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여드레, 이월 끝자락 도청 뒤 용추계곡에 들려고 집을 나섰다. 올해는 윤년으로 내일이 스무아흐레 마지막 날이다. 지난겨울 한문책 보느라고 한 눈 좀 팔았다. 무릎이 시원찮아 멀리 걷기를 얼마간 머뭇거렸다. 그간 써 온 원고를 뒤져보니 너무 창피했다. 말도 줄도 아닌 것을 글이랍시고 이곳저곳 올렸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여, 며칠 밤을 새워 고쳐 쓰고 또 고쳐 썼다. 그래도 아직 마음에 차지 않은 구석이 있다.
사림동 지나다 울 너머 보니 볕바른 정원에는 매화꽃이 활짝 핀 집이 있었다. 용추계곡에 들기 전에 도청 정원에 잠시 서성거렸다. 넓은 잔디밭엔 아직 봄기운이 이른 듯했다. 역시 봄의 전령은 매화꽃인가 싶다. 도청 정원에도 매화는 꽃눈이 봉긋봉긋 부풀고 있었다. 산수유와 목련도 곧 꽃망울을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연못가에 한 그루 뿐인 능수매화와 여러 벚나무는 아직 낌새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거나 모니터 앞에 앉았으니 눈이 침침해 바깥바람을 쐬려고 나선 걸음이다. 용추계곡 들머리는 벌건 토사와 부서진 암반더미가 가득 쌓여있었다. 철로를 옮기고 도로를 새로 뚫는 터널공사가 한창이었다. 이미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지난해 비가 부슬부슬한 초가을 나는 물봉선꽃을 감상하려고 이 길을 찾아든 적이 있었다. 물봉선꽃에 홀려 올랐던 그 탐방로를 따라 걸었다.
자주 오기에 어디 쯤 가면 바위틈에 뱀고사리가 붙어 있고 그 아래 맑은 웅덩이에 송사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것까지 알고 있다. 어느 모롱이 돌아가면 오리나무 연녹색 꽃망울이 부풀고 생강나무 꽃눈이 기지개 켜는지도 잘 알고 있다. 북사면 응달에는 며칠 전 내린 눈이 아직 남아 있었다. 개울 바닥에는 군데군데 얼음장이 보였고 계곡 바위 틈 웅숭깊은 곳엔 겨우내 솟은 빙벽이 그대로 있었다.
이 골짝에 들어 건성으로 보고 지나면 소나무 말고는 낙엽 진 활엽수거나 모두 시든 풀잎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푸름을 간직한 채 겨울을 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소나무야 겨울 산에서 우뚝한 기상으로 너무 잘 알려졌다. 내가 걷고 있는 탐방로 가장자리에 알아주는 이 없어도 꿋꿋하게 겨울을 이겨내는 풀과 나무가 있더이다. 새봄이 와서 연두색 물감이 풀리면 잊어질까 걱정이다.
어쩌면 야윈 춘란 같기도 하고, 어쩌면 살이 통통한 부추 같기도 한 맥문동이다. 파릇파릇한 맥문동이 누군가 심어 가꾼 것처럼 길가에 수북이 자라고 있었다. 모진 응달 추위에도 시들지 않고 거뜬히 이겨내었다. 삭막한 겨울 용추계곡에서 푸른 잎을 간직한 채 의연히 살아남았다. 가랑잎이 쌓여서 이불이 되어주고 눈비가 내려주어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여름에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더니 겨울에는 더 겸손하구나.
맥문동에 홀려 얼마간 오르니 또 반겨주는 친구가 마삭넝쿨이었다. 응달 바위틈에 붙어서도 암녹색 푸름을 간직한 잎을 촘촘히 달고 있었다. 이순신장군동상에 붙은 갑옷비늘 같은 모양의 푸른 잎사귀다. 용하게도 모진 북풍한설에 시들지 않고 청청한 잎을 달고 있더구나. 어릴 적 쇠꼴 베러 갔다가 꼴이 없으면 돌담에 붙어 자라는 이 마삭넝쿨을 걷어 망태에 담았다. 지금은 야생화 화원에선 분에 심어 가꾸기도 한다.
맥문동과 마삭넝쿨 사이로 쥐똥나무가 간간이 보였다. 늦은 봄에 피는 쥐똥나무 하얀 꽃은 이팝나무 꽃 같았다. 가을이면 열매가 익어 꼭 까만 쥐똥모양으로 생긴 것이 앙증맞게 달렸다. 쥐똥나무는 파란 잎과 까만 열매를 가지에 매단 채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열매가 많다보니 산새가 덜 쪼아 먹어 아직 달려 있는 것이 더러 보였다. 이 쥐똥나무는 집이나 학교에서 울타리로 심어도 운치가 있는 사철 푸른 나무다.
용추계곡은 친환경적인 탐방로다. 자연을 그대로 살리고 통나무로 다리와 난간을 만들었다. 나는 탐방로를 벗어나 잔설이 남은 계곡 바닥을 따라 얼음장을 조심조심 걸어 올랐다. 어디 쯤 가면 버들강아지가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산속이지만 계곡 바닥 시든 갈댓잎 사이로 보송보송 부풀어 오르는 버들강아지를 만났다. 자줏빛가지 끝의 보드라운 솜털을 쓰다듬었더니 손끝이 간지러웠다. 봄은 이렇게 산속에까지 와 있었다.
첫댓글 이곳에서도 용추계곡을 보는 듯하여 감사합니다.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