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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왕산-필봉산
2010,08,05 종남형,장원,해바락이,하늘과바다님과 산행시간;10;00-16;00 구형왕릉 주차장-유의태약수터터 삼거리-유의태약수터-삼거리 회귀(왕복1.8km)- 망경대-왕산전망대(제1 정상석)-왕산-필봉산-한의학박물관.
지리산 천왕봉·웅석봉·황매산과 마름모꼴로 이어진 경남 산청의 왕산(923m)은 지리산 왕등재에서 뻗어내린 봉우리다. 왕산은 다시 필봉산(848m)까지 이어져 경호강에 의해 긴 걸음을 멈춘다. 왕산 정상에서 필봉산까지의 거리는 겨우 1㎞. 그래선지 사람들은 흔히 왕산과 필봉산을 묶어 ‘왕산필봉산’ 하나의 이름처럼 부르고 연이어 산행하는 경우가 많다. 구형왕릉에서 출발해 왕산과 필봉산을 거쳐 강구폭포로 하산.
구형왕릉 주차장에서 본 전경
구형왕릉 주변
가야국 금관가야라는 이름은 고려시대부터 알려진 이름으로 그 자신이 사용한 이름은 아니다. 처음 사서에 전하는 이름은 구야국(狗邪國),또는 구야한국(狗邪韓國)인데 狗자의 상고음이 "가이"였고 실제로 김해지역민들은 구지봉을 개야봉, 또는 개라봉으로 부르고 있으므로 구야라는 이름은 가이야,또는 가야로 독음되었다. 이후에 가야는 가야(伽倻 혹은 加耶, 伽耶) 가락(駕洛, 加洛), 가라(加羅, 伽羅, 迦羅), 가량(加良)등 여러가지로 전해졌고 이후 변한지역 전체또는 그 국가연맹체를 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후기가야연맹을 이끌게 되는 반파국에서 새로운 연맹체 이름을 대가야라고 했던 것으로 전기가야연맹도 대가야라고 칭한 바가 있다. 한편 가야의 다른 이름인 가라는 외국을 뜻하는 일본어의 'から'로 전해지기도 했다. 김해지역의 母가야인 구야국은 가락국(駕洛國)으로도 전해졌다. 한편 일본에서는 구야국을 특별히 수나라(須那羅)라고 하였는데 이는 현대 우리말로 '쇠나라'로 읽힌다. 이는 가야의 주요수출품이 쇠(鐵)이었던 데서 기인한다. 이를 삼국사기에서 간간히 금관국(金官國)으로 적기도 했다. 고려시대 이후의 금관가야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
역대 국왕 수로왕(재위 42년-199년) -거등왕(재위 199년- 253년) -마품왕(재위 253년- 291년) -거질미왕(재위 291년- 346년)- 이시품왕(재위 346년- 407년)- 좌지왕(재위 407년- 421년)- 취희왕(재위 421년- 451년)- 질지왕(재위 451년- 491년) -겸지왕(재위 491년- 521년) -구형왕(재위 521년- 532년)
1. 수로왕(首露王) 금관가야의 시조(?~199). 또는 가락국의 시조. 김해김씨의 시조. 금관가야 9부족의 추장인 9간이 김해구지봉에 모였을 때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합 안에서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를 얻었다. 반나절 만에 여섯 개의 알은 모두 사람으로 화하였는데 수로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사람으로 화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수로는 키가 9자[尺]이고 팔자 눈썹이며 얼굴은 용과 같이 생겼는데,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비로 삼았다. 수로는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했다. 157년을 재위하다가 죽었다. 아들 거등왕(居登王)이 뒤를 이었다.
2. 거등왕(居登王) 금관가야의 제2대 왕(?~?). 성 김(金). 수로왕(首露王)의 아들. 모친은 허씨(許氏). 비(妃)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고, 마품(麻品)이 그의 아들이다. 치적에 관련된 기록은 남아있지않다. 재위기간은 199~259년이다.
3. 마품왕(麻品王) 금관가야의 제3대 왕(?~291). 성 김(金). 거등왕(居登王)의 아들. 모친은 모정부인(慕貞夫人).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인 호구(好仇)를 왕비로 맞아,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재위기간은 259∼291년이다.
4. 거질미왕(居叱彌王) 금관가야의 제4대 왕(?~?). 성 김(金). 마품왕(麻品王)의 아들. 비(妃)는 아간(阿干) 아궁(阿窮)의 손녀로, 이름은 아지(阿志)이며 이품(伊品) 왕자를 낳았다. 재위기간은 291~346년이다.
5. 이시품왕(伊尸品王) 금관가야의 제5대 왕(?~?). 성 김(金). 거질미왕(居叱彌王)의 아들. 왕비는 극정신(克貞信), 태자는 좌지왕이다. 재위기간은 346~407년이다.
6. 좌지왕(坐知王) 금관가야의 제6대 왕(?~421). 성 김(金). 이시품왕(伊尸品王)의 아들. 좌지왕(坐知王)은〈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駕洛國記)에만 관련된 사실이 전한다. 아버지는 이시품왕(伊尸品王)이며, 어머니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이고, 비는 도령(道寧) 대아간(大阿干)의 딸 복수(福壽)이다. 407년 즉위하자 용녀(傭女)와 혼인하고 그 무리에게 벼슬을 주어 국내가 소란해지자 신라가 공격하려 했다. 이때 왕은 박원도(朴元道)의 간언과 점을 친 결과를 보고 용녀를 하산도(荷山道)에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했다. 왕비와의 사이에 낳은 취희(吹希)가 다음 왕이 되었다. 재위기간은 407~421년이다.
7. 취희왕(吹希王) 금관가야의 제7대 왕(?~?). 성 김(金). 좌지왕(坐知王)의 아들. 왕비는 인덕(仁德)부인이며, 왕자는 질지왕이다. 재위기간은 421~451년이다.
8. 질지왕(銍知王) 금관가야의 제8대 왕(?~492). 성 김(金). 취희왕(吹希王)의 아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아버지는 제7대 취희왕(吹希王)이며, 어머니는 진사(進思) 각간(角干)의 딸인 인덕(仁德)이다. 왕비는 김상(金相) 사간(沙干)의 딸인 방원(邦媛)이다. 즉위한 다음해 시조인 수로왕(首露王)과 왕후 허황옥(許黃玉)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들이 거처하던 곳에 왕후사(王后寺)라는 절을 짓고 밭 10결(結)을 주어 비용으로 쓰게 했다. <남제서 南齊書〉 동남이전(東南夷傳)에는 479년(건원 1) 남제에 사신을 보내어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을 제수받은 가야왕 하지(荷知)가 나오는데 이 하지왕을 질지왕에 비정하기도 한다. 재위기간은 451~491년이다.
9. 겸지왕(鉗知王) 금관가야의 제9대 왕(?~521). 성 김(金). 질지왕(銍知王)의 아들. 이름 겸지(鉗知). 지(知)는 이름 밑에 붙는 어미이다.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질지왕(銍知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간(沙干) 김상(金相)의 딸 방원(邦媛), 비(妃)는 각간(角干) 출충(出忠)의 딸 숙(淑)이다. 재위기간은 491~521년이다.
10. 구형왕 (仇衡王)
구형왕릉 구형왕 (仇衡王)
생몰연대 미상. 금관가야의 제 10대 왕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 이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 조에 보면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금관가야의 멸망연대를 진흥왕 2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도 가야가 반함에 왕이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야를 정벌하였으며
이때 사다함(斯多含)의 전공이 가장 컸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의 이름은 세종(世宗), 무도(茂刀), 무득(茂得)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이름과 표기가 다르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가야가 멸망하자 신라는 이들을 예로 대접하고 왕에게는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고 그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하였다고 하였다.
아들 무력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각간(角干)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김유신은 무력의 손자이며 금관가야는 멸망하였으나 그 왕족은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성하면서 신라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가락국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왕릉은 구형왕 구해(九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부이다.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왕릉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무인석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세운 시설물이다.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태왕궁(太王宮)에서 돌아가시자 시호(諡號)를 양왕(讓王)이라 하였다고 하여, 가락국 제10대 구형능으로 전해오고 있다. 전면은 7단을 이루고 있으나 후면은 갈수록 경사가 커져서 각 층의 등급이 높이에 따라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석렬은 전면에서도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모퉁이가 뚜렷하지 않고, 정상은 봉분과 같이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면 중앙에서의 높이는 7.15m이고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4단의 동쪽에 폭 40cm, 높이 40cm, 깊이 68cm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돌무덤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을 쌓고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고 새긴 비석이 서있으며, 그 앞에 상석과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석수가 각각 1쌍씩 있다. ‘왕산(王山)’이 있고 그 각주(脚注)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는 기록에 있다. 근처에 있는 왕산사에 전해오고 있는 ≪산사기권≫에 구형왕릉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 다른 자료인 ≪산청현유지≫에는 정조 22년(1798년)에 처음으로 왕릉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홍의영 ≪왕산심릉기≫에 이 “왕릉이 처음 나타났다”고 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여진다. 전하기로 약 200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던중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 있는 내력을 알 수 없는 큰 목궤를 민경원이란 사람이 내려다보았더니, 그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 칼 등의 유물과 함께 명승 탄영(坦渶)의 왕산사기(王山寺記)가 나와서 이를 가지고 왕릉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선 정조 17년(1793년)에 덕양전을 짓고, 가락종친이 봄가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 구형왕릉은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정조 11년(1798)부터는 가락종친회에서 봄·가을로 구형왕과 계화왕후의 음덕을 기리는 제향을 받들고 있다. 구형왕은 세 아들 세종, 무력, 무득은 신라에 들어가 나라의 융성을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구형왕 증손자 김유신은 화랑으로 장군이 되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여 가락인의 기개(氣槪)를 드높혔다. 산청 구형왕릉은 700만 가락후손들의 성지요 전통 한방의 고장 산청의 관광명소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김수로가 정말 한반도 김씨의 시조였을까가야 토착 집단,김수로 집단, 석탈해 집단, 허황옥 집단이 한반도 동남부를 무대로 새로운 문명의 주도권을 놓고 운명적 대결을 펼친 1세기 가야 건국의 현장. 아직까지 미스터리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이 시기의 한국 고대사를 다룬 드라마 < 김수로 > 가 지난 5월 29일 첫 전파를 탔습니다. 시원 중 하나를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점입니다.
망경대 올라 가는 길
이곳 삼거리에서 유의태약수터 까지 왕복 1.8km다녀 옴
유의태 약수터
류의태 약수´ 위장병·피부병에 효과 구형왕릉 뒤로 본격적인 산길이 열리고, 소나무 군락 사이에 얕은 계곡이 흐른다.
15분쯤 울창한 소나무 숲을 올라서면 임도와 합류, 임도를 따라 700m쯤 올라가면 나오는
류의태 약수 이정표를 보고 방향을 잡으면 된다. 풀숲에 덮인 수정궁터를 지나 5분쯤 올라가면 삼거리,
류의태 약수는 망경대 쪽으로 조금 더 가야 나온다.‘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의 스승 류의태가 약재를 달일 때
사용했다는 류의태 약수는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유의태 (1706호는 신연당(新淵堂) 또는 원학산인(猿鶴山人)이며, 자는 백원(伯源)이다. 경상남도 거창에서 출생하였다. 숙종 때에 어의(御醫)를 지냈으며, 1706년에 홍역 전문치료서인 《마진편(痲疹篇)》을 저술했다. 그곳에서 의술활동을 펼쳤다. 숙종 때는 두진(痘疹:천연두)·마진(痲疹:홍역) 등의 병이 크게 전염되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는데, 유이태는 이에 자극받아 《마진경험방(痲疹經驗方)》을 토대로 하여 예방·치료에 대한 의학전문서인 《마진편(痲疹篇)》을 펴냈다.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1931년 경상남도 진주(晉州)에서 박주헌(朴周憲)이 활자본으로 출간했다. 의술이 신기에 가깝다 하여 중국의 명의(名醫) 편작에 비유되었다. 그런 데, 왕산의 유의태에 관한 자료는 출생지 등 다른 데가 좀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망경대
찍히는 사람이나 찍는 사람이나..폼 하고는..
□ 망경대의 유래 □ 고려 공양왕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낸 농은 민안부(農隱 閔安富) 선생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한 두문동 72인의 유신(儒臣) 가운데 한분으로, 고려에 끝까지 충절을 지키기 위해 지리산 기슭인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선생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이곳 왕산(王山) 중턱 바위에 올라 송경(고려의 수도)을 향해 절을 하며 고려를 그리워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선생의 절개와 의리를 기리기 위해 이 바위를 망경대(望京臺)라 부르게 되었다.
웬 명태를 한마리씩 들고 계시나요?
좋아좋아 아주 좋아..여자가 카메라만 들이대면 그저 입이 귀에 붙어서..하하호호라..
왕산에서 보이는 필봉산
비를 맞으며 정상에 오르니 비가 멎고 날씨가 개인다
맞있게 드셔유~~
늘어진 소나무가있어 오랬만에 동심으로 돌아간 어른들..산이 있기에 즐거운건가..
힘껏 솟아있는 필봉
왕산에는 정상석이 두군 데 있다 둘중 어디가 진짜인지..
억새밭을 지나 왕산 정상에 서면 천왕봉 웅석봉이 지척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서 40분밖에 걸리지 않는 필봉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만약 왕산 정상에서 그대로 하산 하려면 망경대를 거쳐 구형왕릉으로 원점 회귀하면 된다. 왕산보다 75m 낮은 필봉산까지는 대체로 유순한 내리막이어서 부담이 없다.20분쯤 내려서면 공터가 나오고 완만한 오르막을 10분쯤 가면 필봉산 정상부 암릉이다. 우회해도 되지만 암릉을 타고 올라선 사람만이 더없이 훌륭한 조망을 만날 수 있다. 경호강을 따라 늘어선 산청군과 엄천강 건너 함양 휴천면 일대, 평화로운 산골마을과 다랑논, 대진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는 자동차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묘한 풍경을 연출한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정상석만 있으면 인증샷을 해야제
종일 지리산은 구름이 샘을 내는지..보여 주지 않네요.
여우재 이정표
필봉산 오름길
정상에 도착하니.. 먼저 오른 종남형이 뾰죽바위에 앉아서..뭘 생각하시는지..
필봉산 정상 ●여인 젖가슴 닮은 필봉산 정상 필봉산 정상부는 영락없이 여자 젖가슴을 닮았다. 선비의 고장 산청에선 절대 용납될 수 없던 표현 대신 붓끝을 닮았다 하여 필봉산이 되었고 문필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정상이 암릉인 것도 그렇지만 멀리서 보든 가까이서 보든 필봉산은 육산마냥 그리 풍만한 가슴은 아니다. 태양 아래 드러난 깡마른 돌덩이와 흙이 말라버린 젖무덤처럼 안쓰럽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황금빛 들판은 한없이 풍요롭다. 강구폭포 쪽으로 하산하는 길은 2.4㎞. 직삼각형 형태의 산이라 내려가는 길이 제법 가파르다. 반대 코스로 오르려면 땀깨나 흘릴듯. 비교적 유순한 왕산에서 시작해 발 아래 펼쳐진 산청의 뜰을 바라보며 필봉산 쪽으로 느긋하게 하산하는 것이 편하다.1 0분쯤 내려서면 쉬어가기 좋은 바위가 나온다. 조금 더 진행해 희미한 갈림길을 만나면 왼쪽으로 내려선다. 이어 철 난간이 설치된 암릉길이 나오고 바위를 지나면서 약간의 오름길이 나타난다. 고만고만한 길들이 이어지면서 암릉이 나오는데, 필봉산 정상 아래 전망대에서도 훤히 내려다보이던 곳이다. 좁은 간격으로 설치된 나무계단을 10분쯤 내려서면 삼거리, 이 지점에서 강구폭포까지는 1.7㎞ 더 내려가야 한다.
여우재에서 기다린다고 갔다 오라더니..후회할 뻔 했져?
필봉산길은 바위들도 많고 아기자기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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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사진 죽입니당...산부님 마지막 만화 넘 해요!!!ㅡㅡ (째려보는 거임 ㅋ)
우리들의(나만 빼고) 일상인데 뭐..그쵸...?근데..나원 참..참 나원..내가 봐도 심하긴 한 데..한번 웃을려고요^^.
올라갈때힘들었어도 돌아와사진을보니 헛된고생이아니네?
다음에는사랑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