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 보다 친숙한 언어예술로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예술적 면모와 문학성이 확충을 위한 체계적 이론수립,
작품의 질적 상승을 위한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동안 수필은 많은 문학적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그에 따른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소재와 형식의 제한을 별도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못 인식하여 아무렇게나 써도 수필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므로 수정되어야 한다.
수필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견해가 범람하는 것은 도전정신에 치열하지 못하고, 이론적 무장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수필은 개인의 정서뿐 아니라 생활주변의 일화를 비롯하여 사회와 과학, 철학과 역사를 포함하여 종교와 정치를 화제로
수용하여 작품화 함을 용인하는, 포괄적 문학 장르가 되어야 한다.
수필의 제재는 다른 장르에 비해 다양하다. 그 이유는 수필창작의 모티브가 다른 장르와는 달리 다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수필창작의 모티브가 다른 장르에 비해 다양하다는 것은 특별한 제약 없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이것은 수필이 갖는 장점만은 아니다. 제재의 선택에 신중하지 않으면 작품의 질이 떨어질 수도 있다.
작품의 문학성은 사상을 대하는 작가의 안목에 따라 결정된다. 이를 위해 작가는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시간과 공간이라는 장애요소와 무관하게 대중에게 진한 감동을 전할 수 있다.
신중해야 할 것은 이 같은 포용력이 수필의 질적 향상에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냐는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적지않은 비판의 목소리가 일고 있다. 양에 만족하던 시대는 이미 끝나고, 지금은 질을 중요시하는 시대다.이것은 문학의 경우만 아니고, 사회의 일반적 성향이기도 하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수필이 다양한 제재를 수용하는 장르의 문학이라는 기존의 이론을 수필가 자신이 오해하고 이는 것이다.
다양한 제재를 수용하는 것은 모든 글이 수필의 범주 속에 속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시의 원래 뿌리라 할 수 있는 서정시는 궁극적으로 합일을 추구하는 문학의 한 갈래이고, 서사시와 극시를 원형적 모태로 하는 소설과 희곡은 갈등구조를 본령으로 하는 문학의 형태인데 비해, 수필은 그런 것을 문제 삼지 않고 수용하는 문학의 한 유형이지, 무엇을 어떻게 쓰든 소속이 불분명한 글은 모두 수필이라는 말은 아니다.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된 비정서적인 기사문까지 수필이라는 견해는 수정되어야 한다. 일부 수필가의 자기주장만이 옳다는 아집에서 벗어날 때 수필발전과 수필의 문은 활짝 열리며 꽃피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