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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도들의 신앙의 중심은 찬양과 감사가 터져 나오는 기쁨의 예배와 절기마다 벌어지는 축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고요한 침묵의 종교가 아니라, 외치고 부르짖고 춤추는 종교였습니다.
선지자가 꿈꾸며 바라본 하나님의 임재는 기쁨이 충만한 현실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7). 또한 시인이 노래한 하나님은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십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그러므로 구원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매임에서 자유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 결과로 우리는 잠잠하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찬양을 구원의 주님께 올려 드리게 됩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시 30:11-12).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의 종으로 오셨지만, 그분이 전파하신 복음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이고, 바로 이 하나님 나라는 기쁨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예수님이 보여 주신 천국은 혼인 잔치와 같고, 신랑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왜 금식을 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하고 금식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9:15).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잔치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분을 가리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 11:19)이라고 말하며 비꼬기까지 했습니다.
*주님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신 사람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보상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마 25:21)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잃어버린 양을 다시 찾아내기까지 찾으셨고, 결국 찾아내시고 말았습니다. 잃은 자를 다시 찾은 일을 기뻐하신 주님이 벗과 이웃들을 불러모아 하신 말씀은 "나와 함께 즐기자"(눅 15:6)였습니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는 이처럼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하늘 아버지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기쁨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맏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복음은 기쁘고 복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기를 기뻐했던 사도 요한은 그의 첫 서신을 쓴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의 증거를 통하여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귐을 누리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일 1:3-4 참고). 요한이 설명한 '새 생명' 또는 '영생'은 새로운 차원의 삶이며, 그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대단한 현실이 주는 결과는 세상의 기대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기쁨의 경험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지금은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라고 선언했습니다. 믿음은 이제는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 (벧전 1:8)하게 하는 놀라운 영적 힘입니다. 고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그의 비결 역시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 4:13상). 역설적인 이 기쁨의 원인은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결과에 대한 확신이 매우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하).
사도 바울도 기쁨을 설파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고(살전 5:16-18), 무고하고 억울한 옥살이 중에서도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빌립보서를 써 보냈습니다. 이 서신의 별명은 '기쁨의 편지'입니다. 바울의 비결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빌 3:1)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
무나 확실하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
하라" (빌 4:4)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을 확증하며 인 치시는 성령을 '자녀됨(양자)의 영'이라고 부릅니다(롬 8:15). 그리고 성령이 자녀 안에 거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자녀에게 예비하신 종말적 기업의 보증이 되시는 '약속의 인치심' 입니다(엡 1:13-14). 그런데 성령이 성도의 삶에서 맺으시는 성령의 열매에서 '희락'이 빠질 수 없습니다(갈 5:22).
이처럼 기쁨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일시적 부작용이 아니고, 신앙의 올바른 작용이며 본질에 속하는 것입니다.
*볼프는 3가지의 축으로 좋은 삶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 내는 것이고, 둘째는 이런 삶이 지속될 수 있는 상황을 누리는 것이며 , 셋째는 그 결과로 찾아오는 감정적 충족입니다.
그가 기독교적 용어로 설명한 3가지 축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치있는 삶은 '공의'를 추구하는 삶이고, 이런 삶이 지속될 수 있는 상황은 '평강'이고, 결과적인 감정적 충족은 '기쁨'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는 말씀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볼프는 기쁨을 좋은 삶과 풍요로움의 중대한 결과물로 보았습니다. 그는 기쁨에 대해서 '큰 즐거움 또는 행복감'이라는 사전적 의미로는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기쁨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우선, 기쁨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느낌 이상의 것입니다. 기쁨은 반드시 어떤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감정이 그렇듯이, 기쁨도 어떤 대상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볼프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를 인용해 기쁨을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과의 연합에 대한 반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아
울러 기쁨은 그 대상을 선한 것으로 규정한 결과라고 소개합니다.
우리가 반응하고 있는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받아들일 때 기쁨이 유발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볼프는 기쁨을 규정하기를 "내가 선한 축복으로 받아들인 세상과 내 자아가 감정적으로 조율되었을 때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기쁨을 배양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대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볼프는 기쁨에는 윤리적 측면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대상에 대한 가치 측정이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뻐함, 즐거워함이 책임 소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뻐함을 명령하는 성경의 말씀들이 타당하다고 여겨지게 됩니다. 하지만 볼프는 기쁨은 명령되지만 강요될 수는 없다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 가치에 동감하고 동의해야 내가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쁨은 나의 자유로운 반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쁨이 아닙니다.
아울러 기쁨은 사랑과 함께 '영원을 구하는'(eternity-seeking) 감정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기쁨은 우리 안에 어떤 동기를 유발하는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기쁨은 한 개인, 사회 및 정치적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고, 또 그 변화를 이루어 낸 이후의 결과물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볼프가 강조하는 것은 기쁨이 가장 극대화되는 자리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기쁨은 동반자를 찾고, 함께 즐거워하는 동반자는 서로의 기쁨을 확대시킵니다. 그러므로 기쁨이 가장 활성화된 자리에는 공동체적 잔치와 축제가 있습니다. 기쁨이 활성화된 사회적 공간은 기쁨의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그 자리에 참여하는 자들은 기쁨의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고, 또 그 기쁨이 그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볼프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우선 기쁨은 참여자의 '성품'(character)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장 진정한 기쁨은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좋은 삶을 살고 있을 때 의미를 갖게 됩니다. 아울러 그가 어떤 '환경'(circumstance) 안에 있는가도 중요합니다. 좋은 삶이 지속되고 지탱될 수 있는 상황에 있을 때 기쁨은 가장 온전하게 누려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은 좋은 성품과 환경의 감정적 '결과'(consequence)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좋은 삶의 3가지 축(성품, 환경, 결과)이 구축될 때 그 안에서 기쁨은 정당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볼프는 결론적으로, 기쁨을 '좋은 삶 위에 씌워지는 왕관과 같다'(the
crown of the good life)고 정리합니다.
*루이스는 기쁨에 대해서, 우선 존재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 그 자체에서부터 설명을 합니다.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존재는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께로부터 기쁨이 마치 격렬한 에너지처럼 뿜어 나와 온 우주에 퍼져 나갑니다.아울러 기쁨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초월적 세계에 근거합니다. 이 초월적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이며, 그러므로 이것을 종말적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이스에게 현세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기보다는 다른 세계와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누립니다. 현세는 영원한 다른 세계의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현세를 위하여 지음 받은 자들이 아니라,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다른 세계를 위하여 지음 받았고 또 준비되어 가고 있다고 그는 믿습니다.
이런 루이스의 종말적 경향을 현실에 대한 도피 성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적으로 루이스는 자기가 살고 있던 시대적 문제들에 대해서 주저 없이 고민하고 분석하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현재적 경험에 대해서 민감하게 논평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답은 거의 균일하게 영구하고 보편적인, 변하지 않는 기독교의 진리에서 축출된 것이었습니다. 현세를 극복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은 인간 스스로에게 잠재되어 있는 능력이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긍정의 힘이건, 시대의 아픔과 대면하는 용감한 이념이건 간에 거기에서 궁극적인 답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창조주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과 시스템 안에서 해답을 찾아내려고 한 것입니다.
*루이스의 기쁨 담론은 결코 개인적인 측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분명 그것은 지극히 경험적이면서도 초월적인 강조점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거대한 윤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윤리의 중심에는 자아 중심성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타자를 향하여 나아가는 여정이 있고, 이 여정에서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타자에 대한 풍미'(taste for the other)를 향유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자아를 떠나 진정한 타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향한 여정을 예배라고 말할 수 있고, 이 예배의 중심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기쁨이고 희열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루이스의 기쁨 담론의 특징은 '종말적'입니다. 언뜻 들었을 때 어렵게 느껴진다면, 이는 루이스가 즐겨 언급하는 영어 단어인 'Heaven'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천국'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신학적 의미는 훨씬 더 깊고 풍성합니다.
루이스가 이해하는 천국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우리를 위해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이루어 내신 우주의 궁극적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 천국은 미래의 시간대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현세와 역사 속으로 들어온 천국, 즉 종말의 침투이고, 그분의 부활은 종말적 완성의 첫 열매입니다. 루이스는 이것을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겪고 있는 '옛 자연'(old nature)과 비교되는 '새로운 자연'(New Nature)이라고 부릅니다.
복음서에는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 동일한 의미로 번갈아 가며 자유롭게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마태복음은 '천국'을, 누가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좀 더 선호하는 경향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의미는 동일하다고 봐야 합니다.
'종말적'이라는 신학적 용어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내용을 통합해서 일컫는 말입니다. 바울 서신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난 종말적 현실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미-아직도'(already-but-not yet)의 구조로 표현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미 천국은 이 땅에 임했고 확산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다시 오심(Parousia, 파루지아)까지 이 땅에 임한 천국은 완성된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따라, "주님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
도합니다.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입니다. 여기에서 '하늘'은 이미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종말의 현장(eschatological arena)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고 표현하고, 히브리서는 그 현장을 '하늘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한때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어졌던 성막이나 성전은 하늘 성전의 모형일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공동체 예배는 현재 속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영적인 현실은 믿음 안에서 예배 공동체가 하늘 성전의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히 12:22)이라는 말씀이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루이스는 'Heaven'이란 단어를 무척 자주 사용합니다. 루이스에게 천국은 현세와 구분되지만 영향을 주고 있는 또 다른 세계이며,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다른 세계를 위하여 창조된 자들입니다. 루이스에게 천국은 단순히 미래의 영역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이 세상의 모든 삶 자체는 이미 천국에 속한 것이며, 천국 지향적입니다.
그러므로 기쁨 담론을 천국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지극히 루이스적이며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천국을 사후의 상태로 국한시킨다면, 천국은 마지막 고려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은 이땅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다 누린 이후에, 더 이상 누릴 수 없을 때 차선으로 등장하는 것이 천국이 됩니다. …
루이스에 앞서 종말론에 대한 일반적 편견을 뒤집어 놓은 대표적인 신학자는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입니다. 그는 20세기 초반에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성경신학자인데, 바울의 신학을 구원론보다는 종말론의 관점에서 풀어냈고, 종말론이 끝이 아니라 바울 신학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바울 신학계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보스의 주장에 의하면, 바울의 신학 전체는 종말론적 색채를 띠며, 결국 구원이란 우리를 종말적 삶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첫 창조 세계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것이지만, 더욱이 새 창조(New Creation)의 중심에는 부활하신 그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세계 질서, 즉 새 창조의 질서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새로운 피조물, 즉 종말적 존재가 되었다고 바울은 주장합니다(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은 더 이상 육신의 눈을 통하여 세상을 보지 않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 나갑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달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환상이나 꿈이 아니라, 이미 역사 속에 부활이라는 종말적 사건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신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맞이한 영적 현실입니다. 여기서부터 종말적 신앙과 윤리관이 흘러나옵니다.
*루이스가 주장하는 것은 '미래의 천국을 누리게 되는 자들에게는 이 땅의 삶 전체도 천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현세
의 고난이 너무 극심해 미래의 어떤 것도 보상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천국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을 얻은 자에게 천국의 현실은 소급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가장극심한 고난도 영광으로 바뀝니다.
반면, 지옥의 저주에 들어간 자들에게는 과거의 모든 삶 역시 지옥입니다. 어떤 자들은 지금 잘못된 쾌락에 빠져 살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앞으로 어떠한 비참한 결과를 만난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이 쾌락만은 포기할 수 없어!"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예상한 '그 비참한 결과'의 소급적 성격입니다. '영원한 저주'(damnation)라는 비참한 결과는 단순히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 소급적으로 적용되어 현세 속에서 이미 그 쾌락을 저주로 오염시키고 근심으로 채워 버립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의 이혼과 분리는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현세의 삶 속에서 이미 점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루이스는 현세 속으로 소급되어 들어오는 지옥의 특징을 '마음의상태' (a state of mind)라고 설명합니다. 마음의 부패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끊임없이 드러나는 자기중심성입니다. 이
상태는 지속적으로 자라 가며, 결국 그는 '자아'(self)라는 감옥에 완전히 갇혀 버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지옥의 실태입니다.
*천국은 가장 풍성한 실체입니다. 가장 견고하고 가장 구체적입니다. 루이스는 심지어 현세 속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견고한 실체는 궁극적으로 천국에 속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은 실재 그 자체다. 충실하게 존재하는 모든 실재는 천국에 속한 것이다.
천국은 한없이 거대하고 풍요롭습니다. 천국은 가장 실재적이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단단합니다. 루이스가 상상한 천국의 존재들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견고합니다. 천국에 속한 사람들은 '단단한 사람들' (solid people)이라고 불립니다.
이 세상에 흔들어 떨어질 것이 다 떨어진 이후에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것이 남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은 미래에 속한 상상 정도가 아니고, 가장 확실한 실재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가장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현세 속에 소급적으로 임하는 천국은 단순히 마음의 상태가 아닙니다. 천국과 관계된 모든 것은 가장 견고하고 실재적이고 영구적입니다.
루이스는 철저하게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 놓으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현세는 너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반면, 종말 또는 내세는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입니다. 이것은 물질세계와 비교되는 영적 세계에 대한 선입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루이스에게는 물질세계보다 영적 세계가 훨씬 더 무겁고 단단하고 구체적입니다.
루이스가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그린 천국의 놀라운 모습은 그 환경이 너무도 실재적이어서 지옥에서 온 희미한 영혼들은 그 단단함과 견고함을 견뎌 내기가 버겁습니다. 천국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 환경의 견고함만큼 그곳에 거하는 존재도 반드시 견고해지
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거룩함' 또는 '영광'이라는 단어에 '무거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루이스가 생각할 때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은 이런 천국의 격을 지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은 영적인 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을 기체나 연기같이 실체가 없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지니신 몸은 '새로운 자연'에 속한 것이라 부를 수 있는데, 이것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합니다.
그리스도가 부활 이후 승천하시기까지 이 세상은 아주 신기한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새로운 자연이 옛 자연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동일하게 먹고 마시기도 하셨지만, 동시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도 하셨습니다. 닫혀 있는 방 안에 갑자기 나타나시거나 갑자기 사라지시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현 자연 세계 속에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계셨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구체적이며 만질 수 있는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맥락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자연에 속한 몸이 옛 자연의 실체보다 얼마나 견고한지, 마치 고체가 물을 가르고 지나가듯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적 몸을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이 이해하는 종말적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지극히 무겁습니다. 지금의 임시적 환난은 어떤 목적을 갖습니까? 바로 우리가 누려야 하는 영광의 무게를 위해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루이스에게 현세는 '그림자의 땅' (shadowlands)이고, 종말적 현실이 실재이고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실재는 천국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것만이 실재이고 영원한 가치를 지닙니다.
현세 속에서 우리가 귀하고 아름답고 기쁜 경험을 만난다면, 그것은 현세 자체에 대한 증거가 아닙니다. 그래서 현세에 안주하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현세 속에서 느끼는 그 아름다움의 경험은 천국에서 떨어진 작은 물방울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제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겨우 한두 방울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물방울 하나에 목을 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천국의 현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천국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사는 것 같지만, 그것은 진정 천국을 원하지도, 사모하지도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루이스가 깨달은 것은 사람들이 천국을 사모하지 않는 것 정도가 아니라, 사실 그들은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천국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사모해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진정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천국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근원은 천국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여러 지체를 지닌 몸이며,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인 사회입니다. 그 안에서 성도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소유하고 있고, 그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각자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주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셨어!"라는 간증들이 모이고 모여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심포니로 울려 퍼질 것입니다. 루이스가 그의 거룩한 상상력을 통하여 우리에게 진술해 준 천국의 모습은 가슴 벅차고 짜릿한 기쁨의 도가니입니다.
이처럼 천국이라는 위대한 운명 (destiny)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천국은 미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 영향은 두 가지로 옵니다.
첫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천국은 소급적으로 역사하고 있습니다. 즉 천국을 미래에 소유하게 될 사람은 이미 소급적 역동을 통하여 오늘의 삶이 천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학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우리의 현재적 삶은 '천국의 그림자'라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속한 사람은 매일 천국의 그늘 아래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 천국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이 각자의 영혼 속에 찍어 놓으신 인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인장이 찍혀 있고, 이 인장을 통해 이미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인장은 이미 우리 안에서 천국의 품격으로 역사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참을 수 없는 내적 갈망이 존재하고, 그 갈망의 대상은 물론 천국과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천국의 품격에 속하는 가장 또렷한 경험을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은 그 근원이 천국에 있습니다. 만일 이 사실을 인식한다면, 비록 현재적 기쁨은 부분적이고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더라도 여전히 그 초월적 의미를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의 불완전한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또 그럼에도 주어진 기쁨을 천국에서 내려온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아울러 이 기쁨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이 기쁨을 천국에 속한 덕망으로 부양해 나가는 것 역시 소중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을 '천국 지향적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을 집중력 없이 살다가는 큰 낭패를 봅니다. 성공할 기회를놓치고, 누군가 나를 제치고 뛰어나와 추월해 버린다면 나는 위기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쁨은 기껏해 봐야 일상을 벗어나 잠시 얻는 휴식 정도입니다. 파티는 잠시뿐, 빨리 정신을 차리고 심각한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반면, 기쁨은 천국에서 가장 중대한 업무입니다. 천국에서는 가장 심각한 일이 기쁨이고, 기뻐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업무입니다. 이 기쁨에는 참여가 있을 뿐 경쟁은 없습니다. 기쁨을 남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어차피 기쁨의 바다에서 누구든 마음껏 기쁨을 누릴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예비된 기쁨은 나밖에는 누릴 수 없습니다. 기회를 놓치는 일도 없습니다. 영원 속에 기회라는 것은 단순히 끊어지거나 중단되지 않는 매 순간이라는 의미뿐입니다. 천국에서의 현재(now)는 끊임없이 주어지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천국이 결론이고 그것이 우리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지금도 천국의 품격을 추구하고 갈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뒤집혀 있습니다. 일시적인 것이 가장 중요하고, 영원한 것은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을 따라가는 사람은 현세적 삶에서는 지각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현실인 듯합니다. 그런데 천국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기쁨을 배양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쁨 담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충분한 이유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Joy'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쁨과는 다른 특별한 경험을 의미하고, 이것을 갈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세 속에 경험하는 일반적인 기쁨의 경험 안에서도 갈망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세 속에 만나는 어떤 기쁨도 일시적이며 부분적이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쾌락주의는 아주 모순적인 인생철학입니다. 쾌락 속에 파묻힐수록 충족을 경험하기보다는 더욱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현세 속에 만나는 모든 기쁨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루이스는 그의 유명한 책 《영광의 무게》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책이나 음악 그 자체를 신뢰하고 그 안에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배반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하여 온 것이며, 사실 그것들을 통하여 온 것은 갈망뿐입니다. 그것들이 생각나게 하는 아름다움이나 우리 과거의 회상들은 우리가 진정 사모하는 것에 대한 좋은 그림일 뿐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들을 대상 그 자체로 오해한다면, 그것들은 어리석은 우상으로 변질되고 그것들을 숭배하는 자들의 마음을 찢어놓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대상 자체가 아니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꽃의 향기일 뿐, 그리고 아직 들어 보지 못한 곡조의 메아리일 뿐, 그리고 아직 방문한 적이 없는 나라에서 온 소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느끼는 기쁨이 지나간 흔적에는 언제든지 아쉬움과 상실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다시 동일한 기쁨을 찾아 나서겠지만, 깨달은 사람이라면 일시적이며 부분적인 기쁨의 의미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을 가리키는 화살표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글에서 루이스는 모든 즐거움을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방편으로 사용하려고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즐거움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정도의 마음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먼저 즐겁고, 그 이후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 자체가 경배이고 감사라는 논리입니다. …
이와 마찬가지로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과 그 즐거움의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은 별개의 행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것과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파악하는 일은 하나의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루이스는 "즐거움이라는 천국의 열매에서는 그것이 자라난 과수원의 향기가 난다"라고 말합니다. 즐거움 그 자체에 천국의 냄새가 묻어 있습니다. 즐거움 그 자체에 창조주의 메시지가 속삭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즐거움의 근원이십니다. 그분의 오른손, 바로 그분의 손가락과 맞닿는 순간이 우리가 즐거움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때 느끼는 전율 속에 또 다른 별개의 사건으로 감사, 찬양을 별도로 할 필요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즐거움은 그 자체가 작은 신현(神, theophany), 즉 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경배입니다. 그 순간의 경험은 "이 같은 즐거움을 주시는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다!"라는 감사의 속삭임이고, 또 "이처럼 멀찍이 와서 잠시 반짝이는 그분의 빛이 이 정도라면, 도대체 하나님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신가!"라는 경외함의 감탄입니다.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은 햇살을 거슬러 올라가 태양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러한 즐거움과 경외함의 일치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러므로 지극히 평범하게 느껴졌던 즐거움이라 할지라도 사실은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부드럽게 다가온 바람이 뺨을 스치는 느낌마저도 황홀한 예배로 변할 것입니다.
*《고통의 문제》 제8장 지옥"에서 루이스는 일반적으로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지옥의 교리가 사실은 합리적이라는 것을 설명해 나갑니다. 그중 중요한 주장 하나는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들은 그 일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정당한 보응에 의해 지옥에 빠지게 되는 것에 앞서, 사실상 지옥행을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옥에 들어가는 영혼들의 기질은 자기 자신이 아닌 그 무엇이라도 거부하는 성향을 지녔습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존재들은 그 무슨 대상을 만나더라도 그 대상을 자기의 일부 또는 부록 정도로 만들어 버립니다. 반면, 선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타자를 풍미하는 기쁨'(taste for the other)을 지닌 것입니다.
하지만 지옥을 선택하는 자들에게 치명적으로 결여된 것은 바로 이 풍미의 기능입니다. 죽기 이전에는 적어도 육체라는 것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 몸이 닿는 외부 세계와 어느 정도는 연결이 유지되고 있어 완전한 단절 상태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육체의 죽음이 이 마지막 연결 고리마저 끊어 버립니다. 결국 죽음을 통해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완성시킵니다. 이제는 아무런 제재 없이 자아에게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기 속에 있는 것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끝까지 거부하는 자아 속에 발견되는 것은 결국 지옥밖에는 없습니다.
*《고통의 문제》에서 루이스가 언급했듯이, 인류 최초의 부모들이 저지른 죄는 자신들의 영혼이 자기들의 것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며, 이런 입장은 여전히 타락한 인간들이 지닌 죄악 된 사고 속에 드러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거짓되고 허황됩니다. 사실상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오직 창조주에게 달려 있고, 그분께 연결될 때만 참 존재적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인간에게 제시된 인간의 목적이며 우리가 도착해야 할 종착역입니다. 누구든지 이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온전함(full humanity)을 성취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루이스는 현세 속에서 우리가 온전한 인간성을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생각은 종말적 측면을 강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현세는 온전한 인간성을 향하여 가는 여정입니다. 그리고 이 여정 속에서 수많은 도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격려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이곳저곳에 세워 두신 종말적 이정표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여정을 통하여 습득해야 할 대표적 과제는 자아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아를 내려놓는 과정은 하나님과 또 타자들과 교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참된 인간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옥은 인간성의 말살을 의미하며, 그곳은 타자에 대한 풍미를 온전히 상실한 현장입니다. 반면, 하나님과 이웃과의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self-giving love)입니다.
'자기 내어 줌'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 영원한 현실이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 드러난 원리이며, 기쁨을 유발하는 근원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타자를 향유하는 즐거움입니다. 대상이 없는 즐거움은 타락한 자기 사랑에 불과합니다. 사실상 자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속에 일어나는 느낌들에 대한 집착일 뿐입니다.
*루이스의 기쁨 담론은 향유의 이론에서 볼 수 있었듯이 이타적입니다. 자기중심성은 천국의 기쁨과는 정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자기중심성은 지옥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작은 차이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천국과 지옥의 거리는 무한하게 벌어져 갑니다. 루이스가 본 종말의 역동은 천국과 지옥의 완전한 이혼이며 이별입니다. 그 종말적 구분 지어짐이 세계와 개인의 역사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 속으로까지 소급적으로 뻗어 들어와 영향을 떨칩니다. 사람들은 이미 현재 이곳에서 천국 또는 지옥을 맛보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속한 것은 고난이라도 영광으로 변하고 있고, 지옥에 속한 것은 쾌락이라도 저주로 물들어 갑니다. 지옥을 떨치고 천국으로 향하는 방향은 자아라는 감옥을 탈출해 밖을 향하고, 타자를 향하여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기독교의 이야기는 자아에 대한 죽음을 통해서만 진정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성례전에 담긴 의미가 바로 그러합니다. 자신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모습입니다.
성찬에 담긴 의미 역시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 줌입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십니다. 이같은 성찬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가 되어 서로를 향하고, 또 세상을 향하여 우리 자신을 내어 주는 데 헌신합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공동체적 삶입니다. 루이스의 관계 윤리는 이런 이해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또 하나의 깨달음이 그 뒤를 잇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그분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시고 그들과 함께 교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드러나는 가장 대표적인 현장은 그분의 백성들이 함께 예배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그분께 예배가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필요에 의해서 희생 제물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12). 우리가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배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이스가 발견한 더 중요하고 타당해 보이는 찬양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칭송은 모든 향유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입니다. 모든 행복한 향유는 당연히 그 대상에 대한 칭송으로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온 세상은 칭송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내적 건강을 외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4 내가 정상적인 상태에 있다면, 내가 즐거워
하는 대상을 칭찬하고 칭송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 나아가 루이스가 깨달은 것은 칭송은 향유의 표현 정도가 아니고 향유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여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것은 단순히 칭찬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이 표현되는 것이 더 큰 희열이고 사랑의 완성입니다. 내가 발견한 기쁨을 표현하고 찬양하고 함께 나눌 때 그 기쁨이 더욱 온전해진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비록 우리의 표현이 부족하고 아쉬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충분히 표현하고 누릴 수 있다면, 그 희열은 더욱 넘쳐 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대상이 더욱 귀중할수록 그 대상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클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하여 느껴지는 반사적인 희열은 더욱 강렬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영혼이 온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대상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누리고 사랑하
고 감격하고 기뻐하고, 더 나아가 그 기쁨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우리의 영혼은 그야말로 최상으로 복된 자리에 있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온 우주에게 가장 중요하다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삼위 하나님의 생명의 춤과 드라마가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연출되어야 하고, 우리는 그 춤 안에서 우리의 존재적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이것 외에 창조주가 우리를 위해 의도하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모두 전염(infection)을 통하여 퍼져 나갑니다. 따뜻함을 느끼기 원하면 모닥불 앞으로 가야 합니다. 물에 젖고 싶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기쁨, 능력, 평안, 영생을 누리고 싶다면 이것들을 지닌 대상에게 가까이, 심지어는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이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때에 따라 건네주시는 상품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품고 계신 속성이며, 그분의 생명력 그 자체입니다. 모든 존재의 중심이 되신 그분께로부터 뿜어 나오는 아름다움 그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가까이 간다면 그 뿜어 나오는 생명수에 젖을 것이고, 떨어져 있다면 메마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은 영생을 누릴 것이고,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은 시들어 죽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이라는 것을 상품화했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과 별도로 간직하고 필요할 때만 꺼내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기쁨을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춤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거대한 역동을 상상해 볼 수 있다면 이러한 모습일 것입니다. 온 우주는 성부와 성자와 그 사랑의 연합이 끊임없이 뿌려 대는 영광의 빛으로 차 있습니다. 온 우주는 하나님의 거대한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웃음소리가 온 우주에 울려 퍼집니다.
*“그는 그 자신에서부터 나오신 독생자이고 그로부터 나오는 자 역시 그자신입니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영원한 낳으심'으로, 그리고 성령에 대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영원한 내주심'으로 고백하고 있는 니케아 신조를 반영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랜섬이 본 위대한 춤의 정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랑 공동체입니다. 영원 속에서 성부가 성자를 낳으시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나오시는 모습이 의미하는 것은 영원하고 완전한사랑 공동체의 형성을 의미합니다.
이 형성은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 과정이 아닙니다. 원래 한 분이신 하나님이 어느 날 세 분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적 일치성(한 분)과 사회성(삼위)은 시간적이나 논리적인 차등을 갖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궁극적인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일치성은 그분의 유일하심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사회성은 그분이 사랑 그 자체이심을 강조합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기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공존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사랑'(self-love)이 아니라, '서로 사랑'(loving one another)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회성 속에 이 리듬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성자가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신 것인데, 이것은 역사 속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오직 한 순간 십자가에 달려 희생을 치르신 일 그 자체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루이스는 성자는 영원 속에서 원래 자신을 내어 주는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십자가 희생은 당연한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독생하신 신성(begotten Dei-ty)은 그분을 낳으신 신성(begetting Deity)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양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낳으심(begett-ing) 그 자체도 성부가 자신을 내어 주시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원형 속에서 존재의 참된 원리가 나옵니다. 가장 높은 존재로부터 가장 낮은 존재에 이르기까지 자아는 포기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자신을 포기함으로 더욱 진정한 자아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 속에 자아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영원토록 진행되는 것이 천국의 원칙입니다. 이러한 자기 내어 줌의 시스템 밖에서 떨어져 존재하는 현실은 유일하게 지옥뿐입니다.
*루이스는 천국에서 일어나는 게임의 법칙을 이렇게 설명합니다.천국에서 즐겁게 벌어지고 있는 게임은 '자아'(self)라는 황금 사과를 손에 잡는 즉시 다른 선수에게 패스하는 것입니다. 황금 사과를 손에 든 채 잡히면 그 게임에서 집니다. 물론 지옥에 비슷한 게임이 있다면 황금 사과를 더 많이 차지하는 싸움이겠지만, 천국의 이론대로 하면 황금 사과를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순간 우리는 천국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황금 사과를 패스하고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조화롭게 리듬을 타고 펼쳐지는 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루이스는 이것이 '천국을 조화로움으로 나른하게 만드는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즐거운 게임, 놀이를 이끄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성부가 성자를 낳으심으로 자신을 영원토록 세상을 위해 내어 주시고, 또 성자가 순종으로 자신을 영원토록 성부께 내어 드리는 이 영원한 역동인 거룩한 춤 안에서 벌어지는 한판의 흥겨운 놀이인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과 쾌락들은 이 춤의 움직임을 초보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춤의 본체에는 현세의 고통과 과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영원한 춤에 가까이 갈수록, 그 경쾌한 리듬에 다가갈수록 현세에서 알고 있는 우리의 고통과 사소한 쾌락은 사라져 갈 것입니다. 이 춤 안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을 위해 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이 춤은 선함이나 사랑을 위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춤 자체가 선이고 사랑이며, 그 자체가 행복이고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 춤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가 이 춤을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의 향연을 위해 존재하며, 그 향연에 참여하여 영원토록 하나님을 향유하고 기뻐함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