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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9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Good Bye List’ - 5. (예수가 없는) 나
본문 : 마가복음 8장 34절(27~38절)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새번역>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책이 있다면 바로, ‘내가복음’이라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욕은 바로, ‘탐욕’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어떤 신보다 무서운 신은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사이비 종교나 어중이떠중이 같은 이단이 난리를 핀다고 해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존재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자신을 신으로 모신 존재들입니다. 때론 그리스도인들도 흔들리고,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혼란스러워지지만, 그들은 결코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 어떤 사이비 종교도, 이단도, 자신이라는 신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바로, ‘자신’이라는 신의 자리를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 드릴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은 환경과 학습을 통하여 ‘자아정체성’을 확립해 가면서 점점 ‘자신’이라는 성을 견고히 쌓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타적이고,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모습은 소위 인간적이지 못 하다고 말하면서,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먼저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참 인간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중심을, 주권과 주도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것도 모자라, 하나님께 내어드린다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너무도 어려운 일이 맞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결정인 것입니다. 내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정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순간은 결정 그 다음부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정한 후부터, 믿기로 결심한 후부터 찾아오게 되는 치열한 싸움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싸움입니다. 소위 ‘믿기’로 결정한 후부터는 매일 매일 너무도 아프고 괴롭고 짜증나는 작별이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내가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모든 방식을 180도 뒤집어야 하는 삶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 문을 넘기는 그나마 쉽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12제자들이 예수님을 3년간 따라 다녔던 시간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 아직 시작도 못한 모습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역에 서 있습니다. 이 지역은 헤롯 빌립이 로마 황제를 위해 만든 도시입니다. 그래서 도시의 이름을 빌립이 황제를 위해 만든 도시라는 의미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시의 가장 중앙에는 로마 황제를 위한 신전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스라엘 안에서 가장 로마화된 도시였고, 가장 세속적인 도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황제를 위한 신전만이 아니라 각종 우상의 신전이 우글거리는 도시였고, 이스라엘 내에 아테네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신전이 존재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리적으로도 헬몬산 아래 텔단, 세미르와 함께 지하수가 용출하여 상부 요단강을 이루어 갈릴리호수로 흘러가는 곳으로 가나안 땅에서 가장 물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곳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현지 로마인과 헬라인들이 휴양지처럼 이용하고, 이주하면서 번창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늘어난 로마인과 헬라인들에 의해 이 지역에는 고대 시리아 바알신을 섬겼던 신전들이 집중적으로 위치해 있었고, 또 다른 이방신인 고대 헬라 판(pan)신(神)의 흔적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곳으로 판신의 중요한 숭배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판신은 자연, 산과 수풀을 관장하는 신입니다. 그렇기에 성서지리학자 데이빗 패드필드목사는 가이샤라 빌립보는 고대 이방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도시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가이사랴 빌립보가 구약에서도 등장하는데, 구약 시대에는 바알갓(수 11:17; 12:7; 13:5)으로 불려 졌습니다. 사실 바알갓은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신으로서 행운의 신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많은 신과 우상들이 있던 지역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 많은 신전과 인간들의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기에 오늘 본문이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가복음 8장 29절A, 새번역>
사람들은 침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한다는 제자들의 말을 들으시고, 그렇다면 제자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계신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한 바퀴 돌아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역시 수제자인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가복음 8장 29절B, 공동번역>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그 대답에 가타부타 칭찬이나 다른 대답이 아닌 그저 엄중히 경고하시며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중요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 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마가복음 8장 31절, 공동번역>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복음’이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숨기셨지만,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에 대해서는 너무도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오늘 첫 번째로 묵상해야 할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도 ‘자기 부인’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이 땅에 알려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드러나는 것이 중요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셨고, 하나님의 계획에 온전한 순종을 이야기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생각과 뜻이 있다면, 마치 불순물처럼, 그것들이 걸림돌이 되기에, 온전한 순종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을 먼저 보여 주고 계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으시고,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부인하셨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첫 번째 묵상해야 하면서, 오늘 예수가 없는 ‘나’와 작별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자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가 가장 먼저 결심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도 사람의 생각과 방법으로 만들어가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있던 베드로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까지 심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가복음 8장 33절, 새번역>
그 곳이 가이사랴 빌립보이었기에 이 질책은 제자들에게 곱절이나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저 화려해 보이는 세상이 곧 나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그만큼 큰 충격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은 더더욱이나 공감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장 먼저 ‘자기 부인’의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의 기초가 바로 이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마가복음 8장 34절, 새번역>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분명히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없는 나와 작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나와, 말씀이 없는 나와,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지 못하는 나와, Good Bye해야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것이 기초이고, 시작이며, 출발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기 부인이 무엇인지 예수님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마가복음 8장 35절, 새번역>
이 구절을 통하여 두 번째로 묵상해야 할 부분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가 없는 나와의 작별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작별이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얻어야 하고, 목숨을 잃으려 하는 사람은 잃어야 마땅한 것이 세상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방법과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시며, 복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자신이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목숨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기 스스로 그 목숨을 구하려고 하여도, 그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자기 스스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노력이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리는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푸른 초장으로 나를 인도하실 목자 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는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내 목숨을 내 손이 아닌 하나님 손에 온전히 맡기는 자의 고백이 등장합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기록하고 있는 다윗은 지금 사실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니는 중입니다. 원수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죽이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오히려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원수들이 보란 듯이 진수성찬 상을 차려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삶으로 자신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힘에 의탁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음의 그늘 골짜기도, 원수들의 공격도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보살펴 주시기에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맡긴 자는, 하나님께 자신을 던진 자는, 예수가 없는 나와 작별한 이는 이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편 1절, 개역개정>
내가 나의 목자이니 늘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내 목숨을, 매일 매일 지키려 할수록 지치고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더 공허하고 답답하고 외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을 지경으로 자신을 몰아넣게 됩니다. 정말로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맡기는 순간, 하나님께 자신을 던지는 순간, 진짜 자유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푸른 초장으로, 쉴 만한 물가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어 보이지만, 나를 온전히 바꾸어 주심으로, 모든 것이 변하게 되는 역사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연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마가복음 8장 36~37절, 공동번역>
이 질문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어도 제 목숨을 잃어버리면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목숨을 무엇과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이 없으면 온 세상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세상 온갖 부귀영화도 ‘내’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 번째로 묵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심으로 이 질문을 던지시고 계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에는 숨겨진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바램처럼 온 세상을 얻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사탄도 혹시라도 예수님이 이런 마음을 가지셨지 않았을까 이렇게 유혹한 적이 있습니다.
또다시 악마는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고 말하였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마태복음 4장 8~9절, 새번역>
그런데 그 때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지금 막 하셨던 말을 하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마태복음 4장 10절, 새번역>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온 세상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은 기꺼이 목숨을 잃어버리신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런 행동을 하신 것일까요? 이렇게 목숨을 잃는 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고 질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인자가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냐는 질문에, ‘사랑’이라고 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으로 이득이 있고, 우리와 목숨을 바꿀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잃으심으로 온 세상보다 귀한 우리를 얻으셨고, 자신의 목숨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와 바꾸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새번역>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9~10절, 새번역>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라고 비아냥거리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잃음으로 저와 여러분, ‘우리’라고 하는 이득을 얻었노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의미를 가진 존재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라고 당연하듯 말하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인간들을 위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가 예수님짜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목숨을 잃어서라도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또 다른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미 수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이, 선교사님들이, 오늘 이 순간에도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목숨을 잃어 축복의 통로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사람을 얻는 이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라도 한 영혼이라도 더 살리겠노라 결심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 공동번역>
마지막으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 마지막 말씀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마가복음 8장 38절, 새번역>
그렇습니다. 예수가 없는 나와 작별한다는 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의 화려함 앞에서, 2024년 현재의 세상 앞에서, 각종 문화와 환경과 상황 앞에서, 예수님과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우리가 묵상해야 할 Good Bye, 작별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대를 살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예수님은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사실 정말 많은 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말씀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실제로 부끄럽게 여긴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실은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에 더 방점을 둘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도, 말씀도,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맞지 않고 이성적이지 못하고 효율적이지 못하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방식과 다르기에 더 이상 나에게 가장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일본의 의사 사이쇼 히로시가 1993년 저술한 자기개발서 ‘아침형 인간’이 미국을 거쳐 2003년에 한국에 소개된 후 한국에서 이 ‘아침형 인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인생을 두 배로 살 수 있다는 캐치프레이즈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야만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너도 나도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아침형 인간을 성공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이 생각할 때 그 방법이 좋다면, 최선을 다해 그 방법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존재라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이, 성경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도 우리 앞에 있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떤 방법을 택하고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가시겠습니까? 정말 간절히 소망합니다. 간곡히 호소합니다. 부디 간절히 소망하기는 우리 주님이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삶을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선택하시길 소망합니다. 말씀을 선택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시길 간구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9월 한 달동안 Good Bye List를 작성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채우기 위한 비움의 시간을 함께 만들어 보았습니다. 불평과 작별하고, 숨겨 놓은 드라빔에 숨겨 두었던 우리의 마음과 작별하고, 탐욕과 작별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과 작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작별의 결심이 하나로 모여 가장 크게 결심해야 할 작별이, 바로 오늘의 결심입니다. 바로, ‘예수가 없는 나’와의 작별이고, ‘말씀이 없는 나’와의 작별이고, ‘하나님의 일이 아닌 인간의 일을 생각하는 사탄과도 같은 나’와의 작별입니다. 어제의 나와 작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Good Bye YesterDay! 이제 버려야 할 옛 사람과 작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Good Bye Old Me!
예수님이 먼저 ‘자기 부인’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보다 앞서는 나와의 작별입니다.
결코 내 삶을 내가 책임질 수 없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있던 나의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던지는 작별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세상의 방법과 반대입니다. 나를 향한 모든 시선을 오히려 다른 이를 위해 내어주면서 나를 통해 생명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도록,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작별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세상을 보며, 사람을 보며, 자꾸만 다른 방법을 찾고 있는 자신과 작별하는 시간입니다.
저는 이 Good bye List를 잘 작성하여, 믿음의 작별에 가장 성공했던 믿음의 선배가 있다면 ‘바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바울의 고백을 오늘 9월 설교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7~10절, 새번역>
결단찬양 - 밀알 + 나의 모습 나의 소유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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