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건너 뛴, '갈리시아 사람들 속에서...'
다음 날은 좀 달랐다.
D일행이 아침부터 서둘렀다. 그날 여정이 40km에 달하는 만만찮은 거리인 데다, 다음 알베르게까지 두 갈래 길이 있는데 그들이 택한 코스가 수도원 쪽이라 인야도 함께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도심을 빠져나가는 길은 자연히 새벽길이 되었다.
전날은 USB 문제로 정신이 팔려 이 도시에 별 관심을 두지 못했는데, 떠나면서 보니... 도심으로 강이 흐르고 지형이나 분위기가 제법 아름다웠다. 다만 도심 관광에는 별 신경 쓰지 않는 인야의 습성상, 더구나 바쁜 나머지... 그저 편의시설을 이용하는 데 그쳤을 뿐이지만.
다리를 건너자 D일행은 아침을 먹고 가겠다며 바에 들어가자고 했다.
평소 바에 잘 가지 않는 인야는 아직 밥 생각도 없던 터라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나는 먼저 천천히 걷고 있을 테니, 당신들은 아침을 먹고 나를 뒤따라오면... 다음 마을에선, 오늘 점심은 내가 사겠다." 고.
전날 저녁을 얻어먹은 것에 대한 답이자, 자신과 함께 걷고 싶어 하는 그들의 마음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렇게 헤어졌지만, 걷는 리듬이 서로 다르니... 애초에 보조를 맞추기가 쉽지 않은 길이기도 했다.
도심을 빠져나가는 길 역시 순탄치 않았다.
인야는 아침부터 길을 잃었고, 얼마 뒤엔 독일 처녀 3인방에게 추월당하기까지 했다.
겨우 도심을 다 빠져나왔다 싶었더니, 이번엔 가파른 오르막 아스팔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별 특징도 없는 그 길의 사진을 다 찍어둘 정도였다.
앞서가던 독일 처녀들은 참 가볍게도 걷고 있었다. 마치 여자 애들 끼리 소풍이나 가는 것 처럼, 조잘대며 가볍게 걸어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세비야에서부터 900km 가까이 걸어온 베테랑들이라지만, 낑낑대며 오르는 인야 옆에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앞서가니, 인야 입장에서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나이 탓이려니 하고 넘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독일 처녀 3인방의 사연도 재미있었다.
키가 큰 둘은 의사로 또 쌍둥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또 다시 관심을 갖고 보니, 정말 쌍둥이가 맞았다. 물론 이 길이라고 쌍둥이가 오지 말라는 법은 없을 테지만, 그렇게 쌍둥이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은근히 웃음이 나기도 했다.
게다가 이들의 구성이 또 색다르고 재밌었다.
이들 중 제일 작은(인야는 이름도 모른다.) 처녀가 또 제일 빠릿빠릿하고 상냥했는데, 그들에 따르면... 이들은 작년에 '산티아고 가는 길' 프랑스 코스에서, 그러니까 길에서 만난 사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날 길에서 만난 같은 나라(독일) 사람들인데, 알고 보니 '쾰른' 주변에서 사는 것까지 비슷해서... 그 뒤로 친구가 되었고, 올해는 여기 '은의 루트'를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어릴 적 친구가 아닌(인야는 그들이 고등학교 친구 쯤 되는 줄 알았는데), 바로 '까미노 친구'라는 것이었다.
뚱한 쌍둥이 자매와 쾌활한 다른 친구.
걷기가 너무 힘들어 잠깐 길에 멈춰 복숭아로 요기를 하던 인야는, 저만치 모퉁이에 쉬고 있는 독일 처녀들을 발견했다. 자신보다 훨씬 앞서갔으리라 여겼는데, 그녀들도 거의 같은 지점에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20m만 더 갔더라면 함께 쉬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루한 길은 계속됐다. 인야는 길가의 사과와 산딸기를 따 먹으며 D일행을 기다리며 걸었다.
그러는 사이 며칠째 함께하던 J는 어느새 멀리 앞서가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까지 간다는지도 모른 채 헤어진 참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인야는 J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
인야는 갈리시아 지방에서 빵맛이 좋기로 유명한 '세아(Cea)'라는 마을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D일행을 기다렸다. 마침내 저 멀리서 온통 붉은 옷을 맞춰 입은 듯한 한 무리가 나타났다.
아침에 출발할 땐 겉옷을 걸쳐서 몰랐는데, 그들은 다 붉은 옷을 입고 있어서... 정말 한 '붉은 군단' 같이 보였던 것이다.
세아에 함께 도착한 일곱 명은 갓 구운 큰 빵 하나를 사서 나눠 먹은 뒤, 한 바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그중 넷이 시킨 '뿔뽀(문어)' 요리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맛이 좋았다.
인야는 답례로 자신이 계산을 하려 했지만, 일행은 완강히 거절했다.
혼자 나머지 여섯 사람 식사 계산까지 하는 건 너무 부담이 된다면서, 자기네는 얻어먹은 걸로 칠 테니... 그리 알고 계산은 각자 하자던 것이다.
그러자 역시 이태리 여인 T가 나서서, 인야더러는 저녁거리 살 비용을 내라는 절충안을 내 놓았다.
어차피 그날 저녁은 수도원까지 함께 가서, 거기서 저녁을 먹어야 할 텐데... 거기는 가게가 없는 마을이니, 미리 먹거리를 사가지고 가야 하는데... 그걸 사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것저것 사기는 했는데... 그 비용이 24 유로 정도였다.
그러니까 식당에서 먹은 건 한 사람 앞에 10 유로라 60 유로(인야 자신의 몫까지 70유로)를 냈어야 했는데, 저녁거리는 24 유로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래도 인야 역시 불만은 없었다.
그렇게 일곱은 저녁거리를 나눠 들고 수도원까지 걸었다.
그곳엔 뜨거운 물이 없어서, 발만 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더구나 수도원 건물은 훵하니 크고 높아 그만큼 썰렁했지만, 전날 마신 비노 덕인지... 잠은 그런대로 잘 잤다.
새벽엔 비가 내렸다.
인야는 앞서가던 프랑스 영감님을 무작정 따라갔다가 함께 길을 잃었다. 다시 마을로 돌아온 뒤 노란 화살표를 좇아 산을 올랐는데, 그러다 뒤따라오던 한 독일인과 동행이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그 스스로 얘길 해줘서) 그는 변호사인데, 하필이면 그날... 그의 두 번째 애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는 날이라는 것이었다.
"?.."
물론, 그런 사랑의 상처를 안고 길을 떠나왔겠지만, 그는 큰 동요 없이(?)... 그런 얘기를 인야에게 해주었던 것이다.
인야는,
'참, 안 됐구나!' 하는 심정이었지만,
오히려 그는, 어떤 면에선 쾌활했고... 또 한편으론 마음 정리도 웬만큼 끝난 것처럼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 길은, 참으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걷고 있기도 하구나......' 할 수밖에.
그렇게 함께 걷던 중, 인야의 왼쪽 발목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겸사겸사 한 마을에서 토스트와 밀크커피로 함께 아침을 먹은 뒤, 인야는 그에게... 까미노 엽서 한 장을 선물했고, 그는 반가워하며... 다음에 만나면, 자기가 커피를 사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뒤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발목 통증으로 절뚝이며 걷던 인야를 독일 처녀 3인방이 다시 추월했다.
그런데 저녁 무렵 알베르게에서는, 사이클로 온 스페인 청년 하나가 서툰 한국말로 인야에게 인사를 건넸다.
작년에 평택 부근에서 6개월간 파견근무를 했다는데,
비록 외국사람이긴 했지만, '은의 루트'를 걸으며 처음 들어보는 한국말이었다.
인야는 산티아고를 앞두고 한 가지 갈등을 겪고 있었다.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 들어서면서, 꾸꼬(Cuco)네 집(빌라 노바 데 아로우사)에 들를지 말지를 두고... 마음이 흔들렸던 것이다.
첫 까미노부터 세번 째까지 다 그곳으로 가서 그들과 어울렸기에, 이번에도 들러야 하는지... 아니면, 여기서는 그 바닷가 쪽으로(까미노는 갈리시아 내륙쪽으로 계속 이어지니) 가기엔, 교통편이 어떻게 되는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하기도 애매해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거기에 들러 또 한 며칠 편하게 쉬었다 산티아고로 입성하는 게 좋을 것 같았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이번은 까미노를 끝내고 그 집에 들르는 것이 아닌... 정작 가장 중요한 가을 길(까미노 프랑스 코스)을 거꾸로 걷는 일을 해야하니, 그리고 그 길을 가다 보면... 어차피 꾸꼬네 딸 크리스티나가 있는 빰쁠로나 부근을 지나기도 할 테니, 그때나 들러 잠시 쉬더라도... 이번엔 그냥 걷는 리듬을 유지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는 등...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즈음, 함께 걷던 그룹에 휩쓸려... 인야 자신의 리듬도 못 찾고 있어서...
(그즈음엔 일기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결국은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미련은 남아... 마음이 개운하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