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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 (Antoni Gaudi )
1852. 6. 25 스페인 레우스~1926. 6. 10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출신 건축가.
자유분방한 형태, 풍부한 색채와 질감, 유기적 통일성이 특징인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가우디는 거의 평생을 바르셀로나와 그 근처에서 일했으며 '성가정(聖家庭) 교회'(Sagrada Familia)를 짓는 데 일생을 바쳤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생애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비천한 집안의 구리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연로한 아버지와 조카딸과 함께 살았다.
일찍부터 건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건축을 공부하려고 1869~70년에 스페인의 가장 근대적인 도시이자 카탈루냐 지방에서 정치와 지식의 중심지였던 바르셀로나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군복무와 다른 활동 때문에 8년 뒤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가우디의 건축양식은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학교의 설계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란한 빅토리아 양식을 썼다. 그러나, 곧 기하학적인 모양의 덩어리들을 희한하게 병렬시키는 구성방식을 만들어냈고 그 표면에 무늬를 새긴 벽돌이나 돌, 화려한 자기 타일 및 꽃이나 파충류 모양을 세공한 금속을 붙여 생동감을 주었다. 다른 형식을 띤 세부(細部)를 빼면 이 양식의 전반적인 효과는 이슬람 양식과 그리스도교 양식을 혼합한 스페인 특유의 무어 양식(또는 무데하르 양식)이었다.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은 카사 비센스(1878~ 80)와 카프리초(1883~85), 그리고 1880년대말에 지은 궬 저택과 궬 궁전이 있으며 엘 카프리초를 빼고는 모두 바르셀로나에 있다.
2번째 시기에서 가우디는 역사상 유명한 양식들의 역학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고딕 양식으로는 아스토르가의 주교 궁전(1887~93)과 레온의 카사데로스보티네스(1892~94)를 지었고, 바로크 양식으로 바르셀로나의 카사 칼베트(1898~1904)를 지었다. 그러나, 1902년부터는 이런 전통양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건물들은 몇 가지의 뚜렷한 자연적․종교적 상징물을 제외하고 본질적으로 구조와 재료를 표현했다. 바르셀로나의 벨 에스과르드 별장과 궬 공원, 콜로냐 궬 교회는 내부 기둥이 외부 부축벽없이도 지탱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구조는 평형구조(equilibrated)로 일컬어지는데, 가우디는 이것을 나무가 서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구조의 기본 요소는 사선으로 미는 힘에 견디도록 설계된 비스듬히 서있는 기둥과 미는 힘을 거의 받지 않도록 얇은 판과 타일로 이루어진 볼트 등이다. 그는 자신의 평형구조를 바르셀로나에 있는 두 고층아파트 건물에 적용했다. 카사 바틀로는 기존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특히 정면에 새로이 고안한 평형구조 요소들을 덧붙였다. 카사 밀라에서는 몇 층의 구조에서 마치 연꽃의 잎맥처럼 철근을 이용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자주 그랬듯이, 그는 이 두 건물의 형상과 표면에 산이 많고 해안에 자리잡은 카탈루냐의 특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괴짜였지만 훌륭한 건축가였던 가우디는 카탈루냐 문예부흥에 크게 공헌했다. 미술과 공예 부흥운동인 카탈루냐 문예부흥은 열렬한 반(反)카스티야주의인 ' 카탈루냐주의'로 일어난 정치부흥운동과 결합되었다. 이 두 운동의 목적은 카스티야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고 마드리드가 중심이 된 스페인 정부 밑에서 오랫동안 압박받던 카탈루냐의 생활방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정교회는 카탈루냐 르네상스를 종교적으로 상징한다. 이것은 가우디가 전 생애를 바친 계획으로 1883년에 이 교회 건설을 위탁받았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신앙이 깊어졌으며 1910년 뒤에는 실제로 다른 모든 일을 포기하고 그곳에 은둔하며 일에만 매달렸다. 75세 때 그는 저녁기도를 하러 가다가 전차에 치어 죽었다.
미완성된 성가정교회(계획되었던 탑 4개 중 하나만 세워진 트랜셉트만이 그가 죽기 전에 완성되었다)의 설계도와 모형에는 고딕 양식 성당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나선기둥, 쌍곡면의 볼트와 측벽, 쌍곡포물면 지붕 등이 복잡하게 상징적으로 균형을 이루었다. 이 경이로운 성당 구조는 1960년대의 많은 엔지니어들과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떠한 콘크리트 골조물보다 가우디의 것이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도 초현실주의자와 추상표현주의 화가, 조각가들로부터 거의 무비판적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으나 그의 영향은 그 지역에만 국한되었고 평형구조를 따르는 몇 사람에 의해서만 표현되었다. 그는 국제주의 양식이 성행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거의 모든 전문가와 비전문가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그에게 다가온 디자인의 난관들을 헤쳐나갔던 무한하고 끈질긴 상상력 때문이었다.
평가
가우디의 작품들은 형태, 질감, 다색장식을 매우 다양하게 사용하며 이 요소들을 자유스럽고 표현적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가우디 건축의 복잡한 기하학은 그 건축 구조와 훌륭하게 일치되어, 외벽면을 포함한 전체가 마치 자연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 자연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전체적인 통일성에 대한 감각은 가우디의 생애를 말해준다. 그의 사생활이 바로 직업이었으며 건축예술에 관한 침착한 그의 비평은 삶의 예술에 관한 격언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을 송두리째 건축에 바쳤으며 그에게 건축은 모든 예술의 총체였다.
칸 (Louis I(sadore) Kahn)
1901. 2. 20 러시아 에스토니아 오셀~1974. 3. 17 뉴욕 시.
미국의 건축가.
힘이 넘치는 육중한 형태가 특징인 건물로 단호히 국제주의 양식과 결별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건축가로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갔다. 1924년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를 졸업하고 후에 유럽을 여행하며 건축기념물을 연구․스케치했다. 1941년에는 조지 하우와, 1942~44년에는 하우 및 오스카 스토노로프와 동업했다. 예일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있을 때(1947~57) 만든 첫번째 중요작품은 코네티컷 주 뉴헤이번에 있는 예일대학교 미술관(1952~ 54)이다. 이 건물의 일부는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작품을 연상시키지만 뚜렷이 국제주의 양식을 탈피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뒤를 이은 중요한 작품은 뉴저지 주 트렌턴에 있는 유대인 지역 센터의 목욕장인데, 콘크리트 블록 기둥으로 받친 4개의 피라미드꼴 지붕이 특징이다.
1957년에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건축학교수로 지명되었는데, 이때 설계한 대학교 구내의 리처드 의학연구 센터(1960)는 '도구' 공간과 '편의' 공간 사이의 구분을 나타낸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계단실, 엘리베이터, 공기 흡입구․배출구, 파이프 등의 도구 공간을 4개의 탑 안에 배치해 생활․작업 영역인 편의 공간과 별개로 분리했다. 캘리포니아 주 러호이아에 있는 솔크 생물학연구소(1959~65)에서는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 슬래브를 폭넓게 사용했다. 뉴욕 주 로체스터에 있는 유니태리언 제일교회(1959~62)에서는 네 귀퉁이에 있는 탑의 창문을 통해 회당 내부까지 햇빛이 비치도록 했다. 비평가들은 그의 다른 작품을 평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 교회에 대해 거칠고 육중하며 강건하고 기념비적이라는 말을 쓴다. 펜실베이니아 주 브린모어에 있는 브린모어대학 기숙사(1961~65)에서도 탑을 이용해 빛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였다. 방글라데시 데카에 있는 주의사당 건물과 아마다바드에 있는 인도 경영연구소를 설계할 때는 건조하고 더운 기후에서 햇빛을 조절하는 전문적인 문제에 큰 비중을 두었다. 이 두 건물의 벽에는 기하학적 모양의 큰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빛을 받아들이면서도 실내에 직접 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고안한 것이다. 뉴헤이번에 있는 마지막 작품인 예일대학교 영국 미술관은 1977년 완성되었다. 빈센트 스컬리 2세가 쓴 〈루이스 Ⅰ. 칸 Louis Ⅰ.Kahn〉(1962)은 칸의 작품을 가장 잘 분석한 책이다.
네르비 (Pier Luigi Nervi)
1891. 6. 21 이탈리아 손드리오~1979. 1. 9 로마.
이탈리아의 공학자․건축가.
특히 철근 콘크리트로 된 장(長)스팬 구조에 기술적인 천재성과 극적인 디자인 감각을 펼쳐 명성을 얻었다. 주요작품으로는 토리노 박람회 때 세운 103m 스팬의 조립식 아치(1949~50)와 공동작품인 이탈리아 최초의 마천루, 밀라노의 피렐리 빌딩(1955)이 있다.
그는 1913년 볼로냐대학교를 졸업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이탈리아 군 공병대 중위로 복무했고 전쟁이 끝나자 볼로냐와 피렌체에서 건축기사로 일했다. 1926~27년 주요 첫 작품으로서 나폴리에 있는 극장을 설계했고 이어서 1930~32년에는 피렌체 시영경기장(베르타스타디움)을 세웠다. 1932년 조카와 함께 로마에 네르비와 바르톨리라는 하청회사를 세워 줄곧 여기서 활동했다. 1935년 이탈리아 공군이 주최한 이탈리아 전지역에 세울 항공기 격납고 설계 현상공모전에 적은 비용으로 세울 수 있는 긴 스팬의 콘크리트 볼트 구조를 출품해, 결국 이 계획을 맡게 되었고 1935~41년 오베르텔로․오르비에토․트레델라고에 격납고를 건설했다. 그러나 이 모든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었다.
네르비가 처음 지은 건물들은 구조적인 문제점들에 대해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끊임없는 연구의 결과로서 관념적인 디자인의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창조성은 건물 설계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이탈리아 해군을 위해 콘크리트 모함을 만들려고 했으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 벽 두께 3.6㎝, 무게 165t의 엔진 동력으로 움직이는 콘크리트 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배는 그의 아내 이름을 따서 '이레네'라고 불렀다. 곧이어 몸체 두께가 1.3㎝밖에 안되는 11.6m의 쌍돛대 범선 '넨넬레'를 만들었는데, 이 배들은 가벼움과 강도를 높이기 위해 강철철망을 사용한 고밀도 철근 콘크리트 재료인 '페로체멘토'로 만들어졌다. 이 재료는 네르비의 디자인 감각에 변화를 주는 활력소가 되어 새로운 형태의 건축을 출현시켰다.
1947년부터 로마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디자이너는 3가지 방법으로 진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즉 힘의 균형과 재료의 저항력을 지배하는 물리적인 세계의 법칙의 완전한 조화를 이해하고 각 문제의 핵심 요소들을 정확하게 해석하며 과거 방법들의 한계를 거부함으로써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50년 유네스코가 파리에 새 본부를 짓기로 결정했을 때 그도 설계가로 뽑혔다. 함께 작업했던 마르셀 브로이어는 네르비가 이 설계에서 "1가지 시스템, 즉 기하학적 리듬을 지닌 시스템을 끊임없이 연구"했다고 묘사했다. 또한 뒷날 "콧대 높고 거리낌없는 무책임이 천재의 속성이라 한다면, 이는 천재가 비인간적이라는 뜻이지만 네르비는 이 개념을 뒤집어놓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55년 네르비는 여러 건축가들과 함께 이탈리아 첫번째 마천루인 피렐리 빌딩 설계에 참여했다. 이 건물은 사무용 건물로서는 처음으로 25m의 긴 스팬 구조를 사용했다.
미국의 건축가와 기사들은 오랫동안 마천루를 설계하고 건축해왔으나 여러 개의 작은 스팬으로 이루어진 골조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네르비는 베르가모의 연구소에서 실험을 거쳐 종종 써왔던 실험적 모델을 피렐리 빌딩 설계에 사용했다. 그가 2번째 설계한 마천루는 역시 공동작품으로 몬트리올에 지어졌으며, 3번째 것은 50층 원통형 탑인 '오스트레일리아 스퀘어'(1962~69, 시드니)이다. 그당시 이 건물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1957년과 1958~59년에는 1960년 로마 올림픽을 위해 2개의 호화로운 운동경기장을 설계했다.
그가 미국에 지은 최초의 건물은 뉴욕 항만청에서 위탁받아 설계한 맨해튼에 있는 조지 워싱턴 다리 버스 터미널로서 1961~62년에 세워졌다. 곧이어 그는 뉴햄프셔의 다트머스대학 체육관(1961~62)을 조립식 볼트 구조로 설계했으며 피에트로 벨루스키와 공동으로 중심 네이브의 수직공간을 수직으로 서 있는 휘어진 네 벽이 극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대성당을 세웠다.
1961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찰스 엘리엇 노턴좌(座) 시학교수로 임명되었고 1963년에는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뒤 작품을 인정받아 미국건축가협회(AIA)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 이탈리아와 여러 나라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뒤 1960년대말부터는 건축활동을 줄여나갔다. 그는 두 아들, 구조공학자 안토니오와 건축가인 마리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설계분야에서만 활동했고 이때부터 많은 작품들을 외국건축가들과 공동으로 만들었다.
네르비의 주된 관심은 미학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많은 작품은 시적 경지에까지 이른다. 그의 건물들은 로마의 가티 양모공장(1953)에 있는 슬래브의 기하학적인 구성, 토리노에 있는 노동자 궁전의 중이층(中二層) 등에서 뛰어난 표현력을 보이고 있다. 그는 겹쳐지고 구부러진 플레이트와 구불구불한 표면이 상호침투하는 평면을 사용함으로써 건축설계에 새로운 3차원적인 어휘를 끌어들였다. 그는 "구조물의 재료와 정력학, 건축기술과 경제적 효율성, 기능적 필요는 건축언어에서 사용되는 어휘"임을 건축가들에게 상기시켰다.
그가 건축에 이바지한 바는 1851년 런던 대박람회 때 수정궁을 세워 건축혁명을 일으킨 조지프 팩스턴과 비교되어 왔다. 두 사람 모두 규격화된 구조와 조립식 시공, 물리적이며 시각적인 가벼움을 강조하면서 헌신적으로 연구촵개발하는 끊임없는 과정 끝에 지극히 합리적이고 혁신적인 구조를 탄생시킨 본보기이다.
니마이어 (Oscar Niemeyer (Soares Filho)(1972) )
1907. 12. 15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
브라질의 건축가.
라틴아메리카 근대 건축의 대표적 인물이며 특히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 세운 여러 건물로 유명하다.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국립미술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했고 1934년 졸업하기 바로 전에 브라질 근대건축 운동을 이끈 루시우 코스타의 사무실에 취직했다. 1937~43년에 코스타와 함께 일하면서 브라질에서 최초의 근대건축 대작(大作)으로 꼽히는 교육보건부 청사를 설계했다. 그때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자문을 맡았으므로 그 건물은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1939~40년에 열린 뉴욕 세계박람회에서는 역시 코스타와 합작으로 브라질 관(館)을 설계했다. 그가 혼자 설계한 첫번째 주요작품은 벨로리존테 교외도시인 팜풀라 도시계획이다. 이 작품은 당시 벨로리존테의 시장이었던 올리베이라로부터 1941년에 위촉받은 것으로 자유로이 흐르는 듯한 형태의 건물들이 특징적이다. 그뒤로 여러 설계를 위탁받았고 1947년에는 뉴욕 시에 있는 국제연합(UN) 건물의 설계작업에 브라질 대표로 참가했다.
1956년 브라질 대통령이 된 올리베이라에게서 새 수도인 브라질리아 도시설계를 위탁받았다. 그는 정부청사를 설계하는 것에는 동의했으나 브라질리아 도시 기본계획은 전국적으로 공모하자고 제안했으며 마침내 그의 스승인 루시우 코스타가 입상했다. 1956~61년에는 브라질리아의 정부청사 건축을 맡은 노바캅(NOVACAP)의 수석 건축가로 일했고 대통령궁, 브라질리아 팰리스 호텔, 대통령 전용 예배당과 성당을 설계했다. 1961년부터 다시 개인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파리와 이스라엘에서 살았다. 1966년에는 프랑스 니스 근처에 있는 그라스 도시설계를 맡았고 파리의 프랑스 공산당 당사(黨舍)를 설계했다. 1968년부터는 리우데자네이루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1968년 브라질리아의 국방부 청사와 1976년 알제리 국민당 중앙당사가 있다. 그는 세계적인 건축상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1963년에는 레닌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라파엘로 (Sanzio Raffaello)
1483. 4. 6 우르비노 공국 우르비노~1520. 4. 6 로마.
이탈리아 성기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이자 건축가.
그의 작품은 유연한 형태와 평이한 구도뿐 아니라 인간의 고결함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적 이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1508년부터 로마에서 바티칸 궁을 개조하는 대규모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계획에는 브라만테가 성베드로 대성당을 재건하고(1514년 브라만테가 죽은 뒤 이 작업은 라파엘로에 의해 완성되었음),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라파엘로는 교황이 거처하는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를 장식(1508~11)하는 일을 맡았는데, 여기에 자신의 가장 중요한 프레스코화인 〈성체에 관한 논쟁 Disputa〉․〈아테네 학당 School of Athens〉을 그렸다.
우르비노에서 보낸 어린시절
라파엘로는 조반니 산티와 마자 디 바티스타 치아를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1491년에 죽었다. 16세기의 화가이자 전기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라파엘로의 아버지는 "뛰어난 데라고는 전혀 없는 화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교양있는 사람으로서 우르비노 궁정에 유행하는 진보적 미술과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쳤고, 1494년 죽기 전에 11세가 된 아들 라파엘로에게 궁정의 인문주의 철학을 소개했는데, 이를 통하여 라파엘로는 과거의 문화적 유산과 16세기를 내다보는 새로운 사상들을 배울 수 있었다. 우르비노는 라파엘로가 태어나기 7개월 전에 죽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이 다스리는 동안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교양있는 군주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을 구현한 페데리코 공은 모든 예술을 크게 장려했고, 도나토 브라만테,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를 비롯하여 뛰어난 인물들을 아름답게 재건한 자신의 대저택으로 초빙했다.
페루자와 피렌체의 다른 주요미술가들도 라파엘로에게 영향을 끼쳤지만 특히 우르비노는 라파엘로가 이후에 배우게 될 모든 지식의 기초를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이 젊은 미술가의 놀라운 조숙함 또한 이 도시의 문화적 생동감 덕분이라고 볼 수 있는데, 라파엘로는 겨우 17세였던 16세기초에 이미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페루자에서 페루지노에게 배운 도제 시절
조반니 산티가 아들을 데리고 페루자로 가서 움브리아 화파의 위대한 화가 피에트로 페루지노 밑에 도제로 보냈다는 바사리의 말은 수긍할 수 없다. 라파엘로는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겨우 11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파엘로가 페루자로 간 날짜를 너무 뒤로 미룰 수는 없다. 일부 학자들은 그 연대를 1495년으로 못박고 있는데, 확실한 것은 라파엘로가 1500년 5월 13일에는 이미 우르비노를 떠났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공증인이 서명 날인한 증서가 분명히 입증하고 있다. 1500년 12월 10일에 작성된 또다른 서류에는 당시 '대가'라고 불리는 이 젊은 화가가 아버지의 제자와 함께 1502년 9월 13일까지 제단화를 완성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라파엘로는 이때 이미 페루지노 밑에서 도제살이를 시작했고, 자신의 재능을 당장 입증했기 때문에 1501~03년에는 꽤 중요한 주문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 주문은 페루자의 산프란체스코 교회에 있는 오디 예배당에 〈성모의 대관식 Coronation of the Virgin〉을 그려달라는 것으로, 이 그림은 1797년 나폴레옹 군대가 훔쳐갔다가 1815년에 바티칸에 반환했다. 페루지노는 1498~1500년에 페루자의 콜레조 델 캄비오에서 프레스코화를 그렸는데, 덕분에 페루지노 작업실에서 일하던 라파엘로는 광범위한 전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실제적 가르침뿐 아니라 차분하고 정교한 페루지노의 화풍도 라파엘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1481~ 82년에 페루지노가 로마 바티칸 궁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린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 Giving of the Keys to St. Peter〉는 라파엘로의 첫번째 주요 작품인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식 The Marriage of the Virgin〉(1504)에 영감을 주었다. 페루지노의 영향은 원근법 강조, 인물과 건축물 사이의 점층적 관계, 서정적으로 감미롭게 묘사된 인물 등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초기 그림에서도 이미 라파엘로의 감성은 스승의 감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건축물과 관련된 인물의 배치는 페루지노보다 덜 엄격하며,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각 인물의 배치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활기에 차 있다.
라파엘로가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식〉을 그린 직후에 완성한 3점의 소품 〈기사의 꿈 Vision of a Knight〉․〈3가지 은총 Three Graces〉․〈성 미카엘 St. Michael〉은 젊은 참신함만이 아니라 자신의 표현양식을 이루는 요소들을 다루는 능력이 완전히 무르익은 것을 보여주는 서술적 그림의 빼어난 본보기들이다. 페루지노한테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1504년말이 되자 라파엘로는 모범으로 삼을 다른 모델을 찾아야겠다고 느꼈고 지식에 대한 욕망으로 페루자 밖으로 관심을 돌렸다.
피렌체 시절
바사리는 라파엘로가 페루자 화가인 베르나르디노 핀투리키오를 따라 시에나로 갔다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하고 있는 작업(그들은 시뇨리아 궁을 장식하기 위해 각기 앙기아리 전투와 카시나 전투를 주제로 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끌려 그곳으로 갔다고 막연하게 전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1504년 가을까지는 피렌체에 도착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첫번째 피렌체 방문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작품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피렌체의 예술과 처음으로 실질적인 접촉을 갖게 된 것은 1504년경이다.
피렌체 문화는 그가 이미 갖고 있던 모든 개념을 더욱 강화시켜준 동시에 좀더 넓고 새로운 지평을 그에게 열어주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이것은 수동적인 흡수가 아니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문화의 기준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그리고 전성기 르네상스의 보편화된 이상주의를 지지한 피렌체 화가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작품만이 아니라, 고딕 양식으로부터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신기원을 이룩한 자연주의의 선구자인 '마사초의 옛 작품'도 연구했다고 조르조 바사리는 기록하고 있다. 라파엘로가 남긴 스케치들 가운데 일부는 그가 조각가인 도나텔로와 베로키오 및 판화가인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의 작품까지 거슬러 올라가 연구한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인체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방법을 열심히 연구했었다.
그래도 역시 피렌체에서 라파엘로의 주요한 스승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였다. 라파엘로가 1505~07년에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들, 특히 〈오색방울새의 마돈나 The Madonna of the Goldfinch〉․〈프라토의 마돈나 Madonna del Prato〉․〈에스테헤의 마돈나 The Esterhazy Madonna〉․〈아름다운 정원사 La Belle Jardiniere〉 같은 마돈나 연작에는 1480년부터 회화 분야에 커다란 혁신을 이룩하고 있었던 다 빈치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이 그림들은 다 빈치의 구도․인물배치․몸짓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15세기 작품에서는 보기 드물게 편안하고 단순한 배경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라파엘로는 또한 다 빈치의 명암법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다 빈치의 명암대조법(chiaroscuro : 자연광이나 고정된 광원으로 인해 생긴 밝음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을 알맞게 이용했고, 특히 다 빈치의 스푸마토(sfumato : 선 대신 극도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음영을 이용하여 형태나 이목구비의 윤곽을 나타내는 기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다 빈치를 능가하는 새로운 인물 유형을 창조했는데, 그가 창조한 둥글고 온화한 얼굴은 단순하고 전형적인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지만 숭고한 완전함과 평온함의 경지로 승화되어 있다. 1504~08년 라파엘로는 피렌체에 계속 거주한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향인 우르비노에 갔었으며 당연히 페루자에도 들렀다.
1507년 그에게 오늘날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Deposition〉를 그려달라고 주문한 사람은 페루자의 한 귀족 여인이었다. 이 그림에는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나 있지만, 이 두 화가의 음울한 강렬함과 열정은 라파엘로 자신의 참신하고 차분한 시각으로 변형되어 있다.
로마에서 보낸 말년
라파엘로는 1508년말경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갔다. 브라만테가 같은 고향 사람들을 교황청으로 데려오고 싶어서 교황에게 제의한 덕분이었다. 이무렵 라파엘로는 로마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이 젊은 화가는 로마에 오자마자 변덕스러운 율리우스와 교황청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대가로서의 권위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는 로마에 동화하려고 애쓰는 한편 로마 귀족들의 정신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화가 중의 왕자'라고 불릴 만큼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인문주의자 첼리오 칼카니니는 나중에 라틴어로 쓴 경구에서 라파엘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로마를 건설하는 데에는 고대의 수많은 영웅과 오랜 세월이 필요했고, 로마를 파괴하는 데에는 수많은 적과 수백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제 라파엘로는 로마 안에서 로마를 되찾았고 그것을 발견했다. 찾아내는 데에는 위대한 이가 필요하지만 발견은 신이 주관하신다."
이 경구는 라파엘로의 품행이 로마 전체의 존경을 얻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로마 귀족들은 그를 그들 자신과 동등한 인물로 여겼고, 비비에나 추기경은 1514년 자기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싶어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율리우스 2세의 후계자이자 위대한 메디치 로렌초의 교양있는 아들인 교황 레오 10세는 라파엘로를 추기경으로 임명할 작정이었다고 한다.
라파엘로는 짧은 생애의 마지막 12년을 로마에서 보냈는데 이는 열에 들뜬 듯한 정력적인 활동으로 잇따라 걸작을 낳은 시기였다. 그는 어떤 시련에도 겁을 먹지 않았다. 모든 일을 겸손과 신중으로 대했지만 매번 새로운 높이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항상 성공을 거두었다. 바티칸 궁의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를 장식하는 일은 1508년말에 시작하여 3년도 채 지나기 전에 완성했는데, 율리우스 교황의 이념과 교양을 반영하고 역사 속의 로마 교회를 찬양하는 이 일은 아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는 그에게 이 일을 주문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거처하고 집무하기로 되어 있던 바티칸 교황청의 수많은 방들 가운데 하나였다. 율리우스 2세는 매우 교양있는 사람이어서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뛰어난 인물들을 주위에 불러모았다. 그는 4세기에 지은 원래의 교회를 허물고 새로운 성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일을 브라만테에게 맡겼고,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무덤을 만들 것을 의뢰했으며 미켈란젤로는 원하지 않았으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을 장식하게 했다. 또한 라파엘로의 천재성을 꿰뚫어보고, 궁정의 인문주의자들과 토론한 철학적 주제를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의 프레스코화로 그리는 일을 라파엘로의 손에 맡겼다. 이 주제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통해 로마 교회의 권력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 프레스코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작품은 〈성체에 관한 논쟁〉과 〈아테네 학당〉이다. 과거와 현재의 로마 교회 대표자들이 모여 있고 그 위로 천상에 성부와 성자가 예언자 및 사도들과 함께 있는 거룩한 광경을 그린 〈성체에 관한 논쟁〉은 그 도상을 통하여 교회의 승리와 진리의 승리를 같은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과거와 현재의 철학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속세의 지식 또는 철학을 복잡하게 그려낸 알레고리이며, 플라톤의 사상이 역사적으로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황의 거처를 장식하는 작업은 1513년에 율리우스가 죽고 후계자 레오 10세가 즉위한 뒤인 1517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중요하고 큰 일을 맡고 있으면서도 라파엘로는 작업의 마지막 부분은 완전히 제자들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다른 야심작들을 한꺼번에 시작했다. 그가 이무렵에 진행한 일들은 다른 건물들을 종교적 또는 세속적인 그림으로 장식하는 일, 초상화, 제단화(여기에 그린 그의 온화한 성자들과 성모는 새로운 종교적 유형을 낳게 했음), 태피스트리의 밑그림, 접시 도안, 무대의 배경그림 등 지극히 다양했다. 그는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의 작업을 하는 동안, 산엘리조델리오레피치 교회를 설계했는데 이것이 건축과 관련한 그의 첫번째 작업이었다. 1513년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는 산타마리아델포폴로 교회에 자신의 장례식용 예배당을 설계하고 장식해달라고 라파엘로에게 부탁했다. 라파엘로는 키지의 저택인 빌라 파르네시나를 이미 장식한 적이 있었다. 1514년 레오 10세는 브라만테와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할 사람으로 라파엘로를 선정했고, 그해 말에 브라만테가 죽자 이 작업을 감독하게 된 라파엘로는 교회 설계를 방사상의 그리스 양식에서 길쭉한 라틴 양식으로 바꾸었다. 브라만테는 바티칸 궁의 로지아(loggia : 한쪽만 벽이 있는 복도)들을 장식하는 일도 맡고 있었는데, 이 일도 라파엘로가 이어받았다. 이 서정적 장식에 나타난 감미로운 단순성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웅장함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제작한 많은 작품들에는 철학적 깊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인문주의자이며 신플라톤주의자라는 평판이 로마 전역에 널리 퍼졌다. 그가 로마에서 사귄 친구들 중에는 수많은 미술가들뿐만 아니라 카스틸리오네, 벰보 추기경, 풍자 작가인 피에트로 아레티노, 비비에나 등을 비롯한 문필가들도 여럿 있었다. 1519년에는 이탈리아의 서사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가 쓴 희극 〈바뀌어진 아이들 I suppositi〉의 무대장치를 설계했다. 라파엘로는 유능한 학자였고 특히 고대 유물에 관심이 많았다. 1515년 8월에 교황 레오 10세는 그에게 귀중한 라틴어 글귀가 새겨진 대리석상을 보존하는 일을 감독하도록 명했다. 라파엘로는 2년 뒤에 로마의 유물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로마의 고고학 지도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의 라파엘로는 오랜 과거의 것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고대 유물 보존계획을 감독하는 동시에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벗어난 새로운 표현양식을 보여주는 설계도를 창조하고 있었다. 로마의 빌라 마다마는 1516년 이후에 착공되었는데, 이 건물에 대한 그의 설계도는 이후 이탈리아 건축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되는 새로운 건축학적 개념의 본보기였다. 건축만이 아니라 그림에서도 그는 미래를 예견했다. 마지막 작품인 〈그리스도의 변용 Transfiguration〉 (1517 의뢰)에서 그는 혼란스럽고 불안한 새로운 세계를 예견한 듯한 새로운 감성을 보여주었는데, 이 그림의 구도는 이미 바로크적인 표현으로 기울어져 있다.
라파엘로는 37번째 맞는 생일에 세상을 떠났다.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신비로운 후광이 그를 둘러쌌고, 교황청 사람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장례 미사는 바티칸 교황청에서 거행되었고 마지막 작품인 〈그리스도의 변용〉이 그의 관 앞에 세워졌다. 그의 유해는 로마의 판테온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