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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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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12) 단종과 세조 [선택! 역사를 갈랐다] .정순왕후 송씨
이장희 추천 0 조회 23 14.05.23 16: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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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역사를 갈랐다] (12)

단종과 세조

 

왕이 된 수양대군, 역사의 승자인가 패자인가

 

단종 원년(1453) 10월, 수양대군은 야음을 틈타 세종 이래의 명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날 밤의 일을 ‘세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종서 부자(父子)·황보인·이양·조극관·민신·윤처공·조번·이명민·원구 등을 모두 저자에 효수(梟首)하니, 길 가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어 그 죄를 헤아려서 기왓돌로 때리는 자까지 있었고, 여러 사(司)의 비복(婢僕)들이 또한 김종서의 머리를 향해 욕하고, 환시(宦寺)들은 김연(金衍)을 발로 차고 그 머리를 짓이겼다.”

 

 

 

▲ 한국화가 김호석의 ‘단종’

 

 

●정난(靖難)?

 

김종서(宗瑞), 세종이 문종과 단종을 부탁했을 정도로 신임했고, 조선의 원칙과 상식을 구현하여 호(號)조차 절재(節齋)였던 인물이다. 나머지 모두 아까운 인물들. 과연 민심이 ‘세조실록’에서 말한 것처럼 그러했을까? 수양대군과 그 세력들은 이 일을 정난, 즉 나라의 혼란을 바로잡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소중한 인재들을 죽인 재난, 즉 사화라고 불렀다. 조선후기 역사서인 ‘아아록’(我我錄)이 대표적이다. 당시는 왕조시대였다. 수양대군이 세조가 되면서, 세조의 후손이 왕위를 이었으니 세조가 찬탈했다고 할 수 없었다. 세조가 찬탈한 것이면 후대 임금의 정통성도 무너지고 왕조의 운명이 달려 있으니까.

 

 

 

 

●승자의 역사?

 

이래서 첫 번째 역사왜곡이 생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런 왜곡의 내면화이다. 한데 이러한 역사사실을 접하면서 사람들은 흔히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말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되게 마련이고, 따라서 승자의 관점에서 왜곡되게 마련이라고. 역사에 대한 가장 소박한 형태의 냉소(笑). 이런 견해는 일부에 대한 진실로 전체를 덮어버리는 지적(知的) 게으름의 온상이 된다. 역사나 인생이 승패로 점철되는 경우는 일부이고, 승패가 있더라도 그 상황을 보고 듣는 이는 승자만이 아니다. 패자도 보고, 승패와 관련 없는 사람도 본다.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이비(似而非) 역사인식은 내려놓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면 모르거니와,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고? 그런 거 없다!

 

수양대군은 정적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은 뒤 영의정부사(영의정), 판이병조사(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겸임했다. 백관(百官)에 대한 통솔권을 비롯하여 문관, 무관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한 것이었다. 이런 권력 집중은 왕실의 종친이 조정의 관직을 갖지 못하게 했던 법례를 깨뜨린 일이기도 했다. 대체로 태종대를 지나면서 국왕의 사적 네트워크가 공적 정치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법규로 정착되었다. 종친은 종친부(宗親府)에 속하게 하여 녹봉과 명목상의 관직을 주어 넉넉한 생활은 보장하되,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수양대군에 의해 깨졌던 이 규정은 ‘경국대전’에서 다시 살아나, 국왕의 적실은 4대, 서실은 3대가 지나야만 관직 진출을 허용하였다.

 

●나이가 어려서?

 

학계의 평가는 수양대군,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로 나중에 세조가 되는 그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는 듯하다. 그러나 세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면이 보인다. 일부는 세조대의 업적, 예를 들면 북방 개척, ‘경국대전’의 완성과 같은 문화 발전을 들어 세조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을 갖기도 한다. 세조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찬탈 정권(쿠데타 정권)이며 세조시대의 정치 운영이 반(反)유가적이었고, 동시에 공신(功臣) 중심의 권력구조로 되어 있었다고 본다.

 

세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국왕의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그것이 정권이양의 명분이 될 수 없다는 점과 세조가 당시 보편적 이념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유가적 정치 질서에 어긋나는 공신 중심의 정치를 펼쳤다고 평가한다. 문화적 성과라는 것도 이미 세종조에 심어진 열매를 거두었을 뿐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왕조란 어떤 집안이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제도이다. 출생에 의해 왕위에 오를 자격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왕위를 내놓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단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랐고 세조의 손자인 성종은 13살에 왕위에 올랐다. 다시 말하면 왕조에서 왕위에 오르는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왕의 나이가 정통성에 흠이 될 수 없는 것은 보통선거제로 뽑히는 대통령의 득표율이 정통성에 흠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어린 나이를 선위의 명분으로 내세우고자 했다면 문종이 승하한 후에 바로 문제로 삼았어야 했다. 세조 때 편찬한 ‘단종실록’에는, 국왕이 어린 탓에 의정부의 권한이 강해져서, 관리를 임명하는 데도 의정부에서 김종서 등이 해당 인물에 노란 표를 하여 건의하면 단종이 낙점했다고 하여 당시에도 ‘황표정사’(黃標政事)라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선양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정치운영을 바로잡아야 할 일이지, 정통성에 흠이 되는 사안은 아니다. 선위의 이유로 내세웠던 나라에 변고가 많다는 것도 국왕이 적극적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그 때문에 왕위를 내놓아야 할 일은 아니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넘겨준 일을 ‘세조실록’에서는 ‘선위’라고 적었지만, 세조가 빼앗았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산군일기와 단종실록

 

세조 2년 상왕(上王) 복위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민심의 반영이었다. 성삼문을 비롯해서 상왕, 즉 왕위에서 밀려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이 일은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었고,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었고, 이듬해인 세조 3년 영월 귀양지에서 살해되었다.

 

영월 청령포는 평창강이 굽어 돌아나가며 삼면이 물길이고 뒤는 산으로 막혀 있는 지형이다. 어떻게 여기 이런 땅이 있는 줄 알고 단종을 유배 보냈을까. 건국 이후 조선 정부는 전국적 통치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각도의 지리지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지리서는 지형, 특산, 인물 등 정보를 수록한 인문지리서에 해당된다. 세종대에는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세종실록’에 수록되어 있어서 ‘세종실록지리지’라고도 부른다-가 편찬되었고, 성종대에는 ‘팔도지리지’가 부족하였던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기에 이른다.

 

단종이 유배되던 때가 세조 2년이니까 각도 지리지의 편찬을 통하여 전국의 지역적 특성과 지형을 중앙 조정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척박한 외지를 단종의 귀양지로 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아들인 수양대군이 손자인 단종을 유배 보내는 데 그 지리지가 이용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사람이 하는 일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잠깐 상식 하나 추가한다. 조선시대 왕대별로 역사를 편찬하고 이를 실록이라고 불렀는데, 단종시대의 실록은 오래도록 실록이 아닌 일기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실록은 정통성을 확보한 왕의 시대를 기록한 역사서라는 상징성과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폐위된 세 임금 시대의 실록에 해당하는 기록은 각각, ‘노산군일기’,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도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는 여전히 그대로 부르고 있다. 다만 ‘노산군일기’는 242년 뒤인 숙종 때 ‘단종실록’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집현전은 사라지고

 

집현전은 세종 때 설립되어 쟁쟁한 인재를 길러내고 한글, 의학, 출판, 농업기술 등 조선의 미래를 설계하고 정책을 실천에 옮겼던 기관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고려 말부터 시작한 문치주의 운동의 결산이기도 하다. 집현전이 설립되던 세종 2년은 부왕 태종이 병권을 유지한 채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준 시기였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집현전 자체의 역사에서 태종의 역할 또한 빼놓을 수 없었다.

 

세조 2년 일어난 단종 복위 운동의 중심이 바로 집현전이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무력에 의한 찬탈은 세종시대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세종시대의 중심에 집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조의 찬탈에 동조했던 신숙주, 정인지, 권람 등과 찬탈을 비판했던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으로 집현전 학사들은 선택을 달리하게 된다. 정인지, 신숙주는 이미 고관대작이 되어 있었다. 박팽년이 단종이 양위할 때 자결하려 하자 성삼문이 말렸다. 결국, 수양대군에게 붙었던 일부 집현전 학사를 제외한 인재들 대부분 계유사화와 단종 복위 운동의 와중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조선 문명으로서는 첫 번째 손실이었다. 그러나 정작 원기(元氣)의 손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동시에 그 사화를 잊지 않는 조선 사람들의 줄기찬 역사바로세우기도 시작되었다. 공론(公論)의 이름으로!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정순왕후 (조선 단종)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년 ~ 1521년 음력 6월 4일)는 조선 단종(端宗)의 정비이다.

시호는 의덕단량제경정순왕후(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이다. 여량부원군 송현수(礪良府院君 宋玹壽)의 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남편 단종이 강등되면서 군부인(君夫人)으로 격하되었다가, 관비가 되었다. 한때 신숙주가 그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후 세조는 그를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이후 남편 노산군의 명복을 빌다가 사망하였으며, 그녀의 능의 소나무는 동쪽 방향으로 굽는다는 전설이 있어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중종 때부터 복위가 거론되다가 송시열, 김수항의 거듭된 건의로 1698년(숙종 24년)에 단종과 함께 복위되어 왕후로 추봉되었다. 전라북도 출신이다.

세종의 왕자 영응대군의 부인 대방군부인 송씨는 그녀의 고모이자 시숙모이다.


생애

초기본관은 여산, 성은 송으로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현 칠보면[1])에서 태어났으며,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영돈녕부사로 추증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 송현수를 따라 한성부로 이사하였다.

 

왕비 간택과 폐비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여 간택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고모가 영응대군의 부인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1454년 음력 1월 22일에 열 다섯의 나이로 한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일임하고 상왕이 되자 왕대비가 되어 의덕(懿德)의 존호를 받았다. 그러나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의덕왕대비는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노비로 전락

친정마저 풍비박산 난 상태였던 그녀는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송씨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한편, 그녀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그녀의 집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시장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는 귀양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으로 전해지는데, 결국 두 사람은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단종이 끝내 유배지인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부군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송씨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큰 바위를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하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한때 신숙주가 그녀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후 세조는 그녀를 노비이지만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서 사역할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려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는데 정업원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출궁하여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후일, 영조가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동망봉 근처 지역이 채석장으로 쓰였으며 그 바위는 깨어져나가버렸다. 2011년 현재, 서울 종로구 낙산 근처인 이곳 동망봉 남쪽에는, 동망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들어서 있다.

 

죽음과 그 이후

그녀는 세조의 증손이자 단종의 종손뻘인 중종(中宗) 18년인 1521년 음력 6월 4일, 82세의 나이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중종의 재위 초기, 사림파인 조광조 등에 의해 복위가 주장됐으나 중종은 이를 거부했다. 그뒤 현종 때부터 송시열과 김수항 등은 단종과 그녀의 복위를 거듭 건의했다. 그들은 세조의 단종 살해는 측근들의 오도에 휘둘린 것이며 본심은 단종 살해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 건의로 1698년(숙종 24년) 음력 11월 6일, 단종과 그녀는 복위되어 시호를 받고 종묘 영령전에 신위가 모셔졌다.

 

그녀의 별세 때에는 대군부인의 격에 따라 치뤄진 장례로 경기도 양주군(楊州) 군장리(群場里,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매장됐다. 단종과 그녀의 복위로 종묘에 배향되면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했는데 이는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사모(思慕)한다는 뜻에서 이다.

 

그녀의 묘소 뒤편에 심은 나무들이 단종의 능인 장릉쪽을 향해 고개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한 때 전해졌다. 무속의 신의 한 명으로 숭배됐는데, 무속에서는 그녀를 송씨부인 신이라 부른다.

 

위키백과

 

 

 

 

 

단종 哀死 후 출가 …팔십 평생 비구니로 살아
 
왕위 찬탈한 세조가 남편과 아버지 죽여
왕비에서 노비로 전락…정업원으로 출가
영조, 비석 세워 위로…출가터 청룡사 복원

 

 

 

 

서울 동대문 밖 숭인동에는 동망봉(東望峰)이란 잘 알려지지 않은 봉우리가 있다. ‘동쪽을 멀리 바라본다’는 뜻의 이 이름에는 열여덟 어린 나이에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의 가슴 아린 사연이 깃들어 있다.

 

숙부의 정치적 야욕에 의해 왕위에서 내쫓기고 끝내 영월 땅에서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비운의 왕 단종. 그가 목이 졸린 채 동강에 버려졌다는 비보를 전해들은 왕비가 팔십 평생을 한 많은 영월 땅을 바라보며 통곡한 자리가 바로 동망봉이다.

 

동망봉에서 대학로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내려오면 나오는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와, 동망봉 아래 지금의 보우불교대학 뒤편에 있는 빨래터, 그리고 정업원 옛터에 들어선 청룡사는 모두 정순왕후의 눈물 어린 역사가 배어있는 유적들이다. 제대로 한번 피어보지도 못한 채 청춘을 송두리째 빼앗긴 어린 왕과 왕비의 이야기는 당시를 지켜보았던 민초들에 의해 산천의 이름이 되었고, 후대인들에게는 아련한 전설이 되었다.
 
젊은 나이로 문종이 요절하자 그의 열두 살 난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1453년 정순왕후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만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왕비에 간택됐다. 이듬해 열다섯의 나이로 조선의 국모가 된 그녀에게는 시부모는커녕 수렴청정을 해줄만한 시할머니조차 없었다.

열네 살의 어린 왕과 열다섯 살 난 왕비가 의지할 수 있는 피붙이는 수양대군을 비롯해 열여덟 명이나 되는 야심만만한 숙부들뿐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야욕이 강한 숙부들은 어린 왕에게 의지처이기보다는 위협적인 존재였고, 단종의 신세는 말 그대로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천애고아(天涯孤兒)나 마찬가지였다.

 

어린 세자를 두고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던 문종은 황보인과 김종서 등에게 어린 왕을 잘 보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황보인과 김종서를 중심으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 출신의 신하들이 왕을 보필하는 신권정치체제가 구축되었다. 자연히 왕실의 권한은 약화되었고, 김종서와 황보인의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커졌다.

 

태종과 세종대를 거치면서 왕권중심의 국가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성장한 세종의 아들들에게 이 같은 신권중심의 국가체제 전환은 종묘사직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특히 세종의 아들 중에서도 재주와 지략이 특출했던 수양대군은 단종의 치세기간 동안 할아버지 태종과 아버지 세종이 힘겹게 쌓아올린 조선왕조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수양대군은 자신이 직접 왕이 되기로 결심했다.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고 자신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던 금성대군을 비롯해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을 연달아 귀양을 보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양위한 후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 살았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이 골육상쟁(骨肉相爭)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하지만 곧이어 성삼문과 박팽년 등 훗날 사육신으로 불리게 된 이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조는 주동자들의 9족을 멸하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해 영월 청령포로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그해 9월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또 다시 발생하자 세조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부득이 자신의 친동생 금성대군과 조카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세조의 오랜 친구인 정순왕후의 아버지 여량부원군 송현수도 이 역모를 함께 도모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에서 초막을 짓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당할 때 왕비는 남편을 따라 가지 못하고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 이때 단종과 왕비가 눈물로 이별을 고했던 청계천의 다리는 ‘영이별다리’로 불리다가 후일 영도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궁에서 쫓겨난 왕비는 끼니를 연명할 꺼리가 없어 걸식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 때 유본예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따르면 정순왕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때마다 푸성귀를 가져다주곤 했는데,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자 왕비가 살고 있는 초막 근처에 여자들만 드나드는 시장을 열어 물건을 사는 척 모여들어서는 왕비에게 먹꺼리를 가져다주는 ‘금남(禁男)의 시장’이 동대문 밖에 들어섰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남편이 영월에서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왕비는 자신이 살고 있던 초막에서 가장 가까운 봉우리에 올라가 멀리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다. 단종의 죽음은 정순왕후의 단 한 가닥 남은 희망이 완전히 소멸되었음을 뜻하는 동시에 그녀의 신분이 일국의 국모에서 노비 신세로 전락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역적 죄인이 되었으니 그녀의 신분도 관의 노비로 전락했다. 관노비는 원래 관청에 소속돼 노역을 담당해야 했지만 그녀에게 노역까지 시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왕비는 단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정업원의 비구니가 되었다. 일부 기록에는 그녀가 도성 밖으로 쫓겨나면서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지만 전후 상황으로 볼 때 그녀가 비구니가 된 시점은 단종이 죽은 직후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비록 귀양을 간 상태였다 하더라도 단종이 살아있는 한 남편과 다시 만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상당히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1918년 김택영이 쓴 『한사경』에 의하면 정순왕후의 미모에 반했던 신숙주가 세조에게 정순왕후를 첩으로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비록 관노의 신분으로까지 추락했다고는 하지만 일국의 국모를, 그것도 자신의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일조한 철천지원수가 자신을 첩으로 달라고 청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순왕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녀가 비구니가 된 이유는 물론 벼랑 끝으로 몰린 자신의 처지를 부처님의 가피 속에서 위로받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비구니가 되어 탈속의 길을 가는 것이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은신처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택영의 『한사경』이 20세기 초에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신숙주가 정말 정순왕후를 자신의 첩으로 달라고 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단종이 죽은 지 300년이 지나도록 이런 이야기가 민중들 사이에서 구전돼왔다는 사실은 왕조가 망하는 그 순간까지 조선의 민중들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부정하고 어린 나이에 요절한 단종과 그를 평생 그리며 살다간 정순왕후를 조선왕조의 진정한 왕과 왕비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정업원의 비구니가 된 후에도 정순왕후는 왕실에서 데리고 나온 시녀 셋과 함께 염색하는 일을 하며 살아갔다. 일설에는 그녀가 정희왕후의 배려로 그다지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아갔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기록에는 그녀가 세조의 도움 받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평생 염색물을 들이는 일을 하며 살아갔다고 전해진다. 현재 보우승가대학 뒤편에 남아있는 자줏골 빨래터가 바로 그곳이다.

정순왕후의 일화가 얽힌 유적들이 지금까지 동대문 인근 곳곳에 남아있다는 점 또한 그녀가 지킨 절개에 대한 민초들의 찬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200여년이 흐른 뒤, 지난날의 일을 들은 영조는 왕비가 오르던 그 봉우리에 동망봉이라는 세 글자를 새기고, 그녀가 밤낮으로 불공으로 들이던 절터에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씨를 써서 비석을 세우게 했다.

 

정순왕후는 여든두 살까지 살다가 1521년(중종 16)에 세상을 떠났다. 열여덟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남은 60여년의 삶을 동망봉에서 통곡으로 채운 그녀에게 어느 누가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동망봉 자락에 올라 여든의 나이로 열일곱 어린 남편을 그리던 그녀의 마음에는 무엇이 피어나고 있었을까. 정순왕후가 버텨나간 인생은 삶이 아니라 차라리 무덤이었으리라.

 

그 황량한 무덤 위에서 정순왕후가 불보살에 의지해 스스로를 지켜낸 고통의 자리에는 오늘날 청룡사라는 절이 들어섰다. 이곳은 절이기에 앞서 조선 여인들의 한 많은 삶을 지탱시켜준 불심이 남긴 흔적이다.

 

/ 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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