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 편
주의 영광의 이름을 위하여
요절: 9절
내용 관찰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1-2) 이는 실로 엄청난 징벌의 날입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여야 마땅합니까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기업” "주의 성전” "주의 종들" "주의 성도들이 당하는 재난이기 때문입니다"(1-2) "주의 **”라는 말은 주의 소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 주인 되시는 분에게 보고하고 호소함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징벌을 당하고 있으나 "주의 **”라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주의 종들, 주의 성도들임을 그들은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환난 날에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자신들에게 주어졌음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요, 승리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7편에 "주의 **”이 몇 번이나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표시하면서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이 당하는 징벌이 "주의 진노"(5)를 사서 당하는 것인 줄을 알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8) 합니다.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9) 합니다. 마지막 결론에서도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13)고 말씀합니다.
"주의 **“라는 말이 전체 13절 속에 16번이나 나옵니다. 79편의 핵심은 "주의 이름 주의 영예"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주신 주의 이름과 주의 영예가 침해를 당하고 손상을 입히게 됨을 애통해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10)의 뜻입니다. 42:3에서도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79편에서 주목할 말씀 중 하나가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11하)한 "보존"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속의 역사란 인간의 행실로 보면 천 배, 만 배나 진멸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이름을 위하여 메시야가 태어나실 그 씨와 계보를 보존하여 내려온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남은 자”의 교리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면서도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일곱 식구를 보존"(벤2후:5)하셨던 것입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1:13)고 말씀합니다. 그 그루터기에서 한 싹이 나서(사11:1)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진노 중에서도 "남은 자"(사10:21)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9) 보존하십니다. 구속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존귀하신 이름과 영예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여"(13) 야만 합니다.
묵상해 봅시다.
79편의 징벌이 어떠합니까?
징벌 중에서도 "주의……"라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하나님은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지금까지 어떻게 해오셨습니까?
적용: 하나님은 지금도 주의 성도들을 주의 이름으로 보존하십니다(요17:11).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만 마땅합니까?(13)
암송: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13)
제 80 편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요절: 3절
내용 관찰
80편의 요절은 3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합니다. 같은 말씀이 후렴처럼 7절과 마지막 절에도 나옵니다. “우리를 돌이키시고"란 것을 보면 그들은 지금 이방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형편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참고, 126:1).
1-3에서는 "요셉을 양 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하고 목자와 양과의 관계에 비유해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2) 합니다. 4-7에서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4) 하고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출6:7) 하신 주의 백성과 그들의 하나님 되심을 들어서 그 징벌이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호소합니다. 8-19에서는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8) 하고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요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심으신 농부로 비유해서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12-13) 하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14) 하고 호소합니다.
이처럼 자신들을 양 떼로 언약 백성으로 포도나무로 말씀하면서 그 때마다 반복해서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하고 애타게 탄원합니다 "얼굴빛을 비취사"란 은혜를 구하는 호소인데 먼저 하나님께서는 왜 그 얼굴빛을 자기 백성에게 가리우시게 되었는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사야 59:2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인류의 시조가 빛 앞에서 추방당한 것도 이 죄 때문이었으며 이제 선민 이스라엘이 이방의 포로가 된 것도 죄악 때문인 것입니다. 구속사의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셨을 때에 그 사방에 지경을 정하심도 그 얼굴빛을 가리우심이요, 내가 거할 성소를 지으라하신 그 성소에 휘장이 가리우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그 얼굴빛을 가리우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역사상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구원하여 주신 최대의 구원사건은 임마누엘 사건입니다. 고후 4:6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얼굴빛을 비취심이 그리스도로 오셨음을 분명히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2) 했는데 메시야는 목자로 오셨고 자기 백성 삼으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참 포도나무로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사건은 주의 얼굴빛을 비춰주신 최대의 계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17절의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가 선민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하여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 얻게 하소서"하고 애타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출애굽 사건(8)도 아니요, 포로에서 귀환하는 데(3)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은 다 그림자요 궁극적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탄의 포로에서 해방되는 데 있음을 80편은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3장) 했는데 진정한 돌아옴은 애굽에서 바벨론에서 돌아오는데 있지 아니하고 사탄의 포로에서 돌아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면 3절과 7절 마지막 절에서 계속적으로 호소하고 있겠습니까? 이 영광스러운 계시가 구약시대는 감추어져 있었으나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난"(골1:26)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이를 보지 못하고 증거하지 못한다면 아직도 그 얼굴에서 수건이 벗어지지 아니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고후3:14). 주의 얼굴빛을 비춰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묵상해 봅시다.
80편의 역사적 배경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엇에 비유하여 호소하고 있습니까?
주의 얼굴을 비춰 주신 최대의 사건이 무엇입니까?
적용: 우리는 이제 '구원을 얻게 하소서' 하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게 하소서' 하고 호소해야 합니다. 닮지 못한 것이 한이요, 불효입니다.
암송: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