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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의 법과 생명의 법
▪로마서 7:1-25▪
5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죽였는지라(롬 7:5-11)
설교작성 노트
로마서 7장은 논란이 많고 해석이 구구한 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7장이 확연하게 해석되지 않고는 복음의 환희와 참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 하겠다.
7장 중에서도 14절 이하의 사람 즉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고 탄식하고 있는 이 사람이 누구냐 하는 문제이다. 바울 자신이냐 바울 이라면 회심 전 바울이냐 후냐 도대체 이 사람은 거듭 난 사람이냐 아니냐.
강론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먼저 주셨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먼저 주신 것입니까? 구속사라는 맥락으로 말하면 "원 복음"을 먼저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원복음과 나타난 복음 사이에 "율법"이 끼어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구원하시려다가 불가능하니까 복음을 주신 양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점을 사도 바울은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 3:17)고 단언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아브라함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과 성취된 복음 사이에 주신 의도가 무엇인가?
그것은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복음을 통하여 구원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자신이 중병에 걸렸음을 진단 받고 의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와서 치료받게 하시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바른 순서입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 5:13) 법이 없으면 죄를 깨달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하십니다.
탐내지 말라
형제가 “나는 형편없는 죄인 곧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한 죄인이구나" 하고 깨닫게 된 것은 언제 어떻게 해서입니까?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완전한 줄로 알았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누가 구원을 받겠느냐는 식이지요. 그러했던 그가 율법의 어느 계명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을까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합니다.
그는 율법을 통하여 율법 중에서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십계명 중에서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몇 번째 계명인지 아십니까 마지막 계명입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9) 이 계명을 쉬운 계명 대수롭지 않은 계명쯤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이 “계명이 이르는" 날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해 보다 더 밝은 빛에 비췸을 받은 그 이후였을 것입니다. 그는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통하여 <탐심>을 깨닫게 되었노라고 말씀합니다. <탐심 탐심>(貪心) 결국 마음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부터 바울은 큰 번민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살인하지 않았노라 자부하던 자신이 얼마나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했으며 도적질하지 않았노라 자부하던 자신이 마음으로 이웃의 것을 얼마나 탐하였으며 간음하지 않았노라 자부하던 자신의 마음 속으로는 얼마나 누추한 생각을 품었던가?
그로부터 그는 마음으로나 생각으로도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의 죄니라” (15-17)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울면서 몸부림쳐봐도 가슴을 두드리며 탄식해도 외식적으로가 아니라 중심에서 생각으로나 마음으로는 원하는 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탐내지 말라"하신 율법 자체는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12)고 시인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법입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13) 그것은 율법의 책임이 아니라 이를 행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이를 행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를 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죄니라"(18-20)
여기서 그는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21)합니다. 그것은 나는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내 속에는 <선은 없고 죄만 있다>(17-18)는 사실입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는 고백이 17절과 20절에서 반복하고 있어서 강조적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신은 전적타락 전적부패 하여 선을 행하기에 전적무능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러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고 비명을 지르기에 이릅니다.
이점에서 집고 넘어가야할 점은 이것이 바울 자신을 놓고 하는 말이냐 아니냐 바울 이라면 바리새인 당시냐 아니냐 도대체 이 7장의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냐 아니냐로 논쟁한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거니와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입니다. 끝에 가서 이점을 보여드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7장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과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열쇠가 6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가 거듭난 이후라 하더라도 만일 의문(儀文)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단계와 상태에 머물러있다면 필연적으로 7장의 사람과 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8:1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원자폭탄보다도 더 위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7장의 사람이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정죄감>에 사로잡혀서 마치 수렁에 빠진 사람이 움직일수록 더욱 빠져들어가듯 하는 사람, 그래서 사람 살려 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해방되었으며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
어떻게 그것이 가능해졌습니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두 <법>이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와 사망의 법>이 무엇이냐 하는 점입니다. 7:10에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이 분명한데 그 율법이 내게 주어졌을 때 온전히 행한다면 <생명>에 이르게 하는 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적부패로 행할 수 없게 되자 도리어 <죄와 사망의 법>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7장의 사람은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어 정죄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해방" 되었다는 것입니다. 명심합시다. 그냥 해방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시켜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할 점은 “해방”된 것이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력 즉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서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무엇인가 그 설명이 8:3절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합니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7장의 사람을 구원해 주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정죄감에서 해방시켜 주지를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셨습니까?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죄를 정하사"의 준말이 무엇입니까? “죄정" 곧<정죄>인 것입니다. 자기 아들에게 대신 정죄하심으로 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인 것입니다. 그 법(진리)이 7장의 사람을 해방하여 자유케 해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그렇습니다 결코입니다) 정죄함이 없나니 하십니다.
이것이 7:6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것입니다. 이를 알았기에 사도 바울은 7:25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해 보십시오 24절에서는 비명을 지릅니다. 왜 비명을 지립니까 자기 힘으로 자기 노력으로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함을 얻으려하나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25절에서는 감사가 나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뿐입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던 그 죄를 주님께서 대신 정죄를 받으심으로 나를 해방시켜주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7장의 사람이 누구인가를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7장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서 지하 감방에 갇혀 비명을 지르던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려면(그때는 볼 수 없어서 몰랐지만) 해방되어 감옥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8:2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해방하였음이라" 7장에서 비명을 지르던 사람은 바로 <너> 당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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