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오 장군을 생각한다.
양(羊)의 가죽이 호랑이 가죽의 문채(文彩)가 되는것을 나는 부끄러워 한다.
한 두 성(城)을 수복한 것은 나의 처음 품은 뜻이 아니요
자리 한장의 좁은땅 치안(治安)한 것이 어찌 명예 되겠는가?
조국의 어려움을 민망히 여겨 감히 이몸을 군막(軍幕)에 드러내어
호적(胡敵)을 물리 첬으나 이 어찌 나라에 입은 은혜의 만분의 일이 되겠는가?
이것이 누가 지은 시인줄 아시는가?
만주 벌판을 말달리며 왜놈들과 싸운 독립군 대장의 시냐?
아니다,그렇다면 민주와 개혁의 용사들인 386세대 중에 장교가 된 어떤이가 지은 호국시일까?
그것도 아니다,친일 매국노 덴노헤이까의 총알받이 견습사관 출신 대일본육군장교로 복무 했던 김종오 장군이 세른세살
나이에 제 1군단장으로 재직할때 쓴 시이다.
구일본 황군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거기서 소위 계급장 달고 해방을 맞은 새파란 군인들이 신생 대한민국에서는 이십대에
사단장,삼십대에 군단장을 했고 마흔도 안된 참모총장이 나왔다,전부 다 자랑스러운 대일본육군장교 출신들이었다.
심지어 만주사관학교 출신 한 사람은 장장 18년동안 이 나라를 통치 하면서 근대화를 이루어 내기도 하였다.
누가 김종오 장군을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고 친일파니 하고 비아냥거린다면 그는 대한민국에서 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김종오 장군이 일본 동경의 주오우 대학에 다니고 잇던 1943년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이 동경 유학생 회관에서 재일
조선 학생들을 상대로 성전에 동참 할것을 호소하는 시국 강연회를 했다.
육당이 누군가? 기미독립선언서를 초안한 33인의 한 사람이다.
춘원은 누구인가? 1919년 2월 8일에 재동경 조선인 유학생들이 유학생 회관에서 조선독립선언을 부르짖은 "2.8독립선언
사건" 에서 그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이다.
당시 춘원은 와세다 대학생이었다.2.8독립선언은 곧바로 3.1 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2.8과 3.1의 선언서를 초안한 두 영웅이 동경에 나란히 나타나 황은에 보답하기 위하여 성전에 동참할것을 호소 했던것이다.
그 강연회는 아수라장이 됐고 춘원과 육당의 변절에 분노한 유학생들이 항의를 하다가 일경에게 끌려가는 불상사를 빚었다.
김종오도 눈 앞에서 벌어진 그 꼴을 보고 비탄과 비분의 눈물을 흘린 유학생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어쩌랴 ! 그 역시 그로 부터
1년도 되기 전에 자기 입으로 학교의 교련교관 오오야마 앞에 나가 " 천황폐하의 홍은에 보답코져 김종오는 대일본제국의
육군에 지원입대 할것을 결심 했습니다 " 라고 외치고 군문에 뛰어들게 된다.
자세한 이야기를 다할 필요는 없겠지만 오늘의 한국에 살고 있는 진보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이 김종오란 사람의 본심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춘원과 육당의 변절과 시국강연도 본심이었다고 믿어야 속이 편한 자들이다.
어느 이름모를 땅에 끌려나가 개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징병에 응하는 결심을 하는데는 하지 않을수 없는 사정들이 있었으리
라는 것은 안듣고 안봐도 뻔한일이다. 늙은 부모님,어린 동생들을 살리기 위해서 일본군의 군복을 걸쳐야 했다.
춘원이나 육당인들 부모없고 가족없고 형제가 없겠는가?
차라리 저 하나 매국노로 천세에 오욕을 당하는것이 자기로 말미암아 온 가족 친척일가들이 줄줄이 말로 다 할수 없는 고초를
겪는것보다 났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것이 일본으로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국과 자기 목숨은 쉽게 바꿀수 있어도 조국과 부모를 바꾼다는것은 인간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국이 아무리 중요하고 자기의 명예가 제 아무리 소중해도 그것이 살아있는 형제들의 목숨보다 무겁지 않다고 생각되는것은
인지상정이다.
춘원과 육당에게 욕을 퍼부은 유학생들의 태반이 그로 부터 1년 안에 자기 입으로 " 황은에 보답코져 " 하고 입대선서를 했다.
누가 누구를 욕할수 있단 말인가?
그런 극한 상황에서의 처신과 행동은 어떤 사람의 본연의 모습이라 할수 없다.
그것은 엄청난 압력과 폭력에 의해 왜곡된 모습이지 결코 그의 참모습이 아닌것이다.
춘원과 육당이 시국강연의 그 자리에 서기까지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며 얼마나 번민하고 괴로워 했는지는 생각지 못하
는 사람들이 아주 쉽게 그들을 손가락질 한다. 변절자,친일파,매국노 ...그리하여 우리는 근대사에서 우리민족의 뛰어났던 인물
들을 모조리 비인간,파렴치범으로 몰아 버렸다.
그들을 빼고 나니 이제는 한국 근대사의 인물로 교과서에 실을 인물이 없는 지경이다.
안중근,유관순 처럼 해방전에 일찍 죽은분들을 빼면 백범,안중근,이범석,우남,나철등등 손꼽을정도의 인물이 있을뿐이다.
세계에 내놓고 자랑해도 손색없을 음악가,미술가,문학가,종교인,체육인,교육자,여성운동가,군인,언론인,법조인,학자들이 모두
친일파란 올가미에 걸려 걸러져 버리고 만다.그리하여 한민족은 국난의 시대에 지조를 지킨 애국자가 한줌도 안되는 못나디
못난 서글픈 종족으로 추락하고 마는것이다.
이 추락을 즐거워 하며 즐거워 하는 사악한 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에 말 하기로 하자.
해방된 조국에게 절박했던 것은 독립할 능력과 힘이었다. 그것은 여러분야가 공히 마찬가지였으나 특히 시급 했던것은 자위
력이요 민족의 존체를 보위할 군사력이었다.이 군사력이 나올곳은 크게 세군데였다.
첫째가 광복군이요 둘째가 만군이요 세번째가 일본군이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 일본군 내의 계급으로 최고 상위자는 영친왕
이은 중장과 필리핀 포로 수용소장이었던 홍사익 중장이었다.홍중장이 전범으로 처형된 다음 최고 계급자는 홍사익과 일본육
사 동기생인 이응준 대좌였는데 해방후 한국군 탄생의 산파를 맡게 된다.대한민국 국군의 대부가 바로 이 사람이다.
원용덕 장군과 박정희 장군이 만주군 출신이고 김종오 장군이 일본군 견습사관생 출신의 장교이며 백선엽,백인엽 형제도 마찬
가지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 미군정 군사국장 쳄페니 대령이 2만5천명의 국방경비대 창설을 발표 했을때 기간요원 60명을 봅기로
했다. 이들이 독립된 한국군의 첫 장교들이요 지휘관들이다. 미군정 당국은 이 기간용원을 정확히 삼분하여 20명씩 안배하여
뽑았다. 만군출신 20명, 광복군 출신 20명, 일본군 출신 20명 , 이들이 한국군부의 최고 고참들이다.
일본군,만군 출신과 광복군 출신 장교들이 새조국 군대를 건설 하는데 출신 파벌에 따른 갈등이나 적개심따위는 있지 않았다.
일제때 어느군에서 어떤 경력을 쌓았던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고 오로지 미래의 조국을 위한 토대를 쌓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중에서 역시 주축이 된 것은 일본군 출신이었는데 군사에 대한 실무경험과 지식의 수준이 역시 제일 나았던것이다.
그들은 요즘 썪어빠진 후배들에 비교 할때 진정한 군인들이었고 나라의 동량들이었는데 일제 시대를 함께 살아온 모든 사람들
이 이들을 믿고 이들이 갈고 닦은 기량과 능력을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쏟으리라는것을 의심치 않았는데 ,그리고 그들이 그 믿
음과 의지에 훌륭하게 보답하여 이토록 자랑스러운 조국을 우리에게 물려 주었는데 누가 이들을 손가락질 하며 일본군이라 하
고 덴노헤이까를 섬겼다고 비난 하는가? 누가 그런 자격이 있어 참람한 짓거리를 자행 하는지 그 얼굴을 한번 보고싶다.
과연 얼마나 잘난 애국자들이고 얼마나 조국을 위해 쌓은 공덕이 있는 사람인지 보고싶다는 말이다.
김종오 장군 같은 참군인이 있어 대한민국이 있는거다. 참으로 박복한 우리민족한테는 드물게도 하늘이 주신 복이었다.
김종오,박정희 같은분들에게 일본군 출신의 경력을 시비하여 친일 딱지를 붙이는자들이야말로 요서 받지 못할 대역의 매국노
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6.25 전쟁이 벌어졌을때 육군에 김종오 장군의 6사단, 해군에 최용남 중령의 백두산 함이 없었다면 우리는 초전에 순식간에 부
산가지 밀렸을것이다.북한이 회심의 전략으로 삼았던 부산 상륙이 최용남 함장한테 걸려서 무산되고 중부전선을 돌파하여 수
원에서 한국군 주력을 포착 한다는 전략이 김종오 장군 6사단의 선방에 좌절 됨으로써 자유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의
백척간두에서 회생 하게 된 것이었다. 한국전쟁의 초기에 북한군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꺾인것은 김종오의 6사단이 방어하
던 춘천방면뿐이었다. 이 춘천 방어의 성공이 나라를 구한것이다.
전쟁 후반기에는 세계전사에 남긴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을 궤멸 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우리가 친일파를 구분하여 인명록을 남기자고 들면 그 기준 안에 우리가 존경 할만한 위대한 한국인의 태반이 포함되고 만다.
< 여기까지는 " 참군인 김종오 장군을 생각하며 " 란 제하의 어느 블로그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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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주장한바와 같이 이 내용의 많은 부분에 동의 하고 인정한다.
이 땅의 진보주의자들과 사회주의,공산주의 신봉자들은 6.25전쟁 당시 저런 영웅들로 인하여 적화통일이 무산 되었슴을 절통
히 여긴 나머지 친일자로라도 몰아세워 그 한풀이를 하고싶은것이다.얼마나 원통하고 피를 토할정도로 아쉬웁단 말인가?
소위 주체사상 맹신도들과 그들의 쇠뇌에 빠진 무지몽매한 젊은이들이 다만 불쌍할 뿐이다.
일제 강점기를 돌이켜 보자, 그당시 나라는 망했고 유능하고 참신한 인재들 더러는 광복군이나 혹은 망명길에 올라 혹은 싸우
고 혹은 일인들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하고 문학이나 언론을 통하여 투쟁 한 존경 받을만한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럴수는 없는일 당시 국내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국민들은 일제에 세금에 공출에 징병,징용을 당하여 어쩔수
없는 친일을 하고야 말았다.하면, 그들도 모두 친일파란 말인가? 왜? 아니면 아닌 이유를 대 보라는거다 .
그들이 모아낸 쇠와 곡식과 장정들은 은 곧바로 대동아전쟁과 미일전쟁에 쓰여져 엄청난 인명의 살상과 고통을 안겨주지 않았
던가? 또 허다한 면단위의 면장,서기,학교의 교장,교감,교사 모두 다 들추겨 친일파로 몰아 세우라는 이야기다.
아마도 대한민국 4천 8백만 인구의 7,8할이 모두 그들의 후손이 될거다.그리하여 그 혼란과 갈등에서 빚어지는 국론분열의 결
과를 그누가 즐겨 할것인가? 이야기 안해도 뻔한 이치일것이다.
첫댓글 먹고 살기 위해서 선택한길이 지금은 승자의 편에서 보면 매국으로 보일수도 있겠지만, 그때 그당시 현실을 감안하면 좀 이해의 폭도 넓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아!~~~장군님...장군같은분이 있어 행복합니다.좀더 계셔서 이나라의 큰 기틀을 세워주시지 않으시고 어이 그리 일직 가셨나요.장군님의 덕에 철원평야가 살아 있는데 지금 사람들이 장군님의 이름 석자도 모르면서 밤세워 길거리에서 부르짖고 있으니 무엇을 위한것이고,누구를 위한것인지요. 일하지 않는자는 먹지도 말라 했는데 온통 놀려고만 하는 인상이 안타까울뿐입니다.이땅에 일하러온 지구촌인구가 백만이 훌쩍 넘었는데 정작 이땅의 주인들은 3디라 일하지 않으면서 밤세우고 온통 지구촌을 여행하는데 아까운 돈을 다써버리면서 정작 나라의 경비는 미군에게 의지하고도 그들의 고마움을 모르는 안타까운 현실...
그렇게 위대하신분들이 장군님이 지켜주신 백마고지를 단 한번이라도 견학하신다면...구지 비행기 타지 안하고 자동차만으로 철원을 한번만 가주신다면.....세상에 지식구도 감싸지 않은 넘이 무슨 할말이 그리 많은지...?..그러니 이 사정을 다아는 일본인들은 호시탐탐 우리를 업수이 여기고...매년 늘어만 대일 적자액을 보노라면 얼마나 일본인들이 우리를 우습게 알까 이해가 되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