원성(寧遠城)을 쌓고 서양의 대포를 배치했다. 6년(1626) 후금(後金) 누르하치의 군사들을 무찔렀는데, 영금대첩(寧錦大捷)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충현(魏忠賢)의 비위를 거슬러 휴가를 내고 귀향했다. 숭정(崇禎) 원년(1628) 병부상서 겸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로 계료(薊遼)의 군대를 지휘했다. 다음 해 금나라 군대가 침입하여 북경(北京)을 위협하자 천 리 길을 달려 구원했다. 숭정제가 반간계(反間計)에 속고 참언에 넘어가 모반죄로 붙잡혀 투옥되고 책형(磔刑)을 당해 죽었다. 시를 잘 썼는데,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배여 있다. 저서에 『원독사유집(袁督師遺集)』이 있다.
<이상>
첫댓글 조상님 정문익 공 대단하신 분이네. 예나 지금이나 유능한 인물은 후세 역사에서 말해주는거 같네.그런 분들이 있기에 우리 후손들이 지금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거니 늘 마음에 새기고 조상님 어른신들 잘 모셔야지...
훌륭한 분을 알아주니 고마워. 조상님을 잘 모실게.
송죽당 공의 고매한 인품과 진정성이 깊은 애심으로 큰 공을 세우셨네,.. 이는 역사적으로 놀라운 일일세,...
후손이 임하빈 학형의 처가에 있다니 이 더욱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소,..!!!
나도 이러한 인물에 대하여 왜 이렇게 늦게(내 나이 40에 처음 들었음) 알게 되었을까? 의아하게 생각이 들었어. 동시대의 임경업 장군은 '먹장구름을 뚫고' 라는 책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널리 회자되었는데 말이야. 아뭏든 훌륭하신 분이야. 우리 민족의 영웅이 아닐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