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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가 후원하고 재미수필문학회에서 주관한
제 7회 재미수필 신인상
오렌지 글사랑모임 강수영 회원 가작 당선작 '그 아버지에 그 딸'
외 2편을 소개합니다.
그 아버지에 그 딸 / 강수영
9월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백투스쿨’ 쇼핑으로 부산하다. 올해 우리 집은 한가하다. 고등학생인 딸아이의 준비물은 펜과 연필 몇 자루, 노트, 파일 바인더 뿐 이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학교 시작을 앞둔 며칠은 A4용지 가득 적힌 준비물을 사느라 정신없었다.
학년말이면 아이는 다 쓰지 못한 학용품들을 고스란히 집으로 가져왔고, 또다시 9월이 되면 같은 품목을 사러 문구점에 갔다. 왜 해마다 같은 물건들을 새로 사야했을까. 어린 아이들이 학교생활에 흥미를 갖도록 하려는 방편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매년 미국 전역에서 문구점 뿐 아니라 백화점과 소매상들까지 백투스쿨 쇼핑 광고를 해대며 새 물건을 사라고 부추기는 행태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5년 전 엘에이로 이사할 때 쓰지 않고 남은 학용품들을 버리지 않고 가져왔다. 당시 중학교를 들어갈 아이에게 새로 사기보다는 있는 것을 쓰라고 권했다. 그 후 5년 동안 볼펜이나 연필을 새로 사 본 적이 없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집안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볼펜과 연필을 찾아 정리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 잉크가 굳어버려 못 쓰는 펜들을 솎아내고 연필은 하나하나 새로 깎았다. 모아보니 큰 필통 하나 가득이다. 당분간 연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새 학기마다 교과서를 싸는 일은 아버지와 나의 정해진 행사였다. 달력의 뒷면을 사용해서 새 교과서를 싼 뒤 아버지는 하얀 표지위에 검정 싸인펜으로 국어, 수학, 사회 등 교과목의 이름을 적어 넣으셨다. 한지에 먹을 갈아 붓으로 쓴 듯 아버지의 유려한 필체가 하얀 바탕위에 도드라졌다. 하지만 나는 늘 문구점에서 파는 색색가지 책표지로 싼 친구들의 교과서가 부러웠다.
아버지는 구두쇠였다. 돈 버는 재주는 없으셨지만 절약정신만은 투철하셨다. 특별한 이유 없이 집안에 불을 켜놓으면 안되었다. 화장실에는 화장지 대신 철지난 일력을 적당한 크기로 자른 종이더미가 놓여있었다.
비 오는 날이 싫었다. 등교 때 아무렇게나 놓인 우산들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십중팔구 어딘가 고장나있거나 찢어진 것들이었다. 우산은 비를 막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그게 아버지의 생활철학이었다. 빨강우산 파란우산들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걸어가면 찢어진 내 우산은 헐떡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가끔은 푸른 비닐로 대충 얽어 만든 일회용 우산을 들고 가야할 때도 있었다. 남들은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우산이지만 아버지에게는 몇 번이고 더 쓸 수 있는 멀쩡한 물건이었다. 빗방울이 우산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퉁퉁 크게 들렸고 한걸음 옮길 때마다 비닐이 아래위로 움직이면서 철퍽 소리를 냈다. 퉁퉁, 철퍽. 비닐우산이 내 걸음걸이에 맞춰 내는 소리는 유년시절 이유 없는 수치심을 담아낸 불협화음이었다.
이번 여름 한국에서는 폭염에 독거노인들이 에어컨도 없이 지내다가 돌아가신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날씨 때문에 죽어가는 소외된 인생들이 안타까웠다. 그런데 우연히 오빠와 통화를 하다가 아버지가 많이 쇠약해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폭염에 에어컨도 안틀고 버티시다가 기력이 떨어져서 제대로 운신도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나. 안 그래도 치매기가 있어서 건강이 안 좋으신 분이 도대체 왜 그러신 걸까. 답답한 마음에 시대에 뒤떨어진 어이없는 아버지의 절약정신에 대해 오빠와 한참 성토를 했다. 폭염사망이 남의 집 일 같지 않았다.
일전에 안부전화를 드렸을 때 엄마는 아버지 건강에 대해 아무 말도 없으셨다. 오빠와 통화를 끝내고 엄마에게 전화했다. 왜 그러셨는지 물어보니, 에어컨 안틀어도 집이 시원하다고 눙치신다. 꼭 이럴 때만 부창부수다. 전기 값 몇 푼 아끼느라 큰일 당하실지 모른다, 나이를 생각하시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어린 시절 내 우산을 갖고 싶었다. 울긋불긋 나비와 꽃이 그려져 있으면 좋겠지만 아무 무늬가 없어도 괜찮았다. 무조건 새 우산이면 되었다. 빨강우산 파란우산이 걸어가는 골목길에 나도 새 우산을 쓰고 끼어들고 싶었다. 그래서 딸아이에게 우산만큼은 좋은 것을 사준다. 뿐인가. 화장실에는 매번 질 좋은 화장지를 사다 걸었다.
그런데 참 기가 막힌다. 자동연필깎이에 수 십 개의 연필을 드르륵 드르륵 돌리면서 나는 딸아이에게 왜 스마트폰을 살 필요가 없는지 일장 설교를 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스마트폰을 보고 아이도 하나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얼마 전부터 조르고 있지만 나는 내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전화는 전화일 뿐 가는 곳마다 인터넷접속기능을 달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논리였다. 접속이 필요하면 컴퓨터를 사용하면 될 뿐이다. 남편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딸아이는 자기 전화는 ‘덤 폰(dumb phone)’이라며 투덜거린다.
아끼라는 아버지의 호통이 지긋지긋 했다. 아버지 세대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모르는 사이 나는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무작정 아끼려고 드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과도한 소비를 부추기는 분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보면 자칫 휩쓸려가기 십상이다. 미국 생활 10여 년, 그나마 중심을 잡고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대를 잇는 아버지의 절약정신 덕인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아끼셨기 때문에 내 유년의 갈망이 부족하나마 채워졌을지 모른다. 찢어졌어도 비를 피할 수 있었던 그 우산 덕택에 나의 오늘이 있는 것이다.
아직도 한 여름처럼 뜨거운 남가주의 9월이다. 이 계절이 지나면 겨울이다. 이번 겨울 한파에 한국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독거노인들이 고생을 할까. 부쩍 약해지신 아버지도 올 겨울 건강히 보내셔야 할 텐데 걱정이다. 아까부터 켜 있던 빈 방의 불을 끈다. 아버지가 ‘불 꺼라!’ 하고 소리치던 목소리가 어둔 방안을 쟁쟁하게 울린다.
강 수영(Sooyoung Kang)
2286 Faust Ave.
Long Beach, CA 90815
(716)553-5443
수상 소감
몇 달 전 우연히 시작한 수필쓰기, 즐겁다.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보기도 하고 꿈의 이미지들을 조각조각 이어 맞추어 보기도 한다. 평범한 문장들이 하나씩 모여 삶의 웅숭깊은 의미를 만들어 간다. 이제 막 재미부친 내 글쓰기 놀이에 ‘수필가’라는 이름을 달아준 재미수필문학가협회에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1년 동안 그들의 글과 이야기 속에서 인생의 잔잔한 여운을 느끼게 해주었던 오렌지글사랑모임 회원 한분 한분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들은 작가로서의 열정을 새삼 일깨워준 숨은 조력자들이다. 쉼 없이 열심히 글을 써서 보답하겠다.
어떤 오찬(午餐)
거기서 밥을 먹게 될 줄은 몰랐다. 문학모임이라 찾아 갔는데 예상치 못한 오찬이 벌어졌다. 회원들이 음식을 직접 만들어 가져 왔다고 한다.
잠시 수런거리며 왔다 갔다 부산하더니 밥과 반찬 등이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식사하세요. 밥 먹어. 사람들 사이로 말이 오갔다. 우리는 각자 음식이 담긴 접시 하나씩을 들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낮은 목소리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 반찬 맛있다, 누가 만든 거지? 응, 내가… 그래? 참 맛있네, 어떻게 만들었어? 식사 시간은 티브이에 소개되어도 좋을 ‘우리 집 간단요리법’ 코너로 슬쩍 바뀐다. 생 부추에 백도를 썰어 넣고 석류홍초로 드레싱을 만들어 뿌린 샐러드, 흔한 호박대신에 가지를 어슷 썰어 밀가루에 무치고 달걀을 풀어 지져낸 가지부침, 빨갛게 고추장으로 볶은 멸치. 김치와 불고기도 빠질 수 없다. 울긋불긋 색색이 고운 한식이 푸짐했다.
첫 날이라 어색했다. 그걸 눈치 챘는지 누군가 말을 걸어주었다. 늘 이렇게 집에서 해온 음식을 먹는 건 아니야. 오늘은 특별히 준비한 것들이지. 수개월간 진행된 시 수업이 끝난 날이거든. 책걸이 파티라고 할까. 자긴 운이 좋네. 오자마자 파티를 열어주니. 주위에 앉은 사람들이 그래 맞아, 맞아 하며 까르르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었다.
회원 대부분은 여자들 이었다. 그녀들은 나보다 한 세대 정도 앞서 있었다. 어머니나 이모뻘 이었다.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고 뽀얗게 화장한 얼굴에 귀걸이 목걸이를 달고 있었다. 분홍, 연두, 색색가지 옷들을 차려입고 있으니 한가위 잔치에 온 듯 하다.
그들은 실제 나이보다 적어도 10살 이상은 어려 보였다. 아마도 그들이 문학소녀 같은 감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문학의 효력은 가끔 이렇게 엉뚱한 방식으로도 확인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잔잔한 주름이 얼굴에 퍼져있다. 그 주름은 그들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젊은 시절 열심히 일하고 아이들 모두 어엿하게 키워 놓은 그들이었다. 할머니 소리를 들으면서도 예쁘게 보이기 위해 옷을 고르고 화장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은퇴 후 삶도 가치가 있다는 무언의 가르침이 전해져온다.
그날은 12주간 진행된 시 강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함께 읽은 시 한편에서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나 희덕 시인은 속리산을 오르며 사색한다. 일상의 한 풍경인 산행에서 “산다는 일은 /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통찰을 얻은 시인의 감성에 그녀들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시를 많이 읽진 않았어도 산에 오르는 것보다 하루하루가 더 가파르다는 삶의 진실을 벌써부터 터득해 버렸으리라. 그녀들은 시를 쓰지 않아도 이미 시인이었다.
문득 그녀들이 미국 땅에서 각자 어떤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낯선 타국에 와서 고향의 기억을 가슴에 묻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을 그녀들. 남편을 도와 밤늦게 까지 가게를 돌보았을 테지. 새벽같이 일어나 장을 봐서 샌드위치나 김밥을 만들어 팔았을지도 모른다. 몰래 신문배달을 했거나 공장에 나가 기계를 돌려야 했을 거다. 일터에서 돌아오면 밥을 지었을 테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것이 몇 십 년이라는 세월이 되어버린 타향살이다. 그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그들의 마음속에는 시가 자라고 이야기가 숨쉬고 있었다.
어느 날 내게도 시가 찾아왔다. 낯선 땅에서 하루하루 “밥을 끓여 먹고” 사는 일이 녹록치 않음을 나름 터득해가고 있던 때였다. 학생으로, 선생으로 학교에서 보낸 20여년의 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남가주로 와서 살기 시작한 지 3년만이었다. 학문적 성취감과 성공도 중요했지만 가족이 서로 흩어지지 않고 함께 사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행복이었다. 유학생활 10년간 숨 고를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아온 내 삶도 돌아보고 싶었다.
남편과 아이가 서둘러 빠져나간 텅 빈 집이 시간이 지날수록 낯설어졌다. 내가 했던 선택들, 내가 ‘가지 않은 길’들이 떠올랐다. 회한이 밀려들었다. 불혹이 지나자 시가 읽혔다. 욕조에 꼬물대는 개미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없애버려도 자꾸만 나타나는 개미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억에 대한 시를 썼다. 시가 읽히고 시를 쓰고 싶은 욕구가 후회와 아쉬움, 안타까움으로 출렁이던 혼자 남은 시간들을 채워갔다. 시는 내 삶의 비상구였다.
글을 본격적으로 써보겠다고 찾아간 모임에서 그녀들을 만났다. 그날의 오찬은 글쓰기가 밥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선 밥 짓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글짓기’라고 하나 보다.
가족들을 위해 쌀을 씻어 밥을 짓고, 야채를 다듬어 갖은 양념으로 나물을 무치고 고기를 재고, 철마다 김치를 담그는 그녀들의 손끝에서 시가 나온다. 그들의 소소한 일상사, 아련한 추억, 가슴 아팠던 사연들이 수필이 된다. 뒷마당 여기저기 알을 낳아놓은 닭, 어린 시절 갖고 싶었던 새 운동화, 제각각 모양도 이름도 다른 밤고구마, 아파트 욕조에서 메주를 띠워 만든 된장, 남편과의 각별한 인연 등이 수필이라는 형식에 담겨져 알알이 영글어간다.
그녀들이 자기들끼리 속삭이다가 깔깔댄다. 워크샵에 익명으로 제출된 수필을 읽다가는 훌쩍인다. 글의 대목마다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추임새를 넣는다. 문장구조니 맞춤법이니 문단구성이니 따위의 수필론이 늘어지면 시침 뚝 떼고 모르쇠를 하기도 한다. 그들의 글은 문법, 주술관계, 띄어쓰기나 맞춤법을 종종 무시한다. 원칙과 형식의 ‘무법천지’와도 같은 그들의 글에는 그러나, 생생한 삶이 있었다. 일터에서, 뒷마당에서, 운전하는 도로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그들의 향수어린 일상이 담긴다. 그녀들은 뚝딱 밥 짓듯이 시를 읽고 글을 쓴다.
정성스럽고 화려했던 첫날의 오찬은 아니어도 매번 모임 이후 점심을 함께 한다. 그녀들에게 밥과 글은 늘 함께 한다. 나는 오늘도 그녀들 사이에 앉아 밥숟가락을 입에 떠 넣으며 밥상 위로 오가는 속삭임에 귀 기울인다. 언젠가 그녀들의 이야기로 따스한 글 한 공기 지어 드리고 싶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언니는 이야기꾼이었다. 영화관에 다녀오는 날이면 초등학생이던 나를 붙들고 영화 줄거리를 이야기해주곤 했다. 이야기 중간 중간 언니는 마치 주인공이 된 듯 대사를 외우고 연기를 했다.
언니가 <라스트콘서트>라는 영화를 보고 온 날이었다. 백혈병에 걸린 주인공 스텔라가 된 양 언니의 머리가 점점 한쪽 어깨로 기울면서 툭, 하고 떨어질 때 나도 모르게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언니는 마지막 장면에서 사랑하는 연인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스텔라가 되었다.
몇 년이 지나 이 영화를 티브이로 볼 기회가 있었다. 한 장면 한 장면 언니가 얘기해 준 내용이 기억났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을 때 나는 미소를 지었다. 핏기를 잃고 죽어가면서도 행복해하던 스텔라의 얼굴에 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몸이 약했던 나는 유년시절 툭하면 누군가에게 업혀서 병원으로 실려 갔다. 쓰디쓴 가루약을 억지로 먹어야 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코피를 쏟아냈다. 학교는 간신히 수업일수를 채우기 위해 갔다. 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 그렇게 병치레를 할 때면 내 옆에는 엄마대신 언니가 있었다. 늦은 오후의 저문 햇살이 창가에 가까스로 걸려있던 어둑한 방에 누워 열에 들뜨거나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도 언니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언니는 간혹 소설을 쓴다면서 연애소설 따위를 원고지에 끄적였다. 다 쓰고 나면 내게 읽어보라고 주었다. 어린 내가 읽어도 언니의 소설은 유치했다.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뻔한 러브스토리가 자잘한 글씨로 원고지를 채웠다. 언니가 쓴 소설들의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게 넘겨주던 원고지뭉치의 감촉은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다. 네모난 칸이 빼곡하게 줄을 맞추어 그려진 원고지라는 종이에 한 글자씩 메워나가면 소설이 탄생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연애소설을 썼던 언니는 연애박사이기도 했다. 얼굴이 예뻐서 ‘미자’라는 아명(兒名)을 갖고 있던 언니는 중학생이었으면서도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사귀었다. 데이트를 하고 오면 그들과의 로맨스를 또 한편의 그럴듯한 연애소설처럼 내게 얘기해주었다.
어느 날 언니가 헬쓱한 얼굴로 들어왔다. 사귀던 남자와 헤어졌다고 했다. 며칠을 시름시름 앓더니 한 밤중에 일어나 구토를 했다. 당시 나는 사랑을 이해할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코흘리개 짝이 옆에 오는 것이 싫어 울어버렸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욕실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꺼이꺼이 눈물을 흘리던 언니의 뒷모습이 안타까웠다. 언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싶었지만 그 아픔은 언니 몫이어서 내가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함께 나눌 수 없었던 언니 몫의 아픔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언니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서 한쪽 다리를 못 썼다. 같이 외출하면 사람들은 흘낏 곁눈질을 하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그들을 째려봐주거나 남들 보란 듯이 언니에게 더 큰 소리로 떠들고 웃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나는 언니의 편이 되어주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언니에게 등을 돌려도 나는 언제나 언니의 옆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언니의 보디가드요, 대변자이자 수호천사가 되고 싶었다.
언니의 얼굴을 본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미국으로 떠나오기 직전 언니는 어떤 일로 나를 속였다. 언니를 신뢰할 수 없게 되니 마음이 닫혀 버렸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곳에서 남편과 단둘이 아이를 기르며 학업을 마쳐야 하는 하루하루가 힘겨웠다. 언니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보다 내 앞에 놓인 생을 다스려가는 일이 더 절실했다. 한번 돌아선 마음에 시간의 켜가 내려앉았다. 현재의 삶이 내리누르는 무게가 버거워 지난 시간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얼마 전 내 글을, 나의 ‘이야기’를 써보기로 결정하면서 삶의 궤적을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내 유년의 추억에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냈다. 기억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후미진 한 구석에 언니가 있었다. 기억 속 언니와 마주친 순간 글쓰기를 향한 나의 호기심과 동경은 언니의 ‘이야기’로부터 생겨났음을 깨달았다. 내 문학은 양 겨드랑이에 목발을 집고 그나마 성한 한쪽 발로 한걸음씩 땅을 디뎌가며 천천히 움직이는 언니를 이해하고 보듬어 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마지막에 비극적으로 죽거나 사랑하다 헤어지거나 상처를 입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니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언니에게 세상은 상실과 상처, 고통과 죽음의 모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스텔라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던 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야기는 언니의 힘든 생을 버티게 해준 힘이 아니었을까. 언니는 삶의 불가피하고 치명적인 상처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글쓰기를 시작하니 아득한 세월 저 편에서 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철없던 ‘미자’언니의 예쁘장한 얼굴이 나를 보고 웃는다. 언니가 해주었던 이야기들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기억의 더께를 들추고 속삭인다. 언니의 이야기들을 계속 이어나가 인생의 아픈 상처들을 글로 빚어내라고.
내일은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할 언니의 환한 얼굴이 보인다. 그동안 못했던 쌓인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언니와 나 사이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고 싶다. 이제 내가 언니를 위해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
첫댓글 기존 수필가들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수준 높은 글입니다.
강수영 선생님의 앞날에 문운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조앤 선생님, 부지런히 찾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히 올려놓을까 망설였는데...
졸작이라 부끄럽습니다만, 더 나은 글 쓰기 위해 회원님들의 질책과 조언, 기꺼이 달게 받겠습니다.
조엔 선생님, 늘 감사합니다.
좋은 글을 써서 회원들을 기쁘게 해 주신, 강수영 선생께도 감사와 함께 격려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