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양재클럽(Y-Club) 원문보기 글쓴이: 카안
오래 전에 실상사를 처음 왔었을 때, 검붉은 흙이 드러나 있는 밭과 갈아엎어진 논 가운데에 한쪽이 무너진 낮은 담장과 마른나무 가지 새로 보이는 절 지붕을 먼발치로 보고 있자니 그 생경한 황량함이 마치'아랑훼즈 협주곡의 아다지오'를 듣는 것 같았고, 뜨악했던 절집 가는 길은 노천명의 '망향'이 썩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노천명 '망향' 중에서)
왕방울의 눈과 주먹코에서 위용보다는 친근감이 느껴진다.
△ 실상사 구산선문 천년의 혼 △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증각대사 홍척에 의해 선종 '구산선문' 중 최초로 창건된 사찰이며 창건당시는 지금의 '백장암' 터에서 시작되었는데, 사세가 커지자 2대 조사인 수철화상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옛 가람의 규모는 보광전 발굴조사 결과인 정면 16칸(30m) 측면 10칸(18m)으로 미루어 볼 때 상당하였을 것이나 정유재란때 불타 버렸고, 1884년(조선고종21년)의 최종 중건 때에 어떤 연유에선지 내부에 단청도 없는 보광전을 비롯한 세 칸 짜리 전각 네 채인 지금의 단출하고 소탈한 모습으로 들어앉았다.
절터가 평지이기도 하지만 대문격인 천왕문에서 보면 주 법당인 보광전이 빤히 보이면서 세로로 한 축을 이룬다. 禪門의 '심즉불(心卽佛)'에 따라 가람을 앉혔다는 설이 있는데, 대문이 마음(心 :중생)이고 법당이 부처(佛)이기에 마주보고 가깝게 해서 절 마당의 세로축은 좁고 대신 가로축이 길어졌다고 한다.
사찰이 평지에 있는 것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지만, '삼국유사'에 "경주는 절이 밤하늘의 별처럼 널려있고 탑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있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원래로 평지 사찰은 많았으며 이 현상은 고려시대까지도 유지되었다.
현존하는 평지사찰이 드문 이유는 조선의 극심한 억불정책 때문이 아니었을까!? 선, 교 양종으로 종파통합 및 사찰과 승려의 숫자와 소유 재산 등의 제한시책이 시행되어 주거지와 격리된 산사는 명맥을 유지했고 평지의 사찰은 수난을 면치 못했는데,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도 절터에 세워진 것으로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가 그것을 말해준다.
한 눈에 볼 수 있는 조감 사진은 귀하여 얼른 빌려왔다. 가운데 나무울타리가 오른쪽의 법당, 왼쪽의 '화엄학림' 공간을 구분 짓고 있다.
나는 지금의 실상사 모습이 좋다. 절에 이르는 그저 옆 동리 마실가는 길 같은 무던한 길이 좋고, 민초를 주눅들게 하지 않는 수수한 절집의 모습이 걸터앉고픈 오래된 시골집의 마루처럼 편안하다.
요사채와 법당 공간을 구분 짓는 싸릿대 울타리 곁에 모과나무가 있다. 제법 모과가 달렸다. 차로 끓여내면 수수한 이들이 즐겁고 기침 나는 이들의 목을 어른다. 모과 같은 실상사다. 진홍빛 감을 매단 감나무를 앞에 세우고 짐짓 물러나 앉은 모과나무. 모과는 아직 파랗다.
뒷간 옆 담장에 붙어있는 담쟁이들도 정겹고 한가롭고 얼기설기 엮어진 것 같은 뒷간도 편안해 보인다. 쪼그리고 앉아 일을 보면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이 나던지... 나오면 다 잊어버릴 것을... 킬킬대면서 '오소백'의 '변소의 철학'을 읽던 고교 시절이 아련하다.
보광전 세월에 바래진 나무색깔 그대로 단청도 없고 아미타불을 모신 불단도 진정 소박하고 닫집도 없으며 벽은 그 흔한 벽화도 없는 하얀 회벽 그대로이고 들보만 덜렁 걸쳐진 유명 사찰의 법당으론 무척 생소한 모습으로, 간결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실상사 삼층석탑 (보물 제37호)
보광전 앞마당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이 쌍 탑은, 보광전 정면을 보고 왼쪽이 동탑 오른쪽이 서탑이다. 모두 2층의 기단부와 3층의 탑신부를 갖춘 신라탑의 정형이며 신라 흥덕왕 3년(828) 실상사를 창건할 때 조성된 탑이라고 한다. 서탑 하대갑석의 파손이 심하다. 2단 괴임 위의 상대중석엔 우주와 탱주를 두었으며 상대갑석은 완만한 경사에 2단의 괴임을 두어 탑신부를 받쳤는데 각층 옥신과 옥개석은 하나의 돌로서 각층마다 우주가 새겨져있으며 수평의 처마와 반전이 경쾌한 추녀를 가졌다. 서탑은 옥개석도 파손이 많다.
(앞이 동탑 건너편이 서탑. 쌍탑의 중앙, 보광전의 정면에 석등이 있다) 찰주를 중심으로 차례대로 올려져 완전한 모양을 갖췄다. 보존상태는 동탑이 좋은데 안타깝게도 수연이 망실되었다고 한다.
석등 (보물 제35호)
본체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화사석에 불붙이려 올라가는 돌계단까지 갖춘 완벽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 위로 아랫마디부터 띠로 두른 연화문과 복련, 앙련을 번갈아 새긴 3단의 마디를 가진 둥근 고복(鼓腹)형 간주석을 세웠다.
그 위로 잎 가운데 꽃을 새긴 복련의 상대석을 받치고 역시 팔각의 화사석을 얹었는데 전·후 2면의 화창만 크게 했고 나머지 6면의 화창은 작게 내었다. 옥개석은 연화관 아래로 복련을 새긴 특이한 모양이며 처마엔 귀꽃이 높다. 상륜부는 간주석 마디무늬의 노반위로 장구형 기둥을 세운 다음 8각의 귀꽃이 있는 보개를 씌우고 수연 모양의 보주를 놓았다.
실상사 철제여래좌상 (보물 제41호)
통일신라 후기 제2대 조사인 수철국사가 석탑 2기와 함께 봉안했다는 약사여래부처님이다. 약 사천근의 쇠를 들여 조성했다고 하며 체고 268cm 무릎 폭 199cm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수인은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내린 9품으로서 두 손은 원래 철제 손 그대로 1986년도에 복원한 것이며 무릎 아래 부분 역시 원래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라 한다. 두상과 상반신의 균형이 알맞고 세월의 흐름에 산화철의 고색창연한 색감이 돋보이며 통견의 법의에서 흘러내리는 옷주름도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약사불상이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한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점이다.
작년 말 실상사에서 부쳐온 달력에 있는 이 부처님의 사진을 보고 오!! 하고 상당히 놀랬었다. 좁은 법당에서 불단에 모셔진 거의 3m 가까운 부처님은 우러러 뵈는 수 밖에 없어서 위와 같은 근엄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또 문화재청 사진의 모습도 대동소이한데, 달력 사진 속의 부처님의 미소는 너무 느낌이 달랐다.
부처님을 사진에 담았던 작가가, 대면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과 높낮이와 위치를 잡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나 보다.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자리를 스스로 찾고, 그 자리에서도 바른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2008년도 실상사 달력 사진을 옮겼다)
실상사 극락전 (지방유형 제 45호)
실상사 법당들은 모두 정면 세칸으로 웬만한 한옥보다도 작은 편이다. 그래서 편안하고 이무롭다. 극락전의 원래 이름은 근처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기 때문에 부도전이였다고 하는데,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다가 순조 31년(1831)에 다시 지어지면서 아미타불을 모시게 되어 극락전으로 변경되었다 한다.
대문앞으로 증각대사 탑비가 왼쪽에 창건자 증각대사의 부도탑이, 오른쪽에 2대 조사 수철화상의 부도와 탑비가 있다. 괴발개발 애들 글씨처럼 쌓아진 토담의 모습도 그저 넉넉하고 편안하게 보인다.
증각대사 응료탑 (보물 제38호)
응료에 대한 설명은 없으나 사전적 의미는 대충 '바르고 크신 증각대사의 부도탑'이 아닐까...
신라 말엽 9세기 후반의 조성으로 추정되며, 묻혀있는 큰 바위덩어리의 땅위 노출부분 정도만 사각으로 다듬어 지대석으로 삼고 하대석부터 옥개석까지 상대받침을 제외하고 팔각형이 체감되면서 올라가는 아름다운 부도이다.
하대 아래받침의 구름무늬가 화려하고 중대석 각 면의 안상연에 팔부중상을 새겼으며 상대석은 원형의 세 겹꽃 앙련이 세련되며 장고형의 기둥을 환조처럼 새긴 두꺼운 받침에 옥신을 세웠는데 역시 팔각이며 사방의 면에 사천왕상을 섬세하게 조각했고, 사유의 면엔 자물쇠가 있고 문고리가 두 개인 아치형 문짝을 정교하게 새겨 달았다. 옥개석은 앙련을 얕게 새긴 받침을 두었고 기와지붕과 추녀 서까래 조각이 매우 정교하여 아주 아름다우며 상륜부의 앙화, 보륜의 연꽃무늬 새김도 섬세하다.
증각대사 응료탑비 (보물 제39호)
받침돌은 용머리 형태의 거북머리가 아닌데 거북머리를 그대로 조각한 것은 희귀한 예라 하며 오랜 세월의 풍파에 세부적인 모습은 알아보기 어렵다. 머릿돌의 조각의 용 조각은 힘이 있어 보인다. 극락전 입구에 있으며 탑비 앞쪽으로 거북이 놀기 좋은 연못이 있다.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
그 때쯤 세워진 것으로 본다. 여왕이 시호를 ‘수철화상’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 내렸다.
이른바 팔각원당형이며 세월의 풍상에 마멸이 심하다. 하대석에 복련의 띠를 두르고 용과 구름을 두껍게 새겼고 하대받침돌엔 사자를 새겼으며 중대석에 안상을 넣고 그 안에 사리함과 주악상(연주 모습)이 새겨져 있다. 옥신은 사방의 면에 사천왕상을 새기고 사유 면에는 문짝이 달려있다. 옥개석은 증각대사 응료탑처럼 매우 사실적으로 목조 기와지붕을 표현하였으며 상륜부는 8각 노반만이 남아있다.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는 수리중이라고 천막을 덮어놓아서 담지 못했으며, 실상사에서 조금(한 3백여m?) 떨어져 있는 아름다운 실상사 부도 (보물 제36호)를 깜박 놓쳤다. 일 후 가실 분들은 꼭 찾아보시길 권한다.
불교가 토착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융화 흡수시켜 상호조화를 이루어 전파해나가는 종교임을 보여주는 칠성각. 칠성각은 중국 도교의 북두칠성 신앙을 접목시킨 것으로 보여진다고 한다. 어떤 종교가 스스로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다른 종교들을 박해하는 행태와는 사뭇 다른 점이다.
|
첫댓글 당신은 "올려진 그림"을 봅니까? 아니면 "쓰여진 글"까지 봅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림, 글" 모두를 보고 읽습니까? 읽었다면 댓글 달고 나가이소. 홍 알 배
맞네, 맞어, 나 그냥 나갈려 했는데 홍알님 한테 얻어 맞을뻔 했네. 실상사 ! 사진으로 보니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