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장
엄니꽃 — 품앗이의 달
유월이 되면
갯머리 들판은 갑자기 바빠졌다.
보리가 익어 고개를 숙이고,
논에는 모를 심어야 하는 계절.
농부들의 하루는
해보다 먼저 시작되었고,
해가 진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그때마다 어른들은
“농번기에는 고양이 손도 빌린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린 나는 그 말이 우스워
정말 고양이도 일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말 속에는 농부들의 절박함과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야 했던 삶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마을에는 돈보다 먼저
사람이 있었다.
오늘은 우리 집 논으로,
내일은 이웃집 논으로.
서로의 손을 빌려 주고,
다음에는 그 품을 다시 갚는 것.
그것이 바로 품앗이였다.
품앗이는 돈으로 계산하는 노동이 아니었다.
믿음을 맡기고,
정을 돌려받는 약속이었다.
우리 마을에는 두레도 있었지만,
내 기억 속에는 품앗이가 더욱 따뜻하게 남아 있다.
품앗이는 얼굴을 마주 보는 일이었고,
이웃의 땀을 내 땀처럼 여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보리를 타작하는 날이면
이른 새벽부터 동네 어른들이
도리깨를 들고 우리 집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모내기 철에는
푸른 논마다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모를 심었다.
허리를 굽힌 채
끝없이 이어지는 논을 바라보면
마치 초록빛 물결이 사람들의 발끝에서
천천히 번져 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보며
한 가지 더 신기했던 것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오늘 어느 집 일을 하고,
내일은 어느 집으로 갈지를
늘 이웃들과 의논하셨다.
누구네 보리가 더 익었는지,
어느 집 논이 먼저 물을 받아야 하는지,
어디에 일손이 더 급한지를
마치 달력을 펴 놓은 사람처럼 기억하고 계셨다.
동네 사람들도
어머니의 말씀을 믿었다.
“이번에는 장흥 양반네 부터 하지요.”
칭호를 부인이 시집온 고향에따라 불렀다.
“내일은 박씨네 모를 심어야겠네.”
어머니의 한마디에
모든 일정이 자연스럽게 정리되곤 했다.
나는 그때는 몰랐다.
우리 어머니가
동네의 보이지 않는 리더였다는 것을.
리더란
앞에서 큰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갈 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어머니를 보며 배우고 있었다.
하루의 일이 끝나면
품앗이를 함께한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모깃불에서는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었다.
둥근 달은
논둑 위를 은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은
부엌에서 분주하게 저녁상을 차리셨다.
된장국 냄새가 퍼지고,
막 지은 밥에서 김이 오르고,
커다란 양푼에는 갓 무친 나물이 담겼다.
모두가 둥글게 둘러앉아
같은 밥을 먹었다.
누구는 서울로 떠난 자식 이야기를 하고,
누구는 군대 간 아들 소식을 전했다.
올해는 비가 적다는 이야기,
벼농사가 잘될 것 같다는 이야기,
내일은 어느 집에서 품앗이를 할 것인지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웃음소리는
모깃불 연기를 따라
밤하늘로 천천히 흩어졌다.
나는 그 곁에서
숟가락을 들고 앉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때는 몰랐다.
그 저녁밥이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서로의 수고를 위로하고,
내일을 약속하며,
마음을 나누는
작은 공동체의 잔치였다는 것을.
세월이 흐르면서
두레도,
품앗이도
조금씩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트랙터가 사람을 대신하고,
돈이 품을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믿는다.
품앗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조금 멀어졌을 뿐이라고.
돌이켜 보면
내가 군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생활하며
작은 조직을 이끌 수 있었던 것도,
미국에 와 수많은 사람들과 협력하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책에서 배운 리더십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만난 리더는
우리 어머니였다.
앞장서기보다
먼저 남을 살피고,
명령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손을 내밀며,
모두가 함께 가는 길을
조용히 만들어 가던 사람.
그분은 직함도,
완장도,
명함도 없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리더였다.
그래서 오늘도
초여름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갯머리 들판을 떠올린다.
푸른 논 사이를 오가던 사람들,
모깃불 연기 너머의 웃음소리,
그리고 품앗이의 날짜를 조용히 정하시던
어머니의 모습.
내 마음속에서
엄니꽃은
오늘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