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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안씨(忠州安氏) 안열(安烈, 또는 安悅)이라는 분이 중국에서 고려로 와서 벼슬을 했다(自中國來仕高麗)는 기록이 있다.
「성균진사안군묘표(成均進士安君墓表)」의 "自中國來仕高麗"라는 기록을 찾고 난 뒤 더 검색을 하다보니「안씨족사탐구」블로그에 이미 올려져 있는 내용이군요. 쩝...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1565)』, 안일(安軼)과 안숭양(安崇讓)의『사마방목(司馬榜目)』기록을 살펴보면, 충주안씨(忠州安氏) 가계도를 짐작 할 수 있는데,
안열(安烈) - ?-?-? - 안선복(安善福) - 안효례(安孝禮) - 안계조(安繼祚) - 안현(安顯) - 안방진(安邦進) - 1남 안식(安軾), 2남 안집(安輯), 3남 안일(安軼)... 그리고 3남 안일(安軼, 1530~1593)은 안숭검(安崇儉, 1554~1619)과 안숭양(安崇讓, 1560~?)이라는 아들이 있다.
1. 1629년 간행된 이항복(李恒福, 1556~1618)선생의『백사집(白沙集)』3권에 충주안씨(忠州安氏) 안일(安軼,1530-1593)공의 묘표(墓表) 기록이 있어 여기에 옮깁니다. 성균진사 안군 묘표(成均進士安君墓表) a_062_224a
安君諱某。字某。上世有諱烈。自中國來仕高麗。官至贊成。其後諱顯。造紙署別提。生諱方進。祥原郡守。娶弘文館直提學尹碩輔女。生三子。君其季也。賢有行。侍祥原君。無子弟過。旣長。力學工書。中隆慶庚午司馬。性恬靜和易。不慍人之不知。唯以山水自娛。嘗得春川之可一山中五芝村。以存晩計。人或疑其過邃。壬辰之亂。君挈家小以全。然後始服其先見。寇退。君曰。吾樂於斯而全於斯。生宜搆屋。死宜藏魄。以明年八月六日。病卒于山中。壽六十四。君之配鄭氏。後君二十日卒。貞而有德。縫羃無違。以是歲某月某日。同葬于是山播命之麓某向之原。遺命也。子曰崇儉。東宮洗馬。其次曰崇讓。成均生貟。女二人。皆適士人。後八年。崇儉以君之狀。徵銘於余。余曰。以君之德之行。宜顯于時。止於是而無有知者。命耶。抑間有知者。雖有如余之詳。而又不能薦揚于朝。則誰之咎耶。身後窺管。未足以盡其豹班。訟之康衢。安得喙之長三尺也。是爲銘。
성균관 진사 안군(安君)의 묘표
안군(安君)의 휘는 모(某)이고 자는 모이다. 그의 상세(上世)에 휘 열(烈)이란 분이 있어 중국으로부터 고려에 와서 벼슬하여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그 후 손인 휘 현(顯)은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였는데, 별제가 상원 군수(祥原郡守) 휘 방진(方進)을 낳았으며, 군수는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윤석보(尹碩輔)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았는데, 군이 그 막내이다.
군은 어질고 착한 행실이 있어 상원군(祥原君)을 모실 적에 자제(子弟)의 과실이 없었다. 이미 자라서는 힘써 배워서 글에 능하여 융경(隆慶) 경오년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군은 성품이 평온하고 조용하고 화락하고 소탈하여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노엽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오직 산수(山水)를 스스로 좋아하여, 일찍이 춘천(春川)의 가일산(可一山) 안에 있는 오지촌(五芝村)을 얻어서 만년의 거주처로 삼으려 하자, 사람들이 혹은 지대가 너무 깊은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임진년 난리에 군이 가족들을 거느리고 들어가서 가족을 온전히 보호한 다음에야 비로소 군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왜구(倭寇)가 물러가자, 군이 말하기를, “나는 여기에서 즐기고 여기에서 온전히 보호했으니, 살아서는 의당 여기에 집을 짓고 살 것이고, 죽어서는 의당 여기에 체백(體魄)을 묻을 것이다.”하였는데, 그 명년 8월 6일에 산중에서 병으로 작고하니, 향년이 64세였다.
군의 배(配) 정씨(鄭氏)는 군보다 20일 뒤에 작고했는데, 바르고 덕이 있었으며, 집안을 다스리는 데 있어 이리저리 미봉하고 덮어 가려서 남편의 뜻을 어김이 없었다. 이해 모월 모일에 이 산의 파명(播命)의 기슭, 모향(某向)의 언덕에 합장하였으니,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아들 숭검(崇儉)은 동궁(東宮)의 세마(洗馬)이고, 그 다음 숭양(崇讓)은 성균관 생원이다. 딸 두 사람은 모두 사인(士人)에게 시집갔다.
군이 작고한 지 8년 뒤에 숭검이 군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銘)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의 덕과 행실은 의당 세상에 드러났어야 할 터이나, 여기에 그치고 알아준 이가 없는 것은 운명이란 말인가. 또한 간혹 나처럼 자세하게 알아준 자가 있기도 했으나, 조정에 천거하여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누구의 허물이란 말인가. 죽은 뒤에 대롱으로 엿보자면 표범의 무늬를 다 보기에 부족하거니와(대롱 구멍으로 표범을 보면 표범의 무늬 전체를 다 보지 못하고 겨우 그 일부분의 무늬밖에 볼 수 없다는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어떤 사물의 전체를 다 알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강구(康衢)에서 드러내 말하자니 삼척(三尺)의 긴 부리를 어떻게 얻을까[강구는 사통 오달(四通五達)의 큰 길거리를 말하고, 삼척(三尺)의 긴 부리〔啄〕란 부리가 긴 새는 많이 지저귀지 않는다는 데서 즉 말이 없는 것을 의미한 말로, 공자(孔子)가 초왕(楚王)과 만난 자리에서 초왕이 공자에게 말하기를 요청하자, 공자가 초 나라의 시남의료(市南宜僚)와 손숙오(孫叔敖)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무위(無爲)의 덕으로써 전쟁을 종식시켰던 사실을 말하면서 자신도 삼척의 부리를 지닌 새처럼 말이 없고 싶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정반대로 삼척의 부리를 능언 선변(能言善辯)의 뜻으로 사용하였다.《莊子 徐无鬼》], 이것을 명으로 삼노라.
안일(安軼)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3년 (15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65위 [인적사항] [인적사항] UCI G002+AKS-KHF_12C548C77CFFFFB1530X0자 자정(子正) 생년 경인(庚寅) 1530년 합격연령 41세 본관 충주(忠州) 거주지 경(京)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 성명 : 안방진(安方進) 관직 : 상원군수(祥原郡守)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형] 안식(安軾) [형] 안집(安輯) [출전] 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2. 1810년 간행된 권두인(權斗寅, 1643~1719)선생의『하당집(荷塘集)』6권에 안일(安軼, 1530~1593)의 아들 안숭검(安崇儉,1554~1619) 묘갈명(墓碣銘)이 있어 여기에 옮깁니다. 오지안공묘갈명(五芝安公墓碣銘) a_151_410a
有少年生。手家傳。詣余言曰。生。五芝安公孱孫也。吾先祖歿。已近百年。尙未揭顯刻。竊聞吾祖與尊先石泉公分厚。敢以墓道文。累丈人。惟丈人。幸哀而與之銘。余蹶然起曰。然。余先果與若祖爲石友。余惡乎辭。生再拜而去。無何。生赴聞韶試。與諸儒。同渰死映湖渡。余甚悲之。久而不已。且恨逋宿請。暇日按其狀而敍之曰。公諱崇儉。字伯恭。五芝。其別號也。公爲人孝友。趣尙極高雅。不屑爲擧子業。弱冠。以親命赴擧。不中。遂絶意。不赴公車。萬曆癸巳。丁內外艱。葬祭以禮。丁酉。被薦。除東宮洗馬。陞戶曹佐郞。歷昌樂,利仁,松羅督郵。棄官歸。不復出。其爲昌樂也。樂小白山水之勝。卜居台莊。爲終老計。坐一室。左右圖書。日吟哦自娛。公學益篤。行益修。而華聞益彰。一時鉅公名卿。莫不折官位與之友。其最深者。一松沈相國,白沙李相國,任疏庵叔英。其赴松羅也。疏庵送以詩曰。不是內緣山有力。焉能千里屈先生。其見重如此。公以嘉靖甲寅生。卒以萬曆己未。享年六十六。葬于家北漢山洞卯向原。公稟氣淸爽。無一點塵俗狀。時人譬之秋天鶴。性簡亢。平生無要路跡至。待人無貴賤。皆厚遇之。傍通岐,和術。已奇疾。有病者歸焉。其詩淸古雅澹。高處往往逼唐人要之可傳於世。按安氏。出自中國。有諱悅。仕高麗爲贊成。遂爲東人。曾大父曰顯。造紙署別提。大父曰方進。祥原郡守。父曰軼。成均進士。妣溫陽鄭氏。進士瑚之女。進士公始移家春川之可一江上五芝村。卒葬是山播命之麓。公之以五芝爲號。蓋以此。公以遠離先壟。不躬拜掃。爲已大恨。築壇山麓。遇節日。必西向致祀。祭需必親自設辦。務盡蠲潔。公凡兩娶。前配金氏。孟男之女。壬辰之亂。爲賊所害。後配金氏。監役溧之女。皆無子。側室男魚變。公有季曰國子進士崇讓。亦無子。其外孫曰黃承安。前日問銘於我者。公五世孫萬昌。卽渰死者也。嗚呼。以公之德之行。後嗣卒零替。天之報施善人。果何如哉。銘曰。 空靑水碧。雖不合世用。自可爲物外奇珍。若公雅操拔俗。高風絶塵。縱不能需世致用。抑可謂出類離倫。千百載之後。猶可彷彿其爲人。
3. 안숭양(安崇讓, 1560~?)의『사마방목(司馬榜目)』 안숭양(安崇讓)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21년 (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54위 [인적사항] UCI G002+AKS-KHF_13C548C22DC591B1560X0 자 중례(仲禮) 생년 경신(庚申) 1560년 합격연령 29세 본관 충주(忠州) 거주지 원주(原州)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 성명 : 안일(安軼) 타과 : 성균진사(成均進士)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형] 안숭검(安崇儉)
[출전] 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4. 안방진(安邦進)의 인적관계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 또는 백사(白沙). 고려의 대학자 제현(齊賢)의 후손으로 참찬 몽량(夢亮)의 아들이다. 1. 가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었기 때문에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고, 특히 죽마고우인 이덕형(李德馨)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허다한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소년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에 영향을 받고 학업에 열중하였다. 1571년(선조 4)에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인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었다. 2. 출사와 관직 1575년에 진사초시에 오르고 1580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이 되었을 때 마침 선조의 《강목 綱目》 강연(講筵)이 있었는데, 고문을 천거하라는 왕명에 따라 이이(李珥)에 의하여 이덕형 등과 함께 5명이 천거되어 한림에 오르고, 내장고(內藏庫)의 《강목》 한질씩을 하사받고 옥당에 들어갔으며, 1583년에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그뒤 옥당의 정자·저작·박사, 예문관봉교·성균관 전적과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에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역모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문사낭청(問事郞廳)으로 친국에 참여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신료 사이에 비난이나 분쟁이 있을 때 삼사에 출입하여 이를 중재하고 시비를 공평히 판단, 무마하였기 때문에 그의 덕을 입은 사람도 많았다. 대사간 이발(李潑)이 파당을 만들려 함을 공박하였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하려 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옥당에 머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뒤 응교·검상·사인·전한·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에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그 이듬해 정철(鄭澈)의 논죄가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는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그를 찾아가 담화를 계속하여 정철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하였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이때 대간의 공격이 심했으나 대사헌 이원익(李元翼)의 적극적인 비호로 진정되었다. 3. 임진왜란중의 활동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동안 그는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으며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지경연사·지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병조판서 겸 주사대장(舟師大將)·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이동안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남도지방에 사신을 보내 근왕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여 윤승훈(尹承勳)을 해로로 호남지방에 보내어 근왕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선조가 의주에 머무르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며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황응양(黃應暘)을 조사차 보냈는데, 그가 일본이 보내온 문서를 내보여 의혹이 풀려 마침내 구원병의 파견을 보았다. 그리하여 만주 주둔군 조승훈(祖承訓)·사유(史儒)의 3천병력이 파견되어왔으나 패전하자 그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대병력으로 구원해줄 것을 청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여송(李如松)의 대병력이 들어와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서울을 탈환, 환도하게 되었다. 다음해에 세자를 남쪽에 보내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보게 하였는데 그는 대사마(大司馬)로서 세자를 받들어 보필하였다. 1594년 봄에 전라도에서 송유진(宋儒眞)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반란군 진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상소하여 이를 중단시키고 반란을 곧 진압시켰다. 4. 중립적 국사처리 그는 병조판서·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楊邦亨)과 양호(楊鎬) 등도 존경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았던 능란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1598년에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올랐는데, 이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같은 사신인 경략(經略) 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우의정으로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들어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토지와 재물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뒤 문홍도(文弘道)가 휴전을 주장했다고 하여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자 그도 함께 휴전에 동조하였다 하여 자진하여 사의를 표명하고 병을 구실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를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하자,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 수습하고 안민방해책(安民防海策)16조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600년에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사,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호종1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문경호(文景虎) 등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 살해하려 했다는 장본인이 성혼(成渾)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는 성혼을 공격하였는데, 그는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사퇴하였다. 1608년에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해에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살해음모를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뒤 정인홍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배향을 반대한 바 있어 성균관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했다가 도리어 유생들이 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져 권당(捲堂: 동맹휴학)이 일어났는데 그의 주장으로 겨우 광해군을 설득, 무마하여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정인홍 일당의 원한과 공격을 더욱 받게 되었으며, 곧이어 북인세력에 의하여 자행된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일가의 멸문지환,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 등 북인파당의 흉계가 속출하였고, 그의 항쟁 또한 극렬하여 북인파당의 원망의 표적이 되어왔다. 그리하여 1613년(광해군 5)에 인재천거를 잘못하였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와 별장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는데, 이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을 옮기게 하였다. 1617년에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金氏)가 서궁(西宮)에 유폐되고, 이어 왕비에서 폐위하여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이해 8월에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그뒤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을 뿐만 아니라 1659년(효종 10)에는 화산서원(花山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으며, 1746년(영조 22)에는 승지 이종적(李宗廸)을 보내 영당(影堂)에 제사를 올리고 후손을 관에 등용하게 하는 은전이 있었으며, 1832년(순조 32)에는 임진왜란 발발 네번째 회갑을 맞아 제향이 베풀어졌다. 1838년(헌종 4)에는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의 요청으로 봉사손(奉祀孫)의 관 등용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5. 평가 이정구는 그를 평하기를 “그가 관작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이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완전에 가까운 그의 기품과 인격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1622년에 간행된 《사례훈몽 四禮訓蒙》 1권과 《주소계의 奏疏啓議》 각 2권, 《노사영언 魯史零言》 15권과 시문 등이 있으며, 이순신(李舜臣)충렬묘비문을 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권두인(權斗寅, 1643∼171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춘경(春卿), 호는 하당(荷塘). 권목(權穆)의 아들이며, 외조는 여주(驪州) 이백명(李伯明), 처부(妻父)는 창녕(昌寧) 성석하(成錫夏)이다. 어려서부터 쾌활하고 영민하였다. 처음 가르침을 받으면 일취월장의 성취가 있었고 또래 아이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조금 자라서는 인근에 살던 매헌(梅軒) 홍준형(洪浚亨)에게 배웠다. 그 노인은 가르침이 매우 엄격하여 크게 감독하지 않았는데도 조금도 태만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가정교육의 영향이라고 칭송하였다. 과거공부를 시작하자 그 진도가 매우 빨라서 선배들이 모두 그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부모와 조부의 초상을 연이어 당하는 바람에 과거 응시는 늦은 편이었다. 35세가 되어서 비로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즉 1678년(숙종 4) 증광 진사시에 3등 22위로 합격한 것이었다. 기사환국 이후 영남의 선비 가운데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자 약간 명을 천거했는데, 권두인이 수위를 차지하여 효릉참봉에 제수되었다. 다시 문학과 행검으로 추천되었고, 품계를 뛰어넘어 장원별제(掌苑別提)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연이어 태복주부(太僕主簿)·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다. 48세가 되던 1690년(숙종 16)이 되어서 비로소 공조좌랑에 부임했지만 여름이 되자 동궁사어(東宮司禦)로 옮겼다. 가을에는 전의현감(全義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가을에는 공조정랑(工曹正郞)에서 사직서령(社稷署令)으로 옮겼다.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겨울에 다시 공조로 돌아왔다. 다음해 다시 공조정랑에서 영춘현감(永春縣監)으로 옮겼다. 또 장수현감(長水縣監)도 지냈다. 그가 지방관으로 봉직할 때 백성을 자식처럼 여겼으며 세금을 간소하게 했고 관속들의 실수에도 관대했다. 한번은 관에서 주관하는 제사를 지내는데 제수가 부족하였다. 그는 집에 있던 물자를 가지고 와서 제수에 보탰다. 이를 보고 주변에서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하자, "내 마음에서 하는 일인데 남의 이목을 생각할 게 무엇인가." 라고 대답했다. 공무를 보다가 여가가 있으면 산수를 즐겼다. 읍문 밖 몇 리 되는 곳에 위치한 강가에 경치가 뛰어난 곳이 있었는데, 그는 쪽배를 띄우고 즐기면서 시를 지었다. 영춘현감을 그만두었을 때 현의 곳간이 꽉 차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전에 없던 일이라 하고 돈을 모아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벼슬에 집착하지 않았고 사대부들의 횡포에 과감히 대항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면 주저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공조낭중으로 있을 때 대신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대신의 무례한 반응을 보고는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고 말았다. 이때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이 서울에 있을 때였는데, 이현일은 노자를 보태주었다. 이는 그가 거취를 청결하게 함을 좋게 보았기 때문이다. 《하당집》은 모두 10권 5책으로 그 원집 여덟 권은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편찬한 것이다. 속집 두 권은 남야 선생(南野先生)이 교정한 것인데 중간에 상화(喪禍)로 인하여 간행할 겨를이 없다가 경오년 여름 권두인 사후 92년 만에 간행되었다. |
첫댓글 저도 이 부분 연구중입니다....오늘날 충주안씨가 신라시대 安錫弼공이 시조로 하여 그 계대를 이어온다고 하는데....그 계보에는 安烈이 없습니다...또한 1640년 충주안씨 시조 역시 중국출자의 安烈입니다...
충주안씨 계보로 본다면 安錫弼~~~瓛(1세)-繼昌-徵石-鎭國-祐-興宇-琦-泊-休-九有-忠克-輪-厚福-宅仁-保赫-明世-思文-置器-邦起(安翰 이분이 방기가 되어야만 함)-承張(承振)-善福(21세)-이하 계보는 위 내용가 일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