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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황(丁熿)
[본관] 창원(昌原)
[생졸년] 1512년(중종 7)~1560년(명종 15) / 향년 48세
조선전기 지평, 병조정랑, 사인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遊軒). 풍저창부승(豊儲倉副丞) 정한우(丁旱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생서주부 정휘(丁暉)이고, 아버지는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 정세명(丁世名)이며, 어머니는 사의(司議) 김수형(金壽亨)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36년(중종 31)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지평·병조정랑·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1544년 정랑으로 있을 때 간관에 의하여 6품 미만의 자급(資級)으로 정5품직에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관작외람(官爵猥濫)의 논박을 받기도 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인종의 장사(葬事)를 서둘러 갈장(渴葬)으로 치르려고 하는 데 대하여 당시 모든 관원들이 그 기세에 눌려 침묵하고 있을 때 극력 반대하여 의례대로 장사를 거행하게 하였다.
1546년(명종 1) 검상을 거쳐 사인으로 있을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소윤 윤원형(尹元衡) 등의 외척이 권세를 잡자 그 일파인 이기(李芑)의 논계로 인하여 파직, 남원으로 돌아갔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곤양에 유배, 이듬해 거제로 이배되었고, 배소에서 죽었다.
천품이 정직하고 항상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입신의 근본을 삼았다. 1708년(숙종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유헌집』4권 3책과 배소에서 지은『부훤록(負暄錄)』·『장행통고(壯行通考)』각 10여권이 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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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국역문첨록
■ 정황[丁熿]의 신도비명(神道碑銘) - 권상하(權尙夏)
을사년(乙巳年, 1545, 명종 즉위년)의 사화(士禍) 때에 사인(舍人) 유헌(游軒) 정공(丁公, 정황. 유헌은 그의 호임)이 권 충정[權忠定, 권벌(權撥). 충정은 시호], 이 회재[李晦齋, 이언적(李彦迪)] 등 제현(諸賢)과 함께 쫓겨나 절도(絶島)에서 몰(歿)하였는데, 선조(宣祖) 초기에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 이이(李珥)]이 차자(箚子)를 올려 설원 복작(雪寃復爵)할 것을 극력 요청하였다.
그리고 금상(今上, 숙종)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 12)에 남쪽 고을 선비들의 요청으로 공을 향사(享祀)하는 곳에 사액(賜額)하였고, 그 후에는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임금께 아뢰어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추증하였으며, 또 상국(相國) 이유(李濡)가 청하여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가증(加贈)하고 충간(忠簡)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국가의 융숭한 보답과 제공(諸公)의 표장(表章)이 참으로 지극하였다.
공의 현손(玄孫)인 정재흥(丁載興)이 공의 신도비(神道碑)를 아직 세우지 못하였다 하여 나에게 신도비문을 부탁하였는데, 이 일은 체모가 중대한 것이니 나같이 비루하고 용렬한 사람이 어찌 감히 이런 일을 담당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야사(野史)에서 공의 전(傳)을 보고 일찍이 분발 격앙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지금 이 일에 대해서 또한 어찌 끝까지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황(熿)이요, 자(字)는 계회(季晦)인데, 본관은 창원(昌原) 사람이다. 원조(遠祖)인 정광순(丁光純)은 신라(新羅)의 대상(大相)이고, 7대조인 정연방(丁衍邦)이 고려(高麗) 때 문하 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이능간(李凌幹)의 딸에게 장가들어 비로소 남원(南原)에서 살게 되었다.
증조(曾祖)는 정한우(丁旱雨)인데, 효행(孝行)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풍저창 부승(豐儲倉副丞)을 지냈고, 조부(祖父)는 정휘(丁暉)인데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를 지냈고, 선고(先考)는 휘(諱)가 세명(世明)인데 사산 감역(四山監役)을 지냈다.
선비(先妣) 김씨(金氏)는 사의(司議)를 지낸 김수형(金壽亨)의 딸이며 익평공(翼平公) 권남(權擥)의 외손녀가 되는데, 홍치(弘治) 임신년(壬申年, 1512, 중종 7년) 2월 1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백씨(伯氏)인 도사(都事) 정환(丁煥)에게 배웠는데, 학문이 날로 진취되자 백씨가 기뻐하여 아버지의 영전(靈前)에 그 사실을 고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536, 중종 31) 8월에 중종(中宗)이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제생(諸生)을 시험하여 친히 네 사람을 선발했는데, 공이 그 선발에 참여되어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배속되었다가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539, 중종 34)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3년상을 마치고는 박사(博士)ㆍ교검(校檢)을 거쳐 예조 좌랑(禮曹佐郞)ㆍ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하고 대각(臺閣)에 들어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으며, 그 사이에 병조(兵曹)와 형조(刑曹)의 정랑(正郞)과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 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었다.
이때 중종(中宗)이 승하(昇遐)하였는데, 명종(明宗)이 대군(大君)으로서 병이 들었으므로, 인종(仁宗)이 자전(慈殿)의 분부를 받들어 세속의 금기(禁忌)에 따라 빈전(殯殿)의 궤식(饋食)을 중지하였다. 그러자 대신(大臣)들은 그 처사가 잘못된 줄 알면서도 그대로 순응하였는데, 공이 홀로 임금에게 간쟁(諫爭)하기를,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시온데, 어찌 이 일이 매우 잘못된 것임을 모르시고서 구차하게 자전의 분부를 따르신다는 말입니까? 신은 결코 그 일이 불가한 줄로 압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정중한 기색으로 공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때 임금께서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간인(姦人)이 위험한 말을 선동(煽動)하여 자전(慈殿)을 요동시키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정랑(正郞) 이중열(李中悅)이 공에게 말하기를, “형이 아들 없이 죽으면 아우가 그 계통을 잇는 것은 고금의 공통적인 도리이므로, 만세(萬歲) 뒤에는 천명(天命)이 마땅히 돌아갈 곳이 있는데1), 화(禍)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위험한 말을 만들어 내니, 이는 나라가 어지러울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마침내 그 사람과 절교(絶交)하여 버렸는데, 공이 사화(士禍)에 걸리게 된 것은 실로 이 일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중종(中宗)의 능호(陵號)에 대해서 헌릉(獻陵)의 고사(故事)를 끌어대어 ‘희(禧)’ 자(字)를 인습하려 하자, 공이 아뢰기를, “헌릉의 일은 본받을 수 없습니다. 높은 이는 낮은 이를 통괄할 수 있으나, 낮은 이는 높은 이를 끌어올 수 없습니다.2)”라고 하고서, 누차 아뢰어 극력 요청하여 윤허를 얻었다.
졸곡(卒哭)을 마친 뒤에 임금이 예(禮)를 준행함이 더욱 신중하여 임금의 건강이 날로 악화되므로, 신하들이 강계(薑桂)를 들도록 권하고 뜰에 서서 울며 빌었으나, 임금은 더욱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외척(外戚)을 시켜 대내(大內)에 들어가 간곡히 권면하게 해서 만분의 일이나마 임금의 마음을 돌리도록 꾀하려는 자가 있으므로, 공이 말하기를, “종실(宗室)의 원로(元老)나 두세 대신이 그 일을 하여도 안 될 것이 없는데, 도리어 왕위를 계승하는 때에 외척의 힘을 빌린다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의정부(議政府)에서 끝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위독함에 이르러서는 공이 위박(危迫)한 심정을 감당하지 못하여, 약원(藥院)에 들어가 친히 탕제(湯劑)를 살피기를 청하였는데, 관례상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므로, 공이 말하기를, “옛날에 허(許)나라 세자(世子) 지(止)는 약을 먼저 맛보지 않고 임금에게 올렸다가 결국 임금이 죽었는데, ≪춘추(春秋)≫에서 바로 그가 임금을 시해(弑害)했다고 썼소. 더구나 오늘날에 우리 임금의 병환을 의관(醫官)에게 맡기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545, 인종 원년) 7월에 임금이 승하(昇遐)하자, 문정 왕후(文定王后)가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바로 그 다음달에 서둘러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 중에 감히 이 일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공이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서 항소(抗疏)하여 말하기를, “제후(諸侯)의 장례는 본디 정해진 제도가 있으니, 지금 아무 까닭 없이 장례를 서둘러 급하게 치러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으나 아무런 회답이 없자, 학사(學士) 윤결(尹潔)이 이어 상소하기를, “대행왕(大行王)의 신하는 오직 정황(丁熿) 한 사람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뒤에 윤결과 이중열이 모두 화를 면치 못하였다. 이윽고 공은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으로 사인(舍人)에 올라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였는데, 그 후 얼마 안 되어 문정 왕후가 충순당(忠順堂)에 나와 3대신(三大臣, 윤임(尹任)ㆍ유관(柳灌)ㆍ유인숙(柳仁淑))을 논사(論死)하고 한 시대의 어진 공경(公卿)들을 모조리 찬축(竄逐)하였으며, 공도 마침내 파직되어 남원(南原)으로 돌아갔다.
정미년(丁未年, 1547, 명종 2) 9월에 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 사건을 고변(告變)함으로써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 송 선생(宋先生) 이하가 사사(賜死)되고 나머지는 모두 유배당했는데, 이때 공은 처음에 곤양(昆陽)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에 거제(巨濟)로 이배(移配)되자, 사람들이 모두 사사(賜死)의 명이 머잖아 곧 이르리라고 하였으나, 공은 태연하게 대처하면서 오직 경사(經史)만을 스스로 즐기었다.
그러다가 경신년(庚申年, 1560, 명종 15) 6월 7일에 졸(卒)하니, 향년 49세였다. 고향으로 반구(返柩)하여 10월에 남원부(南原府)의 북쪽 원당산(元堂山)에 있는 선영(先塋) 아래에 장사지냈는데, 그로부터 33년 뒤에 영인(令人) 이씨(李氏)와 함께 먼저의 묘소보다 조금 뒤쪽인 신향(辛向)의 언덕에 합장(合葬)하였다.
공의 부인인 영인은 공정 대왕[恭靖大王, 정종(定宗)]의 4대손인 흥성 부수(興城副守) 이억년(李億年)의 딸인데, 공의 증직(贈職)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1남 정지(丁至)를 낳았는데, 현감(縣監)을 지냈다. 누차 군읍(郡邑)을 다스리면서 청렴하고 신중하여 부임하여 가는 곳마다 성적(聲績)이 있었다.
그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정두준(丁斗俊)은 선무랑(宣務郞)이고 정두걸(丁斗傑)은 일찍 죽었다. 딸은 첨정(僉正) 권백시(權伯時)에게 시집갔는데, 정유 왜란(丁酉倭亂) 때에 왜적을 만나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그 다음은 생원(生員) 임승후(林承厚)에게 시집갔다.
정두준의 아들은 정진(丁瑨)이고 딸은 강순(姜恂)에게 시집갔다. 정진의 아들은 정석후(丁錫後)이고, 딸은 김지백(金之白)에게 시집갔다. 정석후의 4남은 정재희(丁載熙)ㆍ정재화(丁載和)ㆍ정재흥(丁載興)ㆍ정재승(丁載昇)인데, 정재흥은 효행(孝行)으로 누차 도신(道臣)에게 천거를 받았다. 정재희의 아들은 정무(丁堥)이다.
정재흥의 큰아들은 정후(鄭垕)인데 정재화의 후사(後嗣)가 되었고, 다음은 정채(丁埰)이다. 정무의 1녀는 어리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정직하고 간중(簡重)하여 항상 효제 충신(孝悌忠信)을 입신(立身)의 근본으로 삼았는데, 일찍이 동당 이실(同堂異室)의 제도를 만들어 족당(族黨)들을 한데 모아 화목하게 살았다.
그리고 맏형수를 마치 어머니처럼 섬기어 봉록(俸祿)을 모두 맏형수에게로 돌려보냈다. 그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임금께서 특별히 칭찬하고 권장하였다. 공은 여러 가지 서책을 널리 보았으되, 그중에서도 ≪춘추(春秋)≫에 가장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언론을 할 때마다 매양 ≪춘추≫의 의리를 인용하였으며, 규암(圭菴, 송인수)과 깊이 친교(親交)하여 일을 논할 때에도 반드시 서로 뜻이 들어맞았다.
매양 조정에 큰 의논이 있을 때마다 온 조정 사람들이 그것을 결정하지 못하다가도 공의 말 한마디로 당장 결단되곤 하였으므로, 조야(朝野)가 모두 공을 의지하여 중히 여겼다. 윤임(尹任)이 일찍이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을 때 공이 동료들과 그를 논박하였는데, 공이 마침 휴가 중에 있었으므로, 완준(完準)을 기다리지 않고 정계(停啓)하였다.
이날 규암(圭菴)이 퇴청한 즉시 공을 찾아와 말하기를, “오늘의 정계는 끝내 임금 한 분을 위한 계책이었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소.”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주상(主上)은 일국(一國)의 신민(臣民)들이 다 같이 우러러 받드는 바인데,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규암이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545, 명종 즉위년)에는 윤원형(尹元衡)이 윤춘년(尹春年)을 밤중에 은밀히 공에게 보내어 화복(禍福)으로 유혹하면서 한번 만나주기를 간곡히 요구하였으나, 공이 끝내 응하지 않았다. 공이 도중(島中)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도 어떤 사람이 윤원형의 지시를 받고 찾아와 은근한 정을 펴면서, 공의 말 한마디를 얻어 가지고 돌아가 윤원형에게 보고하도록 해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공은 죽기로써 스스로 맹세하기를, “조석(朝夕)간에 어명(御命)이 내리기를 기다릴 뿐인데, 어찌 감히 서로 누(累)를 끼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공의 마음가짐이 이렇게 확고하였다. 공은 비록 유배 중에 있을 때에도 왕실(王室)을 걱정하여 차마 무관심하지 못한 나머지, 마침내 소(疏)를 기초(起草)해서 시사(時事)를 극론하였는데, 남명(南溟) 조공(曺公, 조식(曺植))이 가서 보고 극력 저지함으로써 그 소를 올리지 않고 말았다.
문집(文集) 2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또 일찍이 ≪장행통고(將行通考)≫와 ≪부훤록(負暄錄)≫ 각 10여 권씩을 편집했는데, 이윽고 말하기를, “이것은 공부를 낭비하는 것이니, 성현(聖賢)의 학문에 잠심(潛心)하여 오로지 본원(本原)의 공부에 힘쓰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대체로 공은 실공(實工)이 이미 깊어져서 대의(大義)를 환히 알았기 때문에 변고(變故)를 만나서도 자신의 지조를 잃지 않았으니, 비록 옛날에 이른바 은산 철벽3)(銀山鐵壁)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 견고하겠는가? 전(傳,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치 않나니, 강하도다, 교함이여.[至死不變强哉矯]”라고 하였는데, 공 같은 이는 참으로 군자(君子)라고 이를 만하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인종과 명종 무렵에 국운이 좋지 못하여, 간신이 정권을 훔침으로써 올바른 선비들이 어육(魚肉)을 당했는데, 이때 오직 규암 선생이 앙화(殃禍)를 가장 혹독히 받았네. 우리 정공(丁公) 같은 이는 규암과 덕을 같이하여, 정색(正色)하고서 조정에 기절을 떨쳤으니, 가을 하늘의 한 마리 독수리4)였네.
그래서 인망이 날로 높아지고 조정의 고관들과 화목했는데, 당시의 소인배가 음험한 자를 의탁하여, 흉악하고 사특한 말을 날조하므로, 공이 즉시 그를 절교하여 버렸네. 그러나 그의 우두머리가 오히려 공을 회유하고자 하여, 누차 자기 진심을 토로해서 유혹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했으나, 공은 더욱 바름을 굳게 잡아 뜻을 굽히거나 빼앗기지 않았네.
그러다가 정언각의 고변(告變)이 있자 갑자기 앙화가 강물 터지듯 하여, 머나먼 섬에 유배되었으나, 곧 죽어도 뜻이 더욱 확고했으니, 곤륜산(崑崙山)에 불이 나도 옥(玉)만은 타지 않았도다. 천리(天理)는 꼭 회복되는 것이라 어두운 세상이 다시 밝아지니, 성조(聖朝)께서 공을 포숭(褒崇)하시고 큰선비가 공을 대서 특필(大書特筆)하였네. 울창한 묘역이 원당산(元堂山) 기슭에 있는데, 비석에 이 명(銘)을 새기어 먼 후세에 밝게 보이노라.
[각주]
1) 이 말은 곧 인종(仁宗)이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아우인 명종(明宗)이 당연히 왕위를 잇게 될 것이라는 뜻인데, 여기에서 ‘만세(萬
歳) 뒤’라는 말은 곧 현재 임금인 인종이 죽은 뒤를 암시하는 것임.
2) 헌릉(獻陵)의 고사(故事)란 곧 태종(太宗)의 왕비(王妃)인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능이 헌릉이었는데, 뒤에 태종이 죽자 그의 능호
도 그냥 헌릉으로 호칭했던 일을 말함. 그런데 중종(中宗)이 승하했을 때 역시 중종보다 먼저 죽은 그의 계비(繼妃) 장경 왕후(章敬王
后)의 능호가 희릉(禧陵)이었으므로, 이때 조정에서 중종의 능호도 희릉으로 하려고 했던 것임. 이에 정황은 지위가 낮은 아내가 지위가
높은 남편을 따를 수는 있으나 남편이 아내를 따를 수는 없다는 뜻으로 반대한 것임.
3) 은산 철벽(銀山鐵壁) : 은산(銀山)은 중국 호광성(湖廣省) 무창부(武昌府)에 있는 산으로, 송대(宋代)에 소식(蘇軾)이 이중람(李仲覽)
과 함께 이 산에 있는 은산사(銀山寺)를 지나다가 절벽에 ‘철벽(鐵壁)’이라는 두 글자를 썼다고 함.[≪연감유함(淵鑑類函)≫ 제353권
민처부(居處部) 14 불사(佛寺)]
4) 이는 뛰어난 인물을 비유하는 말임. 후한(後漢) 때 공융(孔融)이 예형(禰衡)을 천거(薦擧)한 말에, “사나운 새[鷙鳥] 백 마리가 독수리
[鶚] 한 마리만 못하다. 예형을 조정에 벼슬하게 한다면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한 글에서 인용한 말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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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四十八 / 乙巳以後罹禍人
정황(丁熿) 碑銘 - 權尙夏.
乙巳之禍, 舍人游軒丁公與權忠定、李晦齋諸賢同被竄, 遂歿於絶島。 宣廟初, 栗谷李先生上箚, 力請雪冤復爵。 今上丙寅, 因南鄕章甫之請, 宣額公俎豆之所。 其後閔尙書鎭厚白于上, 贈弘文館副提學; 李相國濡請, 加贈宗伯, 易名忠簡。 國家之崇報、諸公之表章, 至矣盡矣!
公之玄孫載興以神道尙闕顯刻, 屬筆於余。 玆事體重, 顧余陋劣, 何敢當 何敢當 然余於野史閱公之傳, 未嘗不傷痛激仰, 則今於斯役, 亦何可終辭也。
謹按公諱熿, 字季晦, 昌原人。 遠祖光純, 爲新羅大相。 七代祖衍邦, 娶高麗門下侍中李凌幹女, 始居南原。 曾祖諱旱雨, 以孝行薦于朝, 官豐儲倉副丞: 祖諱暉, 典牲署主簿; 考諱世明, 四山監役。 妣金氏, 司議壽亨之女, 權翼平公擥之外孫, 以弘治壬申二月十三日生公。
年十三而孤, 從伯氏都事煥學, 學日進, 伯氏喜, 告于其考几筵。 丙申八月, 中廟試諸生于慶會樓下, 親拔四人。 公與其選, 隷承文院副正字, 陞著作。 己亥, 丁內艱, 制終, 由博士、校檢, 歷禮曹佐郞、成均館典籍, 入臺閣爲司諫院正言、司憲府持平。 間爲兵・刑曹正郞、校書館校理、兼春秋館記注官。 時中廟昇遐, 明廟以大君遘疾, 仁廟承慈旨, 以俗忌輟殯殿饋食。 大臣迎合, 公獨爭之於上曰: “聖學高明, 豈不知謬戾之甚 而且順慈旨, 臣決知其不可。” 上爲之改容。 時上無嗣, 奸人煽動危言, 以㨔東朝, 人莫不惴惴。 一日, 正郞李中悅謂公曰: “兄亡弟及, 古今通義。 萬歲之後, 天命有歸, 而有人樂禍, 做出傾危之言, 此亂之兆也。” 公聞而大驚, 遂絶其人。 公之遘禍, 實萌於此。
中廟陵號, 引獻陵故事, 仍襲 “禧” 字, 公曰: “獻陵事, 不可法。 尊可統卑, 而卑不可援尊。” 屢啓力請, 得允。 旣卒哭, 上之率禮益謹, 日就澌頓。 群臣勸進薑桂, 庭立泣禱, 上猶堅拒。 有欲令外戚入內敦勉以冀萬一者, 公曰: “宗室、耆舊二三大臣, 何所不可, 而返借外戚於正始之日, 豈不誤哉?” 政府終不從。 及上不豫, 公不勝危迫之忱, 請入藥院親檢湯劑, 有以例不可者。 公曰: “許世子止不嘗藥, 《春秋》書以弑君。 況於今日, 委之醫官可乎”
乙巳七月, 仙馭賓天, 文定垂簾, 欲以翌月葬, 諸臣莫敢言。 公以兵曹正郞抗疏曰: “諸侯自有定制, 今不可無故渴葬。” 不報。 尹學士潔繼疏曰: “大行之臣, 惟丁熿一人而已。” 後潔與中悅皆不免於及。 俄以議政府檢詳陞舍人、兼編修官。 未幾, 文定御忠順堂, 三大臣, 論死; 一時賢公卿, 竄逐殆盡。 公遂罷職, 還南原。 丁未九月, 鄭彦慤以良才壁書上變, 圭菴宋先生以下賜死, 餘皆編配。 公初謫昆陽, 明年移巨濟。 人皆謂後命朝夕將至, 公處之晏然, 惟以經史自娛。 庚申六月七日卒, 享年四十九。 返櫬故鄕, 十月, 葬于府北元堂山先兆下。 後三十三年, 與令人李氏合窆于稍後向辛之原。 令人, 恭靖大王四代孫興城副守億年女, 從贈貞夫人。 生一男曰至, 縣監, 屢典郡邑, 淸謹有聲績。 有二子: 斗俊, 宣務郞: 斗傑, 早亡。 女適僉正權伯時, 丁酉之亂, 遇賊投水死: 次適生員林承厚。 斗俊男瑨, 女姜恂。 瑨男錫後, 女金之白。 錫後四男: 載熙, 載和, 載興, 載昇。 載興以孝行屢登道臣薦剡。 載熙男
。 載興男垕, 爲載和後; 次埰、
。 一幼。 餘不盡錄。
公天資正直簡重, 常以孝悌忠信爲立身之本。 嘗作同堂異室之制, 團聚族黨而居之。 事丘嫂如母, 俸祿悉以歸之。 事聞, 上特加嘉奬。 博觀群書, 最用力於《麟經》, 立朝言論, 動引其義。 與圭菴爲深交, 遇事必與之契合。 每朝有大議, 盈庭不決, 待公一言而立斷, 朝野倚重。 尹任嘗除秋官長, 公與同僚論之, 公適在告, 不待完準而停啓。 圭菴仕罷, 卽訪公曰: “今日停啓終未免爲上計也。” 公曰: “主上, 一國臣民所共仰戴。 何爲出此言也?” 圭菴慙謝。 乙巳, 尹元衡使尹春年乘夜潛來, 誘以禍福, 懇求一見。 公終不應。 其在島中, 又有人授元衡指, 致其慇懃, 要得一言以歸報。 公以死自誓曰: “朝夕待命, 豈敢相累?” 其處心之貞確如此。 公雖在放逐中, 係戀王室, 不忍恝視, 遂草疏極論時事, 南冥曺公往見力止, 不果上。 有文集二卷, 行于世。 又嘗輯《壯行通考》、《負暄錄》各十餘卷。 旣而曰: “此枉費工夫, 不若潛心聖賢之學, 專用力於本原。” 蓋公實工旣深, 洞見大義, 故遭變事而不失其所操, 雖古所謂銀山鐵壁, 何以加此 傳曰: “至死不變, 强哉! 矯!” 若公者, 眞可謂君子人也。 銘曰:
仁、明之際, 邦運不淑。 奸臣竊柄, 正士魚肉。 曰惟圭菴, 受禍最酷。 有若丁公, 曁圭同德。 正色揚廷, 秋天一鶚。 士望日峨, 朝右肅穆。 惟時細人, 幽陰是托。 捏造凶慝, 公卽斥絶。 然厥渠魁, 尙欲緩頰。 送款頻煩, 且誘且脅。 公愈秉正, 不撓不奪。 慤書之上, 駭機河決。 流移絶海, 九死冞礭。 火炎崑岡, 不燼惟玉。 皓天必復, 幽蔀乃晳。 聖朝褒崇, 儒宗特筆。 鬱鬱佳城, 元堂之麓。 刻銘桓楹, 昭視千億。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