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 예수님
2024.12.8. 성찬주일예배
오늘 주님 모시고 뜻깊은 성찬식을 맞이했는데요. 성찬식의 원조는 예수님이 이 땅에 있는 제자들과 마지막 밤에 그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가졌던 유월절 만찬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살펴보면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제사가 성찬식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포로 되어 있던 억눌린 자기 백성을 위해서 바로에게 보여준 아홉 가지 재앙에도 바로가 강팍하자 마지막 방법인 장자의 재앙을 내리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 년 된 어린 양을 잡아다가 그 피를 문 양쪽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피 바른 문 집안에서 불에 구운 양고기,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 바른 문, 그것은 애굽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사자가 지나갈 때 그 집의 장자와 육축의 첫 새끼가 죽는 심판의 시간이었습니다만 피 바른 문 안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만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생명을 맛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길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따릅니다만 그 복음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공의의 심판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설명하기를 우리 주님의 피 묻은 손이 각 사람에게 임했는데 그 손을 붙잡고 예수님을 끌어안은 자는 구원이요, 그 손을 뿌리치면 그 손이 되돌아와서 심판이 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어린 양 예수님’ 오늘 말씀의 제목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성령 안에서 예수님이 믿는 자의 각 사람에게 계시지만 예수님의 현주소는 하늘나라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통치하시고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버지의 마음을 좇아서 심부름하시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나이 삼십이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다가가셨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이 외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로 알고 있었는데 세례 요한은 주님의 마음을 좇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저는 계시록 말씀을 묵상하면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을 왜 계시록에서는 그 화려한 이름, 권세 있는 이름도 많은데 어린 양으로 예수님을 불러드렸을까? 이 땅에 예수님이 어린 시절과 십 대와 이십 대를 사셨던 곳은 갈릴리 나사렛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십 때부터 삼년 반 동안 공생애를 사셨는데 그 모습은 사복음서에 잘 나와 있지요. 그런데 나사렛에서의 생활은 딱 한 군데 나옵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예수님 나이 열두 살에 어린 나이 때 예루살렘으로 가족들과 함께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이 그들의 일행 속에 없다는 것을 예수님의 육신의 부친 요셉과 모친 마리아는 하룻길을 지나고 나서 발견했습니다. 찾고 찾다 보니까 사흘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화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지요.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님을 좇아서 나사렛에 되돌아가셨지만 그 뒷 말씀이 참 중요합니다.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예수님이 육신의 부모님의 실수를 감싸 안으면서 순종의 아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양 되심은 ‘순종의 아들’의 모습입니다. 힘 있는 장군의 모습도 아니고요, 돈 많은 부자의 모습도 아니고 권력을 가진 권세자의 모습도 아니고 아버지와 어머니께 순종하는 그 착한 아들 말입니다. 이 모습을 보여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기 앞서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물에서 나오자마자 하늘이 열리고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삶을 증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존재가 예수님의 생애를 함축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과 기쁨의 관계 말입니다. 예수님이 뭐 대단한 일 하신 것 아니예요. 육신의 부친이 하셨던 그 목수의 가업을 이어받아 예수님도 나사렛 목수였습니다. 손에 굳은 살이 박혔을 것이고 얼굴은 그을렸을 것이고 이사야 말씀에 의하면 흠모할 만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잘 생기지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요즘 묘사되고 있는 예수님의 얼굴은 모델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거친 삶을 꾸려가시기에 단련된 예수님! 갈릴리 나사렛 목수의 삶이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아들의 삶 말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7장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어느 한 산에 갔는데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었지요. 그래서 변화산이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나사렛에서 살던 삶의 모습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쁨이었는데 공생애라는 드러나는 삶 속에서도 우리 예수님의 삶은 나사렛의 삶의 연장선으로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요, 하나님이 생각해봐도 참 고맙고 기쁨이 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었으며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처럼 증언하셨을까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라면 이 말씀을 무시해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흐르고 있고 우리도 예수님 모시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쁨이 되려면 이 말씀은 우리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증언입니다. 내 아들 예수의 생명을 가진 자라면 내 아들 예수처럼 살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순종의 아들로! 예수님의 생명이 없다면 구원도 없고 그 삶이 저주입니다. 그래서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했지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은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께 호소합니다. “이 잔을 꼭 마셔야 합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멘!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비디오 동영상을 찍듯이 자세히 기록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 우리 예수님의 은밀한 기도 내용 말입니다. 이처럼 기도하고 이처럼 살라는 뜻 아닐까요? 어린 양처럼 말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부활과 승천이지요.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부끄러움인데 개의치 않으셨다! 영광의 보좌에 앉기 전에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그 길을 꼭 걸어가셨어야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수치와 허물과 죄를 담당해주셔야만 보좌 우편의 영광도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 그리고 지금도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가 자기 부인하지 아니하면 순종의 아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의로 주님 앞에 섰다가는 걸레 조각 같아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가려주시고 예수님이 새 생명을 주시고 예수님이 당신의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셔야만 우리는 오늘도 주님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다음으로 계시록 7장과 14장에는 예수님을 ‘목자’라고 설명합니다.
계시록 7장에는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리스도인들이지요. 주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실 당시에도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나는 양들을 위한 목자다. 그것도 선한 목자다.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주님이 우리의 목자 되신다는 것이 얼마나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는지요. 우리 몸 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 식구님들 한 분 한 분의 목자가 되신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요. 나라가 참 혼란스러운 이때 우리 주님의 주권이 살아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들의 목자가 되십니다. 저는 어제 저녁에 기도하다가 잠깐 잠깐씩 뉴스를 보기도 했지만 마음에 평강이 있었어요. ‘주님이 우리 기도를 듣고 계신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알며 양 또한 목자를 압니다. 이 땅의 지도자들이 우리의 목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불안해서 한 시간도 쉼을 갖지 못하지요. 우리의 목자,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땅을 다스리시고 보호하시는 분은 우리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어린 양은 양들을 인도하시는데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는 자가 어린 양에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푸른 초장으로 생명수 샘으로도 인도하시지만 죽음이 한 발자국 앞에 있는 전쟁터에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어느 길로 인도하시던지 힘있게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주님이 양들을 위한 길을 인도하십니다. 처음에는 왜 이런 길로 나를 인도하실까 잠시 번민에 빠진 적도 있겠지요. 그러나 머리를 흔들어 버리시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참 옳다. 주님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믿음과 행복을 위해서 인도하시는 길은 그때마다 생각할수록 감사가 되고 기대가 됩니다. 2024년을 우리 몸 된 교회의 머리 되시고 목자 되셔서 인도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한 날 한 날 순간순간 예수님이 내 앞에 서주시고 친히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목자라면, 어린 양이시면서 나의 목자라면 우리는 힘 있게 따라갈 마음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예수님은 계시록 19장에 보면 우리의 ‘신랑’입니다.
계시록 19장에는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말씀에도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할렐루야! 어린 양의 아내, 어린 양의 신부 된 교회와 성도들 오늘 나에게도 예수님이 나의 신랑 되시고 나의 흔들림 없는 남편이 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성도와 교회가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의 마지막은 해피 엔딩입니다. 웨딩 마치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 땅에 나사렛 예수님으로 오셔서 순종의 아들로 사셨던 주님,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나사렛 예수님, 그 죽으신 십자가 때문에 부활과 승천과 보좌에 앉으시는 영광이 주어진 예수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저와 여러분이라면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저와 여러분이라면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의 자녀로, 순종의 아들로, 어린 양의 생명과 삶을 가진 오늘날의 주님의 양으로 힘있게 살아야 될 줄 압니다. 어린 양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목자를 따르는 그 길에서 어디로 가든지 힘있게 따르는 강한 어린 양, 강한 주님의 양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주님’ 찬송을 같이 부르면서 마치고 싶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주님! 꿈에도 소원은 주님! 이 정성 바쳐서 주님!
주님이여 오셔요. 이 나라 살리는 주님, 이 겨레 살리는 주님
주님이여 어서 오셔요. 주님이여 오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