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인류 문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
우화는 기원전 이솝을 시작으로 오랜 세월 이어져온 이야기다. 이솝은 우화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의미 있는 교훈을 주었다. 여우가 까마귀의 이야기는 프랑스의 장 드 라퐁텐의 우화다. 그는 동물이라는 알레고리를 이용해 당시 중세시대의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했었다.
세태에 대한 풍자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도 한 몫을 할 듯싶다. 오웰은 당시 엄혹했던 스탈린 시대를 힐난했다. 라퐁텐이나 오웰은 지독한 풍자를 담으려다보니 등장인물에 적잖이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동물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문명』은 풍자를 넘어 인류 문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우리는 마치 인류 역사와 지구의 역사를 동일시하는 듯하다.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이래 지구의 모습을 인류의 생각대로 바꾸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가 영원히 지구를 지배하며 살아갈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답을 하지 못한다. 인류 역사는 한 동안도 잠잠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테러, 전쟁, 엄청난 전염병 등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 연장선상에서 인간 문명을 가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이 세상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오. 세상은 그들 이전에도 존재했고, 그들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니까.” 돼지의 경종은 그런 점에서 심각하게 들린다. 그러나 인간은 이 당연한 것을 지금껏 그저 슬그머니 덮고 사는 중이다.
나. 간략한 줄거리
소설은 인간 문명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시점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고양이 바스테트의 집 앞에서 요란한 소동이 벌어졌다. 앞집에서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오고 그 뒤를 광신도들이 따라오며 총을 쏘아 사람들을 죽였다.
그로부터 도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일상이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도시는 쓰레기로 덮이고 바퀴벌레와 쥐가 들끓게 되었다. 쥐가 들끓자 페스트가 유행했다. 사람들이 죽어갔고, 인구밀도가 높은 대도시에서 특히 피해가 컸다. 전염병이 급속히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계 인구가 80억에서 10억으로 줄어들었다. 대멸망이 시작된 것이다. 도시가 폐허가 되고 갑자기 엉망이 되는 바람에 바스테트의 아들이 사라져 버렸다. 아들을 찾아 나서던 중 바스테트는 살풍경한 거리에서 샴고양이 피타고라스를 만났다.
그 외에도 대통령이 키우던 고양이를 비롯해서 여러 고양이를 만나 함께 만났다. 고양이들은 모두 자기들이 집사라고 부르는 주인을 잃었다. 피타고라스의 이마에는 제3의 눈이라는 USB를 꼽는 구멍이 나 있다. 녀석은 대학 연구실에서 고양이 뇌 연구를 위한 실험동물이었다.
그 덕분에 피타고라스는 이곳을 통해 인간 문명의 정보를 얻고 인간들과 컴퓨터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연구실에서는 고양이뿐만 아니라 쥐, 돼지 등 다른 동물들도 실험을 위해 제3의 눈을 만들었다. 이들 중 일부가 혼란을 틈타 연구실을 탈출했다.
제3의 눈을 가진 동물들을 중심으로 각 동물 종들은 인간이 사라진 도시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편안한 삶을 원하고 그것에 만족하지만 바스테트는 피타고라스의 도움을 받아 인간 문명이 사라진 도시에서 새로운 문명 건설을 꿈꾼다.
바스테트는 이를 확실히 하고자 자기 주인이자 집사인 나탈리에게 인간의 문명은 붕괴하지만 고양이들이 뒤를 이어 지구를 지배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나탈리는 고양이들이 인간 문명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개념이 필요한데, 사랑, 유머, 예술이 그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문명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정과 느낌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인간만이 웃는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리고 인간은 예술을 통해 엑스터시를 경험한다고 했다.
도전은 항상 시련에 마주치기 마련이다. 바스테트의 꿈은 엄청난 번식력을 자랑하는 쥐떼에 막혀 악전고투한다. 쥐는 이제 옛날의 그 고양이 먹잇감이 아니다. 쥐는 빠른 번식력 때문에 급속히 쥐의 숫자를 불어난다.
세상은 온통 쥐가 점령을 하고 있었다. 늑대가 쥐떼에게 물려 죽는가 하면 개나 고양이도 예외가 아니다. 쥐떼는 티무르라는 실험용 흰쥐가 거느리고 있다. 바스테트는 쥐떼와의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을 하나씩 체득해 간다.
바스테트는 쥐군단과 싸움을 해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감정을 조금씩 이해하였으며, 마침내 털이 없는 고양이 스핑크스의 꼬리를 보고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가 하면,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보며 격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과의 소통을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해 스스로 이마에 제3의 눈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 덕분에 피타고라스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신세계였다. 인간과의 대화 과정에서 바스테트는 인간들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 바스테트는 샴페인을 잔뜩 마시고 환각상태에 빠지게 되는 데 그 속에서 바스테트 여신을 만난다. 여신은 바스테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 어떤 것보다도 큰 권력이므로 글 쓰는 법을 배우라고 말한다.
글로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 경계를 뛰어넘어 불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에 더해 고양이의 지식까지를 담은 책을 쓰는 것이 바스테트의 소명이자 운명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가 문명을 만들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고양이가 인간 문명을 익히는 과정에서 오로지 인간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칫 고양이의 인간화 과정을 밟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을 것이다. 고양이는 고양이만의 문명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 속의 바스테트 여신은 현재의 바스테트에게 그것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그러나 소설이 끝날 때까지 글을 익히는 장면은 나타나지 않는다. 바스테트 일행이 쥐떼를 피해 그들이 이상향이라고 여겼던 뉴욕까지 대서양을 작은 범선으로 힘겹게 건너지만 그곳 역시 수많은 쥐떼가 들끓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 대멸망의 끝에서 <보트피플> 신세가 된다.
다. 코로나19
저자가 이 소설을 낸 시점이 절묘하다. 책에서는 엄청나게 불어난 쥐떼로 인해 페스트가 퍼지고 그로 인해 인간 문명이 대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현실에서는 코로나로 인해 벌써 3년째 전 세계가 공포 속에서 몸을 사리고 있다.
혹시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이 자칫 대처를 소홀히 하면 소설 속 페스트처럼 코로나로 인해 인간 문명이 어느 한 순간 멸망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 아닐까. 코로나의 위세에 선진국은 백신 이기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그러나 세계는 일일생활권에 들어선지 오래다.
어느 한 나라에서 백신을 집중적으로 주사한다고 해서 그 나라에서만 코로나가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 쥐떼를 피해 파리에서 뉴욕으로 갔지만 이미 그곳에도 쥐가 우글거리고 있었다는 상황이 이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이야 코로나 팬데믹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언제 또 그런 또는 그보다 더 엄청난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때마다 인류를 파멸의 길로 한 발씩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괜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재미는 백과사전(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12권) 내용을 요약한 부분이다. 역사적 맥락을 씨줄로 삼고 인간 문명을 습득해 가는 고양이의 이야기를 날줄로 삼아 나로 하여금 인간 문명에 대해 성찰하도록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