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은 원장을 떠나보내며> ⑦
송길원 / 예수시대 동인, 청란교회 목사, 하이패밀리 대표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녕’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요. 나는 대신 ‘그동안 고마웠어요’라고 말하겠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애절한 울음은 사랑하는 사람의 소리 없는 ‘안녕’이에요.”
미국의 싱어송 라이터 멜라니 사프카(Melanie Safka)의 노래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슬픔을 더한다.
박원장과 나의 만남은 그가 고신의과대학 부속 복음병원에 발을 내딛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병원의사로서 나는 의과대학 교목으로 한솥밥을 먹고 지냈다.
그 중심에 장기려박사님이 계셨다.
그도 나도 의료선교를 축으로 살아왔다.
둘 다 부산을 떠나 서울과 안양에 머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행보를 이어왔다.
내가 <앰뷸런스 소원재단>을 만들어 교통약자들의 생애 마지막 나들이를 돕겠다고 나서자 박원장이 이 일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환자는 돈만큼이 아닌 아픈 만큼 치료받아야 한다’는 철학을 따라 양평 하이패밀리 부지에 선교사들을 위한 <숲속의 잠드는 마을>을 세울 결심을 했다.
남들은 시덥잖게 쳐다보는 일조차 그는 가장 열렬히 지지해 주고 후원해 주었다.
이번에는 박원장이 <순례자의 길>을 만들겠다며 도움을 구했다.
나는 옆에서 아이디어를 나누며 한껏 격려했었다.
이렇듯 우리는 많은 일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지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기 3주 전, 우리는 <시니어 파트너스> 모임을 통해 생활습관의학과 더불어 노년이 건강한 세상을 만들자고 다짐했다.
슈바이처는 30세까지는 자신이 좋아하는 신학과 음악을 위해 살고, 이후 30년은 남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다.
드디어 90세가 되어서 생을 마감한다.
하나님은 30년의 수명 보너스를 허락하셨다.
그런데 어쩌자고 90을 넘어 살 수 있는 박원장을 65세에 데려가셔야 했는지 난 알지 못한다.
나는 그를 떠나보내고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우울하다.
불면의 밤을 뒤척인다.
정태호의 싯귀로 내 마음을 달래보려 했다.
“바람보다 풀이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고 누가 탓하지는 않는다.
바람 불면 풀은 누워야 살기에...”
그러나 그조차도 사치스러운 ‘탓’일 뿐이었다. 내게는 그냥 슬픈 일이 아니라 멜라니 사프카의 노래 제목처럼 ‘가장 슬픈 일’(The Saddest Thing)이다.
나는 이제 그 ‘힘든 말’을 해야만 한다.
“박원장, 그동안 참 고마웠어요. 그리고 안녕~~!!”
※ 40여 년 전 나는 기독교세계관에 기초한 문화운동으로 <예수시대>란 동인 모임을 논의하면서 박원장에게 참여를 권했다.
동인 가운데는 동인 가운데는 김 신(전대법관)과 정현구(서울영동교회목사), 강승철(전 부산일보기자), 남송우(고신대학 석좌교수), 김성인(전 고신대학 교무처), 나삼진(전 총회교육원장, L.A거주), 박춘덕(전 고신대 교수), 이광호(실로암교회 목사), 박영주(법무법인 신성 변호사), 허성욱(시인, 전 성지공고 교사), 안민(전 고신대총장), 김경천(전 부산대교수) 등이 있다.
나보다 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동인들이 먼저 떠난 박원장을 위해 추모목으로 소나무를 심었다.
나는 정현구목사의 말처럼 아버지 박용묵 목사님, 선교사 로제타 홀, 의사 장기려와 같은 분이 심었던 씨가 자라는 모습을 이 나무를 통해 바라보고 또 바라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