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스승으로 모신 12년 : 관징 스님을 찾아 배우고 불사를 도왔다.
(1) 스승님과 함께 일군 불사
1990년 관징 스님 불사를 위한 모금 팀장이었던 아끼 씨가 이야기했다.
“관징 스승이 오는 11월 3일 링쥬옌사 낙성식이 있다고 초청해 왔으니 함께 가보자.”
그러나 우리는 아직 사업이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함께 가지 못했다. 그런데 아끼 씨가 돌아오면서 관징 스승이 나를 위해 몸소 쓰신 ‘불’자 휘호를 한 장 가지고와 전해 주었다. 아래 연꽃을 그리고 위에 ‘佛’자를 쓰고 ‘구름처럼 떠도는 중’ 관징이라는 이름과 낙관이 찍혀 있었다.
1994년부터는 우리 사업도 자리를 잡게 되어 먼저 남편이 정식으로 관징 스님의 계를 받아 제자가 되고 다음해 내가 계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능력이 되는 한 열심히 관징 스님의 불사를 도왔다.
1995년 서방삼성전 신도들이 불사금을 모아 마이셰옌사 바로 아래 있는 산궈옌사를 세웠다. 11월 1일 점안법회에 신도들과 함께 모두 9명이 참석하였다.
점안법회를 마치고 스승께서 구선산을 비롯하여 스스로 세우신 여러 절을 안내해 주어 함께 여행하였다. 특히 구선산에서는 스승께서 극락에 가셨다 돌아오신 미륵동굴을 직접 가볼 수 있어 감회가 깊었다.
“극락에 간 6년 반 동안 몸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다. 그냥 시체처럼 남아 있으면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태워버릴 것이다. 관세음보살이 위력으로 숨겨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1996년 띠쉐이옌사 대웅보전과 두 탑을 세우는데 우리 서방삼성전 신도들이 모두 참석하여 열심히 도왔다.
1996년 우리 부부와 아들, 그리고 홍지는 관징 스승을 모시고 저쟝성 난하이 푸퉈산을 갔다. 우리는 처음 가보지만 관징 스승께서는 옛날부터 자주 다니셔서 길을 훤히 알고 각 절의 스님들도 잘 알고 계셨다. 스승께서는 파위사에서 그 절 스님과 함께 법담을 나누고 계실 때 우리 부부는 주변을 산보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훤칠한 키에 여인처럼 보인 분이 나타나셨다. 아무리 보아도 범상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당시 경황이 없어 누구신지 여쭈어보지 못했다. 나는 남편에게 이야기했지만 남편은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내 눈에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관징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네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구나!”라고 하셔서 감복하였다.
2005년까지 스승께서 활동하실 때 우리 서방삼성전 신도들은 모두 관징 스승의 제자로 귀의하였다.
(2)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신 보살행
많은 사람들이 관징 스승을 비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논란이 되었던 것이 “돈을 많이 벌어서 숨겨 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승께서는 이런 세상의 이야기에 전혀 맞상대도 하지 않고, 변명도 하지 않고 초연하셨다는 것이다. 이 점은 내가 스승의 모습 가운데 가장 존경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함께 하는 동안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서 그 답을 보여주셨다.
보타산에 갈 때 중간에 배를 타야 한다. 그리고 이때가 바로 낮밥을 먹을 때였다. 남편이 우리 식구 3명과 스님 이렇게 4명의 식권을 끊어 낮밥을 준비하자 스님이 크게 나무라셨다.
“4명분은 너무 많다. 3명 것만 시켜서 나누어 먹자.”
그래서 우리는 스승의 말씀대로 3명분을 시켜 넷이 나누어 먹었다. 이처럼 함께 하는 동안 한 푼도 헛되이 쓰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가 찾아가면 언제나 누추한 절방에서 자도록 했고 비싼 호텔에서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자신은 늘 밥에 배추와 두부 정도만 잡수셨다.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처럼 먹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실제로 중국의 여러 제자들이 어렵게 절을 꾸려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형편에 따라 모두 적절하게 나누어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에 늘 부족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제자들은 만족하지 못했으리라고 본다. 스승께서는 늘 스스로를 ‘구름처럼 떠도는 중’이라고 하시며 한 곳에 머물지 않은 것도 큰 제자를 만들지 못한 까닭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스승은 늘 겸손하였다. 대만에서 스님들은 왕이다. 늘 스님을 우러러 보아야 하고 대접해야 한다. 그리고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군림하고 가르치려고만 든다. 그러나 관징 스님은 그런 점이 전혀 었다. “밥을 먹을 때 말을 많이 해서는 안된다.” 라고 하는 정도이지 일부러 권위를 세우거나 권위를 부린 적이 없다. 절에 계실 때나 신도들 집에 계실 때나 한결같으셨다. 10년이 넘게 스승님을 모셨지만 맛있는 음식을 찾고, 화려한 법복을 입고, 안락한 잠자리를 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절을 짓기 위해 엄청난 돈을 운용하셨지만 본인을 위해서는 늘 최소한 것만 취하셨다. 이 점은 관징 스승을 접하는 사람이면 모두가 다 알 것이라고 믿는다.
3) 스승의 마지막 삶과 입적
(1) 스승의 마지막 삶
관징 스님을 스승으로 모신 뒤, 해마다 한두 차례 중국 본토를 방문하여 찾아 뵈었고, 수시로 전화로 문안을 드렸다.
2005년 우리는 스승을 대만으로 초청하는 수속을 밟고 있었다. 대만에 꼭 와보시고자 했고, 심지어는 마지막 삶은 대만에서 보내고 싶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당시 이미 우리는 현재 같은 작은 법당을 벗어나 큰 절을 지으려고 준비를 하면서 땅을 보러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스승께서 오셔서 땅도 직접 잡아주시고, 아울러 그 땅에 맞게 절의 구도도 그려주시기로 했다. 문제는 우리 법당은 너무 작아 법적으로 등록이 된 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다 일찍 스승을 초청 못한 것은 이처럼 우리는 초청 자격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격을 갖춘 휘녠 스님에게 부탁하여 초청장을 보냈다. 그러나 초청장이 마련되었을 때는 이미 여행이 불가능한 상태여서 대만 초청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쉬운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를 드렸더니 현재 스승께서는 전화를 받으실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통화를 하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부랴부랴 비행기 표를 끊어서 샤먼 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중국에 가면 언제나 스승께서 몸소 공항에 마중을 나와 주셨고, 모든 안내도 몸소 해주셨다. 그런데 공항에 아킴이 대신 나왔다고 한다. 스승께서는 갑자기 평소에 가지고 있던 당뇨병이 심해져 지금 어려운 상황이고, 그래서 절에서 치료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현재 사삿집에 내려와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가서 급히 마련해 가지고 간 침향목에서 빼낸 액을 드시게 하며 극진히 간호하였다. 당시 이미 눈도 보이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었으나 우리 정성이 통했는지 조금씩 걸을 수 있는 정도까지 회복이 되셨다.
그 뒤 입적하신 2007년까지 우리는 나름대로 열심히 간호를 하였다. 어떤 때는 가서 한 달 동안 그 집에 머물면서 스승을 간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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