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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2 - 미국 독립 및 프랑스와 싸워서 독립한 아이티!
1. 미국 (1-B : 독립전쟁에서 프랑스 등 제3국의 도움)
아메리카와 아시아 및 아프리카 100개 국가중 식민지를 면한 독립국은 6개국이지만 중국과 태국
은 유럽 국가의 반식민지이고.... 남아프리카는 침략자인 백인들이 세웠으며 리베리아는 미국이
세워주었으니..... 원주민들의 완전무결한 독립 국가는 일본과 에티오피아 단 2나라에 불과 합니다.
식민지가 독립하는 과정을 보면 식민지 본국과 전쟁을 하는 1형과 오히려 식미지 본국에 적극
협력하는 2형에 본국이나 제3국이 선의로 독립을 허락하는 3형과 식민지 당국이 본국을
배반하고 독립하는 브라질 같은 4형이 있는데, 아이티나 콜롬비아는 자력으로 전쟁을
했으니 1-A 형이지만..... 미국은 프랑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으니 1-B형에 속한다고 봅니다?
미국 독립전쟁은 1775년 4월 19일부터 1783년 9월 3일까지 9년간 벌어진 식민지 독립전쟁
으로, 1765년 이후 영국과 식민지 사이 관계는 악화되었으니 미국의 독립주의자들은
"대표 없이 과세 없다" 를 주장하며 인지세법에 반발해 보이콧으로 이어졌으며, 1773년
자유의 아들들이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키면서 영국과 식민지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후 영국은 보스턴항을 폐쇄했고 보복적인 법률들을 제정했으니 매서추세츠
식민지는 영국 왕실에 대항해 비밀 정부를 설립했는데 조지아주를 제외한 12개 식민지는
대륙회의를 만들고 영국에 조직적으로 저항하고자 했으니 영국은 매서추세츠 민병대를
콩코드에서 해산시키려 1775년 4월 19일 영국군과 민병대 사이 렉싱턴 전투가 발발합니다.
민병대는 보스턴을 포위하니 1776년 3월 영국군은 철수했고 대륙회의는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동시에 미국은 퀘벡을 침공하여 영국군에 맞선 내란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퀘벡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니 1776년 7월 2일, 제2차 대륙회의가 독립에 대해 투표를
거쳐 7월 4일에 미국독립 선언을 발표하니 윌리엄 하우의 영국군은 반격을 해 뉴욕을 점령합니다.
그러나 트렌턴 전투와 프린스턴 전투에서의 승리로 미군의 사기는 다시 올라갔으며
1777년 영국의 존 버고인 장군은 사라토가 공세를 개시해 뉴잉글랜드 식민지를
고립시키려고 했는데 이 작전을 지원하는 대신 하우는 필라델피아에서 전쟁을
벌였고, 1777년 10월에는 사라토가 전투에서 버고인의 영국군은 패배 하였습니다.
미국 독립군이 사라토가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하자 고무된 프랑스는 미국과 동맹조약을 체결
하고 1778년 영국과 전쟁에 돌입하는데....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간 캐나다,
이집트, 인도, 아프리카등의 식민지 쟁탈 전투에서 모두 영국군에 패배해 분루를 삼켰던 프랑스
의 외교장관이던 샤를 그라비에 베르젠 백작은 영국에 맞선 미국 대륙군을 비밀리에 지원합니다.
프랑스는 아메리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해군을 확장하기 시작했으니 베르젠 백작은 북아메리카와
영국 사이의 소식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스페인의 참전에 걸림돌이 될 만한것은 제거해 나갔으니
베르겐 백작은 1776년 8월 루이 16세에게 전쟁에 참전할 것을 제안하려고 했으나, 1776년 뉴욕
뉴저지 전역에서 영국군이 승리를 거둔지라 1776년 9월 베르겐 백작은 일단 참전을 지연 시킵니다.
1777년 13개 식민지가 새러토가 전투에서 영국 존 버고인의 군대를 항복시켰다는 소식은 프랑스가
전쟁에 참전하여 유럽간의 전쟁으로 될수도 있다는 예상을 낳았으니... 프랑스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영국의 노스 총리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더 넓은 자치권을 부여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납니다.
1778년 부터 1783년 까지 벌어진 영국 - 프랑스 전쟁은 프랑스와 영국이 동맹국과 함께 싸운
군사적 분쟁이니 1778년 미국과 프랑스가 우호조약을 체결했고, 이에 영국은 프랑스와
전쟁을 개시했는데 이후 1779년부터 스페인 역시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영국과 맞서 싸웁니다.
이 결과로 영국은 북아메리카(미국)에 전력을 쏟아붓지 못한채 유럽, 인도, 서인도제도
등으로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고..... 북아메리카에서의 작전은 아메리카 대륙의
국왕에 충성하는 왕당파의 지지에 의존해야 했는데 1778년 부터 1783년 까지,
프랑스와 영국은 영국해협, 인도양, 지중해, 서인도 제도에서 지배권을 두고 싸웁니다.
프랑스 왕 루이 16세는 미국 식민지군의 사라토가 전투 승리 이후 공식적인 미국-프랑스 동맹
을 맺고 프랑스군이 전쟁에 참여하자, 미국 독립 전쟁은 이제 국제전으로 비화하게 되었으며
스페인은 1779년 아랑후에스 조약이 비밀리 체결되니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참전 하였습니다.
프랑스가 영국과 전쟁이 시작된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의 미국 독립 전쟁 참전과 러시아 제국 및
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하는 제1차 무장중립동맹 결성의 계기가 되었는데, 영국에서는 전쟁
비용이 지나치게 소모되는 전쟁에 대한 반대가 증가했고 1780년 6월에 런던에서 고든 폭동
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전쟁은 결국 1783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끝나게 됩니다.
프랑스와 우호 조약으로 스페인이 프랑스 동맹국으로 참전하고 1780년 영국은 네덜란드 공화국
과도 관계가 악화되었고, 결국 네덜란드와 영국은 전쟁을 개시했으니..... 북아메리카에서
찰스 콘월리스는 왕당파 지지를 받는다는 남부 전략을 채택했으나 소수의 왕당파만 모였습니다.
영국군은 킹스마운틴과 카우펜스에서 패배했고 요크타운으로 철수해 탈출을 모색했는데 프랑스
해군이 체사피크만에서 보급을 위한 영국 함대에 큰 승리를 거두면서 콘월리스 장군의 탈출
은 어려웠고, 프랑스 - 미국 연합군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콘월리스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당시 해군은 스페인이나 프랑스 보다는 영국이 한수 위라 붙으면 영국 해군이 승리를
거두곤 했는데 1781년 9월 5일 체사피크만 해전 (Battle of the Chesapeake) 은
미국의 동부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 연안에 걸쳐있는 엄청 넓은 체사피크만에서
대륙 독립군을 지원하는 프랑스 해군과 독립을 막으려는 영국 해군 간에 벌어졌습니다.
프랑스의 제독 그라드 백작 이 지휘하는 24척의 전열함과 영국의 제독 그레이브스 남작
이 지휘하는 전열함 19척이 맞붙었는데..... 프랑스 함대는 2척이 침몰한 반면에
영국 함대는 무려 6척이나 침몰했으니 아주 드물게도 프랑스 해군이 승리한 해전 입니다!
영국해군은 요크타운요새에 고립된 콘월리스 육군을 구원하지 못하고 해군의 패배로 끝났는데
1588년에 스페인 무적 함대를 물리치고 제2차 세계대전 까지 400여년중에 가장 심각한 패배
였으니, 요크타운에 갇힌 영국 육군은 보급품과 증원 병력이 끊긴지라 더 싸울수가 없었습니다.
프랑스 함대의 승리로 버지니아 요크타운에 주둔하던 찰스 콘월리스 장군 부대에 증원군을 보내려던
영국 해군의 임무는 무위로 돌아갔으며, 워싱턴군 이 뉴욕에서 체사피크 만을 통해서 군대와 보급
물자를 운반하는 것을 저지할수 없었으니 콘월리스의 영국군은 항복 하고 "미국은 독립" 을 이룹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라! 영국도 늘어나는 전비를 감당하지 못해 미국의 독립을 동의했는데, 프랑스
역시 캐나다와 이집트, 인도와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 전쟁에서 늘 영국에 패배해 왔습니다.
미국에서는 이겼지만 엄청난 전비로 재정이 파탄 상태에 이르자 루이 16세는 새로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 3부회를 소집했다가, 이때 모인 국민회의가 반기를 들자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다가 1789
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해 망하고....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립니다.
역사에는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자신의 국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전비가 많이 드는 외국 전쟁에 올인
했다가 망하는 이런 멍청한 예가 또 있으니..... 명나라는 국력이 쇠퇴하면서 부정 부패와 환관의
발호에다가 빈부격차의 심화로 농민 반란이 일어나 총체적인 난국으로 나라가 기우는 중에, 설상
가상으로 몽고족 보바이의난 반란이 일어나 일년 예산의 절반을 쏟아 부으며 힘겨운 전쟁을 합니다.
이러한때 발생한 조선 임진왜란에 황제국 체면 때문에 7년간 25만 대병을 파견했다가 조선은 먼거리
라 보급에 천문학적인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 1597년 정유재란 때 참전 병력은 일본군 14만에
조선군 3만 8천에다가 명군은 11만 7천이니 주객이 전도된 것으로 전쟁을 명나라가 떠맡은 것입니다?
제1차 울산성 전투에서 명나라 양호는 전쟁의 승기를 잡기위해 1만 6천명 가토 기요마사
의 울산성을 공격하는데... 당사자인 조선군은 권율등 1만 1천 5백명인데 비해 명군은
5만 8천을 동원했으니 먼저 2만은 부산에서 올 왜군 증원군에 대비해 양산으로 보냅니다.
자신은 마귀와 함께 3만 8천을 인솔해 조선군과 함께 5만 대군으로 울산성을 공격하다가 26개
남해안 왜성에서 차출된 8만 왜군이 수군과 협공하니 대패해서는 경주로 달아났던 것입니다.
안휘성의 쌀을 울산까지 운반하자면... 운하로 베이징으로 가서는 짐수레에 싣고 화북 지방을
지나 만리장성을 넘어 만주대륙를 횡단해 의주로 들어와 서울까지 와서 배에 싣고 한강을
거슬러 충주에 내려 지게에 지고 조령을 넘어 울산까지 가자면 쌀 10말 중에 운반하는 자가
8말은 먹는지라 불과 2말 정도가 현지에 도착하며 배로 와도 풍랑에 파손되고 4말 정도입니다.
중국에서는 전쟁이 나면 군대는 은만 가져가서는 현지에서 식량과 화살이며 화약과 총알 등
전쟁물자를 사면 되지만, 조선은 은이 통용안되고 화폐가 쌀이나 베 같은 물물교환 수준
이라 은은 무용지물이며... 그나마 오랜 전쟁으로 농사를 짓지 못했으니 조선 현지에서는
쌀을 구할수가 없는지라 천상 먼 중국에서 운반해 와야 했으니 전비가 엄청 늘어난 것입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7년 전쟁에 원거리니 보급을 대면서 엄청난 군비로 인해 재정이 파탄나서
세금 폭징으로 농민반란이 거세지고, 여진족 통제에 소홀히 하다가 망했으니.... 조선에
파병하지 않고 압록강에 대군을 주둔만 시킨채 여진족을 통제하면서 세금폭징을 피했으면
100만에 불과한 여진족에게 1억 2천만의 명나라가 그리 허무하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782년 영국 의회는 아메리카에서의 모든 작전을 중단하기로 투표했지만, 해외에서 전쟁은
이어졌으니, 상트 해전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영국군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프랑스 -
스페인 연합함대는 지브롤터를 여전히 포위하고 있었으며... 1783년 9월 3일 파리 조약
이 체결되었고 영국은 막대한 전비 부담으로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종전에 합의 합니다.
프랑스가 전쟁에 미친 영향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적은 이익을 보았으며 막대한
전쟁비용 지출로 재정적자에다가 채무에 시달리게 되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원이니 되었으며
스페인도 일부 식민지를 회복하였으나, 지브롤터를 점령한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고 네덜란드는
영국과 전쟁에서 패배했으며 영국과 마이소르 왕국의 전쟁은 1784년에 망갈로르 조약으로 끝납니다.
미국 독립전쟁의 원인은 과도한 조세정책이니 영국은 식민지에 대해 〈설탕법〉,〈당밀법〉
으로 당밀, 설탕, 철, 소금 등의 수입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했으나 간접세인 탓에
예상만큼 큰 반발이 따르지는 않았지만..... 문제가 된 것은 〈인지세법〉 으로 신문, 책,
트럼프 카드등 미국 식민지에서 출판되는 모든 출판물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원인으로 영국의 ‘인디언 보호구역’ 설정을 들수 있으니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미국인들은
인디언과 연합한 프랑스와 전쟁한 영국을 적극 지원하였는데 영국 승리후, 식민지 미국인은 비옥한
중서부지역으로 진출을 기대하였지만 영국 정부는 이 지역을 ‘인디언 보호구역’ 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인디언 보호구역 설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인들은 중서부 지역으로 넘어가려하였고, 이 과정에서
식민지 주민과 인디언들의 분쟁이 자주 발생하자 영국은 식민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어쩔수
없이 군대를 파견해야 했고;;;;; 재정적 비용에 부담을 느껴 〈병영법〉을 제정하니 〈병영법〉
은 영국 군대 비용의 일부를 미국 식민지 주민이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 많은 반발을 불렀습니다.
1775년 제2차 대륙회의에서 식민지군을 대륙군으로 명칭을 바꾸고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토머스 제퍼슨의 다섯 사람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 작업을 수행했으며
대륙군을 창설하고, 조지 워싱턴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각 주에 군사와 물자를 요청합니다.
보스턴에서는 반정부 활동이 이어졌고 1774년 영국 정부는 징벌을 위한 《매사추세츠 통치법》을 제정
하고 직접 통치를 거론하자 민중 사이에 반발을 더 불러오는 결과가 되었으며, 본국에서 새로 임명된
관리는 사직하고 폭도에 쫓겨 보스턴으로 도망가자 영국군 북아메리카 총사령관 토머스 게이지 중장
은 보스턴에서 영국군 4개 연대를 지휘하고 있었지만, 시내를 벗어나면 혁명세력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1775년 4월 18일 게이지 장군은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 식민지 민병대가 무기를 보관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탄약을 압수하기 위해 700명의 부대를 파견했는데, 4월 19일 아침 영국군이
렉싱턴 마을에 진입하자 77명의 민병들이 마을의 녹지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총탄을 맞아
몇명의 민병대가 사망했는데, “한 발의 총성이 세상을 바꾸었다” 라는 말을 낳은 사건이었습니다.
영국군은 콩코드로 이동해 3개 중대의 분견대가 노스 브릿지에서 500명의 민병대와 싸웠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영국군이 보스턴에 들어서자 수천명의 민병대가 모여 들었고,
도로변에서 영국군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으니..... 영국군은 증원군의 도착으로 괴멸을
면했는데 이 ‘렉싱턴 콩코드 전투’ 가 미국 독립전쟁의 포문을 열게 된 최초의 충돌이었습니다.
민병대는 보스턴으로 몰려가 보스턴 포위전을 시작했으니 4,500명의 영국 증원군이 대서양을
건너 도착했고, 1775년 6월 17일, 윌리엄 하우 장군이 지휘한 영국군이 ‘벙커 힐 전투’ 에서
찰스타운 반도를 점거해 미국 민병대는 후퇴했지만, 영국군의 손실이 커서 다음 공격을 이어
갈수 없었으니 포위는 깨지지 않았고 영국군 지휘관 게이지 장군은 9월 잉글랜드로 돌아갑니다.
1775년 7월 새로 임명된 워싱턴 장군이 보스턴 교외에 도착하여 식민지군을 지휘해 육군을
조직했는데, 탄약이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공급처를 요구했으니 영국군 무기고
를 습격해 확보하고, 또한 자체 생산도 시도했는데 1776년 말까지 군수 물자의 90% 는
수입에 의존했고 총액은 200만 파운드에 달했으며 대부분의 수입처가 "프랑스" 였습니다.
1776년 3월 패이트리엇들이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획득한 대포가 헨리 녹스 소령에 의해
도체스터 고지에 전달되었으니 대포가 영국군에게 하향 조준되었기 때문에, 하우 장군은
방어를 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3월 17일 보스턴시를 넘기고 배를 이용하여 노바 스코샤의
핼리팩스의 해군 기지까지 후퇴하니 워싱턴은 뉴욕시를 사수하기 위해 육군을 이동시킵니다.
보스턴 방면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대륙회의는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다른
방면에서 작전을 시도했으니,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을 14번째 식민지 주로 끌어
들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이것이 실패하면서 캐나다 침공 작전을 승인했으니
그 목적은 프랑스 사람들이 많은 퀘벡에서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게 하는 것 이었습니다.
캐나다에 2개의 원정대가 파견되었고, 하나는 리처드 몽고메리 준장 이끄는 1,700명의 민병대로
1775년 9월 16일에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출발해, 11월 13일에는 몬트리올에 도달하자 캐나다
지사 가이 칼튼은 퀘벡시에서 철수했으며 두번째 원정대는 베네딕트 아놀드 대령의 부대로
동쪽에서 퀘벡시를 공략했지만 보급이 여의치 않았고 또한 천연두로 쓰러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11월 초에 아놀드 부대가 퀘벡시에 도착했을때 1,100명이던 부대는 60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고
합류한 몽고메리 부대와 아놀드 부대는 12월 31일에 퀘벡 시를 공격했지만, 칼튼 에 의해
완벽하게 막혔으며 미군은 1776년 봄까지 퀘벡 외곽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퇴각할수 밖에
없었는데 캐나다 영국군은 미국보다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전선을 견고하게 방어했습니다.
미은 퀘벡을 재공략 하려고 했지만 1776년 6월 8일 트루아 리비에르 전투에서 패배했고 칼튼은
역습으로 전환하여 10월에는 발쿠르섬 전투에서 아놀드의 수군을 격파하니 아놀드는 캐나다
침공 작전의 출발점이었던 타이컨더로가 요새까지 퇴각했고 캐나다 침공 작전은 미군에게
비참한 결과로 끝났지만, 아놀드의 공작으로 영국군의 전반적인 반격을 연기할 수는 있었습니다.
캐나다 침공으로 미국은 영국 여론의 지지 기반을 잃었으니“그래서 미국에 대한 무력
행사는 이 나라의 모든 계층과 직업의 사람들로부터 흔쾌히 받아 들여지는
것이다.” 퀘벡 전투에서 제임스 리빙스턴 중령의 제1 캐나다 연대가 또한
생피에르 전투에서 모세스 헤이즌 제2 캐나다 연대가 미합중국 군을 추격하였습니다.
영국군 하우 장군은 보스턴에서 철수한후 뉴욕시 탈취에 집중했으니 워싱턴은 뉴욕 방위를 위해
롱아일랜드와 맨하탄 사이에 2만명의 군대를 배치했는데 영국군이 스태튼섬에 집결하는 동안
워싱턴은 새로 채택된 미국독립선언을 병사에게 읽어주었으며 더이상 타협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1776년 8월 27일, 롱아일랜드에 상륙한 22,000명의 영국군은 독립전쟁 중에서도 최대의 교전
이 된 ‘롱아일랜드 전투’ 에서 대륙군을 몰아내고, 브루클린 하이츠까지 후퇴시켰으니
하우는 거기에서 포위전을 시도했지만..... 워싱턴군은 모두 맨해튼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9월 15일, 하우는 12,00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로워 맨해튼에 도착해 뉴욕을 장악하자 대륙군
은 할렘 하이츠까지 물러났으며, 하우가 워싱턴군 주위에 움직일때 퀘벡 주지사였던 가이
칼튼 장군의 해군도 전선에 합류하였는데, 베네딕트 아놀드 장군을 필두로 한 대륙군
은 10월 11일 샹플레인 호수에서 발쿠르 섬 전투로 후속부대의 보급을 지연 시킵니다.
하우가 이끄는 영국군이 워싱턴을 배회할때 워싱턴군은 뒤로 후퇴한뒤, 10월 28일 화이트 플래인스
전투를 벌였는데 워싱턴군은 후퇴를 했기 때문에, 하우는 맨해튼으로 돌아 워싱턴 요새를 점령
하고 2,000여명을 포로로 잡을 있었으니 포로의 수는 롱아일랜드 전투 때와 같이 3,000여명에
달했고 뉴욕에서 악명높은‘감옥선’이 시작되었으니 미합중국군과 선원이 방치되어 죽어갔습니다.
찰스 콘월리스장군이 워싱턴을 쫓아 뉴저지까지 진군하였고, 대륙군은 12월초 델라웨어강을 건너
펜실베이니아까지 후퇴했는데 뉴욕에서 뉴저지로 이어졌던 영국군 진격작전도 겨울들어
일단 정지하고 뉴저지에서 겨울숙영에 들어갔는데 하우는 몇번이나 소모전을 벌이며 대륙군
을 잡을 기회가 있으면서도 실패했지만 5,000명 이상의 대륙군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습니다.
대륙군의 전망은 암울했으니 대륙군과 함께 철수를 반복했던 토마스 페인은 “지금이 병사의 영혼
을 시험할 때다” 라고 적었고 가용할수 잇는 병력은 5,000명 미만이었는데 군인은 1년이면
복무기간이 끝나기 때문에 12월이 오면 1,400명까지 줄어들게 될 것이니 대륙회의는 절망
속에 필라델피아를 포기했지만 그러나 영국군의 점령에 대한 대중의 반항은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워싱턴은 크리스마스 밤에 델라웨어 강을 건너 1776년 12월 26일 트렌턴 전투에서 1,000명 헤시안을
포로로 잡으니 콘월리스는 트렌턴을 탈환하려고 진군해 왔지만, 워싱턴은 그 허를 찔러 1777년
1월 3일의 프린스턴 전투에서 영국군 후위부대를 무찔러 미국 사기를 높일수 있었기 때문에 모리스
타운에서 겨울숙영에 들어갔고 뉴저지 민병대는 영국군을 괴롭혀 뉴욕시 주변까지 철수하게 맘듭니다.
대륙회의와 워싱턴은 보스턴 포위전 때부터 정보, 첩보 전략을 전개하였고, 점령된 뉴욕
을 중심으로 한 정보수집, 첩보활동은 지역의 지원이 적은 영국군보다 우위에 서
있었으니 트렌턴 전투 승리는 첩보활동이 성과를 거둔 예인데 유럽 국가들과
정보 교류는 일찍부터 진행되고 있었으며, 정보전의 우위는 종전까지 계속됩니다.
영국군 전략은 국왕에 충성을 맹세하고 달려오는 식민지내 왕당파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으니
1776년 2월, 헨리 클린턴 장군은 2,000명의 병사와 해군함대로 노스캐롤라이나를 침공하려
했지만, 왕당파 부대가 무어즈 크릭 다리 전투에서 섬멸된 것을 알고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6월에 클린턴은 남부 항구인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을 점령하려 했고, 남부 왕당파의 궐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해군이 요새공격으로 물러났고, 배후에서 마을을 공격하는 왕당파도 없었기
때문에 작전은 실패했는데 남부 왕당파는 형편없는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1781년말
런던의 고위 관료들은 남부에서 도망쳐온 왕당파 말을 믿고, 봉기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영국군이 1777년 전략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을 때, 북아메리카에는 두개의 주력군이 있었으니 캐나다
칼튼 군과 뉴욕의 하우 군이었는데 런던에서 조지 저메인이 부대의 작전을 승인했지만, 연락소홀
과 지휘관의 라이벌의식 때문에 연계가 잘 이뤄지지 않아 하우는 필라델피아 점령에 성공했지만,
북부군이 새러토가에서 항복해 상실하자 1777년의 작전후 칼튼과 하우 두명 모두 사직하게 됩니다.
1777년에 첫 작전은 존 버고인 장군이 이끄는 퀘벡에서 출발한 원정대였으니 목적은 샹플레인
호수와 허드슨강 통로를 확보하고, 뉴잉글랜드를 나머지 미국 식민지로부터 효율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으로 침략은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으니 버고인이 1만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샹플레인 호수에서 올버니로 향했고, 다른 부대는 배리 세인트 리저가 이끄는
2,000여명의 부대로 모호크 계곡을 내려와, 올버니에서 버고인과 합류하는 것이었습니다.
버고인은 6월 출발해 7월 초에는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점령했고 이후 대륙군이 나무를 베고 길을
막았기 때문에 버고인군의 행보는 지체되었는데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해 분견대를 파견했지만
8월에 미국의 민병대와 베닝턴 전투를 벌여 대패하면서 1,000명 가까운 병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인트 리저 부대는 그 절반을 모호크족 지도자 조셉 브랜트가 이끌고 있었는데, 스탠윅스요새를 포위
하니 미국 민병대와 동맹을 맺은 인디언이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기 위해 나섰지만, 오리스카니
전투에서 매복을 당해 흩어지고 말았고 두번째 구원 부대는 베네딕트 아놀드가 이끌고 있었는데,
인디언들의 지원이 무산되자 세인트 리저의 부대는 포위를 풀고 캐나다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버고인군은 6,000명까지 줄었는데도 불구하고 올버니로 계속 진군하기로 결정했으니 이것이
나중에 큰 패착이 되는데.... 대륙군을 이끄는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은 8,000명의
부대를 이끌고, 새러토가에서 남쪽으로 10마일(16 km) 지점에 진지를 구축했으니
9월 버고인은 대륙군의 측면을 공략하려고 했지만 프리먼 농장 전투에서 반격을 당합니다.
버고인 영국군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으며 뉴욕의 하우군이 올버니로 향하고 있다는 기대
를 가졌지만 뜻대로 되지는 못했으니, 하우군은 배를 타고 멀리 돌아서 필라델피아를
공략하러 가고 있었으며 대륙군의 민병대는 속속 집결했고, 10월 초에는 총 11,000
명에 달해 베미스 고지 전투에서 대패를 하게 된 버고인은 10월 17일에 항복 합니다.
새러토가는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으니 비록 하우군에게 필라델피아를 빼앗겼지만, 미국혁명
세력은 자신감과 결의를 되찾았는데 더 큰 소득은 이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를 미국 측에
끌어들여 영국군과 대결할수 있게된 것이었으니 영국군은 전쟁의 상황이 점점 꼬여만 갑니다.
1776년에 뉴욕시를 확보한 하우 장군은 1777년 혁명 세력의 수도인 필라델피아의 점령
에 눈을 돌렸으니 하우는 체사피크만의 북쪽 끝에 15,000명의 부대를 상륙시켰
는데 워싱턴은 11,000명의 병사를 하우군과 필라델피아 사이에 배치했지만,
1777년 9월 11일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또 다시 후퇴를 해야 했습니다.
9월 26일, 대륙회의는 다시 필라델피아를 포기해야 했으니 하우는 워싱턴군을 무찌르고
필라델피아를 저항없이 점령했으며, 워싱턴은 10월 초에 저먼타운 근처에
숙영하고 있던 하우군과 저먼타운 전투를 벌였고, 12월 초에는 화이트 마쉬
전투를 벌였지만, 모두 결정적인 승패에는 이르지 못했고 퇴각해 기다리기로 합니다.
화이트마쉬 전투후 워싱턴은 밸리포지를 겨울 숙영지로 정했으니 필라델피아에서 20마일(32 km)
떨어진 곳으로 6개월을 보냈으니 겨울동안 1만명 병력중 2,500명이 질병과 추위로 죽었으나
1778년 봄, 유럽에서 온 슈토이벤 남작의 체계적인 강훈련으로 대륙군은 사기를 되찾았으니
슈토이벤은 프로이센군의 현대전법을 가르쳤고, 훈련을 통해 규율 있는 군대로 탈바꿈 시킵니다.
영국군 총사령관은 하우 장군에서 클린턴 장군으로 교체되었으며 프랑스군의 참전으로 영국군
은 전략을 바꾸어, 프랑스 해군의 위협 대상이 된 뉴욕시를 방어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를
포기했는데 1778년 6월 28일, 워싱턴은 철수하는 클린턴군을 쫓아 몬머스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전투는 북부에서 벌인 마지막 큰 전투가 되었으니 클린턴군은 7월에 뉴욕에 도착
했지만, 그것은 데스탱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이 미국 해안에 나타나기 직전의
일이었으니 워싱턴 군은 뉴욕시의 북쪽에 있는 화이트 플레인즈로 돌아왔고
양군 모두 2년 전에 대치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전쟁의 양상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1776년부터 프랑스는 정보 교류를 통해 미국 독립전쟁에 관여해 왔으니 토머스 제퍼슨이 프랑스
에게 동맹을 재촉한후 프랑스군 트레빌 제독은 대륙군에게 보급품과 탄약, 대포를 지원했으니,
드 발리에르와 같은 대포가 사용되면서 새러토가 전투와 같은 교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777년 5월 2일 워싱턴은 프랑스의 보급품에 대해서 히이드 장군에게 편지를 썼으며
1778년 들어 북아메리카의 반란은 국제전으로 성격이 바뀌었고 새러토가
전투에서 대륙군이 승리한 것을 알게 된 프랑스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협상으로
1778년 2월 6일에 미국과 동맹조약을 맺어 프랑스 미합중국 동맹이 결성됩니다.
1776년 아란다 공작은 스페인을 대표해 벤자민 프랭클린과 사일러스 딘, 아서 리로 구성된 미국
대표단을 접견했는데 대륙회의는 대표단에게 유럽을 돌면서 북미 해안의 영국 해군의 봉쇄를
풀수있는 유럽 열강들과의 동맹을 재촉했으니 아란다 공작은 파리의 자택에 그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는 스페인 대사로서 역할을 했으며, 식민지에 대한 지원과 공약을 하면서 신생 식민지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으나 보다 신중한 접근을 선택했던 플로리다블랑카 공작 호세
모니뇨로 부터 반대에 부딪쳤으니, 이후 프랑스 왕실의 제로니모 그리말디가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정부에 공개적인 동맹을 선언하라고 설득하는 아서 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약됩니다.
비록 스페인 정부가 전쟁 초기부터 혁명군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지만 1779년 6월
에야 공식적으로 참전하게 되고, 그리하여 아랑후에스 조약을 맺게 되며
네덜란드 공화국도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로는 1780년 말에야 참전을 하게 됩니다.
영국왕 조지 3세는 영국이 유럽에서 싸워야 할 전쟁이 있기 때문에 추가로 군을 투입하여 미국
을 함락시키겠다는 희망을 포기하면서도“미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약속된 전쟁의 무한한 연장으로 그들의 불복종을 처벌할 것이다.”라며 결의를 다지고 있었
으니 3만명 병력을 뉴욕, 로드아일랜드, 퀘벡, 플로리다에 있는 요새에 주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다른 군대는 서인도 제도에 있는 프랑스나 스페인을 기습할 예정이었으니
미국인들을 처벌하기 위해 왕은 모든 해안무역을 저지하며 항구를 파괴하고,
해안을 따라 도시를 불태우고, 약탈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 그리고 인디언
들이 변경 지역의 개척지에 있는 민간인들을 공격하도록 놔두자는 계획도 세웁니다.
1778년에 ‘새러토가 전투’에서 독립군의 첫 승리가 이루어졌고, 벤저민 프랭클린이 이것을 명분
으로 프랑스의 참전을 설득해 프랑스가 참전하게 되고, 1781년‘요크타운 전투’ 에서 프랑스
해군이 체사피크만 해전에서 영국해군을 격파한 덕분에 독립군 연합부대가 영국군의 주력부대를
격파하니 1783년 9월 3일 파리 조약에서 영국 정부는 미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1781년 9월 5일 벌어진 체사피크만해전(Battle of the Chesapeake) 은 세계 최초의 근대 해전인데,
미국의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 연안에 걸쳐있는 넓은 체사피크만에서 미국 독립전쟁 중에
대륙 독립군을 지원하는 프랑스 해군과 독립을 막으려는 영국 해군 간에 해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프랑스의 제독 그라드 백작 이 지휘하는 24척의 전열함과 영국의 제독 그레이브스 남작 이
지휘하는 열함 19척이 맞붙었는데.... 프랑스 함대는 2척이 침몰한 반면에 영국 함대는
무려 6척이나 침몰했으니 그 당시 전후로 아주 드물게도 프랑스 해군이 승리한 해전 입니다!
영국 해군 은 미국 동부 요크타운 요새 에 고립된 콘월리스의 영국 육군 을 구원하지
못하고 해군의 패배로 끝났는데, 1588년에 스페인 무적 함대를 물리치고 제2차
세계대전 까지 400여년중에 가장 심각한 패배 였으니, 요크타운
에 갇힌 영국 육군은 보급품과 증원 병력이 끊긴지라... 더 싸울수가 없었습니다.
프랑스 함대의 승리로 버지니아 요크타운에 주둔하던 찰스 콘월리스 장군의 부대
에 증원군을 보내려던 영국 해군의 임무는 무위로 돌아갔으며, 워싱턴 군이
뉴욕에서 체사피크 만을 통해서 군대와 보급 물자를 운반하는 것을 방해
할 수 없었으니 콘월리스의 영국군은 항복 하고 "미국은 독립" 을 이룹니다!
식민지 미국 독립군은 영국 한나라 하고만 싸웠지만 영국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네델란드 와
전세계 여러 식민지에서도 전쟁을 했으니.... 아메리카에 충분한 군대와 자금을 보낼수
없었는데, 전비가 늘어나면서 심각한 재정상태로 어쩔수 없이 미국의 독립을 동의하는데
만약 프랑스등 다른 나라가 참전하지 않았으면 미국 독립전쟁은 진압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라! 프랑스 는 캐나다와 이집트, 인도와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에 영국에
패배 하다가 미국에서는 모처럼 이겼지만 엄청난 전비로 재정이 파탄 상태에 이르자.... 루이
16세 는 새로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 3부회 를 소집했다가 이때 생긴 국민회의가 반기를 들자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다가 대혁명이 발생해 망하고 오아과 오아비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립니다.
미국 독립전쟁의 의한 사상자 수는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전사자보다 많았으니 천연두가 만연햇으니 이
전염병은 대략 130,000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으며, 25,000명의 미국 독립군이 군 복무중 죽었으니
8,000명은 전사했고 17,000여명은 질병으로 죽었는데 8,000명은 포로가 된 채로 죽었으니 독립군의
사상자는 8,500명에서 25,000명 사이로 추정되니 미국인 총 사상자는 50,000여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171,000 명의 해군이 전쟁 중 영국군으로 참전했고, 그 중 25- 50%는 강제 징집되었
는데 1,240명이 전사했고, 18,500명이 질병으로 죽었으니 가장 큰 원인은 비타민
결핍이 원인인 괴혈병이었는데 레몬주스로 충분히 예방할수 있음에도 불구
하고...... 제독부가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습니다.
때문에 전쟁 중에 42,000명의 영국 해군이 탈영했으며 대략 1,200명의 독일인이 전사했고 6,354명
이 사고나 질병으로 죽었는데 16,000명의 남은 독일인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졌지만 5,500명
정도는 여러가지 이유로 미합중국에 잔류했으니 대부분은 미합중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 였습니다.
2. 아이티(1-A : 자력으로 독립전쟁)
우리는 일본인들의 식민지배에 대해서는 치를 떨면서도 그보다 10배(!)나 더 잔인했던
무자비한 식민지 통치자인 “프랑스” 에 대해서는 와인과 샹송에 파리지앵등 “자유와
인권의 나라” 라며 프랑스의 잔인무도하고 끔찍한 식민통치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으니.... 우리 한국인들의 고정관념인지 선입견이지 아니면 편견인지 모를 일입니다.
1492년 콜럼부스가 처음 도착한 땅인 이스파뇰라섬은 풍요와는 거리가 먼 눈물과 고통에
빈곤으로 점철된 역사를 가진 섬이었으니 19세기 영국작가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 의
주인공이 해적이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 카리브해로 떠날때 배 이름이 '이스파뇰라' 입니다.
인도의 향료와 황금을 찾아 1492년 상륙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대규모 거주지
를 건설한 섬도 이스파뇰라였지만 가장 참혹한 식민수탈의 역사가 자행된 곳입니다.
원주민은 가혹한 식민지 수탈 노동과 유럽인이 가져온 질병으로 죽어 씨가 마르고 아프리카
에서 대규모 흑인 노예들이 수입돼 극한의 고통속에 끝없는 눈물을 흘린 곳이니 아이티
대지진 참사 직후 아프리카 압둘라예 웨이드 세네갈 대통령은 "아이티 이재민에게
무상으로 땅을 주겠다" 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오겠다면 제한없이 환영한다" 고 밝혔습니다.
15세기말 콜럼버스가 이스파뇰라섬에 왔을 당시에는 '타이노' 족 이라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가혹한 식민통치로 거의 멸종되는데 라스카사스 신부의 증언에....
"스페인인들은 원주민을 어린이,임산부 가릴 것 없이 도살장에서 양을 잡는
것 처럼 사람들을 갈가리 찢거나 산채로 태워 버렸다"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 흑인이 노예로 수입됐으니 북미의 2배인 80만
이나 되었는데, 이들은 오늘날 카리브해 도서에 널리 퍼진 뮬라토(흑인과 백인 혼혈)
의 선조가 됐는데 16세기 유럽에서 설탕수요가 늘면서 설탕 공급을 늘리기
위한 노예제 플랜테이션이 브라질을 시작으로 카리브해 곳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폭염 속에서 사탕수수를 꺾어 으깬뒤 즙을 오랜시간 끓여야 하는 설탕제조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
웠을뿐 아니라 즙을 끓이기 위해 수많은 나무를 벌목해야 했던 만큼 노예제 노동을 통해서만
유지되던 상황이었으며 아이티는 자연히 해상무역 중심지로 부각됐고 1697년 프랑스와 스페인
은 이스파뇰라 섬을 프랑스령 서부(현 아이티)와 스페인령 동부(현 도미니카 공화국)로 분할합니다.
한때 캐나다로 이주한 프랑스인의 50% 수준에 이를 정도로 많은 프랑스인들이 아이티로 몰렸고
그들 역시 노예노동을 바탕으로 담배 · 커피 · 설탕 · 인디고 생산과 판매에 주력,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18세기 말 대서양 연안에서 거래된 흑인 노예의 3분의 1(매년 최대 4만명)
이 아이티로 보내졌고 아이티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의 수가 80만명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아이티는 18세기에 설탕과 커피 생산 셰계 1위였으니 한때 프랑스 국부의 무려 70%를 차지할
정도로 효자 식민지 였는데 농장주들은 흑인들이 작업중 혹시라도 사탕수수를 먹지
않을까 염려되어 그 무더운 날씨에도 깡통으로 된 자물쇠를 채울 정도로 짐승 취급을 했습니다.
또 흑인 노예들이 백인인 프랑스 농장주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채찍질은 기본이고 남자
노예를 거세시켰으며 땅에 엎드리게 해서 마차를 달려 팔다리를 분질러 버렸습니다.
사람들을 화형을 시키고 물에 수장시키며 가마솥에 산채로 넣은후 불을 피워 삶아 죽이며,
원형 경기장에 몰아 넣고는 사냥개를 풀어 물어 죽였으니, 조선 총독부와 비교하면.....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후 1794년에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자 독립
운동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 튀르는 혁명정부의 자유 평등 박애에 희망을 걸었으니.....
윤관이 여진족 추장 300여명에게 화의를 하자며 초대해 잔치를 열어 술을 먹인후 몰살
시킨 것처럼 연회에 초대해 남치해서 투옥시켜 옥사시키니 절망한 아이티인들이 궐기합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1801년 11월에 3만여명의 원정대를 아이티(산도밍고)에 파견해 식민지 재탈환과
노예제 부활을 시도하였는데, 아이티 독립군을 붙잡아 가혹하게 처형하는데 배의 선창 짐칸에
아이티인들을 실은후 이산화 황 가스를 살포해 죽이고 빈배로 돌아오길 반복하니 해변은 파도에
시체가 떠밀려오는데 나폴레옹을 존경한 히틀러는 이 아이디어를 얻어 가스실을 만들었는가 합니다?
프랑스 원정대의 초기활동은 순조로운 편이었으나 2년만인 1803년 11월에 최종적으로 아이티
점령을 포기하고 철군하는데 아이티 정복에 실패한 이유는 노예제 부활에 대한 현지인들의
강한 저항과 황열병 그리고 강한 해군력을 가진 영국 해군의 강력한 해상 봉쇄 때문이었습니다.
황열병은 모기에 의해 전파되며 남미 지역에서 유행하는 바이러스성 질병인데 이 병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으니 초기 파병 군인 33,000명 가운데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은 3,000명뿐이었며 또한 영국군이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프랑스 선박
에 대해 해상봉쇄에 나서자 기세가 위축되면서 요청받은 추가 파병을 망설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이티(산도밍고) 는 1804년 1월1일 정식으로 독립했으며 중남미 최초 흑인공화국
이 되었으니....... 이로써 아이티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독립한 국가가 되었으며, 노예제 폐지를 법령화한 최초의 북아메리카 국가가
되었으니 아이티의 독립은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이티는 흑인 노예들이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치는 대혁명을 통해 최초로 독립국가가 됐으니
흑인 노예의 혁명으로 건국된 지구상 유일한 나라이기도 한데 이후 아이티는 베네수엘라 ·
콜롬비아 · 에콰도르 · 파나마 · 페루 등이 독립할수 있도록 병력과 무기에 자금을 지원합니다.
그런데 독립한지 21년이나 지난 1825년 부르봉오아조 루이 18세의 프랑스는 아이티 수도
항구에 군함을 정박시킨후 자기들이 설탕과 커피농장의 나라 아이티를 잃었으니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면서 1억 5천만 프랑이라는천문학적이 배상금을 요구하면서
불응하면 수도를 불바다로 만들고 프랑스군이 상륙해 모조리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나폴레옹이 월털루 전쟁에서 패배해 엘바섬으로 유배된게 1815년이니 10년이 지난 1825년 이 시점
에서 프랑스는 영국 및 미국과 화해해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으니 나폴레옹전쟁의 여파도 수습됐고
예전처럼 영국이 해상 봉쇄를 하지 않는지라 바다를 건너 다시 아이티를 손에 넣을 힘이 있었습니다.
이때 아이티가 거부햇더라면 프랑스는 함포삭겨으로 수돌르 불바다 잿더미로 만든후 프랑스군이
상륙해 아이티는 다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을 것이니 아이티 정부는 굴복해 요구조건을
수락했는데 워낙 거금이라 한꺼번에 갚을수 없으니 분할 지급하는데 비싼고율 이자가 붙는지라
쉽게 줄어들지 않아 다 갚은건 122년만인 1947년이니 오늘날 아이티가 최빈국이 된 이유 입니다!
이후 프랑스는 잃어버린 아이티 대신에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으니 코트디부아르, 말리,
가봉, 기니, 마다카스카르, 중앙아프리카등을 한을 가진 것처럼 마궂바이로 식민지화
햇으며 예전에 식민지화 했던 세네갈이 독립 움직임을 보이자 1944년 대학살을 벌였습니다.
프랑스는 식민지 세네갈인들을 자구 전쟁에 총알받이로 동원햇으니 독일과의 보불전쟁을 시작
으로 1차대전, 2차대전 및 인도차이나(베트남) 전쟁에 수많은 세네갈인들을 징집했는데
차별적인 보스와 형편없는 복지에 약속햇던 연금과 보상금을 주지않으니 항의하자....
비무장 병사들을 장갑차의 기관총으로 400명을 몰살시키니 "티아르예 학살" 이라고 합니다.
5천년 동서고금 역사에서 이웃나라는 예외없이 모두 철천지 원수지간이니 이웃 도미니카와는 사이
가 좋지 못한데, 이는 도미니카 지역이 아이티 보다 기후가 좋은 데다가 인종분포도 흑인 비율이
크게 적었던 점도 두 나라 간 차이를 가져왔으며 결국 19세기 중반 도미니카공화국은 한때
아이티 통치를 받았고,도미니카공화국의 독립과정에서 다수의 아이티인이 학살되기도 했습니다.
독립 이후 아이티 역사도 순탄치 못해서 아이티는 프랑스와 스페인에 영국 등 열강의 침략을 독립
후에도 계속해서 받았고 32차례의 내부 쿠데타에 시달렸으며 1910년까지 18명의 대통령 중에
13명이 쿠데타로 쫓겨났고 미국은 흑인 노예들이 건국한 아이티를 50년간 인정하지 않았으며
1915년부터 1934년까지 미군 점령 아래 들어가는등 프랑스와 미국등 외세의 개입이 계속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